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창비세계문학 45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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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 독서모임을 앞두고 국내에 출간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사실 지난달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잡다한 독서이력 때문에 미처 읽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에둘러 와서 다 읽었다. 사실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책은 <베를린이여 안녕>으로 시작했는데 순서대로 읽으려던 나의 결심을 애당초 틀려버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베를린 연작 중에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보다 <베를린이여 안녕>이 훨씬 재밌다. 지금은 절판되서 구할 수도 없는 <싱글맨>에 빠져 있는 중이다. 그런데 마침 원서도 구해서 같이 비교해 가면서 읽고 있는데 번역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구처럼 소설을 쓴 건 아니지만 말이다.

 

창비에서 나온 책이라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겠나 그래. 다른 버전을 구할 수 없으니 창비에서 나온 책을 읽는 수밖에. 서설이 길었구나.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는 제목 그대로 화자인 윌리엄 브래드쇼(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미들네임이기도 하다)가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에서 50대의 아서 노리스 씨를 만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일종의 경험담이다. 연작으로 나온 <베를린이여 안녕>보다 훨씬 더 정치적 색채가 짙고, 군데군데 자신의 성적 취향을 암시하는 그런 복선들이 깔려 있다는 점에 변별점을 가진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독일을 선거로 독일을 석권하기 이전까지 1930년대 초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그런 도시였다. 데카당스한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그런 분위기 속에 영국 출신의 이방인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분신은 윌리엄 브래드쇼는 독일 사람들에게 영어교습을 하며,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면서 그들 사이를 파고든다. 소설은 그런 윌리엄 브래드쇼가 문제적 인간 아서 노리스와 얽히게 되는 일단의 과정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어느 정도 미스터리한 구성도 눈에 띈다. 독자는 도대체 아서 노리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베를린과 파리를 오가며 무언가 거래를 하는 것 같은데, 소설의 서술자 빌리는 그게 밀수가 아닌가 짐작하지만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잘 나가던 아서 노리스가 빌리 브래드쇼가 사는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이야기는 한층 복잡해진다. 계속해서 정체불명의 마고란 인물이 파리에서 암호 같은 전보를 아서 노리스에게 보내고, 베를린 사교계의 마당발 노리스 씨를 따라 많은 사람들을 소개 받고 심지어 나치 국가사회주의당에 대척점에 서 있던 공산당 활동에까지 브래드쇼는 원치 않게 개입하게 된다. 그렇게 알게 된 루드비히 바이어란 미지의 인물로부터 빌리 브래드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크리스 아이셔우드는 명백하게 자신을 형상화한 윌리엄 브래드쇼란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소설 속에서 브래드쇼는 누가 봐도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성적소수자로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미래의 소설가 지망생으로 지적 풍모를 가진 그런 남자로 그려진다. 그는 마치 소설 <수호전>에 나오는 급시우 송강처럼 어려운 상황에 빠진 친구들을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누구나 인정하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된 아서 노리스를 비롯해서, 나치가 득세하기 시작한 뒤 숙적 나치 돌격대원에게 쫓기는 오토를 성심껏,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상대를 배려하면서 최선을 다해 돕는다. 물론 때로는 베를린의 친구들과 불화를 경험하기도 하고, 냉소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객관적 자세를 대체로 유지한다. 한편 SM적인 성적 취향을 가진 항상 우물쭈물하는 노리스 씨가 주저하며 하지 못하는 말들을 정곡을 찌르는 특유의 화법으로 이끌어 나가기도 한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어쩌면 독자들을 속 시원하게 만들어주려는 작가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어느 작가의 작품세계를 알아보려면 적어도 3~5권의 책을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최근에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작품을 연달아 읽으면서 작가의 성향 혹은 작풍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거주하는 하숙집 주인 슈뢰더 부인도 빼놓을 수 없는 멋진 캐릭터다. 간전기 시대에 제국에 패배를 안겨준 적국 출신의 이방인 크리스 아이셔우드를 이시부 씨라 부르며(아 헷갈린다 <베를린이여 안녕>에서 그녀가 그렇게 불렀던가), 친근하게 대해주는 수다스럽고 푸근한 하숙집 아줌마 같은 존재라고 해야 할까. 세입자들이 장기간 방을 비울 때는 서슴지 않고 그들의 방에 침입하는 고약한 습관도 있지만, 노리스 씨를 괴롭히는 그의 전직 비서 슈미트가 하숙집을 습격했을 때는 초대 받지 않은 이 침입자를 공격해서 감금하는 기지도 발휘한다. 우리의 이시부 씨들의 영향으로 선거에서 공산당에 투표하기도 하지만, 또 나치 시대에도 잘 적응해서 혹심한 전쟁을 무사히 빠져 나오기도 했다. 어쩌면 슈뢰더 부인이야말로 나치 치하의 엄혹한 시절, 전쟁과 기아를 버텨낸 베를린 시민의 상징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이 끝나고 이십년 만에 다시 만난 이시부 씨와 슈뢰더 부인의 해후는 정말 감동적인 에필로그였다. 어찌 됐든, 우리네 삶은 계속된다는 삶의 진실이야말로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어쩌면 크리스 아이셔우드는 자유주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 독재정권으로 이행기에 대한 기록은 은근한 방법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유대인에 대한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갈색셔츠(브래드쇼는 점증하는 나치에 대한 공포를 사방에서 갈색으로 포위된 상황에 비유하기도 한다)를 입은 청년들이 백주대낮에 반대파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경찰들은 멀뚱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는 증언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 당시만 하더라도, 베를린 시민들은 나치가 앞으로 저지르게 될 홀로코스트나 2차세계대전으로 독일이 입게 될 참화 그리고 뒤이은 분단에 대해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이방인 윌리엄 브래드쇼의 시선을 통해 베를린의 사회상을 들려주었다면, 베를린 통신원 신분의 헬렌 프랫은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로 범죄에 가까운 나치의 실상을 서방세계에 전파했다. 대다수 온건한 독일 시민들은 사회주의 세력이 점증하는 나치의 부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냉온탕을 오가는 선거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이방인으로 베를린에서 지내면서, 유창한 독일어 구사 능력 덕분에 각양각층의 사람들을 만난 체험은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베를린 이야기> 연작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십대 청년의 가난, 정치적 증오 그리고 절망으로 가득했던 시절에 대한 진술은 그렇게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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