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이여 안녕 창비세계문학 46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게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삭막한 풍경이다. 2007년 5월의 베를린은 추웠다. 그 때 5유로를 주고 어느 백화점에서 산 스웨터를 아직도 입고 있다. 내가 베를린에 간 건 순전히 여행길에 만난 나그네에게 전해 들은 페르가몬 뮤지엄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낯설었지만 웅장했던 뮤지엄 기행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제국주의 시절 터키에 있는 타국의 신전을 통째로 뜯어온 약탈 행위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말이다. 나보다 수십 년 전에 베를린에서 이방인 생활을 했던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육성 기록인 <베를린이여 안녕>은 그런 점에서 더욱 개인적 감흥을 자극한다.

 

뉴욕타임즈에 실린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베를린 생활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니, 정확하게 그가 베를린에 머물기 시작한 것은 그가 25세였던 1929년이었다고 한다. 영국 출신의 이방인 게이 작가는 조국에서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기(동성애 금지법, 1967년 폐지) 때문에, 온갖 형태의 자유연애가 판을 치던 바이마르 시절 베를린을 자신의 안식처로 삼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가 살던 놀렌도르프 슈트라세는 이제 슬럼화된 지역이라고 하는데, 대신 베를린 밤문화의 중심지라고 한다. 아마 그 시절에 외국인은 경찰서에 체류등록을 해야 했던 모양이다. 경찰서에 외국인 등록을 하러 갔을 때, 자신이 그 지역의 유일한 영국인이라는 사실에 기뻐했다고 한다.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1939년에 발표한 <베를린이여 안녕>은 모두 6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곧 독자들이 익숙하게 될 이름인 슈뢰더 부인의 하숙집에 사는 다양한 인물군이 차례로 등장한다. 나치를 지지하는 요들가수 마이어 양, ‘직업여성’ 코스트 양, 인근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바비가 바로 그들이다. 1930년대 베를린의 소시민들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구성이다. 우리의 이시부 씨는 베를린의 부유한 부르주아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번다. 소설의 화자 이시부 씨는 자존심이 상해 영어공부보다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와 잡담 그리고 약속에 정신이 팔려 있던 제자 히피 베른슈타인 양에게 받은 교습비 5마르크를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가 허겁지겁 찾으러 간다. 절망과 가난에 빠진 이방인에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 자유가 차고 넘치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 시대로 급속하게 우경화하던 시절의 베를린에서 정치 대화는 종교 이야기 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노라는 그의 고백이 당대 베를린 시민들이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대변해 준다.

 

이제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인 샐리 볼스가 등장할 차례다.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한 때 함께 살았던(절대 애인은 아니었다) 진 로스(Jean Ross)라는 실제 인물을 소설화한 인물로 같은 영국 출신의 19살난 형편없는 실력의 나이트클럽 가수다. 정말 훗날 뮤지컬 <캬바레>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다채로운 성격을 가진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가계에 대한 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젊은 피아니스트와 정분이 나질 않나, 백만장자와 사랑에 빠지는 막장드마라 같은 기획도 하고 노래와 춤 못하는 게 없는 그런 신여성의 선두주자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1966년에 뮤지컬로 만들어져서 브로드웨이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고 작년까지 숱한 리바이벌을 거듭해 왔다고 한다. 세상이 좋아져서 뉴욕의 브로드웨이까지 날아가지 않아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유투브로 샐리 볼스 역을 맡은 엠마 스톤이 부른 <Don't Tell Mama>를 잠깐 감상해 보기도 했다. 역시 데카당스한 분위기의 다양한 문화 공간이었던 베를린의 분위기를 잠시 엿볼 수 있어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음 에피소드는 휴양지 뤼겐 섬에서 피터 윌킨슨(영국인) 그리고 노동계급 출신의 오토 노바크와 함께 보낸 이야기다. 은근하게 게이 성향을 드러내는 피터는 날마다 댄스 파트너를 바꿔 놀러 다니는 오토를 질투한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토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만끽한다. 우리의 이시부 씨는 그런 상황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중재에 나서지 않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누구든 도움과 조언을 요청할 때마다 응한다. 그런 성격이 실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모습인지도 궁금해졌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고 피터는 정신과의사를 찾지만 공산주의를 정신병으로 치부해 버리는 나치사상에 경도된 의사가 도움이 될 리 없다. 해수욕장에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들어서고, 다섯살배기 어린아이가 나치 찬양가를 부르는 장면으로 파시즘이 일상에 스며들고 있었노라고 작가는 생생하게 증언한다. 식당에서 만난 독일 청년들과 대화 중에 그들의 지도자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지난 전쟁에서 독가스 사용은 어떻게 된 거냐고 화자가 묻는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건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라며 반박하는 장면에서 곧바로 홀로코스트의 유령이 떠올랐다. 그 엄청난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어디까지나 기술적인 문제였구나.

 

노바크가 사람들과 란다우어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가진 자산만큼이나 정말 대조적이다. 생활고에 찌든 밑바닥 삶을 노바크 집안에서 경험했다면, 베를린의 유명한 백화점을 소융한 유대인 란다우어 집안과의 교제는 또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재와 사업에 그렇게 영민했던 란다우어들이 나치가 집권하면 당장에 그들에게 위협이 될 거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했을까. 파시스트 세력이 그들이 가진 재산 뿐 아니라 목숨/존재까지도 요구하게 되리라는 예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시대의 비극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이시부 씨는 결국 거대한 폭풍이 베를린을 뒤덮기 전에 정들었던 자신의 두 번째 고향을 떠날 수 있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오픈시티였던 격변기의 베를린에 사는 사람들은 매순간마다 정치적 선택을 요구받았다.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 선택으로 귀결되긴 했지만,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이중 이방인은 그런 삶의 양상들을 훌륭하게 소설화했다. 소설 <베를린이여 안녕>은 한 때 자신이 사랑하던 도시가 서서히 몰락해 가는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기록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아련한 소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