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인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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쿳시 작가의 신간 <폴란드인>을 읽으면서, 쇼팽의 녹턴 21곡을 듣는다. 예전 같으면 쇼팽 녹턴 전문가의 연주를 찾아서 들었겠지만 뭐 이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녹턴 두 번째 곡은 내가 예전에 정말 자주 즐겨 듣던 다니엘 바렌보임의 곡이라 너무 반가웠다. 물론 소설이 쇼팽의 피아노곡에 대한 내용은 아니다.

 

2023년에 발표된 존 맥스웰 쿳시의 <폴란드인>을 물 흐르듯이 그렇게 읽었다. 역자의 표현대로 간결하고 검소한 진행이었다. 기본 줄거리는 노년의 폴란드 피아니스트 비톨트 발키치예비치가 피아노 서클에서 만난 바르셀로나 여성 베아트리스와 사랑에 빠지는 설정이다. 폴란드인 칠십대 노인이고, 바르셀로나 여성은 사십대의 유부녀다. 모든 글쓰기가 자서전이라는 말을 인용한다는, 노년의 작가가 품은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섬세하지만 엄격한 피아니스트 비톨트는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쇼팽의 녹턴을 바흐 스타일의 진지함으로 연주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폴란드 남자와 바르셀로나 여자는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자신의 감정을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표현하는 게 어떤 느낌일지는 경험해 보지 못해 알 수가 없다. 동일한 언어로 말을 나누어도 오해가 발생하는데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감정선의 사소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중요하고 동시에 미묘한 감정들이 왜곡 없이 상대방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폴란드인이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자라고 한다면, 바르셀로나 여성은 완벽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녀는 늙다리 아저씨의 거침없는 고백공격을 정중하고 무난한 방식의 회피기동으로 피해나간다. 하지만 또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야 하는 게 소설의 전개상 맞는 일이지 않겠는가. 브라질 연주여행에 동행해 달라고 하고, 또 나중에는 마요르카까지 베아트리스를 찾아간다.

 

분명 단테의 연인이자 뮤즈였던 베아트리체의 에피소드 그리고 또다른 폴란드인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이야기들을 연상시키지만 정작 그들의 사연에 대해 자세히 모르니 그냥 어느 정도 추론할 수밖에 없다. 비톨트는 베아트리스의 사랑을 간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게 되었을 때조차도, 베아트리스의 말대로 그녀의 삶에서 조용하게 사라져 버린다.

 

베아트리스가 폴란드인에 대한 기억을 잊을 법한 시점에, 그가 죽었다는 연락이 도착한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남긴 유품을 바르샤바에서 찾아가라고 했던가. 그녀는 비톨트의 유품을 택배로 받고 싶어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결국 자신이 직접 폴란드에 가서 그가 남긴 84편의 시를 수습해서 귀국한다. 분명 자신에 대한 연시일 텐데, 비톨트는 둘의 공용어인 영어 대신 폴란드어로 시를 써서 베아트리스를 번거롭게 만든다.

 

이 또한 쿳시 작가가 마련한 하나의 소설적 장치가 아닐까. 서로 다른 언어로 사랑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어렵다는 건 이미 전술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폴란드 피아니스트의 일방적 사랑의 표현이 등장한다. 그것도 영어로 쓰인 시가 아니라, 자신의 모국어로 쓴 84편의 시라고 한다. 그렇다면 비톨트가 남긴 시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번역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산문도 아닌 시의 번역은 좀 더 어려운 건 기본이 아니던가. 역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우리 주변에서 누군가 폴란드어를 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게다가 그 번역을 의뢰하기 위해서는 비용도 필요하다.

 

베아트리스가 비톨트가 남긴 시들을 수령하는 순간, 그녀는 비톨트가 설계한 프레임에 갇히게 된 것이다. 죽은 사람이 남긴 글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 과정은 시간과 번거로움 그리고 심지어 비용이 든다고 하더라도, 호기심이라는 강력한 감정을 이길 수는 없었으리라. 누가 과연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겠지 하고 넘겨 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번역되어 자신의 손에 들어온 시를 보면서 당혹감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베아트리스. 너무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차라리 피아니스트만큼, 쇼팽의 음원을 기대했다면 너무 진부한 걸까. 노년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사랑에 빠진 시인으로 변신해서 수수께끼 같은 시들을 남긴다니. 놀랍지 않은가. 어쩌면 이건 시간을 초월한 권위의 아우라에 편승한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예전에 이언 매큐언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참고로 이언 매큐언과 존 맥스웰 쿳시의 모든 전작을 거의 다 읽었다. 최전성기를 지난 노작가들의 글들은 아무래도 예전만 못하다는 그런 느낌이다. 시간에는 끝이 없다지만, 작품의 퀄리티에는 아마 적용이 되지 않겠지. 그냥 아련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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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스파이
김숨 지음 / 모요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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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나의 독서는 비교적 순항 중이다. 어젯밤에는 한 열흘 전에 구입한 김숨 작가의 <오키나와 스파이>를 마저 읽었다. 아마 <국수> 이래 김숨 작가의 책은 처음인가 싶기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 작년 가을에 가서 읽다만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태평양전쟁 말기, 19454월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전역이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키나와 본토는 아니고 오키나와 인근의 어느 작은 섬이다. 사쓰마 번에 의해 일본에 복속된 이래, 오키나와 주민들은 본토인에 비해 2등 시민 차별을 받았다. 그 오키나와 사람들 아래에는 진짜 식민지 조선에서 이주한 '조선인 고물상' 아저씨 가족이 있었다. 소설에 나오는 이들이 대부분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인 고물상만 이름이 없다. 오키나와 언저리의 어느 섬에서 그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이 드러난다.

 

섬에 압도적 화력과 병력을 자랑하는 미군이 상륙하고, 한줌의 일본군들은 옥쇄 모드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전의 사이판이나 오키나와 본토에서 벌어진 옥쇄전에 비하면 이들의 결의는 이전만 못하다. 그들 역시 일본의 패전이 불가피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30명 남짓한 해군통신대 기무라 총대장이 이끄는 패잔병들은 무엇보다 스파이 색출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시민들에게 스파이 때문에 전쟁에 지게 되었다는 거짓 프로파간다를 퍼뜨린다. 전쟁의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전형적인 대본영으로 대표되는 일본 군부의 악질적 행태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일본 국왕 역시 전쟁 후에 아무런 단죄를 받지 않았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몇몇 수괴들만 전범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그건 모두 전쟁이 끝난 다음의 일이고, 지금 당장 스파이로 몰린 섬 주민들 9명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섰다. 기무라와 이케다 등은 마을에서 모집한 소위 "인간 사냥꾼"들을 동원해서 9명의 스파이 혐의자들을 잔혹하게 처단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그들은 스파이들이 아니라 그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비겁한 패잔병들의 전형적인 책임전가가 이런 끔찍한 방법으로 재현된다.

 

초반부터 이런 사건으로 시작하다 보니,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전쟁이란 광기에 휩싸인 인간 사냥꾼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다. 게다가 그들은 심지어 어린 십대 소년들이다.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넋을 잃는 게 당연할 지경이다.

 

기무라와 인간 사냥꾼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할 희생양들을 찾는다. 그러다 1세 스파이까지 등장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값의 후환이나 복수를 걱정해서, 어린아이까지 예외 없이 처단하는 비인간적 처사에 기가 막힌다. 기무라 잔당들은 주민들을 약탈하고, 그들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없는 스파이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경방단장을 필두로 해서 누구도 예외가 없다. 기무라 스파이 리스트에 오른 이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인 고물상과 그의 가족들의 운명 역시 시간문제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의 운명이 그랬듯이, 일제 치하의 식민지 백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강자와 약자로만 세상을 구분하는 파시즘의 광기는 약자부터 공격하기 마련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일본의 패전으로 종전이 되었음에도 전쟁광들의 광기는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질적 무력을 지니고 있던 기무라들은 마을에 내려와 행패를 부린다. 그렇게 정의는 지연된다. 그리고 인간 사냥꾼들의 학살은 계속된다. 전쟁 중이었다면 덜 억울했을지 모르겠지만, 전쟁이 다 끝난 마당에 왜 이런 비극이 벌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일본 국왕의 항복 선언으로 안도하던 독자는 호되게 뒷통수를 맞은 것 마냥 얼얼하다. 이게 다 끝난 게 아니었어?라고 말이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혹은 외부인의 시각으로 서술되는 오키나와의 비극은 그런 점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조선인 고물상이 처음 섬에 왔을 적에 주민들은 선량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무엇보다 해군통신대가 주둔하고 가혹한 스파이 색출과 사냥에 나서면서부터 마을의 인심을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포와 불안 속에, 그렇게 그들의 눈동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 위해, 한줌의 땅이 필요했지만 섬 주민들 누구도 조선인 고물상과 그의 아내 후미에게 땅을 내주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기무라도 대표되는 일본 군부가 심은 타자에 대한 의심과 증오의 씨앗이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빌드업된 비극은 엔딩으로 치닫는다.

 

작가가 구사하는 거대한 비극의 서사에 그만 넋을 빼앗긴 느낌이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라는 물음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죽을 때가지 싸우라는 공허한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무라들이 말버릇처럼 되뇌던 대로 장렬한 방식으로 옥쇄를 했던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은 전쟁이라는 이름의 광기에 편승해서, 어린 소년들을 노예로 만들고 조종해서 인간 사냥을 했을 뿐이다. 어쩌면 그들은 종전과 평화가 아닌 영속적인 전쟁 상태를 원했을 지도 모르겠다.

 

무고한 이들의 계속되는 죽음으로 점층되어가는 비극적 서사의 무게가 견딜 수가 없어서 잠시 책을 덮었다. 마치 작년 가을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때처럼. 조금 용기를 내어 다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각처에서 출현하는 이상한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각종 일탈과 기이한 현상들 때문에 세월이 하 수상하다. 김숨 작가의 <오키나와 스파이>는 이런 혼돈의 시기를 경계하라는 그런 메시지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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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옮기는 사람 제안들 37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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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목욕탕>에 이어 다와다 요코의 <글자를 옮기는 사람>을 읽었다. 원래 다른 책 읽고 있었는데... 순서가 무슨 상관이겠냐만. 워낙에 분량이 적어서 금방 읽었다.

 

자전적 이야기인지 소설인지 헷갈린다. 그래서 책 정보를 검색해 보니 소설이란다. 아 그렇구나. 카나리아 무리의 어느 섬으로 번역가인 화자가 내과의사네 별장 신세를 지게 된다. 아 미션이 있었지. 짧은 단편소설을 번역해야 한다. 아마 독일어 작품인 거 같고, 자신의 모국어(일본어)로 번역해야 한다지.

 

주어와 술어가 뒤죽박죽된 성 게오르크의 용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히 화자의 번역 작업물로 끼어 들고, 화자는 예의 섬에서 원주민과 만나 이런저런 일들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서사를 옮긴다. 참 그리고 보니 이 소설의 원작이 <문자이식>이라고 했던가.

 

섬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정작 바다에 들어가서 수영을 하거나 그러진 않는 모양이다. 뭐랄까, 화자는 다와다 요코 작가처럼 어쩌면 철저한 이방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섬의 풍경에 대해 작가적 시점에서 예리한 진단을 내린다. 섬에는 물이 부족한데, 그건 바나나 나무를 키우기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바나나 나무를 키우지 않으면 되지 않나? 그건 또 아니라고 한다. 바나나를 재배해서 돈벌이를 해야 하니까. 카나리아 무리에서 바나나 재배를 하나 싶다. 그 동네 일에 대해 잘 모르니. 그렇다고 해서 부러 검색해서 모르는 지식을 채우고 싶은 욕망도 생기지 않는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원래 리뷰의 제목을 <선인장, 바나나 나무 그리고 드래곤 바람>이라고 할까도 싶었다. 그 정도로 작가는 카나리아 무리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섬에는 염소 외에는 모든 가축 키우기가 금지되어 있다고 했던가. 그래서 치즈도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만 있는 모양이다.

 

병행해서 진행되는 번역 작업물은 왠지 비밀암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와 술어의 순서가 엉망이다. 그렇지만 굳이 재조립해서 서사의 흐름을 따라가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또 넘어간다. 그냥 여유작작하는 나의 독서 스타일인가 보다. 굳이 무언가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과연 이 부분에서 저자의 집필 의도가 무엇인가하고 따지고 싶지도 않다. 이걸 독서의 내공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무식한 독서 방식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읽는다. 소설의 어디선가 만난 문구처럼, 내가 읽은 것 중에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들은 나의 뇌리 속에서 사라질 건 사라져 버리겠지.

 

그 다음에 또 무슨 이야기가 있더라. 곧 섬에 올지도 모른다는 신비에 휩싸인 게오르크가 있었던가. 그것은 마치 마감에 맞춰 번역에 집중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다는 작화자의 게으름과 상충하는 그런 이미지로 다가온다. 게오르크-용가리-공주의 삼위일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화자는 공주로 대체될까. 에이 그건 아니겠지. 어느 의미에서 사악한 용가리는 일상을 파괴하는 요물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 게오르크는 일상의 회복을 가져다 주는 그런 인물일까.

 

자 다음은 화자가 몰입하지만 또 성과를 내지 못하는 번역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중언어자답게 번역은 창작만큼이나 작가에게 밥벌이의 원천이 아닌가 싶다. 번역의 과정은 타자의 창작물이 나의 시선과 사유를 거쳐 다른 방식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게 아닐까. 어느 순간, 역자인 화자는 자신이 번역한 작품을 자신도 모르겠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내가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걸 알 수 있겠냐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다. 나도 마찬가지다. 난해함의 연속인 다와다 요코 작가의 책들을 만나면서, 내가 다와다 요코가 아닐진대 어떻게 그가 구사하는 언어들을 무슨 수로 다 소화해낸단 말인가.

 

정신없이 그렇게 읽다 보니 다와다 요코의 <문자이식>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오늘 아침 짙은 안개를 헤치고 출근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두 번째 만남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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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왔지만
다카기 나오코 지음, 고현진 옮김 / artePOP(아르테팝)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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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퇴근길에 다와다 요코 작가의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들렸다. 평일인에도 주차장은 만차였고, 도서관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 평일에도 이렇게들 책을 열심히 읽는가 싶어 보니 휴대폰을 하는 사람,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시청하는 사람 그리고 자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물론 책 읽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날 우연히 얻어 걸린 책이 바로 타카기 나오코의 <도쿄에 왔지만>이었다. 올해 처음 읽은 그래픽 노블, 그러니까 만화였다.

 

아주 오래 전에 <뷰티풀 라이프> 서평을 하지 않았었나 싶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그림체가 낯설지 않다. 물론 아주 세련된 건 아니지만, 뭐랄까 일본 특유의 그런 푸근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미에 현 출신의 타카기 씨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도쿄로 상경해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장하다 타카기 씨.

 

어려서 관광으로 방문한 일본 제일의 도시와 정작 거창한 생존투쟁을 위해 상경한 도쿄는 달랐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내가 오래 전에, 교토에 관광 갔을 적에 나는 아침부터 니조조 구경을 하겠다고 부리나케 나섰고, 거의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출근하는 일본 직장인들을 보며 내가 느낀 그런 감정이라고나 할까. 놀이와 생존투쟁은 엄현히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늘 그렇지만 서설이 길었다. 당연히 타카기 씨의 일러스트레이터 도전을 쉽지 않다. 도쿄의 물가는 살인적이다. 방값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비용의 연속이다. 종잣돈이 떨어지고 일러스트레이터의 푸른 꿈도 지지부진해진다. 결국 타카기 씨는 프리터(?)로 변신해서 스시 공장에 투입된다. 아마 스시 공장에서 일하면서 이런 자괴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아니 내가 고작 스시 공장에서 후토마키 따위나 말기 위해 이 고생을 하면서 도쿄에 왔나하고 말이다. 하지만, 미에 현과 도쿄의 분위기는 엄연히 다르다.

 

일단 작가가 좋아하는 미술관과 볼거리들이 차고 넘치지 않은가. 그리고 고향 사람들과는 다른 성향의 이들과 교류하면서 다음 단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작가의 고생은 그런 기회를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물론 말이 그렇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미에에서 휴가를 받아 상경한 아버지는 타카기 씨와 도쿄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지내며, 여름 더위를 막아줄 발도 설치해 주시는 단란한 모습도 보여 주신다. 역시 내리사랑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텔레비전 콘센트 문제도 해결해 주시고, 결정적으로 돌아가시면서 타지에서 고생하는 딸에게 용돈 봉투도 내미신다. 참 멋진 아부지가 아닐 수 없다. 멀리서 응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타카기 씨의 귀성 이야기도 재밌다. 신칸센은 당연히 편하고 빠르고 좋지만, 가격이 비싸다. 신칸센 탑승이 4시간 정도라면 버스는 반값이지만 대신 시간이 7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항상 비용이 작가의 뒷목을 잡는다. 게다가 작가는 버스에서 잘 못잔다고. 그러니 즐거운 귀향길이 이러저러한 계산으로 머리부터 아파 오기 시작한다.

 

다음은 옷에 관한 에피소드다. 후줄그래한 입성으로 집에 오니,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두 걱정이다. 그네들의 걱정을 잘 알기 때문에, 한 번 데인 다음부터는 귀성길에 괜찮아 보이는 옷을 사 입고 온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누가 무슨 옷을 입고, 뭘 먹는가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그게 차가 아닐까 싶다.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하는 거지. 진부하지만, 좋은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그의 인격이사 성공의 척도가 되는 건 아닐 텐데 말이지.

 

그래도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겠다는 꿈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우리의 타카기 씨. 어쩌면 이런 에피소드들이야말로 나중에 성공했을 때, 하나의 소재가 되지 않을까 싶다. 결론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책으로도 나오지 않았나 말이다. 결국 그녀의 노력을 결실을 맺어, 긴자 거리에 윈도우에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번에도 그놈의 비용 문제로, 재료들을 사서 차로 배송시키지 못하고 낑낑 대면서 그걸 직접 집까지 나르는 가난한 일러스트레이터의 비애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뭐랄까 좀 구질구질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그게 또 현실의 반영이라고 하니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살이가 신산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각 에피소드의 말미에 행복 인 도쿄라고 해서 즐거운 이야기들도 간간히 소개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네 일상에 대한 저격이라고나 할까. 누구나 다 항상 행복할 수도 그리고 또 불행한 것만은 아니니까 말이지.

 

명절을 앞두고 있다. 다본 책들은 속히 반납하고, 도서관에 있는 타카기 나오코 씨의 다른 책들을 빌려다 볼까 어쩔까 싶다. 왜냐구? 뭐 재밌으니까. 타자의 삶을 잠시나마 이렇게 엿볼 수 있는 혹은 나의 삶을 투영해 볼 수 있는 재미야말로 우리가 책 읽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나.

 

[뱀다리]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이 책은 아쉽게도 절판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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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런 제닝스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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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피드인지 스레드에서 작년에 반응이 좋았다는 평을 듣고 캐런 제닝스 작가의 <>에 대한 호감이 생겼다. 그리고 작년 말에 수원 리브로 서점에 들렀다가 실물책을 영접하고 거의 살 뻔(?)하는 그런 순간도 맞이했었다. 하지만, 왠지 오기가 발동해서 구매 대신 대출하기로 마음 먹고, 살며시 책을 다시 서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난주에 의왕 책마루도서관 원정에서 드디어 빌려다 읽었다. 지나고 나서 보니 대출해서 보기를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소설 <>의 주인공은 현재 등대지기로 일하는 중인 칠십대 노인으로 오랫동안 빵살이를 한 새뮤얼이다. 이 십몇년을 홀로 섬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일상이 부서지는 걸 혐오한다. 그가 사는 섬에는 시신이 자주 떠내려 오는 모양이다. 어느 날 난민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시신을 발견하고, 그 시신을 수습하면서부터 새뮤얼의 일상이 파괴되기 시작한다. 죽은 줄 알았던 남자는 살아난다.

 

왠지 소설 <>은 현재의 이야기보다 새뮤얼의 과거에 대 중점을 두고 있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그의 과거는 어떤가 살펴보자. 캐런 제닝스 작가는 정확하게 어느 나라라는 점이나 공간을 밝히지 않는다.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조상 대대로 평화롭게 살던 새뮤얼의 땅에 침입해서, 그들을 내쫓고 땅을 차지해 버린다. 어쩔 수 없이 새뮤얼의 가족은 도시로 이주해서 구걸로 생활을 영위한다. 새뮤얼의 아버지는 조국의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총에 맞아, 불구자가 되었다고 했던가. 오랜 감옥생활을 했다는 새뮤얼 역시 그렇다면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받은 후예란 말인가.

 

이야기는 그렇게 만만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다시 현재에서 섬에 홀로 살면서 자신만의 작은 왕국의 건설한 새뮤얼은 낯선 타자의 등장이 불편하기만 하다. 자신이 제공한 음식을 게걸스레 먹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도 한 때 난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타자는 새뮤얼의 일상을 끊임 없이 파괴하고, 또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존재다. 당연히 그런 새뮤얼의 태도는 나중에 망상과 피해의식을 만들게 되는 원천으로 작용한다.

 

소설의 서사는 새뮤얼의 더 깊은 과거로 또 그 과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방점을 찍는다. 그의 조국은 백인 식민주의자들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곧바로 독재자의 등장으로 자유를 억압받고, 식민지 지배시절과 달라진 게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에 독재자에 대한 시민들이 저항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 아니던가. 친구들 사이에서 댄디한 멋쟁이 아메리칸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새뮤얼은 우연한 기회에 메리아와 그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새뮤얼의 애인 아니 동지가 되는 메리아는 폭력을 수반한 혁명으로 독재를 끝장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펼치는 인민당 소속이다. 새뮤얼 역시 운명적으로 메리아들과 합류하게 되고, 독재 투쟁의 선봉에 거의 떠밀리듯 그렇게 서게 된다.

 

아니 인류 역사는 언제 어디서나 비슷한 궤적을 그리게 되는 건가.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던가. 다시 한 번 위대한 문학의 힘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공유하게 되는 정신세계의 패턴은 동서를 떠나, 공유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지 않나 하는 사유에 도달하게 된다.

 

새뮤얼은 독재자를 타도하기 위한 시위대에 합류해서, 독재를 상징하는 동상을 부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동상에서 결국 떨어져 버렸고, 그들에게 총탄 세례를 날린 군인을 죽이려고 했다가 체포되어 장기형을 살게 된 것이다. 얼떨결에 그렇게 민주화 투사가 된 것인가. “왕궁이라 불리는 교도소에서 그는 고문을 피하고 살기 위해 자신의 동지들과 자식 레시를 낳은 메리아에 대한 정보를 죄책감 없이 불어 버렸다. 어쩌면 훗날 섬에서 보여주는 새뮤얼의 셀프-고립은 이 무렵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긴 수형 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지만, 자신을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대는 바뀌었고, 자신의 여동생 메리 마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런 신세가 된 새뮤얼. 레시는 열병으로 어려서 죽었고, 메리아에 대한 소식은 들은 지가 오래다. 그리고 부두가에서 만난 메리아의 처지는 참 그랬다. 청소부 일자리 제안도 받지만, 그가 전과자라는 이유로 철회된다. 새뮤얼의 삶은 실패의 연대기에 다름 아니다.

 

육지에서의 파란만장한 삶에 비하면, 섬에서 난민 아저씨와 벌이는 긴장관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억측에서 출발한 새뮤얼의 망상은 결국 비극적 엔딩을 예고한다.

 

새뮤얼은 섬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고독한 영혼이었다. 그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그런 부적응자였다. 그래서 섬은 고독한 영혼에게 완벽한 피난처가 아니었을까. 다만, 그가 좀 더 타자들과 같이 지낸 경험이 있었다면 엔딩인 확연하게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은 중반까지는 나름 괜찮게 진행이 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동력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이러다가는 계속해서 쏟아지는 신간에 밀려 완독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막판 스퍼트로 마저 읽을 수가 있었다. 좀 더 실제 역사를 다루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르포가 아닌 문학이 실제 역사를 다루어야 한다는 그런 의무는 없지만 말이지.

 

어쨌든 다 읽었고, 비슷한 경로로 알게 된 김숨 작가의 <오키나와 스파이>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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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1-19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내용으로 봐서는 흥미로운데 끝까지 유지되는 소설적 힘이 부족한가 봅니다.
저도 이런 책들이 많아 읽다가 다른 책으로 넘어 가곤 합니다.
어쩌면 저의 집중력 부족이 문제인 것도 같아요 ㅎㅎ

레삭매냐 2025-01-20 08:03   좋아요 1 | URL
처음에는 참 흥미로웠는데...
뒷심 부족이랄까요.

물론 저의 집중력 결핍도
한몫했구요. 그래도 다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게 읽다만 책들이 너무
많아서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