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인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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쿳시 작가의 신간 <폴란드인>을 읽으면서, 쇼팽의 녹턴 21곡을 듣는다. 예전 같으면 쇼팽 녹턴 전문가의 연주를 찾아서 들었겠지만 뭐 이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녹턴 두 번째 곡은 내가 예전에 정말 자주 즐겨 듣던 다니엘 바렌보임의 곡이라 너무 반가웠다. 물론 소설이 쇼팽의 피아노곡에 대한 내용은 아니다.

 

2023년에 발표된 존 맥스웰 쿳시의 <폴란드인>을 물 흐르듯이 그렇게 읽었다. 역자의 표현대로 간결하고 검소한 진행이었다. 기본 줄거리는 노년의 폴란드 피아니스트 비톨트 발키치예비치가 피아노 서클에서 만난 바르셀로나 여성 베아트리스와 사랑에 빠지는 설정이다. 폴란드인 칠십대 노인이고, 바르셀로나 여성은 사십대의 유부녀다. 모든 글쓰기가 자서전이라는 말을 인용한다는, 노년의 작가가 품은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섬세하지만 엄격한 피아니스트 비톨트는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쇼팽의 녹턴을 바흐 스타일의 진지함으로 연주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폴란드 남자와 바르셀로나 여자는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자신의 감정을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표현하는 게 어떤 느낌일지는 경험해 보지 못해 알 수가 없다. 동일한 언어로 말을 나누어도 오해가 발생하는데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감정선의 사소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중요하고 동시에 미묘한 감정들이 왜곡 없이 상대방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폴란드인이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자라고 한다면, 바르셀로나 여성은 완벽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녀는 늙다리 아저씨의 거침없는 고백공격을 정중하고 무난한 방식의 회피기동으로 피해나간다. 하지만 또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야 하는 게 소설의 전개상 맞는 일이지 않겠는가. 브라질 연주여행에 동행해 달라고 하고, 또 나중에는 마요르카까지 베아트리스를 찾아간다.

 

분명 단테의 연인이자 뮤즈였던 베아트리체의 에피소드 그리고 또다른 폴란드인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이야기들을 연상시키지만 정작 그들의 사연에 대해 자세히 모르니 그냥 어느 정도 추론할 수밖에 없다. 비톨트는 베아트리스의 사랑을 간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게 되었을 때조차도, 베아트리스의 말대로 그녀의 삶에서 조용하게 사라져 버린다.

 

베아트리스가 폴란드인에 대한 기억을 잊을 법한 시점에, 그가 죽었다는 연락이 도착한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남긴 유품을 바르샤바에서 찾아가라고 했던가. 그녀는 비톨트의 유품을 택배로 받고 싶어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결국 자신이 직접 폴란드에 가서 그가 남긴 84편의 시를 수습해서 귀국한다. 분명 자신에 대한 연시일 텐데, 비톨트는 둘의 공용어인 영어 대신 폴란드어로 시를 써서 베아트리스를 번거롭게 만든다.

 

이 또한 쿳시 작가가 마련한 하나의 소설적 장치가 아닐까. 서로 다른 언어로 사랑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어렵다는 건 이미 전술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폴란드 피아니스트의 일방적 사랑의 표현이 등장한다. 그것도 영어로 쓰인 시가 아니라, 자신의 모국어로 쓴 84편의 시라고 한다. 그렇다면 비톨트가 남긴 시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번역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산문도 아닌 시의 번역은 좀 더 어려운 건 기본이 아니던가. 역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우리 주변에서 누군가 폴란드어를 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게다가 그 번역을 의뢰하기 위해서는 비용도 필요하다.

 

베아트리스가 비톨트가 남긴 시들을 수령하는 순간, 그녀는 비톨트가 설계한 프레임에 갇히게 된 것이다. 죽은 사람이 남긴 글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 과정은 시간과 번거로움 그리고 심지어 비용이 든다고 하더라도, 호기심이라는 강력한 감정을 이길 수는 없었으리라. 누가 과연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겠지 하고 넘겨 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번역되어 자신의 손에 들어온 시를 보면서 당혹감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베아트리스. 너무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차라리 피아니스트만큼, 쇼팽의 음원을 기대했다면 너무 진부한 걸까. 노년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사랑에 빠진 시인으로 변신해서 수수께끼 같은 시들을 남긴다니. 놀랍지 않은가. 어쩌면 이건 시간을 초월한 권위의 아우라에 편승한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예전에 이언 매큐언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참고로 이언 매큐언과 존 맥스웰 쿳시의 모든 전작을 거의 다 읽었다. 최전성기를 지난 노작가들의 글들은 아무래도 예전만 못하다는 그런 느낌이다. 시간에는 끝이 없다지만, 작품의 퀄리티에는 아마 적용이 되지 않겠지. 그냥 아련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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