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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평점 :

삼일절부터 읽기 시작한 폴 린치의 <예언자의 노래>를 어제 다 읽었다. 이 책 역시 달궁 모임의 버프라고나 할까. 다 읽지도 않은 책이었지만 왠지 느낌이 좋아 6월의 독서 모임 책으로 추천했다. <예언자의 노래> 대신 유디트 헤르만의 <레티파크>가 선정됐고, 일단 <레티파크>부터 다 읽고 나서 <예언자의 노래>를 읽었다. 다음은 <카이로스> 차례다. 참, 이 리뷰에는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조해 주시길.
어제 책의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근래 내가 읽은 책 중의 최고라는 점이었다. 2023년 부커상 수상이 허명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사실 책의 초반에는 아일랜드에서 내전이 벌어진다는 설정이 좀 이해가 되지 않아 몰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비상대권법 시행 후 전체주의적 국가가 시민들의 삶을 옥죄고 각종 시위들을 강압적으로 진압하는 와중에 교원 노조 소속의 래리 스택이 불법체포되는 장면을 거치면서 서사의 수레바퀴가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네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워킹맘 아일리시 스택이다. 갑자기 닥친 남편 래리의 부재는 아일리시를 실질적 가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르다라는 비밀조직을 통해 시민들을 감시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장면에서는 숨통이 턱턱 막혀왔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희대의 사건을 겪어서 그런지 소설이지만, 아주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멀쩡하게 유지되던 민주주의가 파괴되어 가는 과정은 비극이었다. 친정부 극우세력은 반대세력에게 조소와 경멸을 보낸다. 그들은 무력을 바탕으로 해서 각종 제약을 가한다. 아일리시는 마크, 몰리, 베일리 그리고 간난쟁이 벤을 비롯해서 치매에 시달리는 아버지 사이먼까지 돌봐야 한다. 물론, 위태로운 직장에서 일자리를 고수하며 식구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건 선택이 아닌 의무처럼 다가온다. 일찍 캐나다로 떠난 여동생 아냐가 부러워지는 그런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문득 1930년대, 독일의 대대적인 유대인 핍박이 시작되기 전 나고 자란 조국 독일을 떠난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회가 있을 때, 왜 나머지 유대인들은 떠나지 않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까라는 장면과 매우 유사하게 겹치기 시작한다.
스택 가족의 위기는 불법체포되어 구금된 아버지 래리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이제 막 17세가 된 마크에게 징집영장이 떨어지고, 아일리시는 캐럴 섹스턴의 도움을 받아 아들 마크를 그녀의 집에 숨기기로 결정한다. 물론 마크는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전히 래리의 행방을 알 수 없는 가운데, 해외 이주를 위한 여권 발급이 거절되고 결국 마크는 캐럴의 집에서 나와 반군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그 다음부터는 아일랜드가 아닌 시리아의 현실을 대입해도 무방할 것 같다. 결국 반군과 정부군의 내전이 격화되고 아일리시가 사는 삶의 터전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다. 처음에는 전기가 그리고 나중에는 물까지 끊기는 사태가 발생한다. 우리 어머니가 일찍이 말씀하셨지, 전기와 물만 끊어져도 문명세계는 암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박격포탄과 로켓탄이 곳곳에서 터지고 나중에는 공습까지 발생한다. 결국 반군이 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반군이라고 해서 그전의 파시스트 정부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캐나다에 사는 동생 아냐는 손을 써서 아일리시의 가족과 아버지 사이먼을 탈출시키려고 하지만, 아일리시는 주저한다. 끌려간 래리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장남 마크마저 어디에 가서 무얼 하는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베일리가 머리에 파편을 맞아 부상당하고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위기가 닥친다. 이제 스택 가족의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조짐을 보인다.
<예언자의 노래>에는 유럽을 강타한 시리아 난민 문제를 전면에 배치한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행동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 그리고 종교를 지닌 이들이 기존 사회에 적응하기란 난망하다. 유럽에서 부흥하는 극우 전체주의세력들은 자국 내에서 소수인 난민들을 적으로 삼아 자신들의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 그리고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정치적 목소리를 얻는데 일부 성공하는 현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 독일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AfD가 2당의 위치에 오른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가상현실이긴 하지만, 내전 중인 아일랜드는 비극적 디스토피아의 재현이다.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고한 아이들을 징집해서 부족한 병력을 채워 공안부대로 사용한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변수가 아닌 상수다. 직장에서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은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해고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직은 곧 절대빈곤으로의 추락을 의미한다. 아일리시 역시 20년 동안 정규직으로 일한 박사 학위 보유자였지만, 마트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빌런들에게 이런 위기 상황은 돈벌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된다. 검문을 통과하는 비용을 사람들에게 매기고, 또 국경을 넘을 수 있다고 꼬드겨서 막대한 돈을 갈취한다.
더 이상 고향에 살 수 없게 된 아일리시는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결국 월경을 선택한다. 그 과정은 순탄할까? 물론 절대 아니다. 악랄한 포식자들은 곳곳에서 아일리시 가족들을 위협한다. 어쩌면 이런 보통의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우리들도 난민이라는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 닥칠 수도 있는 그런 위험이다. 자기 혼자라면 어떻게라도 해보겠지만, 자신이 돌봐야 하는 어린 식솔들이 있다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런 위기 속에서 가장의 부재는 환상인지 모를 래리의 등장으로 독자를 착각에 빠뜨리게 만든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아일리시의 처지에 나를 대입해 보게 된다.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일상을 다 버리고, 과감하게 식솔들을 데리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타국에서의 삶에 자신의 운명을 내던질 수 있었을까? 긴박한 결정이 필요한 순간마다, 나의 결정이 어떤 후과를 초래하게 될지에 대해 신속한 판단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러기에는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위기의 순간들이 너무 급박하게 전개된다. 아일리시에 판단에 대해 누가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아일리시의 어린 자녀들인 베일리와 몰리 들은 처음에는 어린 아이였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위기의 파고들을 넘으면서 원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어른으로 변신해 간다. 진짜 아기인 벤은 이런 위기들의 트라우마가 각인될 거라고 저자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한다. 매우 공감이 가는 서사의 빌드업이라고 생각한다.
2025년 3월에 만난 폴 린치의 <예언자의 노래>는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수작이었다. 나는 왜 이 책을 무려 4개월이나 묵혀서 읽었는지 모르겠다. 모름지기 책과의 만남은 이런 타이밍이 있나 보다.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