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 페이지터너스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이광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빛소굴에서 꾸준하게 출간되고 있는 페이지터너 시리즈를 응원한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을 발굴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 기획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페이지터너가 없었다면, 내가 언제 브라질 출신 작가 마샤두 지 아시스의 책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겠는가 말이다.

 

<정신과 의사>는 네 편의 단편들과 하나의 중편이자 문제작 <정신과 의사>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처음의 네 편은 후반에 배치된 걸작 <정신과 의사>를 위한 빌드업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가치나 흥미가 떨어지는 건 절대 아니고.

 

점성술과 불륜에 대한 의혹으로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일련의 과정을 그린 <점쟁이>는 비극이다. 세상에 사랑의 종류는 참으로 많다고 하지만, 세 명의 남녀가 연루된 연애사는 어쩔 수 없이 비극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마샤두 지 아시스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버지가 부여한 신부의 길을 거부하고 도망친 다미앙의 비겁한 행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회초리>는 또 어떤가. 도대체 신학교에서 무얼 배웠단 말인가? 자신이 신학교의 엄격한 교육 시스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한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의 신학교 탈출 사유를 구명하러 간 집에서 일하는 하녀가 부당한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녀를 변호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녀를 체벌하겠다는 여주인에게 회초리를 가져다 주는 행동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유사 지식인의 이중적인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작품이 바로 <회초리>였다. 내 생각에 회초리는 하녀가 아닌 다미앙이란 녀석이 맞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저명한 폴카 작곡가 페스타나 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명인>에서는 요즘으로 치면 당시 인기가요 정도인 폴카 작곡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예나 지금이나 무언가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상투적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뼈를 깎는 그런 노력이 필요한 모양이다. 아니 그런데 세상 아래 그런 획기적이로 참신한 아이디어가 남아 있었던가. 결국 우리 인간은 기존의 창작 질서 아래서 만들어진 예술을 바탕으로 해서 그나마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하기 마련이 아니던가.

 

기껏 정성을 들여 만든 곡을 아내는 쇼팽의 야상곡이 아니냐고 묻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아내의 지적이기 때문에 미스터 페스타나는 죽을 지경이다. 모름지기 가까운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이 더더욱 힘들게 다가오지 않던가. 페스타나는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것으로 남은 여생을 보낸다. 누구나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쇼팽처럼 이른바 '불멸의 작품'을 만들 수는 없는 거니까 말이다.

 

, 이제 문제의 작품 <정신과 의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 작품에서 작가는 과학에 기반한 이성이 알고 보면, 광기의 다름이 아니다라는 주제를 독자에게 제시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브라질의 이타구아이시(). 그리고 이타구아이시에 정신병원을 개설해서, 사회에서 소외된 정신병자들을 수용하고, 정신병의 근원을 연구하고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밝혀내겠다는 역사적 소명을 가진 인물로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에서 수학한 시망 바카마르치(포르투갈 어로 '낡은 산탄총'이란 뜻이라고 한다) 박사가 등장한다.

 

지금은 덜 그렇지만,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정신병은 사탄의 저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정신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정신병 역시 치유가 가능한 병이 되었다. 서구에서 공부한 바카마르치 박사는 브라질 땅 이타구아이에 이런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정신병원을 열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정신병 환자들이 쇄도하기 시작한다. 물론 개설 전까지만 하더라도, 카자 베르지(녹색의 집) 병원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위용을 자랑하는 과학의 힘 앞에 사람들은 굴복했다.

 

초기의 선한 의도와 달리 카자 베르지 병원의 운영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바카마르치 박사는 자신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은 광인으로 몰아 병원에 가두기 시작했다. 그나마 처음에는 이런 수용이 선별적으로 행해졌지만, 나중에 가서는 거의 무차별적으로 정신의 균형을 바로 맞추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실시되었다. 바카마르치 박사는 전면에 내세운 그렇다면 선진 과학에 반대하냐는 말에 이타구아이 시민들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상황이 파시즘의 부상과 아주 유사하지 않은가? 이타구아이에서 정신병 환자 지목과 잇달은 정신병원 수용으로 바카마르치 박사는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권력자가 되었다. 이런 시스템의 지속이 과연 가능할까? 거의 4/5에 달하는 시민들이 정신병원에 갇힐 신세가 되자 결국 이발사 포르피리우스를 중심으로 해서 칸지카스 폭동이 발생하고, 11명의 사망자와 25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충돌이 발생한다. 결국 군대까지 동원해서 가까스로 사태는 수습되지만, 포르피리우스는 천하는 며칠 가지 못하고 주동자들은 자연스럽게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소설의 서사는 그렇게 희비극으로 다가온다.

 

미치광이들을 연구하던 바카마르치 박사마저 광기에 물들었는지 자신의 아내 에바리스타 부인도 희생시키고, 마지막에 가서는 가장 완벽한 정신의 소유자인 스스로를 병원에 수용해 버린다. 어쩌면 바카마르치 박사가 광기의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건 예견된 사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성으로 무장된 지식인 행세를 하는 전체주의자에게 권력을 내주었을 때, 해당 주체가 서서히 광인이 되어 가는 과정은 어느 현실과 너무 유사해서 책을 읽으면서 깜짝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미치광이 바카마르치 박사는 궁예의 관심법을 능가하는 실력으로, 다양한 이유를 들어 자신의 적들을 광인으로 낙인찍어 카자 베르지 병원에 수용한다. 독재를 추구하는 박사는 자신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거부한다. 현실계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 이게 과연 1881년에 쓰인 책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정신과 의사>에서 총기라는 물리적 폭력의 은유를 상징하는 바카마르치는 선과 악을 주관하는 절대자로 등장한다. 누가 그에게 그런 권력을 주었던가. 그는 주권자인 이타구아이 시민들을 무시하고, 카자 베르지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이런 바카마르치 박사의 행태에 분노한 시민들을 폭동을 일으켜서 잘못된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하지만, 동원된 군대라는 상위의 폭력 앞에 다시 한 번 좌절한다. 마샤두 지 아시스는 작가는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전체주의 혹은 파시즘의 위협에 대한 경고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가볍게 시작한 <정신과 의사>가 가벼운 단편들을 지나, 후반에 가서 이런 화끈한 마무리로 귀결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블랙 유머 그리고 재치 넘치는 전개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짧지만 강렬한 한 방을 담은 수작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친밀한 사이
케이티 기타무라 지음, 백지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달에 처음 듣는 작가인 케이티 기타무라의 <친밀한 사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서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원래 리뷰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따끈따끈할 때 써야 한다는 나만의 원칙을 지키지 못했나 보다. 그래도 기록을 위해 기억을 더듬어 가며 리뷰를 써본다.

 

주인공 여성은 여러 가지 언어에 능한 통역사다. 최근까지 뉴욕에 살던 주인공(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머지 가족은 싱가폴로 가고 자신은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통역사로 취직되어 헤이그로 이사했다. 문득 이 소설에서 이름 없는 주인공의 익명성은 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나 싶다. 모름지기 이름이 누군가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마련이니까. 어느 의미에서 주인공은 미국 작가들이 선호하는 국외자(expatriate)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헤이그에서 통역사로 일하면서 이런저런 '친밀감'을 동반한 관계들을 맺어간다. 아마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여전히 국외자 신분이기 때문에 예의 적정 수준의 친밀감을 넘지는 않는다.

 

독자는 주인공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하는 통역사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예상했던 대로 모종의 임무가 주어진다. 그것은 서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의 독재자로 반인도적 범죄를 필두로, 다양한 죄목으로 기소된 전직 대통령을 위해 통역하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빛과 어둠은 있는 법이지. 민간인 학살과 불법 체포와 구금 등 예상되는 독재자들의 일반 형태를 그는 그대로 따른다. 재판에 앞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무고한 독재자를 풀어 달라는 시위에 나선다. 어라,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그래.

 

주인공은 헤이그 출신의 부유한 남성 아드리안과 썸을 타는 중이다. 그는 아내와 이혼 과정에 있다. 무언가 깨끗하게 주변 정리를 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으면 좋을 텐데. 리스본으로 간 아름다운 아내 개비와 아이들을 쫓아 아드리안은 헤이그를 잠시 비우고 주인공에게 자신의 아파트에 와서 지내라는 제안을 건넨다. 주인공이 새로운 애인 아드리안에게 느끼는 친밀감은, 상대방인 아드리안이 느끼는 자신의 가족과 전(?) 아내에 대한 친밀감을 넘어서지 못하는 느낌이다. 결국 주인공은 다시 한 번 자신이 결국 국외자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와 마주하게 된다.

 

한편, 독재자는 자신의 모국어인 아랍어 통역 대신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통역을 의뢰한다. 게다가 독재자는 자신의 변호사로 개비의 지인이자 아주 유능한 것으로 알려진 케이스를 선임한다. 이런 불편한 관계의 설정은 뭐랄까, 불편한 사이에서 피어나는 친밀함을 목표로 한 그런 빌드업이 아닐까 싶다.

 

도대체 기타무라 작가가 모델로 삼은 독재자가 누군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코트디부아르 출신 로랑 그바그보라고 한다. 모국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에에서 무려 박사 학위를 받은 인텔리 출신 정치인이었다. 소설에서 독재자가 아랍어 통역 대신 프랑스어 통역을 고수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한 때, 민주화투사였던 인사가 독재자로 변신해서 선거에 불복하고 나라를 내전의 수렁에 빠뜨리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그바그보는 전직 국가수반으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사법재판소 법정에 서기도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유딧 레이스터르의 <젊은 여자에게 돈을 건네는 남자>라는 그림을 찾아 보기도 했다. 현대에 사진이 이미지와 상징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면, 근대에서는 회화가 그런 역할을 했다. 작가의 설명으로 보는 그림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는 명확하게 다가왔다. 케이티 기타무라는 그림의 심부에 "존재하는 불일관성"이 직조하는 긴장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소설에서는 과연 어떨까?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독재자를 반인도적 범죄로 기소하고 재판을 진행했지만, 다수 증거와 증인들의 실체적 증언에도 불구하고 소추관들은 인용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했다. 도덕적으로 독재자는 분명 유죄였지만, 법리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바로 이런 불일관성이야말로 작가가 <친밀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그바그보 역시 현실세계에서 무죄 판정을 받고 풀려나는데 성공했다. 정의의 불일관성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모양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에서의 친밀감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느끼는 어떤 친밀감이 더 나은 관계로 이끌어 간다는 보장이 없다. 주인공 역시, 재판소 통역관 일을 마치고 또 다시 부유하는 이방인이 된다면 지난 일 년 동안 쌓아올린 친밀감 역시 모래성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 친밀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일까.

 

<친밀한 사이>는 케이티 기타무라의 네 번째 소설이라고 한다. 프린스턴 출신으로 무려 문학 박사이기도 하다. 어려서는 발레를 배우기도 했다고. 다음달에 신간 <오디션>이라는 새로운 소설이 출간 예정이라고 하는데, 플롯을 보니 상당히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삼일절부터 읽기 시작한 폴 린치의 <예언자의 노래>를 어제 다 읽었다. 이 책 역시 달궁 모임의 버프라고나 할까. 다 읽지도 않은 책이었지만 왠지 느낌이 좋아 6월의 독서 모임 책으로 추천했다. <예언자의 노래> 대신 유디트 헤르만의 <레티파크>가 선정됐고, 일단 <레티파크>부터 다 읽고 나서 <예언자의 노래>를 읽었다. 다음은 <카이로스> 차례다. , 이 리뷰에는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조해 주시길.

 

어제 책의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근래 내가 읽은 책 중의 최고라는 점이었다. 2023년 부커상 수상이 허명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사실 책의 초반에는 아일랜드에서 내전이 벌어진다는 설정이 좀 이해가 되지 않아 몰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비상대권법 시행 후 전체주의적 국가가 시민들의 삶을 옥죄고 각종 시위들을 강압적으로 진압하는 와중에 교원 노조 소속의 래리 스택이 불법체포되는 장면을 거치면서 서사의 수레바퀴가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네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워킹맘 아일리시 스택이다. 갑자기 닥친 남편 래리의 부재는 아일리시를 실질적 가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르다라는 비밀조직을 통해 시민들을 감시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장면에서는 숨통이 턱턱 막혀왔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희대의 사건을 겪어서 그런지 소설이지만, 아주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멀쩡하게 유지되던 민주주의가 파괴되어 가는 과정은 비극이었다. 친정부 극우세력은 반대세력에게 조소와 경멸을 보낸다. 그들은 무력을 바탕으로 해서 각종 제약을 가한다. 아일리시는 마크, 몰리, 베일리 그리고 간난쟁이 벤을 비롯해서 치매에 시달리는 아버지 사이먼까지 돌봐야 한다. 물론, 위태로운 직장에서 일자리를 고수하며 식구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건 선택이 아닌 의무처럼 다가온다. 일찍 캐나다로 떠난 여동생 아냐가 부러워지는 그런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문득 1930년대, 독일의 대대적인 유대인 핍박이 시작되기 전 나고 자란 조국 독일을 떠난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회가 있을 때, 왜 나머지 유대인들은 떠나지 않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까라는 장면과 매우 유사하게 겹치기 시작한다.

 

스택 가족의 위기는 불법체포되어 구금된 아버지 래리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이제 막 17세가 된 마크에게 징집영장이 떨어지고, 아일리시는 캐럴 섹스턴의 도움을 받아 아들 마크를 그녀의 집에 숨기기로 결정한다. 물론 마크는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전히 래리의 행방을 알 수 없는 가운데, 해외 이주를 위한 여권 발급이 거절되고 결국 마크는 캐럴의 집에서 나와 반군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그 다음부터는 아일랜드가 아닌 시리아의 현실을 대입해도 무방할 것 같다. 결국 반군과 정부군의 내전이 격화되고 아일리시가 사는 삶의 터전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다. 처음에는 전기가 그리고 나중에는 물까지 끊기는 사태가 발생한다. 우리 어머니가 일찍이 말씀하셨지, 전기와 물만 끊어져도 문명세계는 암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박격포탄과 로켓탄이 곳곳에서 터지고 나중에는 공습까지 발생한다. 결국 반군이 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반군이라고 해서 그전의 파시스트 정부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캐나다에 사는 동생 아냐는 손을 써서 아일리시의 가족과 아버지 사이먼을 탈출시키려고 하지만, 아일리시는 주저한다. 끌려간 래리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장남 마크마저 어디에 가서 무얼 하는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베일리가 머리에 파편을 맞아 부상당하고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위기가 닥친다. 이제 스택 가족의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조짐을 보인다.

 

<예언자의 노래>에는 유럽을 강타한 시리아 난민 문제를 전면에 배치한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행동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 그리고 종교를 지닌 이들이 기존 사회에 적응하기란 난망하다. 유럽에서 부흥하는 극우 전체주의세력들은 자국 내에서 소수인 난민들을 적으로 삼아 자신들의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 그리고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정치적 목소리를 얻는데 일부 성공하는 현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 독일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AfD2당의 위치에 오른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가상현실이긴 하지만, 내전 중인 아일랜드는 비극적 디스토피아의 재현이다.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고한 아이들을 징집해서 부족한 병력을 채워 공안부대로 사용한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변수가 아닌 상수다. 직장에서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은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해고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직은 곧 절대빈곤으로의 추락을 의미한다. 아일리시 역시 20년 동안 정규직으로 일한 박사 학위 보유자였지만, 마트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빌런들에게 이런 위기 상황은 돈벌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된다. 검문을 통과하는 비용을 사람들에게 매기고, 또 국경을 넘을 수 있다고 꼬드겨서 막대한 돈을 갈취한다.

 

더 이상 고향에 살 수 없게 된 아일리시는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결국 월경을 선택한다. 그 과정은 순탄할까? 물론 절대 아니다. 악랄한 포식자들은 곳곳에서 아일리시 가족들을 위협한다. 어쩌면 이런 보통의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우리들도 난민이라는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 닥칠 수도 있는 그런 위험이다. 자기 혼자라면 어떻게라도 해보겠지만, 자신이 돌봐야 하는 어린 식솔들이 있다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런 위기 속에서 가장의 부재는 환상인지 모를 래리의 등장으로 독자를 착각에 빠뜨리게 만든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아일리시의 처지에 나를 대입해 보게 된다.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일상을 다 버리고, 과감하게 식솔들을 데리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타국에서의 삶에 자신의 운명을 내던질 수 있었을까? 긴박한 결정이 필요한 순간마다, 나의 결정이 어떤 후과를 초래하게 될지에 대해 신속한 판단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러기에는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위기의 순간들이 너무 급박하게 전개된다. 아일리시에 판단에 대해 누가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아일리시의 어린 자녀들인 베일리와 몰리 들은 처음에는 어린 아이였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위기의 파고들을 넘으면서 원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어른으로 변신해 간다. 진짜 아기인 벤은 이런 위기들의 트라우마가 각인될 거라고 저자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한다. 매우 공감이 가는 서사의 빌드업이라고 생각한다.

 

20253월에 만난 폴 린치의 <예언자의 노래>는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수작이었다. 나는 왜 이 책을 무려 4개월이나 묵혀서 읽었는지 모르겠다. 모름지기 책과의 만남은 이런 타이밍이 있나 보다. 만족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5-03-16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이밍! 맞네요.
얼마전 이러다 내전 ? 얘기가 나올때도 이 책이 떠올랐어요.
너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레삭매냐 2025-03-16 14:37   좋아요 1 | URL
그렇죠 현 시국와 맞물려서
아주 긴박하게 읽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쉬르리얼리스틱하다
는 느낌에 얼얼하네요.
댓글저장
 
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주말, 숨동지의 추천으로 다음 달궁 책으로 정해진 책이 바로 유디트 헤르만의 <레티파크>였다. 모두 17개의 소설집이 담겨 있지. 작년 가을에 읽기를 시도하다가 실패한 책. 물론 읽다만 부분들은 기억이 휘발해 버렸다. 유디트 헤르만의 짧은 소설들은 뭐랄까 밍밍한 맛의 평냉을 먹는 그런 느낌이랄까. 강렬한 한 방이 없다. 그냥, 그렇게 모든 이야기들이 지속하다가 그대로 흘러가 버리는 느낌이다.

 

문득 작가는 누굴 위해서 글을 쓰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참 그전에 나는 유디트 헤르만의 팬이던가? 작가의 책들을 계속해서 읽어 오지 않았던가. 예전에 읽었던 내용들과 유추를 시도해 보지만 휘발해 기억 속에서 난망할 따름이다. 1998년에 시작된 작가 경력이 사반세기가 넘는다는 50대 작가는 이제 더 이상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쓰고 싶은 그런 글을 쓰는가 싶다.

 

어차피 달궁 모임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사실 고도의 집중력(?)을 동원해서 <레티파크>를 만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무언가 이야기할 만한 꺼리들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그건 아니지 싶다. 리뷰에 무언가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억지로 이야기를 픽업할 필요가 있냐면 역시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흘러가 버리면 그런 대로 나는 책을 읽는다.

 

어느 이야기에 나오는 낸터켓에는 미처 가보지 못했다. 대신 그 부근의 마사스 비니어드에는 가봤지. 그 해 여름은 정말 인생 최고의 여름으로 기억될 것 같다. 한무리의 지인들과 배를 타고 들어가서 조금은 낯선 환경에서 보고 느끼는 것들, 배를 놓칠까봐 부리나케 선착장으로 향하던 일들이 기억난다. 그곳에서 보낸 여름의 시간들은 무더웠지만, 기억은 찬란하게 남았다.

 

그 다음에는 같이 살던 친구의 귀국 즈음해서 갔던 케이프코드의 끝자락 게이들의 천국이라는 프로빈스타운의 추억도. 추운 겨울날이라, 게이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지. 그리고 보니 남자 둘이 겨울바다를 찾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우릴 게이로 봤을 수도 있겠구나. 알록달록한 사탕이 가득했던 캔디샵에서 사탕을 샀던가. 곳곳에 그려진 인어 그림이 기억에 남는다. 유디트 헤르만이 구사하는 종잡을 수 없는 서사에서 그런 다양한 기억들이 소환되었다.

 

JFK 생가에 들렀다가 만난 하이애니스에서 오신 노래 클럽 소속의 아줌마들이 찍어준 사진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사진을 인화해서 편지에 담아 보내주시기까지 했지. 그게 벌써 지난 천년의 기억이로구나.

 

내 생각에 아마 유디트 헤르만 작가 역시 나처럼 그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엮어내지 않았나 싶다.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어느 독일 부부는 러시아로 가서 알렉세이라는 이름의 입양 후보 어린이를 만난다. 당연히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부부를 알렉세이는 피한다. 하지만 운명은 독일 부부와 알렉세이를 연결해 주었고 결국 부부는 알렉세이를 독일로 데리고 올 결심을 한다. 그리고 알렉세이는 독일식으로 이름을 바꾸었던가. 독일에 온 러시아 어린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독일인으로 바꾸고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물론 후속 이야기는 없다. 나머지는 오롯하게 독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오데사에 가서 숙소 호객을 당한 두 여성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특히 어둑어둑한 저녁 시간이라면 더더욱. 길도 모르지, 온통 낯선 곳 투성이인데 어찌 하룻밤을 지낼 숙소를 정한단 말인가. 그리고 베를린에 갔을 때 숙소를 정하지 못해 중앙역 서비스 센터에서 2유로인가를 내고, 도움을 받은 기억이 난다. 지리를 몰라서 숙소를 찾아가는데 좀 버거웠다. 숙소는 도미토리였는데 독일 친구들을 다들 일찍 자는지, 불을 끄고 다들 드러누워 있어서 씻고 등을 누이기까지 바짝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자못 무서워 보이는 아주머니들과 가격 흥정을 하고, 그녀를 따라 나서지만 결국 숙소에 머무르지 않고 나오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돈을 내지 않은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둘이서 하는 여행의 장점도 있지만 그냥 하룻밤 잠만 되면 되는 게 아닌 친구의 의견도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오래전에는 나홀로 여행을 선호했었다. 아무런 제약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런 여행길의 매력이란. 지금도 가끔 그런 나홀로 여행을 꿈꾼다.

 

유리 가가린 카페에서 굽타 박사와의 정신분석 상담 이야기도 있구나. 외로운 현대인들은 그냥 박사가 아니더라도, 그냥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냥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소소한 수다를 할 수 있는 친구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사실 중요한 이야기들을 상담한다고 해도, 결국 최종 판단의 주체는 자신이 아니던가. 이렇게 다양한 층위의 부유하는 이야기들이 담긴 <레티파크>란 소설을 읽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도무지 작가의 의도를 읽지 못해 헤매는 것도 오롯하게 내 선택이라는 거지.

 

어쨌든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쓰고, 독자는 그 중에서 자신에게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골라 읽는다. 물론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고. 마치 오늘 아침에 자욱한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그런 경험을 할 때도 있고 말이지. 내가 읽은 <레티파크>는 그랬다고.

 

<뱀다리> 예전부터 궁금해 하던 이반 곤차로프라는 작가의 이름을 보니 반가웠다. 그의 작품인 <오믈로모프>가 출간되어 있더군. 미리 사둔 이반 부닌도 마찬가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를 희망도서로 신청해 두었는데, 이달에는 만나볼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나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흐메트 알탄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책에는 진입장벽이 있다. 터키 출신 작가 아흐메트 알탄의 <나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16715일에 발생한 쿠데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책은 실패한 쿠데타 이후 두 달 뒤에 체포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아흐메트 알탄이 교도소에서 쓴 옥중수기다.

 

2016715, 일단의 터키 장성들은 이슬람주의로 회귀를 도모하는 미래의 독재자 에르도안의 통치에 반발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6시간 만에 에르도안의 신속한 대응으로 쿠데타가 제압되면서, 피의 숙청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우리의 주인공 아흐메트 알탄에게까지 몰아 닥쳤다.

 

경찰이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올 것을 대비해서 모종의 준비(?)를 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소설 <시대의 소음>에 등장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고 사십오 년 전 작가와 형제 메흐메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알탄 형제 역시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히는 영어의 몸이 되었다.

 

그 뒤에 벌어지는 투옥과 심문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사법당국이 내세운 죄목과 그에 대한 증거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흐메트 알탄이 쓴 몇 개의 칼럼과 방송 출연을 증거로 68세의 노작가에게 국가노반역죄라는 무시무시한 죄목과 함께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했으니 말이다. 시간적으로 나중에 언급되는 사건들을 미리 말해 버렸네.

 

솔직히 인신구속이 되어 보지 않아서, 전적으로 작가의 심리 상태에 공감할 수 없을 것 같다. 현대판 술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에르도안은 실패한 쿠데타를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현대판 술탄은 자신에게 불리한 일체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독재자들의 특징이 바로 그런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라는 걸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동시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출신 지식인의 비판이 그만큼 무섭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이 불안할 때 담배를 피운다고 말한다. 투옥되고 나서도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동안 자신이 접하고 익힌 문학의 힘으로 그는 어쩌면 정신줄을 놓고 미쳐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상태를 이겨낸다. 아니, 지난 주말 독서모임에서 토론했던 문학이 결국 육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그런 결론과 이렇게 맞닿게 된다는 설정인가. 좁은 공간에 갇혀, 생전 처음부터 보는 이들과 강제로 지내야 하는 공포와 두려움을 작가는 문학적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이겨낸다. 대단한 정신력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문득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아흐메트 알탄의 경우처럼 그렇게 문학적 상상력과 사유의 힘으로 현실에 닥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분주한 일상 가운데 시간에 쫓겨 살지만, 막상 작가처럼 막대한 시간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할 일이 없다는 게 심각한 문제로 다가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를 때 작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시간을 발견해내지 않았던가.

 

한 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을 했던 친구가 법정에서 판사는 가히 신에 버금가는 존재라는 말을 한 기억이 이 책을 읽는 도중에 떠올랐다. 아흐메트 알탄의 종신형 선고와 가석방 그리고 재투옥의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희망과 절망의 교차로를 수없이 넘나든다. 그 와중에서도 그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건, 유년 시절 이래 그와 함께 한 문학의 힘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예상대로 책의 후반에 가서는 19세기의 위대한 작가들에 대한 작가의 옥중 분석과 조우하게 된다. 그가 어렵게 교도소 도서관에서 소원 수리의 방식으로 처음 얻게 된 책이 바로 레프 톨스토이의 <카자크 사람들>이었다. 이 위대한 작가는 사람들의 삶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재구성해서 인간 본성의 비밀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그 다음 세기 작가들은 더 쉬운 방식의 관념에 집중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인간 본성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보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도대체 교도소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의 사유와 고뇌가 이런 분석을 가능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많은 양식 있는 터키의 지식인들이 금세기 첫 제노사이드로 알려진 터키의 1915년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침묵하지만, 아흐메트 알탄은 조국 터키에서 금기시되는 이 주제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국가적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아흐메트 알탄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불과 얼마 전 우리도 비슷한 사태를 경험할 뻔한 위기를 겪어서 그런지, 아흐메트 알탄의 체포와 투옥 그리고 수감생활에 대한 기록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더 몰입해서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꽤나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국내에 소개된 책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터키의 밀란 쿤데라라는 별명으로, 연애 소설 전문가라고 하는데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는 <위험한 동화>를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