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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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숨동지의 추천으로 다음 달궁 책으로 정해진 책이 바로 유디트 헤르만의 <레티파크>였다. 모두 17개의 소설집이 담겨 있지. 작년 가을에 읽기를 시도하다가 실패한 책. 물론 읽다만 부분들은 기억이 휘발해 버렸다. 유디트 헤르만의 짧은 소설들은 뭐랄까 밍밍한 맛의 평냉을 먹는 그런 느낌이랄까. 강렬한 한 방이 없다. 그냥, 그렇게 모든 이야기들이 지속하다가 그대로 흘러가 버리는 느낌이다.

 

문득 작가는 누굴 위해서 글을 쓰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참 그전에 나는 유디트 헤르만의 팬이던가? 작가의 책들을 계속해서 읽어 오지 않았던가. 예전에 읽었던 내용들과 유추를 시도해 보지만 휘발해 기억 속에서 난망할 따름이다. 1998년에 시작된 작가 경력이 사반세기가 넘는다는 50대 작가는 이제 더 이상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쓰고 싶은 그런 글을 쓰는가 싶다.

 

어차피 달궁 모임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사실 고도의 집중력(?)을 동원해서 <레티파크>를 만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무언가 이야기할 만한 꺼리들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그건 아니지 싶다. 리뷰에 무언가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억지로 이야기를 픽업할 필요가 있냐면 역시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흘러가 버리면 그런 대로 나는 책을 읽는다.

 

어느 이야기에 나오는 낸터켓에는 미처 가보지 못했다. 대신 그 부근의 마사스 비니어드에는 가봤지. 그 해 여름은 정말 인생 최고의 여름으로 기억될 것 같다. 한무리의 지인들과 배를 타고 들어가서 조금은 낯선 환경에서 보고 느끼는 것들, 배를 놓칠까봐 부리나케 선착장으로 향하던 일들이 기억난다. 그곳에서 보낸 여름의 시간들은 무더웠지만, 기억은 찬란하게 남았다.

 

그 다음에는 같이 살던 친구의 귀국 즈음해서 갔던 케이프코드의 끝자락 게이들의 천국이라는 프로빈스타운의 추억도. 추운 겨울날이라, 게이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지. 그리고 보니 남자 둘이 겨울바다를 찾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우릴 게이로 봤을 수도 있겠구나. 알록달록한 사탕이 가득했던 캔디샵에서 사탕을 샀던가. 곳곳에 그려진 인어 그림이 기억에 남는다. 유디트 헤르만이 구사하는 종잡을 수 없는 서사에서 그런 다양한 기억들이 소환되었다.

 

JFK 생가에 들렀다가 만난 하이애니스에서 오신 노래 클럽 소속의 아줌마들이 찍어준 사진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사진을 인화해서 편지에 담아 보내주시기까지 했지. 그게 벌써 지난 천년의 기억이로구나.

 

내 생각에 아마 유디트 헤르만 작가 역시 나처럼 그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엮어내지 않았나 싶다.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어느 독일 부부는 러시아로 가서 알렉세이라는 이름의 입양 후보 어린이를 만난다. 당연히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부부를 알렉세이는 피한다. 하지만 운명은 독일 부부와 알렉세이를 연결해 주었고 결국 부부는 알렉세이를 독일로 데리고 올 결심을 한다. 그리고 알렉세이는 독일식으로 이름을 바꾸었던가. 독일에 온 러시아 어린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독일인으로 바꾸고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물론 후속 이야기는 없다. 나머지는 오롯하게 독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오데사에 가서 숙소 호객을 당한 두 여성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특히 어둑어둑한 저녁 시간이라면 더더욱. 길도 모르지, 온통 낯선 곳 투성이인데 어찌 하룻밤을 지낼 숙소를 정한단 말인가. 그리고 베를린에 갔을 때 숙소를 정하지 못해 중앙역 서비스 센터에서 2유로인가를 내고, 도움을 받은 기억이 난다. 지리를 몰라서 숙소를 찾아가는데 좀 버거웠다. 숙소는 도미토리였는데 독일 친구들을 다들 일찍 자는지, 불을 끄고 다들 드러누워 있어서 씻고 등을 누이기까지 바짝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자못 무서워 보이는 아주머니들과 가격 흥정을 하고, 그녀를 따라 나서지만 결국 숙소에 머무르지 않고 나오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돈을 내지 않은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둘이서 하는 여행의 장점도 있지만 그냥 하룻밤 잠만 되면 되는 게 아닌 친구의 의견도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오래전에는 나홀로 여행을 선호했었다. 아무런 제약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런 여행길의 매력이란. 지금도 가끔 그런 나홀로 여행을 꿈꾼다.

 

유리 가가린 카페에서 굽타 박사와의 정신분석 상담 이야기도 있구나. 외로운 현대인들은 그냥 박사가 아니더라도, 그냥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냥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소소한 수다를 할 수 있는 친구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사실 중요한 이야기들을 상담한다고 해도, 결국 최종 판단의 주체는 자신이 아니던가. 이렇게 다양한 층위의 부유하는 이야기들이 담긴 <레티파크>란 소설을 읽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도무지 작가의 의도를 읽지 못해 헤매는 것도 오롯하게 내 선택이라는 거지.

 

어쨌든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쓰고, 독자는 그 중에서 자신에게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골라 읽는다. 물론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고. 마치 오늘 아침에 자욱한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그런 경험을 할 때도 있고 말이지. 내가 읽은 <레티파크>는 그랬다고.

 

<뱀다리> 예전부터 궁금해 하던 이반 곤차로프라는 작가의 이름을 보니 반가웠다. 그의 작품인 <오믈로모프>가 출간되어 있더군. 미리 사둔 이반 부닌도 마찬가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를 희망도서로 신청해 두었는데, 이달에는 만나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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