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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부동명왕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9월
평점 :
간만에 미미 여사의 책을 읽었다. 한 때 미미 여사가 구사하는 에도 시대물에 빠져서, 사방팔방으로 뛰어 다니면서 일단 중고책방에서 작가의 책을 구하던 시절 생각이 났다. 그리고 잠시 멀리했었다. 우리 책쟁이들의 세계가 그러하지 아니한가.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가 또 잠시 시들했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는. 내게는 미미 여사의 시대물이 그러하다.
일본 시대물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19세기 에도를 중심으로 해서 펼쳐지는 진기한 괴담 이야기가 매혹적이다 못해 유혹적이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에도 미시마야라는 주머니 가게에는 흑백의 방이라는 곳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자 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전에는 오치카라는 여성이 청자였는데, 시집가서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녀를 대신한 사람이 바로 미시마야의 작은 도련님인 도미지로다. 24살 정도의 청년으로 생과자를 좋아하는 먹보 미식가로 보인다.
정갈하게 차려진 도코모나 앞에서 조금 세상 경험이 없어 보이는 도미지로가 이야기꾼들이 펼쳐 보이는 세상의 기담에 귀를 기울인다. 이야기의 힘이란 그런 것인가? 재미나고 신기한 이야기가 있다면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그렇다면 그들은 현대 소설가들의 전신이 아니었을까. 문득 서사의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야기를 써서 돈까지 번다면 더욱 좋겠지.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을까? 소설에서는 우리의 도미지로가 그런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물론, 집안이 유복하여 힘들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르주아지 상인 집안의 청년이라는 점도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이다.
미미 여사의 <청과 부동명왕>에는 모두 네 개의 인스톨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멧돼지를 닮은 우린보 님을 메고 와서 출산이 임박한 오치카의 순산을 기원하는 기담으로 출발한다. 동천암이라는 곳에 소외받은 여성들을 위해 일종의 구호소를 차린 오나쓰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오나쓰 역시 어머니와 자기 형제들을 돌봐주던 이모를 잃고 불화를 빚던 아버지 곁을 떠나 독립한 에도 시대에서 볼 수 없는 그런 의지결연한 여성의 전형이다.
마을에서 품삯을 받고 허드렛일로 돈을 벌고, 쇠락해 가는 암자 부근의 땅에 콩을 심어 보지만 쇠 기운 때문에 작물이 자라지 못한다. 진부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행상 로쿠스케가 밭에 청과를 심어, 쇠 기운을 빼내라는 조언을 해준다. 그리고 부유한 집안에서 내쳐진 오사요가 동천암에 합류하고, 미미 여사는 그야말로 19세기 판 여성 연대의 저력을 보여준다.
오치카가 산기를 느끼면서, 미시마야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출산은 여성들의 전투라는 말과 함께, 도미지로도 비록 꿈에서나마 우린보님을 닮은 청과들을 수확하면서 전설에 나오는 악당 지네와 한 판 대결을 벌인다. 그리고 나중에 오치카가 매화꽃을 닮은 어여쁜 고우메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두 번째 인스톨인 <단단 인형>에서는 번주를 섬기는 다이칸이 번주 휘하의 백성들을 위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추구하면 어떤 비극이 벌어지게 되는지에 대한 하나의 고찰로 다가온다. 아무리 에도 시대가 태평성대라고 하지만, 무사 계급을 필두로 한 고착화된 계급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에 대한 미미 여사식 비판이라고나 할까.
참 흑백의 방의 규칙 중의 하나는 화자가 굳이 실제 지명이나 인명을 말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에 대한 익명성에 대한 보장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야기를 한 사람도, 이야기를 들은 청자도 모두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는 잊는 것이 대원칙이다. 물론 이 모든 걸 바로 옆에서 그야말로 녹취하듯이 기록한 미미 여사에게는 예외이긴 하지만 말이다. 구전 설화의 경우에서처럼, 터무니없어 보이는 전승도 하나의 이야기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기록에 남길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상인이었던 자신의 현조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도미지로와 비슷한 또래의 몬자에몬은 가감 없이 들려준다. 선량한 다이칸이 영지를 다스릴 적에는 문제가 없지만, 악당 같은 다이칸이 백성들을 수탈하기 시작한다면 힘없는 백성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장류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이사와야에서 일하던 몬이치/이치몬은 사부 격에 해당하는 유지(유 씨)를 따라 미쿠라무라 마을로 향한다. 기존의 사람 좋은 다이칸 대신 도아쿠 단조라는 악인이 다이칸의 자리에 오르면서 전국에서 유명한 된장을 만들고, 인형 두레를 하던 미쿠라무라 마을에 비극이 시작되었다. 압정과 수탈을 위해, 기존 거래처인 이사와야와의 거래를 끊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마을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기 시작했다.
동행했던 유지마저, 무사들의 창에 살해당하고 몬이치는 길잡이 도비자루와 목숨을 건 탈출을 시작한다. 결국 도아쿠 단조의 악행에 세상에 알려져 그는 다이칸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미쿠라무라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고 죽은 유지를 사모하던 절세미인 오빈은 몬이치에게 답례로 흙 인형, 단단 인형을 하나 만들어서 선물해 준다.
3촌 정도 되는 크기의 자그마한 단단 인형은 일찍이 몬이치가 삼엄하게 포위된 미쿠라무라 마을을 탈출하면서 네 번이나 간이 녹아 내릴 뻔한 위기를 감안해서, 몬이치 가문을 네 번의 위기에서 구해줄 거라는 예언이 전해졌다. 그 예언을 이루고 단단 인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게 큰 줄거리다. 마지막으로 단단 인형의 활약으로 몬이치 가문을 구할 적에는 마치 한 편의 닌자 드라마를 보는 듯한 쾌감이 들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짧지만 강렬했던 세 번째 인스톨인 <자재의 붓>이 가장 인상 깊었다. 화공 에이쇼가 소유하게 된 “자재의 붓”이 모든 화의 근원이었다. 이 붓을 들게 된 화공들은 그야말로 영감에 넘쳐 걸작들을 잇달아 생산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창작이라는 짐을 평생 지고 가야 하는 아티스트들의 한계를 뛰어 넘게 만들어주는 마리화나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다만, 자재의 붓은 소유자에게 자신의 재능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를 제공하는 대신 반대급부로 상상 이상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게 문제였다.
에이쇼의 부인을 필두로 해서, 딸과 아들 며느리 그리고 자기 집안에서 일하는 이들이 변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친구의 도움으로 저주 받은 붓을 봉인하는데 성공하지만, 에이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붓을 봉인해서 맡긴 가게를 드나들기 시작한다. 결국 비극으로 끝나 버리는 이야기다. 전에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반 장 정도의 종이에 그림으로 그리던 도미지로는 충격을 먹게 된다. 한 때 자신 역시 화공을 꾸지 않았던가. 도락으로 취미면 되지, 화공을 직업으로 삼을 정도는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된 걸까. 뭐랄까 미미 여사는 안분자족하는 일상의 삶에 대해 만족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청과 부동명왕>의 대미는 <바늘비 내리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다. 직원들을 데리고 출타한 마시마야의 이헤에와 오타미를 대신해서 도미지로가 형님이자 마시마야의 후계자 이이치로가 가게 업무를 맡고, 도미지로는 지원에 나섰다가 정강이 부상을 입고 만다. 아직은 덤벙대는 도련님이라는 신호일까. 흑백의 방 수호격인 오카쓰는 2대 청자가 된 도미지모를 격려하고 응원한다.
부상당해 심심하기도 하던 차에, 유카타노구니 출신으로 심한 사투리를 쓰며 오른팔이 없는 사나이 몬지로가 등장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스스로를 “이것”이라 칭하는 몬지로는 버려진 아이였다. 그리고 종이가게 사환으로 일하다가 수양 소개상을 하는 센조에게 픽업되어 어린 나이에 하자마무라 마을로 떠나게 된다.
미쓰루기야마 산을 중심으로 한 첩첩산중에 자리잡은 하자마무라 마을은 야마와타리라는 산새 새끼의 알껍질과 깃털 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알껍질은 폐병에 특효인 치료제로 그리고 깃털은 훌륭한 방화복을 만드는 재료로 외진 하자마무라 마을의 보물 같은 존재다. 이 마을에 투입된 몬지로는 2살 어린 나나시와 ‘도다이’와 ‘소라’ 파트너가 되어 야마와타리 둥지에서 알껍질과 깃털을 채취하는 일을 시작한다.
<바늘비 내리는 마을> 역시 첫 번째 인스톨인 <청과 부동명왕>과 마찬가지로 에도 사회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소외된 아이들에 위한 구호소적인 성격인 지니고 있는 하자마무라 마을의 비밀을 풀어내준다. 다만 그 주체가 누군가라는 미스터리는 최후에 배치해 둔 채로 말이다.
근래 최악의 불경기로 예년 같은 추석 분위기가 나지 않지만, 간만에 다시 만난 미미 여사의 기담 시리즈는 여전히 흥미롭고 재밌었다. 태평성대로 알려진 에도 시대에도 보통 사람들을 옥죄는 사회 시스템과 계급제도의 부조리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래도 없는 사람들끼리의 연대와 상부상조로 그럭저럭 사람 살만한 그런 세상이었다고 미미 여사는 <청과 부동명왕>을 통해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런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