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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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시작한 <베네치아의 종소리>가 추월해 버렸다.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인가 싶었었는데, 스가 아쓰코 여사의 이탈리아-유럽 시절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성장기의 이야기들로 반전을 이루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볼 적에 아쓰코 여사는 일본의 전형적인 부르주아지 가정의 수혜자가 아닌가 싶다. 책의 곳곳에서 자신은 전후 가난한 유학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전후에 그렇게 유럽 특히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곳에 갈 수 있다는 자체가 아무에게나 허용된 일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로마 시절, 한국에서 온 김 씨는 결국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쓰코 여사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갔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만난 카티아라는 독일 친구는 어쩌면 아쓰코 여사의 인생행로를 이탈리아로 인도한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보니 그녀가 프랑스 시절 소르본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노동사제가 주관하는 미사에도 참가하고 또 당시 프랑스를 휩쓸던 분위기에 편승해서 샤르트르 순례도 나섰다는 체험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그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아카데믹한 언어 말고, 실제 생활에서 원어민을 따라 가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쓰코 여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정말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있던 아쓰코 여사가 이탈리아에서 장학금을 준다는 유혹에 넘어가 관심도 없는 사회학 전공을 조건으로 이탈리아로 갔다고 했던다. 멀쩡한 방송국 일 대신, 다시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 아니었을텐데 말이지. 아무리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29세의 적지 않은 또 새로운 환경과 나라 그리고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인생은 결국 자신이 책임지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바람난 꼰대 아버지가 뭐라고 하더라도, 아쓰코 여사는 자신만의 삶을 꿋꿋하게 살지 않았던가. 미션스쿨에서 엄격한 수녀님들과 함께 야구를 즐기기도 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에 계속해서 도전하는 모습은 결국 그녀를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고 또 그 다음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밀라노에서 페피노를 만나 결혼도 하지 않았던가.

 

사실 전작들인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등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든 생각이 과연 페피노는 어떻게 죽었는가 그리고 그의 병명은 무엇인가 등등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슬픈 과거를 꽁꽁 사매고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아주 약간의 단서만 남길 뿐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은 하지 않는다. <베네치아의 종소리>에서 늑막염으로 고생하던 남편이 석달 뒤에 죽었다라는 실마리로 그녀의 고통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추론해 볼 뿐이다.

 

전쟁 중에 큰이모집에 피난 가 있던 시절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사람 좋은 그 집의 장남 긴이치 사촌오빠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필리핀 전선에 파견되었다가 병사했다고 했던가. 시집간 나오 언니와 같이 친정에 와 있던 어린 카즈가 병으로 죽는 과정도 슬펐다. 전시에 근로봉사대로 동원되어 공장에 가서 강제 노동을 했다는 체험도 아쓰코 여사는 들려준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보다 더 한 일도 겪지 않았던가.

 

작가가 구사하는 어떤 죽음의 이미지(남편 페피노의 사망으로 귀결되는)<아스포델 들판을 지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페피노의 큰형과 누이가 결핵으로 돌아 가셨고, 철도원이었던 시아버지마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들의 이런 변고를 목격한 페피노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래도 이방인 아쓰코 여사와 결혼해서 건강을 되찾아 가나 싶었지만, 그 역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향에서 남편을 잃은 그녀에게 인연들은 기꺼이 손을 내주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 그런 인연들은 삶 속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우리네 삶은 그런 것이다.

 

코르시아 서점이 1960년 말, 서점의 정체성을 두고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그리고 이방인인 자신은 중립을 지키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노라고. 그 이면에는 이방인이라는 방패 뒤에 숨고 싶은 그런 마음이 엿보였다. 그전에는 나치 독일이 지배했던 나라의 언어인 독일어를 배우는 게 좀 꺼려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렇다면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 전쟁에 대해 독일처럼 처절한 반성을 했었나?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왜 이렇게 일본 지식인들은 과거사에 대해 인색한지 모르겠다.

 

비슷한 경험으로는 2007년 봄, 잘츠부르크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게스트하우스 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다 만난 일본 친구에게 여행에 목적에 대해 물으니 자기가 정한 '평화 순례'라고 하면서 아우슈비츠 등지를 여행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유럽도 좋지만, 자국이 직접 연관된 필리핀의 마닐라나 731부대가 주둔했던 하얼빈 혹은 바탄 반도를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언어 구사의 부족과 첨예한 이야기로 저녁 식사 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아 패스했던 기억이 난다.

 

19366개월 여정으로 유럽 대륙을 누빈 저자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베네치아의 종소리>는 마무리된다. 가장 가까운 혈육에 대한 애증의 관계라고나 할까. 바람난 아버지는 가족들을 저버리고, 바깥으로만 돌았다. 그런 가운데 자신과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을 홀로 키우는 작고하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심정과 아버지가 재력으로 베푼 일그러진 사랑이 빚어내는 양가적 감정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9월 들어 매일 같이 한 권씩 책을 읽고 있다. 이제 한계에 도달했나.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마구 책을 씹어 먹듯이 읽고 있는 건가.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은 쉬엄쉬엄 읽어야지 싶다. 뭐 또 읽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 나 스스로에게 추석을 맞아 선물한 미미 여사의 신간 <청과 부동명왕>이 도착했다고 한다. 주말에는 미미 여사를 영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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