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성의 사내 필립 K. 딕 걸작선 4
필립 K. 딕 지음, 남명성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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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름이 물러서지 않은 가을이지만, 어쨌든 나의 독서열을 마구 타오른다. 어제 도서관에 상호대차로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내>를 신청했는데 거의 바로 도착했고 빌려서 이틀 만에 완주했다. 그만큼 재밌다는 말이겠지.

 

오래 전 대체역사를 다룬 로버트 해리스의 <당신들의 조국> 영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구했는데, 그 책은 미처 읽지 못했다.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내>는 우연한 기회에 너튜브로 드라마 시리즈 요약본을 보고서 책이 너무 궁금해졌다. 결국 어제 빌려서 보기 시작했는데, 드라마와 원작 소설은 큰 틀만 유사하고, 큰 간격이 존재했다. 드라마 버전이 좀 더 큰 스케일로 진행되고, 소설은 뭐랄까 좀 더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집중했다고 할까.

 

<높은 성의 사내>1962년 미국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1945430일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죽지 않았다. 죽기는커녕 연합군을 쓸어버리고 미국의 동부까지 점령해 버렸다. 러시아에서는 슬라브족을 우랄산맥 저편으로 쫓아냈다. 나치 독일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독일의 파트너였던 일본은 미국의 서부 해안지역을 점령해해서 태평양연안공영권을 지난 15년 동안 운영해왔다.

 

그렇다면 미국에 살던 백인 원주민들은? 1947년 치욕스러운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일본 지배계급에 복종하는 2등 신민의 지위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서부와 동부 중앙에는 로키산맥연방이라는 완충지대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 사는 상황과 너무 다른 그런 이질적 세계에 대한 스케치가 이어진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아마존 프라임 드라마와 같은 점이나 다른 점을 찾게 되는 부작용을 경험했다. 드라마가 독일과 일본이 패망하고 미국-영국-러시아 연합군이 승리한다는 2차 세계대전의 진실을 밝힌 필름을 추적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소설은 미국 내의 레지스탕스 운동보다 1947년 종전 이래, 타국의 지배를 받고 순응하면서 사는 미국인들의 삶에 방점을 찍은 느낌이다.

 

일본이 지배하는 서부연방의 수도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골동품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골동품상 로버트 칠던, 일본 무역대표부의 다고미 노부스케, 전쟁에 참전한 퇴역 군인 프랭크 프링크 그리고 그의 아내 줄리아나 등이 엮어 나간다.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의 주인공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FDR(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암살당해 죽고, 아프리카의 롬멜이 영국군을 카이로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주코포의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결국 미국과 영국을 항복시킨다는 그런 가상의 설정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1962년 기술의 독일 제3제국은 달은 물론이고 화성과 금성까지 식민지로 만들 정도의 우주 공학이 발전되어 있지만 텔레비전 기술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군정장관으로 미국에 부임한 롬멜은 1949년에 대사면령을 내려 유대인들까지 동원해서 재건 사업에 몰두한다. 서부연방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일본 제국은 독일 나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정한 방식으로 미국인들을 대했다고, 로버트 칠던은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적 자존심까지 내려 놓은 건 아니었다. 지배계급의 젊은 인텔리인 폴과 베티 가소우라 부부에게 묘한 질시의 감정과 동시에, 매력적인 폴의 아내 베티를 유혹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들... 그리고 진품이 아닌 가품으로 드러난 자신의 판매 물품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리뷰를 쓰다 보니,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보다 이렇게 단선적인 생각들만 쓰게 되는 기분이다. 게다가 2대 총통 마르틴 보르만이 죽으면서, 독일에서는 총통 후계 자리를 두고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요세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 그리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같이 한 시대를 풍미한 나치 악당들의 이름이 열거된다. 베를린의 템펠호프 공항에서 도미한 스웨덴 기업가 행세를 하는 바이네스(루돌프 베게너 대위)가 추진하는 이른바 <민들레 작전>도 엉성한 느낌이다. 결국 세계 정복을 위해 독일과 일본이 한 판 붙는다는 거지.

 

무엇보다 일본인 다고미야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인 프랭크가 주역에 심취해서 허구헌날 산가지로 일상의 점괘를 치는 설정은 웃겼다. 과연 서양 사람들이 도()와 오(:깨달음)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프랭크와 에드가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 만든 은세공품에 그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폴 가소우라의 모습에 어쩌면 그런 역설적인 의미로 풍자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드라마에서 필름을 찾는 데 비중을 두었다면, 소설에서는 독일이 지배하는 영내에서는 금지된 호손 아벤젠의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소설 속의 소설이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이 또한 흥미로운 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조 치나델라와 함께 호손 아벤젠 수배에 나선 프랭크의 전처 줄리아나가 전화번호부에서 쉽게 찾아낼 정도가 아닌가. 그렇다면 오토 스코르체니가 이끄는 독일 특수부대들이 습격해서 눈엣가시 같은 아벤젠을 없애 버리는 건 시간문제가 아니었을까.

 

<높은 성의 사내>를 읽고 나서 되는 대로 적다 보니, 감상이 파편화되고 그만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무려 62년 전, 작품이다 보니 소설의 구조나 전개 면에서 치밀하지 못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동시에 나치 독일과 일본의 전쟁 승리라는 강렬한 이미지 덕분에 오롯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들에 집중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좀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뱀다리] 그래도 책의 어디에선가 만난 너새네이럴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는 한 번 찾아서 읽어봐야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못 말리는구나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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