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인의 사무라이 - 완역 가나데혼 주신구라 일본명작총서 1
다케다 이즈모.미요시 쇼라쿠.나미키 센류 지음, 최관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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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너튜브는 온갖 정보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예전에 블로그가 한 일들을, 더 편하고 간단하게 너튜브가 전달한다. 사무라이 영화을 검색하다 보니, 알고리즘이 나를 기무다쿠가 연기한 <주신구라>로 연결해 주었다. 대강의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좀 더 알고 싶은 생각에 이 주제를 다룬 책을 찾다가 만나게 된 것이 다케다 이즈모의 <47인의 사무라이>였다.

 

우선 연극 상연을 위해 만들어진 인형극의 각본인 만큼 상당히 극적인 요소들이 많이 첨가되어 있다. 배경은 1701년 일왕의 칙사 대접을 맡은 아코번의 다이묘 아사노 나가노리가 의전 담당 고케 출신의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부림을 한 사건에서 유래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아코번의 영주 아사노는 할복을 명령받았고, 영지는 몰수되었으며 가신단은 해산되었다. 사건 초반, 아코 번사들의 격렬한 저항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가신단은 막부의 조치를 순순히 받아 들였다. 하지만, 가로이자 아코 번사들의 수장이었던 오이시 구라노스케는 막부의 엄중한 감시망을 뚫고, 의사들을 규합해서 결국 주군의 원수인 기라 저택을 급습해서 복수에 성공했다. 복수가 끝난 뒤, 막부에 체포된 46인의 아코 번사들은 전원 할복을 명령받았다.

 

백년간의 치열한 센고쿠-모모야마 시대의 대전란을 수습한 도쿠가와 막부는 더 이상 천하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꿈 같았던 한 시절을 보낸 사무라이들은 다섯 번째 쇼군 시절인 겐로쿠 태평성대에 순치되고 있었다.

 

주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은 사무라이가 지배하던 시절이었지만,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전대의 쇼군들 같은 카리스마를 지니지 못했다. 사실 아코 사건 당시에도, 아사노 뿐 아니라 사건의 당사자인 기라에 대해서도 같은 처벌이 필요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아사노가 저지른 죄 역시 불경죄로 다스려, 근신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천하의 질서를 세운답시고 할복을 명령했다가 결국 주신구라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지 않았던가.

 

아코 번사들의 복수극이 발생하고 45년 뒤에 씌여진 인형극 대본인 <주신구라>는 이제 거의 전설이 되어 버렸다. 지금처럼 정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니, 사건에 연루된 번사들의 에피소드에 양념이 많이 추가된 것 같다. 가령 예를 들어, 기라를 처단하는 거사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구라노스케에 의해 주군 아사노의 영령에 두 번째 분향하는 영광을 안은 하야노 간페이의 경우를 살펴보자. 간페이의 아내가 된 오카루를 유곽에 팔아, 주군의 복수 자금으로 쓰려다가 비운에 간 장인 그리고 장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결국 자결한 간페이. 아코 번사들이 추구하는 복수극의 정당성을 위한 빌드업이 극한으로 확장된다.

 

아사노 가문이 망하고, 낭인 신세가 된 오보시의 아들 리키야와 혼례를 치르기 위해 그들을 찾은 고나미와 그녀의 어머니 도나세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거사를 앞둔 오이시 부부는 청상과부가 될 며느리가 불쌍해서 고나미를 며느리로 받아 들이길 거부하지만, 도나세와 고나미는 거의 막무가내였다. 여기서도 그놈의 석고의 많고 적음 타령을 하는 도나세의 전근대적 발상이 황당하긴 했지만, 이 이야기가 무려 276년 전에 쓰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다수 아코 번사들과 의견을 달리하고, 결국 기라 편에 서서 부역하게 되는 오노 부자의 비참한 죽음도 전형적 권선징악의 경우를 따른다. 아들놈은 오카루 아버지를 죽이고 강도질하다가, 멧돼지로 오인한 간페이에게 주살당한다. 아버지 역시 유라노스케의 기만술을 파악하고, 아코 번사들의 거사 계획을 간파하려고 하다가 결국 응징당한다. 인형극에서 이런 빌런들이 하나둘씩 무대에서 사라져 갈 때, 팬들의 환호성이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사카이에서 47인의 사무라이들의 거사를 위해 거사에 필요한 문자들을 아낌없이 지원한 죠닌 출신 아마가와야 기헤이의 에피소드도 엔딩을 위한 마지막 빌드업의 하나였다. 삼엄한 막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고용한 일꾼들도 트집을 잡아 모두 해고하고 습격에 필요한 사다리 같이 특수한 물품의 구매처를 숨기는 일을 기헤이는 도맡아서 처리했다. 사랑하는 아내 오소노와의 위장이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빌드업에 비해 마지막 장의 기라 저택 습격사건은 의외로 간단하게 기술된다. 가코가와 혼조가 제공한 기라 저택의 지도와 구라노스케의 치밀한 전략에 따라 아코 번사들은 순조롭게 저택에 침투해서 결국 기라를 사로잡아 죽이는데 성공했다. 기라 저택 부근의 인근 다이묘들 역시 2시간에 달하는 복수극이 펼쳐지는 걸 알면서도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는데 나서지 않고 방조했다. 막부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기라 구조에 나섰더라면 아마 주신구라 전설은 아예 생겨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에도 막부의 통치자들은 모든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자신들에게만 복종할 것을 원했다. 하지만, 일본식 막번 시스템의 구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막부에 대한 충성은 고위 관료들이나 대형 다이묘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각 지역의 번주와 그 휘하의 사무라이들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주군의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한 책임은, 아코의 모든 번사들이 나누어져야 하는 명예스러운 치욕이었다.

 

막부가 아무리 금령을 내려, 주신구라 전설의 회자를 막으려 하더라도 민간에서 아코의 사무라이들은 사사로운 복수에 나선 불한당 집단이 아닌 의사들로 간주되었다. 그런 이유로 <주신구라> 이야기가 계속해서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재창조(re-creation)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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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들 - 돈과 기름의 땅, 오일샌드에서 보낸 2년
케이트 비턴 지음, 김희진 옮김 / 김영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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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 작가 케이트 비턴의 <오리들>과 만났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수급을 신청했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지난 주말, 책이 도착했다고 해서 부리나케 가서 대출해서 바로 다 읽어 버렸다.

 

노바스코샤주 케이프브레턴 마부 출신 케이트 비턴은 가족과 다른 사촌들처럼 일자리를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나야했다. 이유는 시골마을에는 그녀가 필요한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자리 이주는 세대를 이어온 마을의 전통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렇게 떠난 이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케이트는 고향을 떠나면서 다시 돌아올 거라고 결심한다.

 

참 케이트가 왜 앨버타주로 떠났는지 말하지 않았네. 그건 바로 돈이 흘러 넘친다는 오일샌드 광산에 가서 돈을 벌기 위해서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학 다니면서 받은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서다. 문과대를 나와, 특별한 기술이 없는 케이트가 고향에서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돈이 흘러 넘치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가족들과 떨어져서 말이지.

 

그렇게 케이트가 찾아온 돈과 기름의 땅은 이십대 초반 여성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다. 고향과 멀리 떨어진 남초 사회에서 케이트는 모든 남성들이 가진 호기심의 객체로 간주된다. 한 마디로 말해 피곤하다는 말이다. 유부남부터 시작해서 자기와 엄청나게 나이가 차이 나는 이들도 모두 케이트에게 직접댄다. 자신의 언니 베키가 훨씬 예쁘다고 생각하는 케이트에게 이런 상황은 낯설고 불편하기만 하다.

 

어 그런데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서 읽지 않았나? 대략 1년 전에 읽다만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의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말이다.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거지만, 글쟁이들에게 이런 특이하고 낯선 경험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좋은 글감이 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아니 누가 평범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이 정도는 되야 그나마 타인의 시선을 사로 잡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케이트 역시 새출발을 시작한 싱크루드 등지에서 오로라를 보러 오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정작 자신도 그런 대자연으로부터 고달픈 노동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 받지 않았던가.

 

돈이 되는 오일샌드를 퍼올리는 험난한 노동현장에서 젠더에 따른 차별은 일상이라고 그녀는 몸으로 증언한다. 시간당 페이부터 시작해서, 좀 더 험한 일을 하고 노조에 속한 소위 짬바가 많은 이들이 당연히 많은 돈을 번다. 그렇게 번 돈을 흥청망청 쓰는 이들도 당연히 존재하고, 케이트처럼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도 등장한다.

 

그리고 비슷한 환경에서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일하기 위해 선커나 롱 레이크 같은 곳으로 점프하기도 한다. 학자금을 절반 정도 갚은 다음에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빅토리아로 가서 해양박물관 일을 하기도 한다. 자신을 따라, 언니 베키와 친구 린지도 왔던가. 그들과 함께 아픈 기억들을 공유하며 극복해 가는 과정도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친구와 가족이 필요한 거지.

 

오일샌드가 나는 곳이 야생 그 자체였다면, 빅토리아는 문명 정도로 볼 수가 있을까. 벌이는 시원치 않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생활, 뭐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옆지기가 예전에 빅토리아에 산 적이 있다고 해서 그래픽노블을 보면서 특히 빅토리아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다. 정말 그곳에 산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 그런 '인하버'와 호텔 등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 주더라. 실제 체험과 책을 통한 간접체험의 만남, 기가 막혔다.

 

사실 난 케이트 비턴 작가의 개인적 체험보다는 제목 <오리들>처럼 환경 문제가 전면에 나서지 않을까 싶었지만 무분별한 오일샌드 채취로 벌어지는 환경오염에 대한 문제 제기는 생각보다 적었다. 우리 지구별이 돈이 되는 에너지 자원 발굴 때문에 계속해서 앓고 있다는 전지구적 고민보다는, 젊은 여성이 고향을 떠나 오지의 시골마을에서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개인적 고민에 더 치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케이트는 남은 학자금 대출 유예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오일샌드 지역으로 돌아간다. 돈이 아니었다면, 저자는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암담한 시절의 경험을 그래픽 노블로 만들어서 성공을 거두고 작가가 되었다. 그녀의 커리어에서 오일샌드 시절을 뺀다면 어떻게 현실이 변하게 될지 궁금해졌다.

 

케이트 비턴의 글과 그림들을 보면서, 노동과 재화를 교환해서 벌어먹고 사는 나 같은 보통사람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대부분 현재의 벌이에 적당히 만족하고 살지만, 케이트 비턴이나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처럼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 달리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케이트는 오일샌드 지역에서 일하는 동안,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으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다. 누군가에게는 고된 노동의 시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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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1950 -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20세기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 세계의 전쟁 1
피터 데니스, 고든 L. 리트먼 지음, 김홍래 옮김, 한국국방안보포럼 감수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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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천 사람이다. 인천이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그래서 자유공원에도 많이 놀러 갔었다. 거기에는 무속 업계에서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미국 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 더글라스 맥아더. , 송도에는 인천상륙작전 기념관도 있지. 어려서 나에게 <아메리칸 시저>라는 별명의 맥아더는 대단한 영웅의 이미지를 안겨 주었다. 나중에 그가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플래닛미디어에서 세계의 전쟁 시리즈의 첫 번째로 나온 <인천 1950>은 한국전쟁에서 낙동강 전선에 내몰린 유엔군/한국군을 위기에서 구해낸 전설적 영웅 맥아더가 구상하고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인천상륙작전의 이모저모를 그린 책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요즘 다시 보기 시작한 역전다방 한국전쟁 편을 보면서였다. 이미 책은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었고, 중고서점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달려가서 샀다. 예전 같았으면 아예 살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지. 절판과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재조명 덕분이라고나 할까.

 

1950625, 38도선을 돌파하면서 전면 남침을 시작한 인민군은 단 3일 만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남침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한국군은, 소련에서 지원해준 T-34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의 파상공세를 막지 못하고 연전연패해서 결국 한반도의 동남부까지 밀려나 버렸다. 그나마 미국이 중심이 된 유엔군이 신속하게 파병결정을 내리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84개 사단을 주축으로 해서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 지원군이 속속 부산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나서, 본격적인 군축에 돌입했다. 그 결과, 한국전쟁 당시 신속하게 병력을 모아서 파견할 수가 없었다. 태평양전쟁에서 맹활약한 미해병 1사단 역시 완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여단 편성을 해서 한국전선에 파견하게 됐다. 이 책의 중심이 되는 인천상륙작전에 알몬드 장군의 10군단 소속으로 해병대에 이어 인천에 상륙한 미보병 7사단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일본 홋카이도에 주둔 중이었다.

 

책에 따르면 맥아더가 구상한 크로마이트 작전, 인천상륙작전의 핵심은 바로 미해병 1사단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간신히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 내고 있던 중에, 맥아더는 역발상으로 한반도의 허리에 위치한 부산에 이은 두 번째로 큰 항구도시이자 서울로 가는 관문인 인천에 10군단을 파견해서 상륙 부대를 서울로 진공시키고, 인민군의 후방을 차단한다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미 합동참모부에 제시했다.

 

크로마이트 작전이 입안되던 시기만 하더라도, 한국의 운명이 그야말로 백척간두의 위기였다. 미 합동참모부의 대안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대규모 상륙작전에 위험 부담이 큰 인천이 아닌 군산 상륙이었다고 했던가. 하지만 맥아더의 뚝심으로 크로마이트 작전은 미군 수뇌부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게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세 역전의 발판이 되었다.

 

전쟁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항공작전에 나선 미공군의 맹활약에 힘입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인민군 부대들은 전투에 반드시 필요한 탄약과 식량 그리고 의약품 같은 보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 두 달 간에 걸친 격전으로 그들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 인천에 미해병대가 상륙하는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이 인민군 부대들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1950915, 해군의 전폭적 지원 아래 비교적 순조롭게 월미도를 비롯한 인천 상륙 지점에 상륙한 미 해병연대 전투단들은 인천 주둔 인민군들을 소탕하면서 진격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상륙작전 초기, 미해병 1사단의 주요 전략 목표 중의 하나는 김포 비행장을 최대한 빨리 확보해서 수송기에 의한 보급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 초기부터 한반도의 제공권을 장악한 미 공군의 활약이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전투나 이후에 벌어지는 각종 전투들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작전 초기에 성공적으로 교두보 확보에 성공한 미 해병대와 이후에 상륙한 보병 7사단 그리고 한국 해병1연대가 초반 무력한 대응을 보여주었던 인민군의 견고해지는 방어전을 잇달아 격파하면서 전속력으로 서울 해방에 나섰다. 나에게는 익숙한 지명인 부평이 예전에 애스콤 시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10군단장 알몬드와 해병 1사단장인 올리버 스미스 사이에 있었던 갈등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알몬드가 정치적 이유로 한국전쟁 개전 3개월 전에 서울을 해방시키기 위해, 해병대를 무리하게 서울 시가전에 투입하려고 했다는 점은 전쟁의 다음 단계인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반복되는 갈등의 연장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맥아더의 전쟁 지휘자로서의 빛나는 영광은 모두가 반대했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탈환, 38선 돌파 그리고 평양 점령까지였다. 1950년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맥아더의 계획은 원래 방어에 나서려고 했던 30만 중공의용군이 한만 국경에서 미군과 대치하게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방어 대신 적극적 공세에 나서면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역전다방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한반도에서 가장 방어에 유리한 평양-원산선에서 진격을 멈추고, 패주 중인 북한이 고사하는 작전으로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이 공세에 나서 운산전투나 군우리전투 등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패퇴시키고 기세등등하여 결국 수도 서울을 다시 한 번 적에게 피탈당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가정이란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천 1950>은 아무래도 미국 저자의 시선에서 저술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인천상륙작전 당시 한국군의 전적이나 활약에 대해서는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주공을 미 해병대 소속 두 개 연대전투단이 담당했다는 역사적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니까. 디테일이 부족하지만, 한국전쟁의 극적 대반전을 이룬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개요를 다룬 보교재로서는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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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숲에서 - 바이칼에서 찾은 삶의 의미
실뱅 테송 지음, 비르질 뒤뢰이 그림, 박효은 옮김 / BH(balance harmony)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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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가에 대한 갈급함은 책읽는 이들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익숙한 작가의 이름도 좋지만, 또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인도할 모르는 작가와의 만남에 대해서도 나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아니 오히려 환영한다.

 

<노숙 인생>이라는 책으로 나는 실뱅 테송을 알게 됐다. 단편집인 <노숙 인생>을 읽다 말고, 그의 다른 책도 조금 읽었다. <눈표범>이라는 책도 재밌게 읽기 시작했는데 못다 읽고 결국 반납했다. <노숙 인생>도 마찬가지. 그래도 이 책을 쉽게 읽겠지 싶어 도전한 책이 바로 그래픽노블 <시베리아의 숲에서>란 책이다.

 

지구상에서 춥기로는 어디에 뒤지지 않는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에 6개월 정도 은둔하는 삶을 살겠다며 실뱅 테송은 도전장을 내밀었다. 문득 오래전, 일 년 중 어느 계절에 미디어 다이어트를 하신다는 교수님이 기억났다. 우리는 너무 미디어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내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반대로 중동에서 분 바람 덕분에 당장 출퇴근하는 차에 넣어야 하는 기름값이 오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난 다른 건 모르겠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중단하고 시베리아로 몇 개월씩 떠날 수 있다는 작가의 여유가 부러웠다.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일상에 묶여 도저히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수은주가 떨어지고, 여름이 되면 곰돌이들이 출몰하는 그런 곳이 이 기인 같아 보이는 작가에게는 낙원이었다니.

 

실뱅 테송이 시베리아에서 특별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번잡한 도시생활에서 읽지 못한 책들을 읽는다던가,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고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주변의 지인들을 찾아가 말동무를 하거나 그러는 것. 아니 어쩌면 그런 거야 말로 우리네 현대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없다면, 러시아의 기나긴 겨울을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오두막으로 떠나기 전에 다양한 물품들을 준비하긴 했지만, 역시 나같은 책쟁이에게는 작가가 나름 치밀하게 준비한 책궤짝에 대한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윙거의 일기, 사라진 70년대>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마 여기서 말하는 윙거는 내가 아는 바로 에른스트 윙거일까? 그의 책은 <강철 폭풍 속에서> 정도 읽은 게 전부인데, 전쟁일기도 있다고 하니 궁금해진다. 지금 찾아 보니 윙거 작가의 책들이 모두 절판되었군 그래. 이래서 책은 읽지 않더라도 이렇게 절판을 대비해서 일단 사두어야 한다는.

 

읽은 지가 제법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기억나는 에피소드 중의 하나는 프랑스에 있는 여자친구가 작가에게 이별 선언 정도. 어떤 관계라도 단절은 참을 수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인 실뱅 테송에게 아무나 할 수 없는 시베리아 6개월 살기 체험은 글쓰기를 위한 절호의 기회일지 모르지만, 그의 여자친구에게는 또다른 이름의 시련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을 뛰어 넘는 관계라면 실뱅 테송이 복귀했을 때 좀 더 단단한 관계가 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래픽노블에서처럼 빠른 정리가 필요하다.

 

도시인들에게 시간은 항상 부족한 무엇이지만, 바이칼 호수 통나무집에 살림을 차린 누군가에게 시간은 넘쳐 흘러 주체할 수 없는 물질이다. 그렇게 주변에 자신의 사유를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당연히 사유는 깊어지겠지.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지고, 그런 생각들을 가다듬어 자신만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그러니까 실뱅 테송에서 6개월이라는 시간과 바이칼 호수의 외딴 통나무집은 작가로서의 삶에 있어 어느 순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노라고 지적하고 싶다.

 

나중에는 이웃에 사는 지인이 강아지 두 마리도 가져다 주지 않았던가. 가끔 너튜브로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면서, 야생에서 전문가처럼 뚝딱뚝딱 통나무집을 짓는 콘텐츠를 보고 하는데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화면에 강아지 한 마리라도 등장하게 되면 콘텐츠에 갑자기 활력이 생기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니 어쩌면 실뱅 테송은 과거에 이미 이른바 부시크래프트 콘텐츠를 기획한 선구자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늦겨울부터 시작해서 초여름까지 바이칼 호수에서 지낸 작가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스케치가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실뱅 테송처럼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엉뚱하게도 수년 동안 사두고 읽지 못한 책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바이칼 호숫가로 떠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그 좋아하는 책읽기마저 금방 질려 버려서, 시시껄렁한 너튜브 콘텐츠 타령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이제 그래픽노블로 워밍업을 했으니 오리지널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전에 도중에 포기한 <눈표범>부터 읽는 게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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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4-23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몰랐던 작가도 이렇게 알게 되네요. 그래픽노블이라 읽어볼려구요. 늦겨울에서 초여름까지의 숲생활 부러워지네요.

레삭매냐 2024-04-23 16:57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새로 나온 책인
<노숙 인생>이란 책으로
실뱅 테송을 알게 되었네요.

그림만으로도 바이칼 호수
오지 언저리의 고독함이
느껴지는 것 같더라구요.
 
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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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다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었다. 그 때는 아디치에 작가의 책이 궁금해서, 그리고 이번에는 내일 참전할 달궁 모임 책으로. 처음 읽었을 적에도 그해에 손에 꼽을 만큼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다만 한 보름 정도 걸려서 천천히 하지만 막판에는 스퍼트를 내서 읽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리뷰를 썼겠지만, 이번에는 뭐랄까 숙고하는 그런 느낌으로 뜸을 들여서 리뷰를 쓰게 됐다.

 

아디치에 작가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지금으로부터 21년에 발표된 작가의 데뷔 소설이다. 아니 그런데 초짜 작가가 이런 세련된 책을 썼다고? 지금은 예전처럼 활발하게 작품 활동(소설 쓰기)을 하지 않는 것 같아 좀 아쉽다. 그녀가 쓴 마지막 소설은 11년 전에 나온 <아메리카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다 읽고 나서 바로 9년 전에 읽다만 <아메리카나>를 펼쳐 들었다. 과연 이번에는 다 읽을 수 있을까.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화자는 이제 곧 15살이 되는 소녀 캄빌리 아치케다. 에누구에 있는 가톨릭 계열 여학교에 다니는 캄빌리는 무척이나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캄빌리는 웃지 않는, 또래 친구들에게 이른바 재수탱이 같은 존재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건 바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집안에서는 독재적인 모습의 짜르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영국 유학 출신의 타인을 돕는데 비용을 아끼지 않는 지식인 모습을 한 아버지 유진이 자신의 자녀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래서다.

 

자신의 아버지 파파은누쿠를 이교도라 부르며, 그의 개종을 원하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수작이다. 유진은 일찍이 서양 문물의 수혜를 입어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전통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러니 여전히 미개한 전통주의 혹은 미신을 숭배하는 아버지와 결코 화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야말로 아치케 집안이 사는 땅인 나이지리아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군인들이 헌정을 뒤집고 자신들만의 무법 천지를 만드는 건 일상이었다. 아프리카에서도 유명한 산유국이면서도, 기름 부족으로 캄빌리의 지식인 고모 이페오마네는 자동차를 굴리지 못하고 정전은 변수가 아닌 상수로 인식된다.

 

신문사 <스탠더드>를 운영하는 발행인 유진은 편집자 아데 코커를 전폭적으로 후원한다. 그가 정권을 탈취한 군부에 대해 비판적인 스타일의 칼럼을 실어도 그를 해고하지 않는다. 물론 그에 따른 후과는 예상을 초월하는 비극으로 다가왔지만 말이다.

 

자신의 성공 방정식에 도취한 유진 아치케는 자신의 아들인 자자와 딸인 캄빌리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길 바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유사 지식인 행세를 하는 유진이 구사하는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다. 아들 자자의 왼손가락을 망치질 않나, 사촌 형제가 그려준 파파은누쿠의 미완성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펄펄 끓는 물을 자식들의 발에 부어 징벌한다. 자신이 예전에 서양 출신 선교사들에게 당했던 것처럼.

 

아디치에 작가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여전히 나이지리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위선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영국 제국주의는 그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리아 이보족과 하우사족에게 문명과 종교를 이식하는 동시에 그들의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착취했다. 우선 종교를 앞세워, 전통적인 것들을 모두 미신과 이교적이라는 이유로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렇데 정신적 불모지를 만든 다음에 자신들의 신을 강압적으로 나이지리아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파파은누쿠 세대와 유진 세대의 갈등의 단초를 제공했다. 여전히 해방될 수 없는 식민주의 잔재의 어두운 그늘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포스트콜로니얼적 배경을 파악한 상태에서 아디치에 작가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는다면 좀 더 수월하게 텍스트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아버지 유진의 꼭두각시 같았던 존재였던 자자와 캄빌리가 가난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은수카의 이페오마 고모네 식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그동안 아버지 유진에게 세뇌 받아온 것들이 모두 모순적 위선에 기반한 무엇인가라는 점을 작가는 현란한 소설적 빌드업을 통해 구현해낸다. 당연히 자자와 캄빌리는 이 과정을 통해 삶에서 다음 단계로 성장한다.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현실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 자자와 캄빌리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로 변신한다. 평생을 아버지 유진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 과정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아디치에 작가는 세련되고 점진적으로 내러티브를 진행시킨다. 소설 초반에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자자의 모습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작가는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속삭인다. 아니 어쩌면 선동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내가 믿고 살아온 세계가 붕괴되는 가운데, 어렵게 자각한 내가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과거의 삶은 차치하고서라도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독자에게 묻는 느낌이랄까.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은수카를 떠나 미국으로 간 이페오마 가족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그리고 보니 아디치에 작가의 또다른 소설 <아메리카나>에서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 않은가. 물질적으로는 미국이 모든 것이 결핀된 나이지리아보다는 나을 수 있지만,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낯선 땅이 그렇게 호의적이지만 많은 것이라는 게 나의 조심스러운 추측이다.

 

캄빌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아마디 신부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웃지 않은 소녀 캄빌리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같은 기분을 포착하고, 그의 곁에서 응원하고 결국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영국 출신 베네딕트 신부와는 결이 다른 아마디 신부가 아니었던가. 자신들에게 새로운 신과 종교를 가져다 준 또다른 서구 국가인 독일로 가서 사역을 한다는 설정이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소설의 엔딩은 왠지 그리스 비극의 그것을 닮았다. 겉으로는 인자한 성공한 사업가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집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정폭력을 행사하던 유진이 죽은 뒤 아들 자자는 교도소에 가 31개월의 징역 생활을 한다. 고난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면, 확실히 자자 아니 추쿠카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캄빌리 역시 자신만의 삶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이 가려고 하는 미국은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다시 그렇게 이 작품은 <절반의 태양>을 지나 <아메리카나>로 연결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이 리뷰에 모두 담았는지 모르겠다. 못다한 이야기들은 내일 달궁 독서모임에 가서 풀어보자. 언제나처럼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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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25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디치에 작품 갖고 있긴 한데,,, 읽고 싶었구요,,, 레삭매냐님 리뷰 보니 읽어야겠네요
토론은 잘 하셨나요?^^

레삭매냐 2024-06-17 13:01   좋아요 0 | URL
아이구 덧글이 많이 늦었습니다.
아주 신나게 이야기 나누고 즐거운
시간이었답니다.

책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이야말로
독서 모임의 즐거움이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