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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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을 열독 중에 있다. 지난 주말에 <칠드런 액트>를 읽었고, 이번 주에는 <이노센트>를 읽었다. 소설 <이노센트>는 서방세계와 소련이 치열하게 맞붙었던 1955년 그리고 동서방 대결의 최전선이었던 베를린을 공간적으로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터널을 파서 소련군 사령부를 도청하겠다는 실제 있었던 골드작전을 모티프로 삼아, 전후세대 젊은이들의 사랑과 배신 그리고 음모를 그린 걸작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참고로 이어지는 리뷰에는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려 드린다.

 

1955년 베를린, 영국 토트넘 출신의 25세 청년 레너드 바넘은 체신국 소속의 전화가설 전문가다. 당시 베를린은 서방과 소련이 맞붙은 첩보전의 최전선이었다. 유명한 카페 프라하에는 정보를 팔고 사려는 수많은 스파이들이 득시글거렸다고 했던가. 5천명에서 만명에 달하는 스파이들이 동독에서 서방세계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 속에 섞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그린 베를린이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데카당스한 분위기의 도시였다면, 참혹한 2차세계대전이 상흔이 잔재한 1950년대 베를린은 폐허의 다름 아니다. 물론 근면 성실을 모토로 삼은 독일 민족의 맹렬한 복구의지는 조만간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를 폐허에서 그야말로 불사조처럼 재탄생시킬 것이지만.

 

전쟁 당시 군인이 될 수 없을 정도로 꼬맹이였던 레너드 바넘은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지난 뒤, 다른 방식의 전쟁에 투입된다. 전쟁터에서 피와 살이 튀는 열전이 아니라, 보다 치열한 차원의 암투 속에 벌어지는 냉전에 말이다. 독일의 심장부 베를린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그 나라 언어가 필수적이다. 영국 출신이지만, 미국 소속으로 골드작전에 투입된 레너드는 보안에 유난히 까탈스러운 미군 밥 글래스의 지휘 아래 배속된다. 영국에서 자고 나란 레너드에게 독일은 뭐든지 새로운 그런 국가였다. 하지만 새로운 도시의 문물을 즐기기에 앞서 그의 앞에는 먼저 해야할 일들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다. 도청작전을 위해 테이프리코더를 준비하고 각종 장비들을 지하 터널에 배치해야 한다. 하루 14시간씩 일하는 와중에 한눈을 팔 시간이 없다.

 

어디 그래도 우리 호모 루덴스들이 놀이 없이 살 수가 있을까. 미국의 방송 아나운서 출신 러셀과 밥 글래스는 영국 출신 순진무구한 청년 레너드를 유명한 나이트클럽으로 데려가고, 요즘은 상상할 수 없는 기송관 메시지 전달이라는 방식으로 아름다운 마리아 에크도르프와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우리의 주인공 레너드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여전히 흥청거리는 분위기는 있었구나 싶었다. 마리아의 전언에 따라, 전후 베를린의 열안한 주거상황 그리고 베를린 포위전에서 러시아군이 독일 여성들에 대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다시 한 번 주지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원인제공자였던 가해자 독일이 구소련에서 러시아군 못지않게 저지른 엄청난 전쟁범죄가 상대적으로 사면받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꼬집고 싶다.

 

이언 매큐언은 <칠드런 액트>와 마찬가지로 역시 투트랙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전자가 골드작전에 투입된 영국인 레너드 바넘에 대한 이야기라면, 후자는 한때 적국으로 맞붙었던 순진한 영국 청년과 상대적으로 “성숙한” 독일 여성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마리아는 거의 불한당에 가까운 전남편 오토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돈을 요구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꼴마초는 독자가 예상하던 대로 결국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대소련 스파이전에서 미국과 영국은 협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청 신기술을 미국이 영국을 따돌리고 귀중한 정보를 독점한다고 판단한 영국 정보부에서는 맥나미를 내세워 레너드에게 미국이 숨기는 정보를 캐내라고 독촉한다. 베를린에서 유일하게 그나마 정을 붙인 밥 글래스를 배신해야 하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레너드는 그래서 더욱 더 마리아에게 집착한다.


 



그렇게 순항하던 마리아와의 관계는 이제 막 성에 눈뜬 레너드의 무리한 행동으로 파국으로 치닫는다. 자신의 치명적 실수를 자책하던 레너드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찾아온 마리아. 말다툼 끝에 비명을 지른 마리아를 돕기 위해 레너드가 사는 아파트 아래층에서 찾아온 조지 블레이크라는 사나이가 등장한다. 나는 이 조지 블레이크라는 사나이가 그냥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실존했던 영국 출신의 악명 높은 이중스파이였다. 영국정보부 소속으로 소련을 위해 활동한 조지 블레이크는 우리나라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대독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한국 전쟁 발발 전에 영국 MI6 한국지부에 파견되어, 한국전쟁이 터진 뒤에 전쟁포로가 되어 만주에 끌려갔다가 공산주의자로 전향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영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베를린에 파견되어 소련을 위해 이중스파이 노릇을 하다가 결국 서방으로 망명한 폴란드 정보요원의 폭로로 정체가 발각되어 42년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탈출에 성공해서 모스크바로 갔다. 푸틴 대통령에게 훈장을 서훈 받아, 영국과 외교마찰이 생기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는 정말 소설을 능가하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조지 블레이크가 이미 골드작전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마리아와 갈등을 간신히 봉합하고 레너드는 약혼식을 치른 날, 마리아의 아파트를 찾아온 오토와 몸싸움 끝에 그만 과실치사로 그를 죽인다. 그 다음에 오토를 처리하는 방식 부분이 개인적으로 정말 읽기가 쉽지 않았다. 영화 <화차>에서 이미 김민희가 타인의 신분을 얻기 위해 보여준 장면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소설에서 이언 매큐언 선생이 기술한 부분은 그 이상이었다. 레너드는 마리아의 도움으로 오토의 시체가 든 두 개의 케이스를 처리하기 위해 베를린 시내를 누비다가 그만 자신이 일하던 터널로 복귀하기에 이른다. 그가 저지른 범죄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순간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중, 앞에서 언급한 조지 블레이크가 누설한 도청작전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 레너드.

 

오토의 죽음을 같이 처리한 마리아와 레너드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없으리란 예감이 바로 들었다. 30년 뒤, 마리아가 보낸 편지를 들고 레너드는 자신의 삶 속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 남아 있는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역시 디테일의 강자답게, 냉전이 치열하던 시기의 베를린에 대한 이언 매큐언 선생의 묘사는 탁월했다. 비주류 음악이었던 로큰롤 음악이 태동하던 시기, 세대를 갈랐던 새로운 음악의 등장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가사조차 일견 유치해 보이는 가사로 무장한 로큰롤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가 없었고, 반대로 그 자식들은 경쾌하고 중독성 있는 자이브 리듬에 자연스레 몸을 내맡겼다. 음악으로 대변되는 세대 간의 갈등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발꿈치의 독일군이 쏜 총탄을 맞았던 레너드의 아버지가 독일 출신 며느리를 반대하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하지만 베를린에 도착해서 남자로 거듭나게 된 영국 청년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마치 미국 오지 시골 출신 청년들이 세계대전을 겪고, 파리를 보고 나서는 그 무엇도 이전과 같을 수 없다고 했었던 장면과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다음 장면은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여 준비한 골드작전의 실체다. 미국의 CIA와 영국 MI6라는 최고 정예 정보조직들이 동원돼서 적국의 정보를 취득하겠다는 발상으로 시작된 도청작전은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소동이었다. 소련은 조지 블레이크라는 이중스파이의 활동 덕분에 사전에 골드작전의 실체를 알고 있었고, 진짜 중요한 정보들은 도청의 위험이 있는 통신선을 사용하지 않고, 별로 쓸모없는 정보들만 서방세계에 흘려보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독자는 미국과 영국이 작전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장기자랑 준비하는 장면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난 시절에 경험한 냉전의 실체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막대한 군비경쟁, 다량한 인력과 물량이 동원된 첩보전 말이다. 결국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한 시기에, 군산복합체의 생명유지를 위한 정치 엘리트들의 농간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이언 매큐언 선생은 마리아와 레너드가 보여주는 복잡하면서도 성적 흥분으로 가득한 청춘남녀들의 복잡한 감정의 회로도에 화력을 집중한다. 어떻게 해서 순진무구했던 청년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베테랑 마리아와 사랑을 나누면서 마치 폭력적인 점령군으로 변해 가는지, 통제할 수 없이 들끓는 욕망의 최종 종착지가 결국 상호관계의 청산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오토가 죽은 뒤에, 시체 처리 과정에서 레너드 내부에서 폭발하는 자기합리화 장면 역시 압권이었다. 번뇌에 휩싸인 레너드의 두뇌 회로 속을 엿보고 싶을 정도였다고나 할까. 역시 대가의 솜씨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가 왜 그 책을 읽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도 전혀. 그리고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서 주저하고 있던 <칠드런 액트>를 그리고 연달아서 <이노센트>를 읽었다. 다시 <암스테르담>을 읽고 싶어졌다. 아직 읽지 않은 이언 매큐언의 책들이 많다는 게 위로가 된다.



[뱀다리] 참고로 이 소설은 1993년 존 슐레진저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그런데 주인공은 레너드인데, 밥 글래스 역을 맡은 앤소니 홉킨스가

포스터 전면에 등장하는 걸까.


여주인공이자 팜므 파탈스러운 마리아 역은 이사벨라 로셀리니였다.

그녀가 연기를 잘 하는진 모르겠지만, 이미지 하나 만큼은 최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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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5-24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작년부터 이언 매큐언 전작 독파하려고 책 열심히 모으기만 하고 손도 못 대고 있었는데, 레삭매냐님 글 보니까 또 불끈불끈 하게 되네요ㅎㅎ 아아....책의 세계에선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너무 많아요;

조지 블레이크만큼 인상적인 영화 [타인의 삶]도 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아는데, 인생엔 참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는 거 같아요.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도 있듯이 전쟁 나면 인간의 추악함에 고삐가 풀리죠. 요즘은 서로 이해관계가 상당히 얽혀 있어 전쟁을 피하는 분위기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전쟁은 안 날 거 같지만 스스로를 보호하는 힘을 기르는 차원에서 저는 여성들도 기본적인 군대 교육을 했으면 하는 입장입니다. 남성만 징병된다는 투덜거림은 차치하고 만약에라도 전쟁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총을 가지고 있어도 제대로 쏠 줄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건 좀 그래요.

레삭매냐 2017-05-24 13:20   좋아요 2 | URL
의외로 이언 매큐언 선생의 책들 모셔만
두고 안 읽으신 분들이 꽤 되는 것 같아요.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칠드런 액트>, <이노센트>에 반해서 지금
달려 나가서 <암스테르담> 중고책으로 사들였고
도서관에 가서는 <체실 비치에서>, <토요일>
빌려 왔어요.

매큐언 선생의 소설, 한 번 빠져드니 대단하네요.

군대에서 배운 기술이라는 게 결국 사람을 살리는
기술이 아니라 그 반대의 기술인지라...
말씀 하신 대로 자신을 지키는 차원에서 일리가
있으신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cyrus 2017-05-24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멘트 가든》을 중고매장에 있다는 정보를 파악하자마자 곧바로 매장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다른 손님이 먼저 사갔어요. 언젠가 재출간될 거라고 믿습니다. ^^

레삭매냐 2017-05-24 14:14   좋아요 0 | URL
작년엔가 위화 작가 책을 읽으면서 이언 매큐언
책 컬렉션에 들어갔던 같아요. 물론 사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었죠.

그 때 <시멘트 가든> 가서 읽기 시작했는데...
마무리는 못 지었네요.

목나무 2017-05-24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셔만 두고 안 읽는 일인 여기 추가요. ㅋㅋㅋ
최근 출간된 두 권은 사실 읽다가 중간에 접어서 연달아 레삭매냐님 리뷰를 보니까 자극을 받습니다. ㅎㅎㅎ
이 소설도 영화화 된지 몰랐네요. 영화도 어케든 구해서 보고싶네요.
다음에는 어떤 책을 읽으실지...왠지 <토요일>일 것 같다는....^^

레삭매냐 2017-05-24 14:54   좋아요 1 | URL
아니 한 번 읽기 시작하시면
금방 다 읽으실 것을... ㅋㅋ

영화는 오래 전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네요.

<토요일>은 분량이 제법 있어서 대신 얇다란
<체실 비치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유부만두 2017-05-25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부끄럽게도 이 책도 사두기만 했습니다. (이언 매큐언 팬이라고 말해놓고 이게 무슨.....)
하지만 읽을 책이 남았다는건 정말 행복한 일이죠?! 그렇죠? ^^

레삭매냐 2017-05-26 09:03   좋아요 0 | URL
그러믄요, 애정하는 작가의 책들을 계속해서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말 기분
이 좋더라구요.

게다가 이언 매큐언 작가의 책들은 절판된
책들이 있어서 사냥하는 맛도 나고요.

저도 <이노센트> 득템한 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서야 읽었네요. 읽고 싶게 된 책을 가
지고 있어서 바로 읽을 수 있는 것도 복이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