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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세크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인경 옮김 / 꿈꾼문고 / 2020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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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2022년 11월은 발자크를 읽는 달이다. 지금 사서 쟁여둔 책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 수두룩하다. 에리크 뷔야르의 <7월 14일> 후속타자는 바로 16세기 셰익스피어의 샤일록에 버금가는 19세기 모델 곱세크다.
1830년에 발표된 <곱세크>의 화자는 어음 할인전문가, 보석감정가 혹은 고리대금업자가 아닌 양심적인 법률가이자 소송대리인인 데르빌이다. 아, 이 남자 내가 바로 전에 읽은 <샤베르 대령>에서도 전처 페로 부인에게 과거와 재산을 털린 샤베르 대령/백작을 변호해 준 이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곱세크의 이름도 아마 언급이 되었더랬지.
왕정복고로 해외 망명지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드 그랑리외 자작부인의 재산 반환 소송을 승리를 이끈 데르빌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동업자이자 파트너인 네덜란드계 유대인 장에스테르 반 곱세크와 얽힌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발단은 드 그랑리외 자작부인의 딸 카미유가 젊은 백작 에르네스트 드 레스토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청년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누구인가? 그녀는 바로 <고리오 영감>의 장녀 아나스타지 드 레스토다. 고리오 영감에게 그의 딸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불후의 명작에 잘 나와 있으니 참조해 주시길. 카미유와 그의 어머니가 걱정하는 건 바로 드 레스토 집안의 재산과 아나스타지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곱세크>에서 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요주의 인물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곱세크가 아니라 바로 이 아나스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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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빌이 들려주는 과거사를 통해 알게 되겠지만, 곱세크는 나름 금전에 대한 철학을 가진 어음할인 전문가다. 발자크는 짓궂게 곱세크 영감을 찾는 이들을 희생자로 표현하지만, 곱세크는 당대 파리 제2금융권의 실력자였다. 급전이 필요하지만, 은행에서 대출이 막힌 이들에게 곱세크는 구세주가 아니었을까? 물론 우리의 곱세크가 그냥 돈을 빌려주는 건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폭리를 취하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였다. 그러니 그의 집 문턱을 넘는 이들이 염통이 쫄아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궁한 사람이 언제나 약자가 되는 법이니 말이다.
곱세크가 담당하는 분야는 바로 귀족들이다. 혁명과 제정을 거쳐 부르봉 왕가가 복귀해서 다시 제 세상을 만난 것 같은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사치품을 사들이고, 도박이나 사교댄스, 끝없는 파티 같은 유흥과 향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들이 자산과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금전은 유한했다. 인간이 추구하는 쾌락의 극한은 자신의 가진 것을 훨씬 넘는 그 무엇이었다. 사업이나 생산에 쓰는 돈도 아니고, 놀고먹기 위해 쓰는 돈을 은행에서 대출해 줄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곱세크 같은 고리대금업자들이 번성하기 좋은 시절이었다.
견유학파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의 곱세크의 금전에 대한 철학은 간단했다. 권력과 돈이 바로 시대의 정신이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 넘어가던 사회의 면모를 발자크는 곱세크라는 문제적 인물의 사고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해적이라고 불릴 정도의 담이 큰 곱세크 영감은 자신의 금전적 이익을 위협하는 이들에게는 총과 칼쓰기도 무다하지 않을 정도로 배포가 큰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약관의 데르빌을 좋게 본 모양이다. 법학과를 졸업하고 법률사무소에서 서기 생활을 하던 데르빌은 법률사무소장이 시장에 내놓은 법률사무소를 인수하길 원한다. 문제는 그에게 가진 돈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신출내기 서기에게 누가 15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내준단 말인가. 데르빌은 결국 곱세크를 찾게 된다. 곱세크는 데르빌을 도와줄 법도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샤일록을 능가하는 고리대금업자가 아니었던가. 결국 10년 상환에 15% 이자라는 곱세크로서는 관대한 조건으로 데르빌에게 무담보 대출을 해준다. 대신 자신의 고리대금 삼인방(팔마, 베르브뤼스트, 지고네) 써클을 동원해서 산더미 같은 소송을 가져다 줄 거라고 데르빌을 안심시킨다. 물론 자신의 사건은 무료로 처리해 준다는 특약도 빼놓지 않는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파니 말보 아가씨와 결혼한 데르빌은 5년도 되지 않아 곱세크에게 진 채무를 모두 청산한다. 자신이 열심히 일한 탓도 있겠지만, 파니의 유산 상속도 채무의 조기 상환에 한몫했다고 한다. 훗날 곱세크는 청년 데르빌에게 좀 가혹한 조건의 이자를 붙인 것에 대해 자신에게 아무 것도 빚진 게 없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 않을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처음에 등장한 문제적 인간 아나스타지가 다시 등장한다. 그녀에게 빈대 붙은 댄디보이 막심 드 트라유 대리보증을 서주려고 했다가 곱세크 영감에게 아주 톡톡히 당하는 아나스타지. 어쩌면 모든 건 불쌍한 자신의 아버지 고리오 영감을 홀대한 후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심지어 장남 에르네스트 말고 다른 두 아이는 드 레스토 백작의 자식들이 아닌 드 트라유의 애들이었다고. 자기 몰래 귀금속류를 곱세크에게 저당 잡히고, 무일품 건달 애인에게 돈을 융통해주려는 아나스타지의 태도에 집안 거덜낼 여자라는 걸 직감하는 드 레스토 백작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장남 에르네스트에게 정당한 유산을 상속하기 위해 곱세크-데르빌 비밀 프로젝트를 가동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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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의 죽음을 앞두고 “반대증서”를 찾기 위해 아나스타지가 보이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눈먼 욕정 때문이었을까? 양심적 법률가 데르빌은 정당한 상속을 위해 아나스타지와의 위험한 대결도 마다하지 않는다. 데 레스토 백작의 임종 뒤, 아나스타지가 벌인 소동극은 막장 드라마의 절정이었다.
소설의 엔딩은 죽는 순간까지 재산을 움켜쥔 곱세크의 처절한 모습이다. 사방에서 모여든 금과 은, 골동품 뿐 아니라 공물같이 그에게 진상(혹은 담보로 잡힌)된 각종 물건들이 썩어 들어가는 가운데 우리의 어음할인 전문가는 마지막 숨을 내쉰다. 그전에 자신이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데르빌에게 유언장을 남긴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죽기 마련이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 돈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지 못한 곱세크의 마지막은 처절하기만 했다.
<샤베르 대령>에서 언급된 데르빌의 15만 프랑 대출 건에 대한 궁금증이 <곱세크>에서 시원하게 해결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양심적 법률가 데르빌의 연이은 활약도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인물들의 재등장기법이라는 맛에 <인간희극>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해적 고리대금업자로 불러도 무방할 곱세크가 마냥 악당 노릇만 하는 건 아니라는 점도 인간이 지난 다층적 모습을 보여 주려는 발자크의 의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곱세크에게 축재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사양하지 않고 넙죽 받아먹는 장면에서는 확실히 이 악당에 대한 선입견이 제대로 작동하기도 했다.
발자크는 과연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맛이 있다. 발자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마냥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