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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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부터 열심으로 압둘라자크 구르나 작가들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낙원>에 이어 <바닷가에서>도 주파하는데 성공했다. <낙원>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는 독서여서 즐겁게 읽을 수가 있었다. 다음에는 <그후의 삶>에 도전할 생각이다. 그전에 지난달에 읽기 시작했지만 마무리 짓지 못한 <글록>부터 만나야지 싶다.

 

[스포일러가 한가득이오니,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원하지 않는다면 퍼더 리딩(further reading)을 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국 공항에 내린 라자브 샤아반 마흐무드가 난민, 망명을 요청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가 정확하게 어디라고 말은 하지 않지만 독자들은 라자브가 구르나 작가의 문학적 페르소나로 그가 잔지바르/탕가니카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무심, 그러니까 계절풍에 실리듯 라자브는 고국에서 위협받을 수도 있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며 난민을 자처한다.

 

오래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하는 이들이 많다. 시리아와 리비아 내전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 유럽으로 향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목숨을 걸고 지중해 바다를 건너다 마주하게 되는 비극적 뉴스도 자주 들린다. 그들에 비하면 라자브 샤아반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티켓 판매자의 조언에 따라 그는 영어를 할 수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숨긴다.

 

이국에서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었던가. 프리모 레비 역시 죽음의 절멸수용소에서 생존을 위해 독일어를 배우기에 전력했었지 아마. 초반부에 전개되는 라자브 샤아반의 내적 갈등에 대한 구르나 선생의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흑인 무슬림 노인의 자국 망명을 반길 영국인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영국인들 역시 자국의 경제 혹은 사회에 도움이 될만한 이들의 망명은 환영할 것이다. 동시에 자신들의 세금 부담 혹은 일자리 경쟁자는 또 원하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정치적 망명의 개인적 수용은 나의 이익을 반하지 않는 정도가 심리적 마지노선이리라.

 

고향에서는 나름 잘 나가는 가구상이었는데, 이역만리 영국에서 그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참 영어 단어 망명(asylum)에는 망명이라는 뜻 외에도, 정신병원(madhouse)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상당히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난민으로 망명하는 건, 결국 미친 짓이라는 걸까.

 

영국 입국 과정에서 라자브 샤아반은 입국심사관 케빈 에덜만에게 새로운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온 자신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유일한 귀중품 우드알카마리를 강탈당하기도 한다. 과거 식민지 시절, 탕가니카의 모든 자원을 수탈해 갔던 식민 지배자들의 후예들은 망명자의 알량한 소지품도 그냥 놔두질 않는다. 임시수용소를 거쳐 영국 바닷가의 작은 마을로 보내진 라자브는 난민담당관 레이철의 도움으로 자신이 살던 곳의 전문가로 알려진 라티프 마흐무드를 소개받는다. 라자브 샤아반은 라티프의 아버지 이름이었고, 그렇다면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 행세를 하는 현재의 라자브 샤아반은 누구란 말인가? 이런 미스터리한 요소들은 소설 <바닷가에서>에 한층 가독성에 대한 텐션을 끌어 올리는데 성공한다.

 

라자브 샤아반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망명 신청자들이 임시로 머무는 영국 가정으로 거처를 옮긴다. 임시수용소 동지였던 알폰소는 그에게 타월을 주었던가. 곳곳에서 라자브 샤아반이 마주하게 되는 망명 신청 동지들과의 인연들 그리고 그와 라티프의 30년도 더 된 오래전 악연들을 추적하는데 구르나 작가는 소설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바닷가에서>의 상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탕가니카의 건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책을 읽어 가면서 등장하는 1960년대 아프리카 제국(諸國)들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부족하마나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탄자니아의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는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54년부터 시작된 독립운동은 1964년 술탄국 잔지바르를 합병한 탄자니아의 건국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초대 대통령 니에레레의 강력한 영도력에 힘입어, 탄자니아는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종족 혹은 종교분쟁에 의한 내전을 겪지 않은 나라였다. 다만, 니에레레가 아프리카식 사회주의를 추종하며 산업화를 이루지 못하고 경제 발전이 뒤처지는 바람에 빈곤국으로 추락해버렸다.

 

이런 신생국 탄자니아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 구르나 작가는 살레 오마르(그렇다, 첫 번째 화자의 이름은 라자브 샤아반 마흐무드가 아니었다)과 마흐무드 집안의 오랜 악연들을 풀어 놓으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소설의 한 축을 살레 오마르가 차지하고 있다면, 그의 대척점에는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졸지에 잘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던 청년 라티프가 있다. 순식간에 생존을 위한 거처를 잃고 나락으로 추락한 라티프는 어머니의 추천으로 GDR(구 동독)로 가게 된다. 라티프가 탄자니아에서 살레 오마르에게 당한 수모들은 30년 뒤, 영국 바닷가의 소도시에서 자신이 들을 수밖에 없게 된 서사의 기반이 된다.

 

라티프가 독일에서 펜팔 친구를 만나게 되는 설정이 좀 작위적이긴 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디아스포라에 나선 아프리카 무슬림 청년의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본다면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지 않나 싶기도 하다.

 

탄자니아에서 승승장구하던 살레 오마르는 새엄마 비 마리암이 남겨준 집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결국 모든 건 시간에 따른 새옹지마라는 것이었을까. 서로 좋게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 때문에, 살레 오마르는 독립 후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 당국에 체포되어 11년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계속해서 끝나지 않는 비극 때문에 결국 그는 조국을 떠나 영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한다.

 

그렇게 오래 묵은 악연을 품고 각각의 디아스포라를 거쳐, 영국의 바닷가 소도시에서 만나게 된 라티프와 살레 오마르. 공통의 문제가 발생한 조국 탄자니아에서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식민 모국인 영국이라는 무대로 가져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 시절 아프리카 대륙의 독립운동가들은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순간, 그들에게는 지상낙원이 도래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식민지에서 독립국가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연착륙 스타일의 트랜지션이 필요했지만, 시간에 쫓긴 신생국의 위정자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황급하게 떠난 뒤, 남은 혼란과 무질서는 오롯하게 신생국 주민들의 몫이였다. 마흐무드 가족들에게 가해자로 비치는 살레 오마르가 어떻게 보면 억울하게 보일 수도 있는 옥살이를 십일 년이나 했다는 점에서 그 시절의 혼란이 명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마치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건너는 듯한 초중반의 신중한 전개와 달리 엔딩은 상대적으로 급작스럽게 처리된 점이 아쉬웠다. 오랜 시간을 두고 결국 마주하게 된 살레 오마르와 라티프 마흐무드. 라티프는 과연 살레 오마르에게 복수를 원했을까? 시간이 흐르고, 관련된 사람들도 거의 죽은 마당에 그런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라티프와의 대면에서 연장자답게 살레 오마르는 디아스포라 선배의 다음 수를 모두 읽고 대응하는데, 과연 고수의 짬바이브가 느껴지기도 했다.

 

<바닷가에서>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는데, 막상 리뷰에 담으려고 하니 상당수가 휘발해 버렸다. 아무리 메모를 하고 포스트잇을 붙이면서 책을 읽어도 실제 독서와 리뷰하는 시점의 간극은 멀기만 하다. <낙원>의 왕은철 역자가 점잖은 선비 같은 번역의 정석을 구사했다면, <바닷가에서>의 황유원 역자는 시인답게 뭐랄까 말맛을 살리는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바로 읽기 시작한 <그후의 삶>은 또 다른 역자가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한 명의 역자가 같은 작가의 작품들을 맡아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헤르타 뮐러의 경우는 정말 같은 작가가 썼나 싶을 정도여서 말이지. 보통 한 작가의 작품은 3권정도 읽어야 감이 잡힌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세 번째 권인 <그후의 삶>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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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6-04 10: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을.위해.하루 24시간을.따로.떼어 놓으신 거 같은 레삭매냐님..정주행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요!!

레삭매냐 2022-06-04 15:07   좋아요 3 | URL
어제는 졸려운 데도 꾸벅꾸벅
졸면서 읽었네요 ㅋㅋㅋ
누가 보면 고시 공부하는 줄 -
꾸벅,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2-06-04 17:17   좋아요 3 | URL
졸면서 책 보고
졸면서 유투브 보고

그게 제맛입니다

저도 어제 새벽 앰버허드 조니댑 유튜브 보는 줄 알았는데 졸고 있더라고요

정주행!! 계속 같이 응원하며 책 읽어요 레삭매냐님^^

미미 2022-06-04 10: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별은 3개주셨는데
리뷰는 별 4개~4개반 주신 느낌입니다😆

요즘 저는 읽는 도중에도 앞쪽
내용이 휘발되더라구요ㅠㅠ
어떤 짬바이브일지 결말이 너무 궁금합니다

레삭매냐 2022-06-04 15:08   좋아요 2 | URL
그랬나요? 그렇지 않아도
세 개는 좀 박하고 세개반
정도 생각했는데 말이죠.

역시나 대단하십니다 !!!

전 적어도 안되더라구요 ㅠ

바람돌이 2022-06-04 13: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벌써 3번째 권을 읽으신다니 정말 레삭매냐님 독서력에 박수 박수 👏👏
이 작가에게 별 3개는 의외네요. 그래도 저도 읽으려고 주문해서 어제 받았으니까 곧 읽어보겟습니다. ^^

레삭매냐 2022-06-04 16:24   좋아요 2 | URL
노벨상 프리미엄으로 별을
막 퍼주기는 왠지 그래서요 :>
한 개 정도는 ㅋㅋㅋ

요즘 갠춘한 책들이 마구 나
와서, 읽을 책들이 밀리고
있네요.

페넬로페 2022-06-04 14: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한 작가에 대해 정주행하기 쉽지 않잖아요.
낙원에 비해 별 세개를 주셨네요.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리뷰 쓰기는 언제나 어려워요^^

레삭매냐 2022-06-04 16:34   좋아요 3 | URL
저는 아무래도 <바닷가에서>
보다는 <낙원>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리뷰 쓰기는 참 쉽지 않아
미션이네요. 쓰고 나서도
고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불쑥 나고 그러네요.

mini74 2022-06-04 2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댓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노벨상 프리미엄 ㅎㅎ 왠지 큰상 받은 작품은 별을 더 줄거 같은데 !!! 매냐님의 소신 👍 낙원 더 좋으셨다니 전 낙원으로 한 번 시작해볼랍니다 ㅎㅎ 고맙습니다 매냐님 *^^*

레삭매냐 2022-06-05 19:38   좋아요 1 | URL
그래두 왠지 -
대가의 작품이라고 꿇리면 안돼!
하는 마음이 들어서 좀 더 냉정
하게 고고씽...

그나저나
주말에 독서를 더 못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