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롭 데이비스 지음, 김마림 옮김,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원작 / 미메시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주말에 영원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다시 만났다. 어려서 만나고, 원전을 읽는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다. 모든 걸 나의 게으름 탓으로 돌린다.

 

다 읽고 나서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했다. 알론소 케하나, 우리에게는 돈키호텔로 알려진 라만차 동네의 이달고였던 그는 정말 기사 문학을 너무 읽어서 광인 기사가 된 또라이일까? 그래픽 노블에서는 케하나가 머리가 쪼개지는 고통을 겪고 나서 비루먹은 말 로시난테를 이끌고 허술한 무장을 하고 기사도를 실현하기 위해 나서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한 가지 그동안 미처 몰랐던 점을 이번 그래픽 노블은 통해 알게 됐다. 돈키호테는 세상의 고통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기사가 되어 나섰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시네아 델 토보소 공주로부터 사랑을 얻기 위해. 고통으로부터의 진정한 구원과 사랑을 얻기 위해, 바로 우리네 인간들이 사는 이유가 아닌가.

 

돈키호테의 앞길을 막는 두 명의 서브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신부요 다른 하나는 이발사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중세 이래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하면서 신의 이름 아래 민중들의 모든 욕구를 통제한 종교 권력의 화신이다. 어찌 보면 쾌락주의는 인간의 본성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데우스의 이름을 빌려 그들은 민중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물질적 욕망과 안위만을 추구했다. 현세에서 민중들이 느끼는 고통과 구원에는 사실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돈키호테라는 또라이 기사가 등장해서 세상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겠다니, 자신들의 밥줄을 끊을 판이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 광인을 제 위치에 돌려놓아야 하는 절대적 책임감을 통감하고 사사건건 돈키호테의 모험을 방해한다.

 

자 다음 주자는 이발사다. 이발사는 중세 시대에 의사의 업무도 대신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이발소 앞에서 빙빙 돌아가는 간판 중에 붉은색이 의사 업무를 상징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뭐 그렇다. 암튼 종교권력자인 신부와 결탁해서 의사 혹은 17세기 초반 부상하기 시작한 부르주아지의 전형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존의 공고한 사회적 질서를 흩뜨리는 또라이 광인기사를 그 역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신부와 이발사는 크로스결탁해서 돈키호테를 저지하는데 힘을 모은다.

 

지금 기준으로 보다 돈키호테 케하나는 무모한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이미 세르반테스가 이 책을 쓰던 시절에도 이미 기사의 시대는 저물었다. 장궁 등으로 무장한 보병대의 위력 앞에 비싼 비용이 드는 귀족 놀음 같은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중세시대에는 요즘으로 치면 탱크 격인 기사들이 적진으로 돌격해서 전쟁의 승패를 가리는 시대는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멋지게 무장하고 위용을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본업인 전장에서 소용이 다하면 누가 기사가 되려고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과거에 연연하는 케하나는 이상주의자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첫 번째 모험에서 그야말로 박살이 난 채로 라만차로 돌아온 돈키호테는 자신을 따를 종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낀다. 기사 체면에 스스로를 누군가에게 밝히고, 먹을 것과 잠자리를 구하는 자질구레한 일을 대신한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임무에 적합한 사람을 이웃에서 하나 구했으니 그가 바로 산초 판사다. 주변에서는 그를 머리가 좀 모자라는 얼간이라고 평했다. 케하나는 자신이 공을 세우게 되면, 산초에게 섬의 총독 자리를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케하나가 이상주의자라면, 산초 판사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그를 터무니 없는 모험으로 인도한 것은 다름 아닌 탐욕이었다. 그렇게 17세기 버전의 판타지 어드벤처 듀엣이 탄생했다.

 

산초 판사와 함께 한 첫 모험에서 빙빙 돌아가는 풍차를 상대로 역사에 길이 남을 돌격을 감행하면서 돈키호테는 풍차남이라는 세간의 명성을 얻게 된다. 돈키호테는 풍차를 사악한 거인이라고 생각하고 돌격했다. 능구렁이 같은 작가 세르반테스는 이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가 훗날 얼마나 대단한 유명세를 치르게 될지 미리 알고 이런 서사를 직조해냈을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거대한 풍차를 상대로 돌격한 돈키호테가 어떻게 만신창이가 되는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돈키호테의 무모한 도전에는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이 꿈꾸는 낭만과 모험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세상풍파에 너무 길들여진 우리들은 하지 못하지만, 딱히 잃을 게 없었던 17세기 이달고 돈키호테는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했다. 이런 서사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을까.

 

, 그리고 돈키호테가 톨레도 상인단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집으로 돌아와 있는 동안 신부와 이발사는 돈키호테의 정신에 악영향을 미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나선다. 그것은 바로 검열과 분서였다. 기사 문학을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에 케하나의 정신세계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한 그들은 케하나가 애지중지 모아온 책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서>의 서두에 등장하는 가르나타의 불의 장벽에 바로 연상됐다. 그리고 책을 태우는 이들이, 사람이라고 태우지 못할까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에스파냐에서 여전히 종교재판이라는 무시무시한 종교권력이 횡행하던 시기에 세르반테스는 굉장히 위험한 사회적 비판을 이 위대한 기사 소설에 이런 방식으로 녹여냈다.

 

1부가 나온지 10년 만에 발표된 2부는 확실히 1부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부에서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농락하는 공작 부부 그리고 케하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학사 삼손 카라스코들의 활약이 주목할 만하다.

 

대문호 세르반테스는 자신이 소설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모든 서사들을 썼으면서도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라는 가상의 인물이 편력 기사 돈키호테의 연감을 기록한 것이라고 둘러댄다. 그건 아마 전문 편집자가 없었던 시대에 자신의 작품에 들어나게 될 문제점에 대한 지적을 피하고, 혹시라도 모를 엄혹한 검열을 피하기 위한 꼼수가 아니었나 싶다.

 

2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바로 산초 판사다. 숱한 모험을 통해 신나게 두들겨 맞고,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하던 돈키호테는 이상과 꿈의 세계에서 결국 현실세계로 귀환하게 된다. 슬픈 이야기지만 안되는 일은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케하나가 퍼뜨린 이 위험한 형태의 이상주의 전염병은 바로 자신의 충실한 종자 산초 판사에게 옮았던 모양이다. 항상 눈앞의 빵에만 관심을 갖고, 이제나 저제나 돈키호테가 자신에게 약속한 섬을 주나 싶었던 산초 판사가 완전히 머리가 돌았는지 아니면 진짜 현실주의자에서 이상주의자로 사상적 전환을 한 것인지 말에서 낙마한 뒤, 돈키호테의 임종 순간에 다시 편력 기사로서의 모험을 나서자는 말을 내뱉는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모욕과 편력 기사로서의 명예 실추를 자각한 뒤, 현실로 돌아온 주인과 판시노-키호티스 듀엣이 되어 목동의 삶이라도 살자는 종자의 상호 트랜스포메이션 엔딩 설정은 정말 대단했다.

 

이 정도면 됐나? 더 쓸 게 있었던가. 나중에라도 더 생각이 나면 추가해야겠다.

 


읽다만 나의 <돈키호테>는 어디에 있나. 어린이날인데 오래 전 어머니가 사다 주신 동화 돈키호테의 추억을 되살리며 다시 읽기에 도전해야겠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2-05-05 10:5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입니다~~
어릴 때 동화로 읽었는데 그때는 모험에 촛점을 둔 듯했거든요. 그 깊은 의미를 잘 몰랐었어요^^

레삭매냐 2022-05-05 11:26   좋아요 4 | URL
적어 주신 글을 보니,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네요. 동화의 모험은 정말
재미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나이 들고 보니 더 심
오한 메시지들이 한 가득이지
싶습니다.

새파랑 2022-05-05 12: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구해만 놓고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ㅜㅜ 나이들어 보면 더 심오하시다고 하니 좀 묵혀둬도 될거 같군요 ^^

레삭매냐 2022-05-05 18:42   좋아요 3 | URL
제가 오늘부터 원전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초장부터 국가의 허
락을 받아 출판하는 거라는 명문
이 떠억~하니!

한 때 세계 대제국이었던 에스파
냐가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는지
단초를 제공해 주지 않나 싶을
정도네요.

moonnight 2022-05-05 14: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꽂아놓고 흐뭇해하기만 한 두 권 돈키호테-_ㅠ 언젠간 읽게 되겠지요..(체념-_-)

레삭매냐 2022-05-05 19:00   좋아요 2 | URL
그러믄요, 소장각으로만도 아주
므훗한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읽으시리라 믿습니다.

바람돌이 2022-05-05 14: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완역본을 오래전에 사두고 아짇도 읽지 않은 책. 이 글을 읽으니 또 욕구가 들썩 들썩이면서 책장에서 꺼내 먼지 털고 있네요. ㅎㅎ

레삭매냐 2022-05-05 21:28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그렇지요...
램프의 요정 기록을 뒤져 보니
저는 두 번 <돈키호테>를 샀네요.

한 번은 시공사 버전으로 그리고
2년 전에 열린책들 버전으로.

후자를 찾아서 오늘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완독해
보려구요.

mini74 2022-05-07 0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린 책들이군요. 저도 사려고 이것저것 찌르고 있는 책입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2-05-07 09:11   좋아요 1 | URL
우선 그래픽 노블로 만나고
다시 원전 읽기에 돌입하니
또 새로운 느낌이 들고,
기시감이 있어서 진도가
수월하게 나가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