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그래픽노블로 만나다
켄 크림슈타인 지음, 최지원 옮김, 김선욱 감수 / 더숲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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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으로부터 딱 9일 전에 켄 크림슈타인의 한나 아렌트 그래픽 평전인 <세 번의 탈출>을 읽었다. 곁에 책은 없지만,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 이 멋진 책을 리뷰해 보고자 한다.

 

독일 하노버에서 프로이센 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난 그녀는 칸트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재 철학자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성인들도 어렵다는 칸트의 저작들을 십대부터 마스터했다고 하지 아마. 그녀의 어머니에게 그녀는 언제나 한나쉬카라는 유대 이름으로 불린 모양이다. 아버지는, 매독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그녀의 유대 혈통은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유래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조금 들었다.

 

지성인으로서 한나 아렌트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건 바로 마그부르크 대학에서 저명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솔직히 그들이 추구한 철학 세계에 대해서는 1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저 그들이 한 시대를 주름 잡은 저명한 철학자라는 것 정도. 그리고 하이데거 밑에서 수학한 숱한 인사들이 유대인이었다는 점도. 그리고 당대 독일을 대표하는 하이데거는 나치로 변신했다. 그렇게 잘난 철학자의 응집된 사유와 번민의 끝이 어쩌면 다른 것도 아니고 국가사회주의, 나치즘이 되었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유부남 하이데거와 한창 나이의 한나 아렌트의 불륜은 스캔들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나치 당원 하이데거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쫓아 한나쉬카와 미래의 위험을 무릅쓸 리는 없었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히틀러와 그의 나치 일당들이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정권을 잡고 유대인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나쉬카의 첫 번째 탈출의 서사가 시작된다.

 

모두가 역사를 통해 알다시피, 독일 제3제국의 총통의 자리에 오른 아돌프 히틀러는 패전과 경제공황의 위기에서 독일 국민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SS와 게슈타포가 중심이 된 유대인 사냥꾼들의 손아귀에서 한나 아렌트와 그 어머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포위가 조여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나는 기지를 발휘해서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 그전에 한나는 잘난 베를린의 잘난 유대인 귄터 스턴과 결혼했지 아마. 이제 자신의 나라에서 탈출한 한나 아렌트는 영원한 이방인 신세가 되었다. 다음 목적지는 파리였다. 1920년대 유럽의 문화 수도였던 베를린을 대신하게 된 파리에는 수많은 지성인들이 들끓었다. 책에는 그녀의 먼 사촌으로 소개된 발터 벤야민도 당시 파리에서 거주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교류한 수많은 인사들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인물이 나에게는 바로 벤야민이었다.

 

파리에서의 안락한 세월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전쟁광 히틀러가 두 번째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격전으로 폴란드를 석권하고, 그 다음 목표였던 프랑스마저 무력하게 독일 기갑부대에게 패하면서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운명도 경각에 달리게 됐다. 상황이 그렇게 급박하게 흘러가는 와중에서도 한나 아렌트는 두 번째 탈출을 위한 준비 대신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경감이 등장하는 탐정소설만 읽고 있었다지.

 

하지만 한나쉬카의 그런 노력은 두 번째 탈출을 위한 철저한 준비의 일환이었다고 알려진다. 심농의 탐정소설에는 프랑스 경찰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담겨 있었고, 우리의 한나쉬카는 다음 목표인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프랑스 경찰의 실체에 대해 알기 위해 전력으로 매그레 경감 시리즈를 읽었다는 것이다. 과연, 뛰어난 지성인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이 정도는 되어야 레전드급 인사가 될 수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마저 손아귀에 넣은 나치의 마수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는데 성공한 한나 아렌트. 그리고 유럽의 전화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미국에서 비로소 한나 아렌트는 안정과 평안한 거주지를 얻고 새 출발에 나선다. 문득 이런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독일어야 모국어니 그렇다 치고, 프랑스에서 수년을 살면서 프랑스어 구사에는 문제가 없었을까? 그리고 미국에 이주해서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처음으로 여자 교수가 될 정도의 영어 구사 실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철학적 사유만큼이나 언어 능력에서도 뛰어난 그야말로 천재가 아닐까 싶다. 최근 즐겨 보는 너튜브에서 캐나다나 뉴질랜드에 이민가서 살면서 언어 문제로 현지인들과 의사소통에 버거워하는 이들의 콘텐츠를 보면, 영원한 이방인 한나 아렌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발터 벤야민과의 에피소드 하나를 빼먹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도주하던 벤야민은, 자신의 소중한 원고를 한나 아렌트에게 보내 적절한 때가 되면 보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나치의 무자비한 탄압과 순전히 타이밍 문제로 인류의 소중한 인적 자산이 어이없게 사멸해 버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미국 뉴욕에서 글밥을 먹고 살게 된 한나 아렌트는 1951<전체주의의 기원>을 발표하면서 일약 학계의 스타로 거듭나게 된다. 7년 뒤에는 또 다른 역작 <인간의 조건>으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역시 그의 대표적 저작은 아무래도 나치 전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다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내가 유일하게 읽은 아렌트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사실 아이히만은 나치가 반제 회의에서 결정한 최종 해결책실행에 동원한 하나의 톱니바퀴 같은 존재였다. 독일식 기계적 명령에 따라, 유럽 동부에 포진한 절멸수용소로 유대인 이송을 맡은 이가 바로 아이히만이었다. 종전과 전후에 홀로코스트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히틀러와 제국의 2인자 헤르만 괴링 그리고 선전상 요셉 괴벨스 등이 모두 죽으면서 뉘른베르크 재판은 그야말로 속빈 강정처럼 진행되었다. 반제 회의에서 큰 역할을 맡았던 금발의 짐승이자 프라하의 도살자로 알려진 라인하르트 프리드리히는 전쟁 중에 암살당했다.

 

 

전후 오데사 프로젝트로 이름을 바꾸고, 라틴 아메리카로 숨어든 수많은 나치 전범 가운데 아돌프 아이히만이 1960511일 이스라엘 비밀 정보팀에 의해 납치되어 이스라엘로 송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 있는 나치 전범에 대한 세기의 재판이 되었다. <뉴요커>는 한나 아렌트를 특파원으로 삼아 예루살렘 재판 취재를 맡겼다. 한나쉬카는 아이히만이 우리가 생각한 그런 괴물이 아닌, 지극힌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설파했다.

 

제국의 지도자들이 내린 유럽의 모든 유대인들을 학살하라는 잘못된 명령을 아무런 생각 없이 실행에 옮긴 것이 잘못이라는 지적은 유대인 사회에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어떻게 보면, 그 명령을 실행한 평범한 아이히만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는 그런 논쟁의 시발점이었다. 혹독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는데 성공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증오와 분노의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 그런 화점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아르헨티나에서 국제법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애써 잡아온 아돌프 아이히만이 제격이었다. 이런 아이히만에게 냉정한 시선과 거리를 유지하며 글을 쓴 한나 아렌트에게 등을 돌린 지인과 친구들이 속출했다. 나라면 그녀 같이 용감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 한나 아렌트는 어떤 주변 여건이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양심이 지시하는 대로 쓴 글을 발표했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한나 아렌트는 오늘 내가 읽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힌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 아룬다티 로이의 그것과 실천하는 삶에서 일맥상통한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멋진 그래픽 평전을 창조해낸 켄 크림슈타인은 한나 아렌트의 1차 저작을 필두로 해서 다수의 저작들을 통해 한나 아렌트의 실체적 모습을 재현해내는데 성공했다. 책의 말미에는 숱한 한나 아렌트의 저작들이 소개되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보면 흐뭇해 하기도 하다가 또 없는 책들은 사야 하나 싶기도 했고, 또 절판된 책들 앞에서는 좌절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위험한 책이기도 하다. 덮어 놓고, 마구잡이로 한나 아렌트의 저작들을 사들일 뻔 했으니 말이다.

 

오늘까지 써야하는 적립금 때문에 아무래도 이 밤이 가기 전에 한나 아렌트와 관련된 책을 사야지 싶다. 나는 아무래도 별 수 없는 책쟁이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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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30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01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1-11-30 21:15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책쟁이 레삭매냐님 덕분에 저 이 책 몰래 샀;;;
저 정말 앞으로 어떤 글을 쓰셔도 안 사겠어욥!!! 굳은 결심!!!ㅠㅠ
땡투 아마 접미다아~.^^;;

레삭매냐 2021-12-01 01:08   좋아요 1 | URL
책쟁이로서 더 이상 책을
사지 않고, 집에 있는 책
만 파먹겠다...라는 결심
은 아무 소용이 없답니다.

그저 사고 읽고 또 그것
의 무한반복일 뿐.

미리 감사합니다.

mini74 2021-11-30 22:1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나아렌트 유일하게 본 책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입니다 그래픽 평전 수준이 아주 높은 거 같아요. 저도 보고싶어지네요. 적립금은 책을 부르죠 ㅎㅎ

레삭매냐 2021-12-01 01:08   좋아요 1 | URL
결국 질르고야 말았습니다.

1,500원 쓰겠다고 만원 쓰
는 닝겡이 바로 접니다 넵!

얄라알라 2021-11-30 23: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알라디너 누구신가의 리뷰 읽고 뒤져서 읽었는데 정말 흡족 풍족 대만족 독서였어요. 레삭매냐님께선 9일전 기억이라 감동과 디테일이 생물 수준인데, 저는 코로나 시대 읽었다는 희미한 기억만^^ 다시 읽어야겠다는 조바심이

적립금 그래서 쓰셨는지요?^^안쓰시고 12월 맞으시면 뭔가 어색하시려나요?^^ 책쟁이 레삭매냐님을 응원합니다!!^^

레삭매냐 2021-12-01 01:09   좋아요 2 | URL
전 우연히 도서관에 들렀다가
얻어 걸려서 읽게 된 책인데
아주 흡족했습니다.

격렬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라스트 울프> 질렀습니다.
분량에 비해 책값이 아주 사악
하더라구요 ^^

2021-11-30 2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01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1-12-01 00: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이 극찬하시니 완전 궁금하네요~!! 그래픽 노블도 읽어봐야 하는데 ㅋ 역시 책쟁이 레삭매냐님은 바로 구매 들어가시는군요~!! 👍 👍

레삭매냐 2021-12-01 01:12   좋아요 3 | URL
감히 일독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아마 후회하시지 않으리라
고 장담... 하고 싶습니다.

이제 올 한 해도 다 갔네요-

고양이라디오 2021-12-07 1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픽 노블 좋아요! 선리플하고 리뷰 읽을께요^^b

한나 아렌트 책은 아직 못 읽어봤는데 그래픽 노블부터 시작해야겠네요ㅎㅎ

레삭매냐 2021-12-13 15:38   좋아요 0 | URL
그래픽 노블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한나 아렌트의 책을 사냥하고 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