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옌데의 시간
카를로스 레예스.로드리고 엘게타 지음, 정승희 옮김 / 아모르문디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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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때마다 먹먹해지는 이름이 하나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적인 방식의 선거로 집권에 성공한 칠레의 대통령. 197094, 보수 우파 후보 알레산드리 호르헤를 꺾고 칠레 최고지도자에 당선되는 순간부터 반대파들로부터 살인협박과 테러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칠레 민중들을 위한 정치역정에 나선 아옌데는 결국 집권 천일 만에 미국 CIA의 사주를 받은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고 역사가 되었다. 그의 존재를 알게 된 다음부터 꾸준하게 그를 다룬 책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 가을 이 그래픽 노블이 나오고 나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하지만 바로 거부당했다. 이유는 이 책이 만화라는 점에서였다. 여전히 책이 담고 있는 컨텐츠가 아닌 외형만으로 그 책의 가치를 판단하는 방식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후, 중고로 나오길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길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검색해 보니 비치가 되어 있다는 게 아닌가! 그것도 내가 신청했던 도서관에 말이다. 살짝 울분이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 정도야 이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한켠으로 묻어 버렸다.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린 다음에 네고왕 딜로 산 배라 쿼터 아이스크림을 전리품처럼 사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귀환했다. 아니 그런데 책의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웬 놈의 글밥이 이렇게 많은 건가 그래. 눈이 다 침침할 정도다. 원래 바로 다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옌데의 대통령 당선은 많은 이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1970, 세계 경찰국가를 자임하던 미국은 사방에서 도전을 마주했다. 1959년 이미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고, 베트남에서는 끝도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아메리카 남녘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고? 닉슨 행정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트랙 1 작전을 구사했다.

 

그동안 숱하게 선거에서 우파 연합에게 패배했던 칠레 좌파들은 인민연합(UP, 우페) 깃발 아래 6개 정파가 연합해서 대선을 준비했다. 1952, 1958년 그리고 1964년 세 번의 대선에서 패배한 살바도르 아옌데가 네 번째 도선에 나섰다. 그리고 아주 근사한 차이(39,000)로 아옌데 박사가 당선됐다. 의회 인준이라는 복잡한 절차까지 거친 끝에 칠레의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아옌데는 그동안 부르주아 계급과 다국적기업으로 대표되는 세력에 의해 착취와 침탈에 시달려 온 칠레 민중들을 위한 정치혁명에 나선다.

 

대농장을 몰수해서 토지개혁에 나서고, 많은 사기업들을 국유화하는 조치에 나섰다. 그리고 칠레의 기간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구리광산의 국유화를 선포했다. 당연히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보수 우파가 지배하고 있던 언론들은 일치단결해서 사회주의자 아옌데에게 공산주의 혁명의 전도사라는 가짜 뉴스와 선동을 동원한 프레임을 씌운다. , <아옌데의 시간>의 화자는 미국 출신 저널리스트 존 니치 특파원으로 1970년 대선부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1973년까지의 시간들을 다루고 있다.

 

그동안 자신들을 위한 정부를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칠레 민중들은 아옌데 정권의 이러한 조치들을 대환영했다. 하지만, 야당 세력과 기득권층들을 똘똘 뭉쳐 사사건건 아옌데 정권의 개혁 조치에 저항했다. 그들은 준군사조직을 동원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부유층 마나님들은 냄비시위를 조직해서 정부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시작했다. 아옌데 정권이 시도하는 개혁 조치들의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기도 전에 우파의 사주를 받은 트럭운전사들의 파업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금수조치로 칠레 경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좌파는 좌파대로 좀 더 개혁적인 조치를 실시하지 못하는 인민연합 정부에 반감을 품었다. 개인적으로 아옌데는 좀 더 장기적인 차원에서 긴 시각으로 개혁을 준비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속도조절이 필요했지만, 그러기에는 아옌데와 그의 동지들에게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게다가 미국과 CIA 그리고 ITT는 트랙 2 프로젝트, 그러니까 아옌데 정권을 뒤집어 엎기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비롯한 전국에서 좌우간의 폭력투쟁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 군부에서도 끊임없이 쿠데타를 시도했다. 고육책으로 카를로스 프라츠 최고사령관을 비롯한 일단의 군 지휘관들을 내각에 영입하는 방식으로 아옌데는 위기를 돌파해 나갔다. 하지만 그래픽 노블에 등장하는 음모가들의 예언대로, 그 중에 하나는 성공할 거라는 말처럼 1973911일 사임한 프라츠 사령관에 이어 육군 최고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피노체트가 주도한 쿠데타로 아옌데와 동지들이 투쟁한 영욕의 시간들은 과거가 되었다.

 




아옌데의 죽음을 놓고 그동안 자살이나 타살이냐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아옌데의 시간>에서는 자결로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 무엇도 사회의 진보를 막을 수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가 역사 그 자체가 된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스. 그의 영광에서 종언에 이르는 연대기에 다시 한 번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생전에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마리아 칼라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옌데 박사의 묘소를 찾아 헌화하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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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8-12 20: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수서, 넘 기계적으로 하지말고 책 내용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네요.

그레이스 2021-08-12 20:22   좋아요 4 | URL
저 방금 저희 동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했습니다

레삭매냐 2021-08-12 21:42   좋아요 4 | URL
그나마 수급이 된 것으로
위안을 삼고 싶습니다.

어쨌든 책은 만났으니까요 ^^

coolcat329 2021-08-12 20:1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그래픽 노블을 단순 만화라고 거절하고 알아서 비치해놓다니 웃기네요 ㅋ
그래픽 노블이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하더라구요.
도서관에서 저도 빌려봐야 겠습니다. 생소한 나라의 역사는 이런 그래픽을 곁들여 보면 좋을거같아요.

Falstaff 2021-08-12 20:22   좋아요 6 | URL
ㅋㅋㅋㅋ 이사벨 아옌데의 책 <영혼의 집>으로 읽으세요. 무지 재미나요.

coolcat329 2021-08-12 20:23   좋아요 6 | URL
오 영혼의 집! 그러고 보니 이사벨 아옌데가 조카죠? 알겠습니다 ~책은 있습니다!

레삭매냐 2021-08-12 21:43   좋아요 4 | URL
[폴스태프님] 저도 책은 저업때애~ 수급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읽다가... 헷

레삭매냐 2021-08-12 21:44   좋아요 3 | URL
그러게요 이건 뭐 어지간한 경장
편 수준의 글밥이더라구요...

그런데 만화라고 안된다고 하다닛!

NamGiKim 2021-08-12 20: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입니다.^^

레삭매냐 2021-08-12 21:44   좋아요 3 | URL
공감하는 바입니다.

청아 2021-08-12 20: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리보기 해보니 꽤 사실적으로 그려냈네요~♡ 마치 다큐같은 느낌도 들고요! 역사 만화들 보면 도서관에서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저희 도서관에도 있길 부디~!!
(희망도서 매번 퇴짜 맞은 미미ㅠ)

레삭매냐 2021-08-12 21:45   좋아요 3 | URL
설렁설렁 그린 게 아니라
아마 당시 사진이나 영상 자료들
을 참조한 게 역력해 보입니다.

도서관에서 왠지 뻰찌를 먹으면
좀 그렇더라구요...

NamGiKim 2021-08-12 20:5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눈물흘리며 읽은 책입니다. 특히 아옌데의 마지막 순간은 ㅠㅡㅠ

레삭매냐 2021-08-12 21:47   좋아요 4 | URL
아옌데의 최후는 정말 장렬
했습니다.

무조건 항복해서 망명을
떠나라는 군부의 요구조건
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맞
서는 장면에서는 울컥!했
습니다 참말로.

내 조국과 동지들을 두고
어디를 가란 말인가.

NamGiKim 2021-08-12 21:48   좋아요 3 | URL
저도 울컥했었습니다. 특히나 아옌데가 국민들을 향해했던 그 마지막 연설은 정말 심금을 울리죠. 당시 아옌데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는군요.

2021-08-12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12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8-13 0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혼의 집」 읽고 어설프게 알던 아옌데를 더 알고 싶어졌는데,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용~ 꼭 읽어야징~~

레삭매냐 2021-08-13 06:26   좋아요 0 | URL
저는 역으로 이제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시간>을 만나야겠습니다.

독서괭 2021-08-13 0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닛 거절해놓고 들여놓은 건 뭐죠?=_=
읽고싶은 책이네요! 사진 보니 그림체도 멋진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1-08-13 06:26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유럽 스타일의 그림체
더라구요.

줬다 뺏기인가요? 아니 반대인가 -
애증의 도서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