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근처에 새롭게 <플라테로북스>라는 독립서점이 하나 생겼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이 바닥에서 책이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고(물론 읽고 뭐 그러는 것보다 사는 것으로!) 자부하는 나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분주한 일상 가운데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방문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유월의 어느 주말 마침내 플라테로북스를 방문할 기회를 잡았다. 물론 그것도 단독방문이 아닌 그 앞 빵집에 들렀다가 방문했노라고 고백하는 바이다.

 

새롭게 생긴 베이커리 전문점은 그 앞에 초라하게 덜렁 문을 연 서점과 달리 휘황찬란하기 그지 없었다. 육신의 허기와 커피로 갈증을 채우기 위해 수만 원을 쓰는 사람들에게 작은 서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물론 나도 그곳에서 육신의 즐거움을 누렸다. 나중에 남으면 집에 가서 먹어야지 하고 페이스트리와 여느 때처럼 아이스라떼를 시켜 2층 테라스에 올라가니 무더운 여름날의 선선한 바람이 나의 염통을 편안하게 맹글어준다. 아 신난다. 그리고 남으면 싸간다는 페이스트리는 그 자리에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나의 육신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게 망중한을 즐긴 다음, 플라테로북스에 들렀다. 무엇 하나 쉽게 진행되는 법이 없다.

 


서점은 작고 아담했다. 누군가의 서재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서점 주인장 양반이 서점에 비치해둔 책이 판매용이라기 보다 왠지 주인장의 인격과 독서 취향을 내보이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잠깐 스치고 간다. 그리고 내가 샀지만 읽지 않은 책들이 바로 눈에 내리 꽂혔다. 최근에 나온 제발트의 신간 그리고 로맹 가리의 책들.

 

이달의 작가로 아마 주인장 양반은 버지니아 울프를 선정하신 모양이다. 얼마 전에 중고서점에서 데려온 솔출판사 한정판인 <자신만의 방>이 있나 둘러 보는 나. 혹시라도 그 책이 있다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죄책감이 덜어지려나.

 


작은 서점을 둘러 보면서 나는 왠지 어떤 책이라도 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근데 내가 책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하나? 오늘 아침에도 도서관에 가서 책반납하면서 세 권의 책을 빌리지 않았던가. 욕심이고 모든 게 허망이다.

 

작은 독립서점이기에 재고로 책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바로 알 수가 있었다. 내가 있는 동안, 두 팀 정도가 책방에 들렀는데 역시나 그들은 책방만 둘러보고 책은 사지 않고 나갔다. 아니 내가 왜 미안해 지는 거지? 나라도 뭔가 한 권이라도 사야 한다는 강력한 주술을 되뇌이게 된다.

 


거의 망가져서 사진이 잘 찍히지도 않는 핸드폰으로 사진 몇 장을 찍다가 주인장이 비치해둔 앙드레 케르테스의 원서 <On Reading>을 만나게 된다. 전형적인 외국에서 나온 사진집인데... 이거 울림이 보통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화당에서 헝가리 출신 포토저널리스트의 책이 한 권 나와 있긴 한데 <온 리딩>은 아니었다.

 


<온 리딩>에는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책과 만나는 순간을 앙드레 케르테스 작가가 애용하는 라이카 흑백필름으로 찍은 사진들이 담겨져 있었다. 단가는 무려 USD 30였다. 하긴 미쿡이 책값이 우리나라에 비해 비싸긴 하지. 게다가 사진집이 더더욱. 이 포스팅을 날리기 전에 구글링으로 검색해 보니 <온 리딩>에서 만난 여러 사진들이 주루룩 올라 오더라. 그래서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진짜 오랜 만에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주문했다. 오늘 도서관에서 빌린 에드거 모건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이었다. 어제 램프의 요정 쿠폰 써먹겠다고 주문했다가 취소했다가 나의 귀중한 적립금 2,500원이 날아가 버려서 결국 도서관에 가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거 재밌다. 아무래도 포스터 선생의 책은 컬렉션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주문했다.

 

책방 주인장은 입고 되면 그 때 계산해도 된다고 하셨으나, 미리 결제하고 책방을 나섰다. 아마 다음 주초면 입고되겠지.

 

타이틀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소리만 했네 그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우리는 책방에 가는가냐고 묻는다면 책을 사러 간다고 말하고 싶다. 온라인 서점과 중고서점을 이용하는 나의 책구매 패턴과 상이한 구매였지만, 이런 일탈이 있어 삶이 풍요로워지는 게 아닌가 하고 내 마음대로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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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6-05 21:0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독립서점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익과 상관없이 그냥 좋아서 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하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가 싶은데 과연 그럴 수 있나 싶어요.
나라에서 지원도 하고 그러면 좋을텐데.
그래야 선진국 아닙니까?ㅠ

레삭매냐 2021-06-05 23:23   좋아요 5 | URL
책산업이라는 게 철저하게 자본주의
시스템적이면서도 또 동시에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책방이 1도 신기한 게
아니었는데, 아까 보니 손님들이
책방의 존재 자체에 대해 신기해
하던 점이 참...

독서괭 2021-06-05 21: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 뒤지지 않으시는 거 맞는 것 같고요, 아이스라떼에 서점구경 부럽습니다😢

레삭매냐 2021-06-05 23:24   좋아요 5 | URL
아이스라떼도 좋았지만,
곁들었던 페이스트리가 정말
짱이었습니다. 아 또 먹고잡네요.

미미 2021-06-05 21: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작은 서점 둘러보셨다는 글만 읽어도 저는 이미 미안해지네요.^^;ㅋㅋ
저도 빈손으로 못나왔을 거예요!
아마 로맹가리의 책을 샀을 듯 합니다. 덕분에 구경 잘했어요!

레삭매냐 2021-06-05 23:25   좋아요 5 | URL
제가 달팽이 속도로 로맹 가리
의 전작 읽기를 하고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다섯 권의 가리
형님 책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답니다 :>

작고하신 지 40년이 넘었는데
도 새로운 책들이 꾸역꾸역
나오는 걸 보면 참 대단합니다.

새파랑 2021-06-05 23:2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책이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멋지네요. 역시 레삭매냐님^^ 저도 <전망좋은 방> 읽어야 하는데 ㅎㅎ
사진보니 줌파의 책과 스토너, 슬픔이여 안녕이 눈에 확 들어오네요(저에게 별 7개짜리 책들~~)
검색해보니까 군포던데 저도 여기랑 그 옆에 있는 빵집도 가보고 싶네요 ~!!

레삭매냐 2021-06-05 23:27   좋아요 5 | URL
그만 어줍잖은 책부심이 폭발해
버린 모양입니다...

전 오늘부터 <전망 좋은 방> 읽기
시작했는데 프리뷰를 해서 그런지
술술 넘어 가더라구요. 뭐 책을
주문했으니 좀 쉬엄쉬엄 가렵니다.

낭중에 건너편 빵집 포스팅도 한
번 해보겠습니다. 기대해 주셔요.

붕붕툐툐 2021-06-06 00: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플라테로북스>를 먼저 찾아본 후 그 앞 빵집을 알아보고, 같은 코스로 방문한다.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1-06-06 18:07   좋아요 1 | URL
아마 빵집과 책방의 스케일
차이에 놀라실 거라고 장담
하는 바입니다.

페넬로페 2021-06-06 00:48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전엔 외출하면 서점에 꼭 한번씩은 갔었는데 요즘은 정말 안가는것 같아요~~
서점, 또는 독립서점에 가면 책을 하나쯤은 사들고 와야 하는데 그래서 좀 미안하네요^^
페이스트리에서 웃고 갑니다
사실 그게 남겨둘 양은 아닌듯해요 ㅎㅎ

레삭매냐 2021-06-06 18:09   좋아요 2 | URL
이제 책 구매의 패턴이 책방
에서 온라인으로 바뀐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대형서점에 가서 실물
은 보지만 실제로 구매로 이
어지지는 않더라구요.

작은 책방은 이야기가 다르
지만 말이죠.

페이스트리를 푸짐하게 판단
한 저의 오판이었습니다.

mini74 2021-06-06 13: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치킨하고 빵은 원래 남기는 거 아닙니다 ㅎㅎ 독립서점들이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북클럽이나 혹은 글쓰기 수업. 치유의 책읽기 등 다양한 행사를 하더라고요. 그렇지 않음 힘들다고ㅠㅠ

레삭매냐 2021-06-06 18:10   좋아요 2 | URL
예전에 일산에 있는 어느 서점
에서 션한 맥쥬도 판다고 하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
나 음주를 하게 되면 차를 데려
올 수가 없어서 방문을 포기했
던 생각이 문득 드네요.

말씀하신 대로 책방이 책의 유통
과 판매라는 고유의 업무보다
문화거점으로 거듭나는 상황이
요즘의 트렌드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