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체 게바라 평전
시드 제이콥슨 외 지음, 이희수 옮김 / 토트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처음으로 만난 에르네스토 게바라, 우리에게는 혁명적인 이름인 체 게바라로 더 알려진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를 만난 건 장 코르미에의 평전을 통해서였다. 한 때 신세를 지던 동생은 책의 표지에 나온 예수보다도 더 유명하다는 말에 불끈했던 기억이 난다.

 

젊은 시절의 조국 아르헨티나에서 그 어렵다는 의사시험을 패스하고 의사가 된 체 게바라는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위험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위험한 혁명가의 삶에 투신했다. 결정적 계기는 이십대에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도는 모터사이클 여행이 그 계기였다. 청년 게바라의 눈에 천혜의 조건을 두루 갖춘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에 사는 민중들이 가난하고 억압된 삶을 살게 된 주 이유 중의 하나는 미제국주의와 매판 자본가들 때문이었다.

 

책으로 만난 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제국(諸國)의 비참한 현실을 직접 보고 들은 청년 게바라는 혁명에 투신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과테말라에 들어선 아르벤스 민주정권을 군부 쿠데타를 획책해서 전복시켜 버렸다. 모든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과 미국 기업들의 이익을 해치는 일체의 행위와 도전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여러나라를 돌아 멕시코에 도착한 게바라는 망명 중이던 피델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 쿠바에서 벌어지고 있던 무장혁명에 동참하게 된다.

 

체 게바라를 포함한 일단의 게릴라 전사들은 어렵게 장만한 자금으로 그란마 호를 타고 조국 쿠바에 상륙해서 고난 가운데 투쟁을 이어나갔다. 지병인 천식을 앓으면서도 코만단떼 게바라는 혁명의 최전선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투지로 결국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서방세계의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 혁명에 대한 인식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체 게바라에 대해서는 강경한 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미국의 안마당으로 불리던 쿠바가 일단의 국유화 조치와 반자본주의 성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쿠바의 혁명지도부는 경제지원을 바탕으로 유혹하던 소련 측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반세기 가량 진행된 미국의 금수조치는 갈등은 최고조로 치닫기 시작했고, 결국 쿠바 미사일 사태로 전 세계는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가는 미증유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냉전의 격돌이 바로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활약한 쿠바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세계 곳곳에 혁명을 수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체 게바라의 존재가 피델 카스트로에게는 점점 더 부담으로 작동했던 모양이다. 결국 체 게바라는 쿠바에서 맡고 있던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비밀리에 아프리카 콩고로 혁명의 무대를 옮겼다. 1965424일 체는 열댓명의 동지들과 함께 콩고에 도착했다. 문제는 바티스타 독재정권으로부터 해방이라는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혁명전쟁을 치렀던 쿠바와 달리, 체 게바라가 마주한 콩고에서의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군벌에 가까운 콩고 반군들이 이방인인 체 게바라의 지휘를 따르려고도 하지 않았고, 반군의 기강은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이 성공하길 바라는 게 오히려 기적일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콩고에서의 체 게바라 행적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그래픽 노블을 통해 적게나마 그의 활동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체는 당시 독립의 열기가 뜨거웠던 아프리카가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라고 생각하고 혁명전선의 최일선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1959년 이래 체와 각별한 관계였던 이집트의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는 체의 콩고에서의 모험이 현명하지 못한 것이며, 그가 콩고에 간다면 타잔이 될 거라고 예언했는데 그의 예언은 맞아 들었다.

 

그렇게 한 번의 성공과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체 게바라는 대머리 중년 사업가로 변장해서 이번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의 해방을 도모했다. 그는 여러 후보지 중에서 포코 이론에 따른 혁명거점으로 교통의 요지였던 볼리비아를 선택했다. 1964년 군부 쿠데타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르네 바리엔토스는 정부군을 동원해서 1967624, 산후안 축제 전날 카티바 광산의 광부들을 학살했다. 이 사건을 모티프로 해서 1971년에는 <산후안의 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도 했다.

 

체 게바라는 1966113,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를 거쳐 볼리비아의 라파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3일 뒤에는 남부의 발레그란데 지역으로 떠나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다. 체는 볼리비아에서 쿠바에서와 같은 빛나는 승리를 기대했지만, 그가 처한 상황은 쿠바와 달랐다. 동료전사이자 혁명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사람으로 이방인인 체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 주었지만, 볼리비아에서는 외부인이 자신들의 혁명운동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게릴라 전투요원의 모집도 여의치 않아 고작 50여명 남짓한 병사들이 전부였다.

 

요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자국에 침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볼리비아 특수부대와 미국 CIA의 합동으로 체의 추격에 나섰다. 쿠바망명자 출신의 펠렉스 로드리게스가 CIA 소속으로 활동했고, 나치 전범 클라우스 바르비가 체의 추격에 조언했다고 한다. 결국 체의 게릴라 부대는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쿠바에서처럼 볼리비아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면서 체의 게릴라 투쟁은 사실상 실패했다.

 


1967108,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볼리비아 특수부대에 포위된 체는 교전 끝에 부상당한 채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볼리비아 대통령 르네 바리엔테스는 재판도 없이 체의 처형을 명령했다. 39세의 한창인 나이에 비운의 혁명가는 그렇게 세상의 떠났다.

 

훗날 전직 CIA 요원은 체 게바라를 라틴 아메리카의 기존 질서를 뒤흔들 만한 능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혁명의 기운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순치화된 21세기에 체 게바라는 반항의 상징으로서의 실존은 사라지고, 티셔츠에 담긴 이미지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21-05-25 13: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체의 삶을 통해서 ‘혁명‘과 ‘정치‘는 다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체의 삶이 짧게 마무리되었기에, 그가 우리 곁에서 ‘영원한 혁명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레삭매냐 2021-05-25 17:34   좋아요 2 | URL
너무 적절하신 지적이었습니다.

혁명과 이후의 정치는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체는 나머지
를 피델 카스트로에게 맡기고 자신
은 혁명에 투신했던 게 아닌가 싶
습니다.

때이른 죽음이 전설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