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칸드
아민 말루프 지음 / 정신세계사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기준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선택은 내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책이다. 상당히 주관적인 기준이다. 나는 재밌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음은 무언가 새로운 정보와 지평을 넓혀주는 그런 책이다. 내가 그동안 모르고 살던 분야에 대해 알려주는 책들을 나는 사랑한다. 참고로 나는 주로 문학을 즐겨 읽는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새로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책이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만난 아민 말루프의 <사마르칸드>는 좋은 책이 분명하다. 심지어 재밌기까지 했다.

 

이 책은 오래 전에 절판됐다. 그래서 새 책으로 만나는 건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도서관에도 오래 돼서 그런지 어쩐지 대여목록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유이한 선택은 책바다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중고로 구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시간이 좀 걸리고 반납의 압박이 있었고, 후자는 좀처럼 구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가격도 비정상적으로 비쌌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서울책보고 온라인 서비스에서 이 책을 찾아냈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주문장을 날렸다. 책값이 배송료보다 싸다는 점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책이 주말에 도착했고, 책에 인쇄된 문자에 허벌한 사람처럼 그렇게 달려들었다.

 

기이하게도 1912년 타이태닉호의 침몰 타령을 하며 시작된 소설은 독자들을 양탄자의 나라 11세기 페르시아로 인도한다. 그러니까 대략 천 년 전의 일이다. 실존했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아민 말루프 작가의 장기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4부의 구성된 첫 두 이야기의 주인공은 페르시아 출신 시인이자 과학자, 점성가, 의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오마르 하이얌(1048.5.18. ~ 1131.12.4.)이다.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잘 알 수가 없는 당대 인물들과 달리 천문학에 능통했던 하이얌은 자신의 생몰 연대를 별자리의 운행을 통해 정확하게 기록에 남겼다. 소설의 시작은 4행시 루바이의 대가였던 시인의 이십대 시절을 그린다.

 

이란 북부 호라산 지방의 니샤푸르에서 태어난 하이얌은 이미 젊은 나이에 대학자로서의 위용을 자랑했다.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마르칸드의 거리에서 위대한 스승이자 이성의 사도였던 아비켄나의 제자 자베르 영감이 거리의 부랑배들에게 봉변당하는 모습을 보고 분연하게 도전했다가 자신 역시 몰매를 맞는다. 카디(재판관) 아부타헤르 앞에 끌려 나간 하이얌은 카디의 현명한 판결과 중재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하이얌의 후원자로 변신한 아부타헤르는 하이얌을 사마르칸드의 절대군주 나스르 칸에게 소개한다. 그에 앞서 부하라 출신의 젊은 과부 자한느는 궁정 시인으로 멋진 시를 낭송하고 나스르 칸에게 상으로 무려 46개의 금화를 입에 무는 기염을 토한다. 물욕의 상징인 금화를 혐오하던 지식인 하이얌은 거의 도발에 가까운 대범한 시로 절대군주에게 도전한다. 젊은 시인의 위태로운 줄타기는 성공했고, 나스르 칸의 친구가 되었다. 소설 초반의 결정적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아부타헤르는 오마르 하이얌에게 빈 공책을 주고, 그만의 루바이를 비밀리에 쓰라고 제안한다. 어떤 점에서 시나 문학이 권력자들에게 불편한 그런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지적하고 싶었던 것일까.

 

셀주크 투르크 술탄과 당대의 재상 니잠 엘물크 그리고 알라무트 요새에 자객단 아사신파를 창조한 하산 사바흐가 빚는 권력투쟁의 연대기는 거의 신세계처럼 다가왔다. 지식인 하이얌은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은 엄정 중립을 지키면서, 거의 곡예에 가까운 모습을 선보인다. 술탄을 정점으로 한 권력투쟁의 결말은 모두에게 비극이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동시에 신화나 전설에 가까운 천 년 전의 이야기들이 이렇게 매력적일 수가.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 <사마르칸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1부와 2부가 11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이 살던 사마르칸드를 그리고 있다면 3부와 4부는 19세기말 그리고 20세기 초의 아이란(아이라니아 바에자:아리아인들의 땅)의 급변하는 정세를 다룬다. 천 년 전의 페르시아와 위대한 시인 오마르 하이얌은 당연히 몰랐다고 하더라도, 근대 이란에 대해 이렇게 무지했나 싶을 정도다.

 

두 개의 서로 상이한 이야기를 연결하는 건 바로 하이얌이 남긴 <사마르칸드의 원고>, <루바이야트>. 역사 속에서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 루바이야트를 찾아나선 미국 아나폴리스 출신의 벤자민 O. 르사즈는 다시 한 번 독자를 신비한 동방의 세계로 인도한다. 외할아버지가 사는 파리에서 앙리 로슈포르 후작을 만나고, 다시 그를 통해 페르시아의 지식인 세이예드 자말레딘을 알게 된다. 르사즈의 미들 네임인 O가 올리버 같은 서양 이름이 아니라 바로 오마르하이얌에서 왔다는 건 이제 비밀이 아니다.

 

세기말 서구열강의 각축장이 된 페르시아에 입국해서 하이얌의 <루바이야트>를 추적하던 미스터 르사즈는 새로운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테헤란에 대한 정경을 기록으로 남긴다. 페르시아의 오랜 도시들인 이스파한이나 키르만, 시라즈 같은 고대 도시들과 달리 신도시 테헤란에는 역사가 부재하다는 사실을 그는 파악한다. 격심한 빈부의 격차 그리고 낙후된 도시 시설들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증언한다. 서구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혁명의 파도 앞에 페르시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도로와 철도 부설권 그리고 우편업무까지 모조리 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 침탈당한 페르시아의 모습은 구한말 우리네 그것과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페르시아 민중들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나는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회교혁명은 알고 있지만, 그전에 이미 이런 혁명의 기운이 있었다는 건 미처 알지 못했다. 르사즈가 테헤란에 체류하던 189651, 카자르 왕조의 나세드린 샤가 광신도 미르자 레자에게 의해 암살당했다. 마치 수백 년 전 음지에서 암약하던 아사신파가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샤의 암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르사즈는 열혈 청년 동지 파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체포의 위기를 모면하고, 샤에게 억울하게 처형된 반대파 바비교도 집안 여자들의 안다룬(안채)’으로 도피한다. 그동안 르사즈는 단기속성으로 페르시아어를 익혔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미국인이 페르시아어를 할 수 있다는 설정을 위한 탁월한 세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르사즈는 샤의 손녀 시린느 공주의 도움으로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온다.

 

고향인 아나폴리스에서 르사즈는 동방의 대모험가 취급을 받게 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파리에서 테헤란으로 가는 데 한 달이 걸렸다고 했던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시린느 공주의 현지 보고를 담은 편지로 르사즈는 페르시아 내부의 현지사정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 수가 있었다. 새로운 샤의 요양 자금을 얻기 위해 페르시아는 러시아에게 무역독점권을 부여했고,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를 벌이고 있던 러시아는 상대방의 견제를 의식해서 벨기에의 레오폴드 2(콩고 식민지를 악랄하게 수탈한 바로 위인이다)에게 세무 업무를 대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다고 해서 외세에 의한 수탈이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수모를 견딜 수 없었던 페르시아의 상인들은 비폭력 바스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샤는 절대왕정 대신 입헌제 도입을 선언하게 되었다. 물론, 이 와중에서 다수의 무슬림 종교지도자들은 서구식 입헌제와 민주주의가 이교도의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때가 1906년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미스터 르사즈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페르시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불꽃은 타브리즈에서 화려하고 장엄하게 타오른다. 물론 그 자리에 우리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르사즈가 있었던 것은 불문가지다. 모사데그와 호메이니의 회교 혁명 이전인 20세기 초반 페르시아, 오늘날의 이란에 이런 혁명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1859년 영국 시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에 의해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가 서방 세계에 소개되었다. 그럼에도, 진본 <사마르칸드의 원고>를 찾겠다는 집념으로 똘똘 뭉친 미국인 르사즈의 인내와 패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가 어렵게 손에 넣은 <루바이야트>는 타이태닉호와 함께 대서양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천 년 전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장엄한 엔딩으로 이보다 더 강렬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나의 <사마르칸드> 읽기는 마치 한 편의 소설을 통해 두 편의 작품과 만난 그런 경험이었다. 800여년의 세월을 건너뛰면서도 무리 없는 전개와 위대한 시인이 남긴 <루바이야트>를 통한 세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의 전승이라는 주제를 고른 아민 말루프의 탁월한 선택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이런 훌륭한 책이 절판되었다는 점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저자의 다른 책을 너무 만나보고 싶어서 <마니>를 오늘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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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4-05 20: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 타사 책방잉크에서 이 책이 제 취향이라고 떠서 놀랐어요.ㅋㅋㅋㅋ말씀대로 주변 도서관에 전무해서 중고알람 걸어놓고 꿩대신 닭? 심정으로 이 작가님 다른 책 찜했어요. 좋은 평가 하나라도 있음 절판일 경우 e북이라도 내줬음 싶네요.

레삭매냐 2021-04-06 01:40   좋아요 1 | URL
아이란[이란]이 아리아인의 땅을
의미한다는 걸 그리고 파라다이스
의 어원도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했
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전 올드스쿨 스탈이라 그런지 전통
적 책만 보게 되네요. 옛날 사람...

개인적으로는 타리크 알리의 지중
해 5부작 가운데 나머지 3권도
절실하게 번역해 주시길 바랍니다.

바람돌이 2021-04-05 21: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뭔가 굉장하 얽히고 설켰을 느낌늬 책인데요. 힘들게 구했는데 책이 좋아서 참 다행입니다.

레삭매냐 2021-04-06 01:41   좋아요 1 | URL
내용이 하도 광범위해서 저의 보잘
것 없는 리뷰에 다 못담았습니다.

4월에는 아민 말루프를 읽겠습니다.

nama 2021-04-05 22: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990년대에 갈 뻔했던 사마르칸드. 호기심에 구입해두고 읽지는 않았는데 이런 훌륭한 책이었네요. 헌책으로 버릴 뻔 했어요.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1-04-06 01:42   좋아요 1 | URL
우리 책쟁이들은 집에 있는 책들을
읽습니다. 일단 가지고 있다면 언젠
가는 읽을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청아 2021-05-07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민 말루프로 당선이라 더 의미있고 멋집니다. 축하드려요~이 당선을 부스터로 재출간이 되길!!^^*

레삭매냐 2021-05-07 20:14   좋아요 2 | URL
예전에 나온 책은 물론이고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책들도
속히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5-07 17: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레삭매냐 2021-05-07 20:13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초딩 2021-05-08 1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지척!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레삭매냐 2021-05-08 21: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모쪼록 아민 말루프
의 새로운 책들이 나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