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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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읽겠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 책들이 있다. 그 중에서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은 결국 몇 차례 시도 끝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한 번 집어 들었다가 나가 떨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너튜브에서 유시민 선생의 <알릴레오북> 짤을 만나게 되었고, 선생이 다룬 책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펼쳐 들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이윤기 역자의 번역부터 시작해서 숱한 버전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유 중이다. 이번에도 선택은 역시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윤기 역자의 중역을 골랐다. 예전에 빨간책방의 영향 탓이라고나 할까. 이번에 알릴레오에서 정본으로 삼은 책은 이윤기 역자의 책이 아니더라.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이 중요하기 때문에 알릴레오북을 참조만 하고 건성으로 넘겼다. 주인공 알렉시스 조르바가 모름지기 절대 자유인이라고 하는데, 타인의 생각에 속박되고 싶지 않은 독서인의 기개라고나 할까. 그래도 조금의 정보 정도는 얻어도 되지 않나 자신을 합리화시켜 본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은 1946년이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은 출판으로부터 30년 정도 전인 1916년 정도라고 한다.

 

카프카즈의 그리스인 동포들을 구하러 가자는 절친의 호소를 뒤로 하고 크레타 섬의 갈탄광 경영을 위해 아테네의 외항인 피레우스에서 배에 오르는 35세의 화자. 그는 그곳에서 65세의 알렉시스 조르바와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된다. 화자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투영한 그리스 지식인/먹물의 표상이라면, 뱃사람으로 세상 안해본 일이 없는 남자 조르바는 그야말로 동물 아니 짐승에 가까운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지닌 남자다. 전자가 실천력이 떨어지는 이상주의자라면, 후자는 오직 현재만 사는 그런 철저한 현실주의 화신 같은 남자다. 시작부터 저자가 준비한 주인공 콤비는 공간을 크레타 섬으로 옮겨 숱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준비를 마친다.

 

단테의 <신곡>을 여행 중에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 먹물 화자에 비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조르바는 좌충우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천력을 보여준다. 뻔뻔하게 카바레 출신 가수 마담 오르탕스에게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모습을 보라. 그가 뜯어 먹는 닭고기와 위장에 때려 붓는 포도주는 바로 그런 행동을 위한 연료다. 그가 부불리나라고 부르는 마담 오르탕스를 사랑하는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왠지 그런 조르바에게서 카사노바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유럽을 주유하며 추억을 쌓은 젊은 지식인이 오지 않은 과거에 집착하는 동안, 우리의 주인공 조르바 씨는 쉴 새 없이 자신의 과거 무용담을 자랑하고 보스를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갈탄광의 모든 업무를 해치운다. 자신의 아들 뻘인 보스를 위해 요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들의 나라인 그리스인이면서도 독신(瀆神)도 두려워하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보스의 서술이 진행될수록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조르바가 모습이 현현된다.

 

알릴레오북의 진행자들에 따르면, 진정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근심과 걱정이 바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들이다. 아마 그 중에서도 최고는 물질적 결핍이 아닐까? 그놈의 먹고사니즘과 일용한 양식을 위해서 우리는 물질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런 속박된 존재들이다. 게다가 소비만능주의 시대에, 굳이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들이 우리네 삶을 풍족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모든 미디어를 동원해서 사방에서 압박을 가하지 않는가.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다면 그런 기대와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데 미스터 조르바 같은 배포가 없다면 그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리라.

 


(문지 원서 버전에서는 "용 아저씨"로 번역이 되어 있다. 난 오그레가 사람 이름인 줄 알았네 그래.)


몇 번이나 초반부를 읽은 덕분에 기시감 때문인지 진도가 쑥쑥 나간다. 화자 오그레에게 조르바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동시에 연애지상주의자이기도 하다. 동네 청년들을 들썩이게 하는 젊은 과부를 맺어 주려는 그의 시도는 젊은 스토아주의자에게 걸맞지 않는 옷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로 말해,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게 낡은 에피쿠로스주의자의 신념이었다. 젊은 시절, 터키인들이나 불가리아인들과 격렬한 투쟁을 벌인 자신의 경험을 셰에라자드처럼 오그레에게 들려주며, 모두가 헛된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젊은 시절 발칸 반도는 물론이고 러시아까지 종횡무진 누비며 사랑의 전도사였던 늙은 전사의 회고는 마치, 오스만 터키에 대항하는 그리스 민족주의의 거센 물결을 목격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 다음부터는 실패의 연속이다. 고가 케이블을 설치해서 수도원 부근의 목재까지 팔아먹겠다는 계획을 세운 조르바는 고가 케이블 제작에 필요한 물품 구매를 위해 칸디아로 간다. 그곳에서 만난 롤라라는 젊은 카바레 가수에게 화자의 피 같은 돈을 탕진한다. 이 얼마나 뻔뻔한 행동이던가. 자하리아라는 반미치광이 수도사를 만나 수도원에 불을 지르라고 사주를 하지 않나... 이성보다 그때 그때 자기 감성에 충실한 인간 조르바의 모습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르게 된다. 동네 젊은 과부를 사모하던 청년의 죽음에 이어(비극의 전주곡이다) 조르바의 끝없는 부추김에 힘입어 결국 용단을 내린 화자는 과부를 찾는다. 이 장면에서는 그놈의 오렌지물이 기억에 남는다.

 

과부의 죽음으로 시작된 재난은 결국 화자와 조르바의 갈탄광 사업까지 모조리 말아 먹게 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무존재와 거덜의 순간, 화자는 지고의 행복감을 느낀다. 한 마디로 말해 나의 모든 것을 비워야 비로소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걸까. 오로지 그전부터 준비해오던 붓다에 대한 원고 하나를 마무리한 뒤, 결국 화자는 조르바와 영원히 이별한다. 그리고 세상을 주유하던 화자는 희대의 영걸 알렉시스 조르바에 대한 연대기를 남기기로 결심한다. 아무리 오디세우스의 활약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호메로스 같은 시인이 없다면 그의 영웅적 활약은 후대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런 점에서 화자는 호메로스와 오디세우스가 세운 그리스적 전통을 그대로 따른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 읽으면서 나는 지난 수년 동안 옥죄어 오던 조르바 읽기로부터 해방되었다. 아거야말로 조르바가 그렇게 목청 높여 주창하던 자유가 아니던가. 물론 그런 작은 성취 뒤에 찾아오는 허무는 또 어쩔 것인가.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부분은 마담 오르탕스가 죽고 나서 곡쟁이들과 마을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는 그녀의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경쟁에 대한 서술 장면이었다. 사람이 죽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뒤지면 안된다는 급한 마음에 곡을 하지 않나, 고열로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닭과 토끼들을 삶아 잔치를 벌이는 그들의 모습 앞에 그야말로 웃픈 심정이 들었다.

 

녹로 돌리는데 귀찮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절단하는 조르바가 들려주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는 천일야화처럼 매력적이다. 젊은 시절에는 애국자로 터키인과 불가리아인들을 마구 죽이는 게릴라 전사였다고 고백하지 않던가. 누가 이런 영웅담을 마다할 것인가. 카프카즈의 50만 그리스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친구 스타브리다키와 달리 화자는 언제나 말과 지식만 앞세우는 그런 펜대 운전사였을 뿐이다.

 

조르바는 자신의 보스에게 지난 35년 동안, 한 번이라도 치열하게 산 적이 있었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린다. 화자는 그렇기 못했기에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야생의 짐승 같은 조르바의 매력에 흠뻑 취해 버린 것이다. 언제나 주저하다가 모든 기회를 날려 버린 자신의 과거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조르바는 크레타 섬에서의 이별 이후에도 화자가 계속해서 바보짓을 멈출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지식인들이 무언가 터무니없는 짓을 하기에는 너무 영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무학의 조르바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바로 자유를 속박하는 억압의 본질이다.

 

내가 만약 젊은 날에 조르바를 읽었다면 아마 장대한 경험을 한 꼰대의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지 않았을까. 화자보다는 언제나 에너지 넘치는 조르바에 가까운 나이가 되자,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늙다리 조르바의 배짱에 감탄하게 된다. 누구는 이 책을 3, 4독했다고 하던데 나는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이나 조르바를 다시 만나게 될지 궁금하다. 다른 버전의 책들이 많으니, 그 때마다 새로운 책들을 만나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나저나 나도 마냥 자유롭고 싶구나, 조르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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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08 1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조르바는 영화도 좋았음요 ㅋㅋ홋타 요시에 책 읽으면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읽게 됩니다 ^0^

레삭매냐 2021-02-08 10:52   좋아요 3 | URL
네이!~ 그렇지 않아도 영화는 수해배
두었답니다 :> 아직 자막을 구하지
못해서리 못보고 있네요.

홉스봄 선생의 <혁명의 시대>는 작년
말에 시작했는데... 반짝 읽고는 잠시
휴지 중이네요.

일단 레비-스트로스 책은 어디에 있는
지부터 ㅋㅋㅋ 감사합니다, 스캇트님.

막시무스 2021-02-08 13: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조르바를 첨부터 다시 읽은듯한 감동적인 리뷰 감사드립니다! 조르바는 어떤 형태의 글을 읽어도 사랑인것 같아요! 조르바 에너지로 뜨끈뜨끈한 하루되십시요!ㅎ

레삭매냐 2021-02-08 13:34   좋아요 2 | URL
제가 이 책에 네다섯번이나 도전했다가
실패해서, 내 이번엔 반다시 완독하리라
작정하고 덤벼서 3일 만에 다 읽었네요.

점심으로 때려 넣은 뼈해장국처럼 뜨끈
뜨끈 졸바의 에너지, 만빵입니다 !!!

bookholic 2021-02-08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렵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렵게 읽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인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뚯?^^

레삭매냐 2021-02-08 17:56   좋아요 2 | URL
종교나 이데올로기 그리고 무엇보다
먹고사니즘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조르바처럼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요.

적어주신 바에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이미 머리는 자유를 희구하려는 시도에
차단막을 치는 거죠.

얄븐독자 2021-02-08 2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조르바라는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제 입장에선 만약 세상 모든 인간이 조르바와 같은 자유인이라면... 하고 가정해볼때 과연 그 세상은 유토피아 같을까? 저는 아닌것 같습니다. 천하의 난봉꾼 같은 조르바라는 마초적 남자를 너무 자유인 프레임으로 포장한게 아닐까 싶어 저는 조르바라는 작품을 불편케만 읽은 기억입니다 ㅋ

막시무스 2021-02-08 21:31   좋아요 2 | URL
저도 얄븐독자님이 지적하신 마초 이미지에 공감합니다. 문학적 캐릭터나 레토릭임을 감안하더라도 조르바(작가)의 여성관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작가가 제시하는 자유라는것이 보편성을 가장한 국가, 사회, 계층, 종교 등이 강요하는 왜곡된 가치관, 부당한 도덕관, 폭력적인 편견 등에서 얼마나 당당할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보면 조르바의 자유가 방종이 아니라 쉽게 실행에 옮길수 있는 그런 자유인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2021년에 맞게 재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럴수록 자유인의 의미는 더욱 더 진정한 자유인으로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레삭매냐 2021-02-09 10:41   좋아요 1 | URL
상마초 난봉꾼 조르바 같은 닝겡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팍팍할까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916년,
그리고 알렉시스 조르바가 나이가
65세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전근대적 사고의 소유자일 것 같습
니다.

지지부진했던 독서가 독자와는 맞지
않는 너무 강렬한 캐릭터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붕붕툐툐 2021-02-08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 조르바는 자유죵~ 완독 축하드려요~👏👏👏

레삭매냐 2021-02-09 17:0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수년간 저의 애물 덩어리였던
책을 마침내 읽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