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역대급 한파가 몰아 닥쳤다.

어느 뉴스에서는 2020년이 가장 따뜻했다고 하는데, 그런 뉘우스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현재를 사는 우리 닝겡들에게는 지금 눈앞의 추위가 가장 추워 보이니 말이다.

 

당장 우리 사무실(2)에서 1층이 얼어붙어서 탕비실로 물이 역류한다. 겨울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아니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관리소장님은 조치를 안해 주시는 건지 모르겠다. 1층이 물바다가 되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1층 배수관이 얼어 2층의 우리가 아침마다 물을 퍼내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긴 예전에 꽤 오랫동안 한파 때문에 사는 동네에 빨래대란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빨랫감을 싸가지고 빨래방을 찾았다가 그야말로 장사진을 친 모습에 급하게 철수했던 적도 있다. 놀랍군. 내가 사는 동네가 좀 중심가에서 외진 곳인데, 이곳까지 빨래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걸 보면 급하긴 했구나 싶기도 하다.

 

자주 쓰지 않아서인지 어쨌는지 차도 방전이 돼서 어제 점퍼를 잡으려고 보험사 긴급서비스를 요청했다. 아저씨는 30분만에 오신다고 했는데, 실제는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래도 승질은 조금도 내지 않았다. 그저 와주신 것만으로도 어찌나 감지덕지하던지. 인근 이맛트에서는 장장 세 시간이나 걸려서 긴급출동(전혀 긴급하지 않은)이 도착했다나 어쨌다나.

 

인간이 자연을 정복했네 어째네 하지만, 꼴랑 이런 추위에 하나에 닝겡들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자연 어르신께서 어떤 생각을 하실지 그냥 궁금해졌다.

 

원래 빨래 때문에 벌어진 물바다에 대한 공동체적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이 추위에 배수관이 어는 건 기본이다. 그래서 아파트 관리실에서 하루에도 수차례 당분간 빨래를 자제해 달라는 방송을 앵무새처럼 틀어대고 있다. 그런데도! 당장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몰지각한 닝겡들이 아래층에 사는 이들을 눈꼽만도 생각하지 않은 채, 세탁기를 돌리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저층에 사시는 분들은 아닌 밤중에 물벼락을 맞아야 했고, 며칠 전 나의 모습처럼 각종 도구들을 동원해서 대야인지 바께쓰인지에 물을 퍼 날라야했다. 아파트에 사는 게 어느덧 표준이 되어 버린 21세기에 이 정도로 우리의 공동체 삶에 대한 협조와 인식이 부족한 지 그리고 나 하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작태가 넘실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사태를 통해 알게 됐다. 동네 커뮤너티에는 빨래 좀 고만하라는 글들이 시시각각 올라오고 있는 중이다.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는 경영효율화(라고 적고 경비 절감이라고 읽는다)를 위해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들을 모두 해고한 모양이다. 지난주 수요일에 내린 폭설 때문에 아무도 눈을 치우지 않아 멍멍이판이 됐다. 물론 아파트 경비원님들이 눈을 치우시는 분들은 아니겠지만, 그분들 덕분에 아파트 입주민들은 직접 제설작업하는 수고를 덜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자리를 빌어 경비원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의 경비원 분들을 모두 해고한 아파트 단지에 사시는 분은, 입주자회의에서 경비원 분들 해고에 앞장선 입주자들이 나와서 눈을 치우라고 아우성이다. 이런 썰들은 정말 소설로 써도 흥미진진할 것 같다. 아마 좀 더 흥미롭게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극적이고 과장 섞인 양념도 필요할 것 같다.

 

암튼 빨래를 하기 위해 갖가지 방안들이 제시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농업용 배수로(?)를 사서 화장실로 세탁기에서 나오는 물을 빼는 방법으로 추정된다. 물론 그 방법도 송수관이 아예 동파되어 작동하지 않는다면 만사휴의다. 예의 배수로? 배수관은 10미터에 만원도 하지 않는다고 가격 부담도 덜하다고 한다.

 

어느 신축 아파트에서는 동파와 난방이 둘 다 되지 않아 지난 목요일부터 고생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니 몇 년 전에 다른 단지에서 난방공사를 가을부터 시작했다가 이러저러한 사정과 비리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는 통에 한 겨울에 난방이 되지 않아 집에서 야외용 텐트를 치고 살기도 했었다. 공사 시점부터 시작해서 비용, 인력의 수급, 관리 이슈 등등해서 모든 게 문제였다. 아 참, 코로나 3차 대유행과 강추위로 아무 데도 나다니지 못하게 되면서 집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울분과 넘치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못한 아해들이 방방 뛰기 시작하자 발생한 층간소음 문제도 거의 폭발 수준이다. 작년에 읽은 정소현 작가의 <가해자들>이 바로 생각났다.

 

어쨌든 당분간은 원활한 공동체의 삶을 위해서라도 빨래를 자제합시다. 내가 편안하자고, 다른 이에게 불편의 원인을 제공하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당분간 세탁기를 돌리지 못할 것 같아, 어젯밤에 손으로 속옷 빨래를 했다. 세상살이 만만치 않구나.

 


이 컷은 맹추위에 시달리는 즁생들의 허기를 자극하기 위한 염장샷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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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1-10 09: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난리네요 ㅜㅜ
시간이 갈 수록 미끄러져 엉덩방아 찍으면 ㅜㅜ 이제 병원 가서 물리 치료 받아야할판인데, 경비 이저씨들 모두 해고는 이런 난리에 더 이해가지 않네요 ㅜㅜ
저희는 단지 안에서도 눈을 이저씨들이 치워주셔도 차들이 언덕 앞에서 긴장하는데 에효.

레삭매냐 2021-01-10 12:34   좋아요 2 | URL
음식 배달 서비스도 그렇고,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온
일들이 누군가의 수고와 노동을
착취해온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오직 비용절감만
외쳐대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합니다.

mini74 2021-01-10 10: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갈수록 타인에게 야박해지는 것 같아 씁쓸해요. 저희도 며칠전부터 계속 안내방송을 하고 역류 피해를 이야기하는 거 보면 기어코 돌리는 몇 몇 집이 있네요 저희 집 빨래 산처럼 쌓았더니,강아지가 너무 좋아해요 ~

레삭매냐 2021-01-10 12:36   좋아요 2 | URL
신나라하는 댕댕이가 커엽~네요.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서로가
좋은데, 너무 이타적인 감수성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얄라알라 2021-01-10 1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아파트 이야기로 페이퍼를 썼는데, 레샥매냐님 말씀에 많이 느끼고 갑니다!! 그런 문제가 있네요....저희 단지에서도 폭설 내리던 날, 새벽까지 치우시더라고요.

레삭매냐 2021-01-10 19:13   좋아요 2 | URL
어느덧 아파트 살이가 표준이 된 세상
에 조금 더 양보하는 공동체 의식도
따라와 주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입니다.

바람돌이 2021-01-10 12: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추우면 빨래도 안되는군요. 영하로 내려가긴 했지만 그래도 여긴 따뜻한 남쪽이라 추워서 빨래 하면 안된다는 생각은 한번도 못해봤어요. 다들 저기 맛나고 뜨끈한 족발 맞죠. 하여튼 저거 드시고 다들 힘내세요

레삭매냐 2021-01-10 19:15   좋아요 2 | URL
아 따땃한 남쪽 나라, 너무 부럽습니다.

저희 동네는 하루 종일 빨래 하지 말아
달라는 안내방송에, 몰지각한 이웃이
아랑곳하지 않고 빨래를 했다고 비난
하는 글들이 동네 커뮤니티에 폭주하고
있네요...

막 솥에서 삶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족발 사진을 보니 사진으로 남기고
싶더라구요. 빠이팅~입니다.

붕붕툐툐 2021-01-10 13: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과 사진의 믹스매치에 이끌려 들어왔습니다(물론 아니어도 들어옵니다만..ㅋㅋ). 저부터도 공동체 의식이 절실한 요즘이라 생각합니다~^^

레삭매냐 2021-01-10 19:16   좋아요 2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일 수밖에
없으니 조금만 더 양보하고 이
해하는 모습이 아쉽습니다.

scott 2021-01-10 14: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에 이끌려서 들어옴 ㅋㅋㅋ매냐님 말씀에 동감 앞뒤 안가리고 무조건 빨리 최대한 싸게 누군가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 ㅜ.ㅜ

레삭매냐 2021-01-10 20:02   좋아요 2 | URL
최근 등장한 플랫폼 사업자들의 경우도
면밀하게 살펴 보면, 말로는 무언가 대
단히 기술혁신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것처러 보이지만, 결국에 나서는 하부에
있는 영세상인들이나 라이더들을 착취하
는 구조로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져야 하는 책임은 외면하고,
폭설이나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약자들을 위험한 거리로 내몰고 있습니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cyrus 2021-01-11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집은 빌라 1층이에요. 작년 여름에 부엌 싱크대 위에서 물이 새어 나왔어요. 제 방의 벽에 물이 샌 자국이 남아서 그 자리에 곰팡이가 생겼어요. 물이 샌 원인은 2층이었어요. 2층 거주자가 사비를 들여서 싱크대 위치를 옮기는 공사를 2년 전에 했어요. 문제는 공사 마무리가 부실했어요. 싱크대 배관을 구불하게 배치하는 바람에 거기가 터져서 물이 샌 것이었어요. 원인을 확실히 알아내서 2층 거주자에게 보상을 받았고요, 물이 샌 자국이 있는 부부만 도배를 했어요. 이거 때문에 꽤나 고생했어요. 방에 있는 책장, 책상, 책들 다 거실로 옮겼거든요.. ^^;;

레삭매냐 2021-01-11 19:32   좋아요 0 | URL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겠습니다.
저희 사촌 매형은 홍수가 나서 아끼는
장서들이 모두 물에 젖어서 못쓰게
되는 바람에 끌어 안고 우셨다고 하더
라구요.

책 옮기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닌데...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