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키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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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에 산 책을 겨울에 읽는다. 어디 이런 일이 한 두 번이었던가. 아니 해를 넘기지 않고 읽게 되어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할까. 제목부터 수려하다, 무려 <레닌의 키스>란다. 지금은 영락해 버렸지만 한 시절, 세계를 주름잡았던 막스-레닌주의의 원조가 바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가 아니었던가. 왜 레닌의 키스가 필요한지 27년 경력의 전 인민해방군 전사 옌렌커 선생이 말하는 소설 속으로 뛰어든다.

 

우선 소설은 전설부터 독자에게 시전해준다. 여말선초 같이 대단히 혼란스러웠던 원말명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우훠 마을의 전설이 등장한다. 어느 마을에 살던 부자가 박대한 호대해가 훗날 명나라 건국 시조 주원장의 눈에 들어 이주대신으로 변신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중원에 살 사람이 필요해진 홍무제는 호대해를 이주대신에 임명해서, 전제군주답게 강제 이주를 계획한다. 자신의 권력을 한껏 누릴 수 있게 된 호대해의 첫 번째 타겟은 바로 자신을 홀대했던 부자였다. 꼼수로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을 추려낸 뒤, 강제 이주 프로젝트는 가동된다. 그것은 마치 마오쩌둥의 실패한 인민공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처럼 읽힌다.

 

그리하여 생겨난 마을이 바로 고통 속의 즐거움이란 뜻을 지닌 서우훠 마을의 탄생이었다. 한편, 호대해를 잘 대해준 귀머거리 서우훠 할머니의 선행으로 이주대신은 그녀의 청을 들어준다. 그래, 서우훠 마을은 천하 장애인들의 집결지가 되었다나.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바로 올해 69세의 마오즈 할머니다 십대 어린 나이에 홍군의 장정에 참여하기도 했던 혁명 원로 마오즈 할머니의 기백은 대단하다. 위세 높은 성에서 현에서 파견한 공무원들에게 자신의 가슴을 드러내기도 하고, 바지까지 벗어젖힐 기세로 그들을 제압한다. 중국 고래의 전통을 대표하는 혁명 전사 출신의 마오즈가 할머니가 한 축을 지탱하고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업둥이이자 임시노동자 출신의 현장 류잉췌가 버티고 서 있다.

 

류 현장은 대단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이렇다 할 자원도 없고, 공장도 없는 솽화이현의 부흥을 위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 이 인물은 덩샤오핑을 모델로 한 걸까.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자본)만 잘 잡으면 된다는 거 아닌가. 우선 남양 출신 사업가에게 읍소해서 솽화이현에 도로도 깔고, 상수도와 전기까지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한다. 배포가 커진 류잉췌 선생이 다음에 도모한 프로젝트는 거창했다. 그것은 바로 관광산업으로 자신이 지배하는 솽화이현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특단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 종주국 러시아의 애물단지가 된 레닌의 유해를 구입해서 솽화이현 훈도산에 레닌기념관을 설립해서 거기에 안치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과연 러시아를 대신해서 전 세계 사회주의를 선도하는 국가의 현장다운 발상이 아닌가? 동시에 누군가 자신을 문학의 역병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발칙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옌렌커 작가 자신이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중국식 리얼리즘은 개혁개방의 물고를 타고 잠시 화려한 르네상스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국수주의적 반동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쇠락해 가고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바로 그 지점을 옌렌커 선생은 예리하게 타격하고 있다. 그래서 난 이 작품이 너무나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 참 한국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출생의 비밀에 대한 스토리도 이어진다. 류현장과 눈이 맞은 마오즈 할머니의 딸 쥐메이는 서우훠 마을에서 듣도 보도 못한 딸 네 쌍둥이를 낳는다. 그러니까 류잉췌는 쥐메이의 딸 퉁화, 화이화, 위화 그리고 어얼의 생부인 것이다. 작가는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자신의 대하소설을 위해 기기묘묘한 장치들을 곳곳에 설치해 두었다. 한편, 신사회의 대표선수인 류잉췌 현장은 구질서를 상징하는 마오즈 할머니의 권위를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간다.

 

때 아닌 열설로 봄기근을 맞게 된 서우훠 사람들에게 구호 지원금을 준다는 명복으로 그동안 마오즈 할머니가 주관하던 사흘간의 축제를 자신이 가로채서 진행한다. 서우훠 사람들에게 일인당 55위안에 해당하는 지원금을 하사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과거 군주시절 황제의 모습이 어른거리기도 했다. 처세에 능한 스 서기는 막스-레닌-마오쩌둥 사회주의 지도자 반열에 당당하게 류잉췌 현장의 사진을 올려 현장의 눈도장을 찍기도 한다. , 이 지점에서는 현재 주석인 시진핑의 행로에 대한 풍자로 읽어도 될 정도다. 놀랍군 놀라워. 이런 신랄한 풍자와 해학의 무람없는 전개가 자신이 무려 반생을 보낸 인민해방군에서 옌렌커 선생이 쫓겨난 이유일 지도 모르겠다.

 

싱가포르 출신 사업가 어머니의 장례를 빌미로, 레닌 유해 구입 프로젝트를 조기에 성취하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가 사업가에 사기를 당해 현장은 위기에 처한다. 조국 근대화 아니 서우훠 마을 근대화에 여념이 없는 류잉췌가 그만한 일로 기가 꺾일 인물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191명이 사는 서우훠 마을에 각종 기예를 지닌 장애인들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서 그들을 선발해서 묘기공연단을 만들어 전국 각지를 돌며, 돈을 벌 계획을 세운다. , 류현장으 끊임없는 도전에 그저 놀랄 지경이다.

 

한편, 오래전 혁명 전사로 서우훠 마을에 흘러들어 석공의 아내가 된 마오즈 할머니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채로 살아온 마을에 신사회 혁명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원조(?)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마오즈 할머니(당시 71)67명으로 구성된 묘기공연단이 출발하는 날, 자신이 직접 만든 아홉 겹 수의를 껴입고 류잉췌 현장에게 서우훠 마을의 합작회사 퇴사를 겁박해서 추인 받는데 성공한다. 그녀가 경자년 홍사 출신으로 옌안 멤버였다는 점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한 커리어의 소유자라는 점을 확실하게 주지시킨다.

 

송화이현 현성에 도착해서 실전 연습에 들어간 서우훠 출신 묘기공연단의 서커스에 가까운 쑈는 모두를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는다. 중국인 특유의 과장과 허풍이 난무하는 묘기공연단의 대활약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하지만 소설의 엔딩은 희극으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레닌보다 앞선 마르크스의 예언을 떠올리게 한다. 류잉췌 현장의 레닌 유해 구매 프로젝트는 묘기공연단이 그야말로 전국 순회공연에서 돈을 긁어모으면서 현실화되어 가는 모양새를 갖춘다. 소외된 이들이 모여 살던 서우훠 마을 사람들은 대처에 나가 공연을 하고, 평생 만져 보지 못할 그런 엄청난 돈을 벌면서 이전의 천당 같은 세월을 잊기 시작한다. 아니 그들에게는 돈이 다발째 굴러 들어오는 지금이야말로 천당 같은 세월이었으리라. 모두가 그렇게 자본의 세례를 받아 초심을 잃어 가고 있는 동안에도, 홍군 전사 출신의 마오즈 할머니는 연말까지 공연을 마치고 합작회사 퇴사라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다.

 

옌렌커 선생은 돈맛을 알게 된 사회주의 국가 출신 인민들의 타락상을 자신의 작품 <레닌의 키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서로를 위한다는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 이념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자신들 같이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전개되었을 때의 비극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을 집어 삼킬지 알 수가 없었던 게 그들의 문제였다. 류잉췌 현장과 그의 부역자들이 도모하던 성공의 열매가 너무 달콤했던 것처럼, 그의 추락 또한 삽시간에 벌어졌다.

 

원말명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설에, 민국 시절은 물론이고 장정, 항일투쟁, 해방, 신사회 건설, 대약진운동, 강철재앙, 대기근 그리고 문화대혁명을 지나 개혁개방의 시절까지 아우르는 그야말로 중국 현대사의 큰줄기들을 옌렌커 선생은 <레닌의 키스>라는 도발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제목 아래 녹여냈다. ‘문학의 역병이라는 표현을 들을 정도로, 저자는 오늘날의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인민들을 이끌어 가고 있는지 묻는다. 마오즈 할머니로 대변되는 국가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장애 같은 불편함을 안고서라도 천당의 세월을 보내고 싶다고 온몸으로 항변한다. 모든 것을 혁명에 걸고 사람들을 선동했던 마오즈 할머니도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역사를 되돌리기 위해 수십 년을 애쓰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허무맹랑한 자신의 기획을 밀어 붙이던 기회주의자 류잉췌 현장의 추락은 희비극의 끝판왕다웠다.

 

700쪽이 넘는 대서사시에 잠깐 위축이 되었지만, 막상 몰입해서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피니시라인에 서 있었다. 지난 4일 동안, 나와 함께 고락을 나누었던 서우훠 동지들이여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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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12-15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폴스타프 님이 싫어합니다 ㅋㅋㅋㅋ

레삭매냐 2020-12-15 18:27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순전히 잠자냥님 덕분에 읽은 것으로 하렵니다.

scott 2020-12-15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북으로만 갖고 있었는데 한국어판 700페이지! 레닌 키스, 레삭매냐님에 백오십 일번째 ㅋㅋㅋ

레삭매냐 2020-12-15 19:41   좋아요 4 | URL
최근의 만난 최고의 책 중의
하나입니다.

웃기고 슬프고, 또 신랄한
풍자와 해학에 이르기까지...
옌렌커 선생이 계속해서 노벨
문학상 후보가 오르는지 알려
주는 그런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페크pek0501 2020-12-16 1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산 책을 요즘 읽는 페크도 있습니당~~~^^

레삭매냐 2020-12-16 13:07   좋아요 2 | URL
저도 몇 년 묵혀서 읽곤
한답니다.

올해는 그런 책들이 제법
많았네요.

쎄인트saint 2020-12-16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읽으셨군요...저도 올해안에 읽을생각이었는데..아무래도 내년으로 넘겨야할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0-12-16 17:1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럴 판이었으나,
잠자냥님의 리뷰를 읽고서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야지 결단을 하고
읽었네요.

좋은 책은 내년에 만나도 좋으시
리라고 생각합니다.

scott 2021-01-09 1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옌레커가 새해 매냐님을
이달에 당선작으로 뽑히게 했음
추카~추카~

레삭매냐 2021-01-09 13:26   좋아요 1 | URL
제가 지난 달에 민 책은 <레닌의 키스>
보다 <니클의 소년들>이었는데 그것 참...

알 수가 없네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01-09 1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도 이 달의 당선작 진심 축하드립니다. 멋져요~

레삭매냐 2021-01-09 13:27   좋아요 1 | URL
초딩님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들 해주셔서 알게 되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