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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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난 춘수 씨의 팬이 아니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해서 그의 책들을 섭렵하고 있다. 이번에 나온 <일인칭 단수>도 발매 당일날, 동네서점 에디션을 사기 위해 찬바람을 무릅쓰고 사냥에 나섰다. 덤으로 무슨 다이어리도 받아왔다. 그보다 더 좋았던 건 동네책방에서 거저 나눠주는 책갈피들이었다. 감사하게 잘 쓰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춘수 씨는 장편보다 단편 혹은 에세이에 더 능한 작가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해봤다. 나는 너무 늦게 <노르웨의 숲>을 만나서 그런지 책이 나왔을 당시의 감흥이 잘 느껴지지 않더라. 책은 어떤 시절에 만나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감상이 달라지는 법이니까. 그런 점에서 춘수 씨의 모두 8편의 단편이 담긴 <일인칭 단수>는 가을의 끝자락에 잘 어울리는 그런 책이 아닐까. 어제 같아서는 초겨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춘수 씨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어머니의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란 티가 팍팍 난다. 뭐 그렇다고. 춘수 씨가 재즈와 마라톤에 미친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또 야구팬인 줄은 또 몰랐네. 당연히 야구팬인 나의 원픽은 바로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집>이었다. 일본에는 미국의 뉴욕 양키즈 같은 사악한 팀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네들 사이에서는 교진이라 불리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였다. 단카이 세대라고 말하는 춘수 씨가 한창 야구를 보던 시절에 교진에는 ON포로 유명했던 오 사다하루(왕정치)와 나가시마 시게오가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지 아마.

 

오래전 삼미 슈퍼스타즈의 꼬마 야구팬으로, 약팀의 설움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약체팀이었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대한 춘수 씨의 애정에 격하게 공감할 수가 있었다.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더 많았던 시절에 대한 아스라한 향수가 저 구석탱이에서 마구 피어 올랐다. 춘수 씨는 텔레비전 중계로 보는 야구보다 직관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그렇지 야구는 모름지기 직관이지. 이 양반이 뭘 좀 아는구만 그래. 일본 야구장에서는 라거 뿐만 아니라 흑맥주도 파는 모양이지? 야구와 코히 비루의 조합이란 정말! 어쨌든 누가 야구장에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지는 걸 보러 가냐고 말하겠지만, 꼴찌팀의 비애란 바로 그런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춘수 씨는 인생철학을 등장시킨다. 인생이 항상 승리로 점철된 것은 아니라고. 아니 어쩌면 행복한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고 그 반대는 차고 넘치는 법. 그러니 지더라도 좀 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겨내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패배는 야구나 인생에서나 사양하고 싶다.

 

고희를 지나 망팔에 도달한 능구렁이 작가는 고대사에서 비틀즈와 자신의 전문 분야라고도 할 수 있는 재즈 알토색소폰의 대가 찰리 파커를 소환한다. 나도 한 때 춘수 씨 마냥 좋아했던 비틀즈 이야기에서는 18년의 세월이 지나 중년의 나이에 알게 된 첫사랑 소녀가 등장한다. 자신보다 네 살 많은 그녀의 오빠가 느닷없이 출현해서 그녀가 3년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오래 전,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녀의 오빠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일본 국어독본에 나오는 역시 자살한 유명 소설가의 작품을 읽었던 추억들을 부지런히 들려준다. 춘수 씨는 어쩌면 그렇게 적재적소에 꼭 필요한 부사들을 배치하는 지 놀라울 따름이다. 솔직히 그의 능력이 부럽다. 나는 점잔빼는 양복 입은 비틀즈 스타일보다는 반항기 넘치는 깡패 같은 롤링스톤즈의 <새티스팩션>을 더 좋아했더랬다. 그의 경우처럼 파나소닉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청춘 배경음악이 그 시절에는 나에게는 무엇이었나 문득 궁금해졌다. 내 경우에는 조지 마이클, 인엑에스 그리고 건즈 앤 로지즈 정도가 되겠다.

 

주술처럼 어긋나 버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자 친구의 집을 방문해서 그녀의 부재에 놀라는 일인칭 단수 시점의 나. 그녀의 오빠는 계속해서 토스트와 커피를 권하지만, 예절 바른 젊은이는 점잔을 빼며 극구 사양한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자 식사시간에는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는 게 아니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물러 나오려는 모습이 왜 그렇게 내 마음에 잔상을 남기는지 모르겠다.

 

재즈와 클래식 음악에 정통한 춘수 씨는 이번 작품집 속에서도 자신의 장끼를 아랑곳하지 않고 발산한다. 나도 한 시절 클래식 CD를 격렬하게 사 모아서 그런지 그의 궤적을 따라가는데 제법 도움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정도야 껌이고, 안토니오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그리고 마르타 아르헤리치 같은 연주자의 이름은 참 반가웠다. 아니 자신의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이 정도는 알아 두어야 한다는 고수의 기백이랄까. 슈만의 사육제라는 음악적 아름다움의 추구를 베이스를 깔고, 그 음악을 논하는 파트너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움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도 역설적이지 않은가. 예의 아름다움을 커버하는 매력이라는 점에 춘수 씨는 포인트를 둔 걸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복잡스러움 만큼이나 춘수 씨의 글쓰기가 지향하는 바는 참으로 광활하구나 싶다.

 



보사 노바를 연주하는 찰리 파커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결국 재즈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찰리 파커의 음악을 들어 보고 싶다는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너튜브를 돌렸다. 아니 그랬더니만 진짜 그런 제목의 음반이 있지 않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음반에 대한 리뷰로 원고료를 챙겼다는 춘수 씨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걸까. 나중에 꿈에서 그랬다더라는 식의 전개는 조금은 황당하면서도, 바로 이거지 이런 게 문학의 힘이 아니겠어라고 이해하게 된다. 문학에서 이 정도의 상상력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게 문학이겠냐고 묻는 것 같이 느껴졌다. 조금은 뻔뻔스러운 우리의 춘수 씨 같으니라구. 어쨌든 그렇게 너튜브 연관검색으로 듣게 된 안토니오 카를루스 조빔의 <걸 프롬 이파네마>는 끝장이었다.

 

군마 현의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료칸에서 만난 시나가와 원숭이 사연은 또 어떤가. 나홀로 즐기는 여행을 하다가 화자는 허름한 료칸의 온천탕에서 말하는 시나가와 원숭이를 만나게 된다. 원숭이가 말하는 것도 놀라울 판에, 료칸에서 일하는 원숭이가 등을 밀어주기도 한다. 서비스가 아주 좋은 원숭이다. 그리하야 화자는 코히 비루 두 병을 청해 시나가와 원숭이와 대작을 하면서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 있을 법한 이야기로 독자들을 현혹하는 기술에 그만 감탄해 버렸다. 역시 춘수 씨야 그래.

 

, 너무 아쉽다. 좀 더 많은 이야기들을 만나고 싶었었는데. 달랑 8개의 이야기들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그렇게 춘수 씨의 신간 소설집을 다 읽어 버렸다. 쩝쩝 아쉽다. 고수는 자신의 소설에서 무언가 교훈과 주제 그런 걸 기대하지 말라고 점잖게 조언을 날린다. 그리고 소설 같은 문학에서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라는 국어 시간에나 등장할 법한 질문들의 무용성에 대해서도 나의 생각을 다시 한 번 확인 사살시켜 주었다. 아니 오독까지도 포함한 내맘대로 독서의 즐거움이 얼마나 큰데 그걸 정형된 틀로 분석하라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지금까지도 그래 왔지만, 앞으로도 내맘대로 읽을 테다. 춘수 씨, 어쨌든 즐거운 시간을 주어서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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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11-28 08: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팬 맞으신데요? ;;;
하긴 저도 하루키 끊으려다 레삭매냐 님 글에 주문하고 있습니다. 아, 왜 이러세요 ㅠ ㅠ

레삭매냐 2020-11-28 09:0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저도 끊을라고 하는데 그게 또 마음대로 안되네요 :>

scott 2020-11-28 08: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춘수옹 찐팬 인증 ^.~

레삭매냐 2020-11-28 09:03   좋아요 2 | URL
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찐팬 돌입 시츄 !

blanca 2020-11-28 08: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런데 왜 춘수씨인 거예요? 아이구, 감질 나네요. 왜 이리 찔끔 찔끔 아주 거한 소설이나 에세이 최소 육백 페이지는 내주셔야. 저 후회중입니다. 예상 배송일이 늦어 이번 주에 안 시켰는데 주말에 읽을 책 떨어지고...

그 동네 책방 한번 부럽네요. 이게 동네책방버전이 동네책방에 있는 게 아니라 지정 서점에만 있는 거더라고요.

레삭매냐 2020-11-28 09:06   좋아요 2 | URL
하루키의 한자 표기가 春樹 여서
우리식으로 적어 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600쪽까지는 아니어도
분량이 넘 적어서 아쉽긴 하더라구요...

읽을 책이 떨어지시다니... 그게 더
놀랍습니다 ㅋㅋㅋ

맞습니다, 아무 동네책방이 아니라
지정서점 몇 곳에만 있더라구요.
다행히 저희 동네 한 곳이 있어서
어제 냉큼 다녀왔습니다.

blanca 2020-11-28 09:07   좋아요 2 | URL
저도 지금 충격이에요.--;; 손이 떨립니다. ㅋㅋ

단발머리 2020-11-28 1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동네서점 에디션이 훨씬 더 이쁘네요. 보는 즐거움에 한 몫 했어요^^

레삭매냐 2020-11-28 15:18   좋아요 1 | URL
아마 이 맛에 동네서점 에디션
을 사는 게 아닌가 싶네요...

소설집이 너무 짧아서 아쉬웠습니다.

2020-11-28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9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ystal 2020-12-05 1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 온라인으로 오더하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다음주 화요일 도착 예정이라는데..이게 뭐라고 살짝 설레네요. 저도 하루키 팬은 아닌데.. 뭔가... 책 나올때마다 꼬박꼬박 찾아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네요;; 이게 팬인건가요?? ㅋㅋ

레삭매냐 2020-12-05 10:43   좋아요 1 | URL
저하고 아주 비슷하시네요...

저도 말로는 춘수 씨 팬이 아니라고
하는데... 다른 이웃분들이 팬이라고
인증해 주셨네요 ㅋㅋㅋ

고양이라디오 2020-12-09 1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춘수씨의 팬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이번 작품 제게도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춘수씨의 단편집 중 최고라고 할 정도?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레삭매냐 2020-12-10 17:39   좋아요 2 | URL
저도 아주 즐겁게 읽은 기억이네요.

역시나 대단하신 양반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