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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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는 책을 또 사는 패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분명 나는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구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난 금요일 같은 책의 리커버 에디션을 샀다. 반값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데려 왔다고 희희낙락했던 기억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그리고 바로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기존 책은 프리모 레비 작가의 전작에 도전하면서 샀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 어디 그런 책들이 하나둘이던가. 그러던 차에, 책에 소개된 21개의 원소들이 작가의 얼굴 위로 떡하니 인쇄된 표지를 보니,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사실 <이것이 인간인가>를 비롯한 프리모 레비를 읽는 건,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인류사의 비극을 다시 만나는 것만큼의 무게로 다가왔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독서를 미루거나 방치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펼쳐 들었고 그대로 빠져 들었다. 그제서야 프리모 레비의 책들을 본격적으로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모두 잊어 버렸다. 그것 역시 기억의 의도적 작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장의 스트레스도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의 존재가 인류사적 비극을 읽는다고 해서 작금의 삶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뭐 그런 얕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서설이 길었다. 아무래도 인생책이라 부를 만하다고 공언한 만큼, 본격적인 썰을 풀기에 앞서 워밍업한 것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거창한 리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뭐 그럴 만한 능력이 되지 않기에. 그저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마음에 자꾸만 말이 길어지는 그런 느낌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6개의 불활성기체 중에 하나인 아르곤으로 시작하는 게 심상치 않다. 참고로 나머지 5개의 불활성기체는 헬륨·네온·크립톤·제논 및 라돈이라고 한다. 프리모 레비는 왜 다른 원소들과 좀처럼 섞이지 않는 보통 사람은 잘 모르는 아르곤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나는 곰곰 생각해 본다. 그것은 바로 스페인에서 1500년대에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으로 이주한 유대인 조상에 대한 이야기에 기원한다. 여호와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당한 이래, 전 세계를 돌면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는데 전력했다. 유일신 사상과 언어 그리고 경전은 그들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기반이었다. 소수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은 이방인이자 화학에서 말하는 불순물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읽는 키워드로 불활성기체와 불순물을 채택한다.

 

1930년대는 물질보다 정신을 강조하는 파시즘, 군국주의 전성시대였다. 쾌락주의자이자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는 유물론자일 수밖에 없었던 미래의 청년 화학도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핍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탈리아에서 인종법이 시행되면서 유대인의 대학입학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다행히 인종법 시행 이전에 토리노 대학에 진학한 레비는 학업을 마칠 수는 있었지만, 우등으로 졸업하고서도 취업에 난항을 겪는다. 대학시절에는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린 친구 산드로를 만나 육체적 단련을 했다고 했던가. 친구가 전수해준 자연의 곰고기 맛은 훗날 암울한 철의 시대에 생존에 꼭 필요했다고 진술했던가. 아니 어쩌면 그것도 나의 해석일 지도 모르겠다. 오독의 자유야말로 독서가 제공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주기율표>에서는 가능하면 전작 <이것이 인간인가>에 나온 아우슈비츠 이야기는 배제하고 화학자로서 평생 밥벌이와 아우슈비츠에서 결국 그의 목숨을 건질 수 있게 했던 원소와 얽힌 이야기들에 방점을 찍는다. 사실 구판 <주기율표>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나를 주저하게 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주기율표를 장식하는 원소 기호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직도 고등학교 시절 외웠던 수헬리베붕탄질산으로 이어지는 암기의 기억은 여전하니까. 그 시간들이 프리모 레비 같은 연구 실험자들에게는 세상의 비밀을 밝히는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즐거움의 시간이었을 진 모르겠지만, 또 누군가에는 고통의 시간들이기도 했다는 걸 알아주려나.

 

한편 프리모 레비는 밥벌이와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부양하기 위해 광상에서 니켈을 제련해내는 일이 궁극적으로 독일군의 세계정복에 필요한 포탄에 사용될 지도 모른다는 양심적 고민도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를 정점으로 독일 제3제국이 기울어 가기 시작하면서 이탈리아는 추축국에서 이탈했고, 한 때 동맹국이었던 독일은 중부와 북부 이탈리아의 정복군으로 변신했다.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얼치기 빨치산 활동에 나섰던 프리모 레비는 파시스트 민병대에게 체포되어 총살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심문 중에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밝힌 프리모 레비는 민병대에게 총살당하는 대신, 악명 높은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니 패스하도록 하자.

 

운명의 여신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650명의 이탈리아 유대인 중에 살아남은 20명에 프리모 레비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 그는 고작 3~4개월 밖에 생존 기간이 되지 않았던 아우슈비츠-모노비츠에서도 천우신조로 생존하는데 성공했다. 도덕률에 따라 생전 도둑질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 극적으로 변신해 가는 과정도 생생하게 등장한다. 과학도이면서도 토마스 만과 체사레 파베세의 글들을 사랑했고, 카를로 레비와 긴즈부르그의 반파시스트 동지이기도 했던 청년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로 귀환해서는 보통 사람들처럼 직장을 잡고, 수용소에서 사라진 옛사랑 대신 새로운 사랑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돈을 벌어야 했다. 이거야말로 밥벌이의 지겨움이 아니었을까. 수용소에서 겪은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증언을 위한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운명은 프리모 레비를 부나공장에서 강제 노역하던 시절, 상사였던 로타르 뮐러 박사에게로 인도한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레비에게 나치 돌격대원이었던 뮐러는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들만 취사선택하고,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던 지척의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매일 같이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고 변명한다.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 생존자 전부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과 뮐러가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수정주의 역사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지만,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과거의 극복타령을 하며 취했던 방관 혹은 의도적 외면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키지 않는 해후를 약속한 레비와 만나기로 했던 뮐러 박사의 편지가 도착한지 8일 뒤에 죽었다는 소식은 초현실적이었다.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물질을 지배하는 건 정신이라는 파쇼적 교육의 세례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실험으로 입증된 사실만 추구한 화학자/작가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는 가히 인생책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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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4-06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2007년에 나온 표지로 갖고 있는데 개정증보판이 안 나왔나봐요?

레삭매냐 2020-04-06 13:33   좋아요 0 | URL
저도 말씀 하신 예전 구판으로
사두었는데... 리커버로 다시 구매
하게 되었네요. 이번엔 책도 읽었구요...

개정증보판인지는 비교해 보지 않아
서 잘 모르겠습니다.

페넬로페 2020-04-06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커버에디션을 검색해도 알라딘에 왜 검색이 안될까요?

레삭매냐 2020-04-06 22:17   좋아요 1 | URL
제가 검색해 보니 알라딘에서 나온
어나더 커버 에디션으로 한정판으로
나왔나 보네요.

더 이상 시중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
그런 책으로 추정됩니다.

120퍼센트 2020-04-07 0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매냐님 글 읽고서 리커버판 사고싶어서 계속 뒤졌는데...더이상 없는거군요 ㅜㅜ 레삭님 글 읽고 이책 정말 읽고싶어졌어요, 구판은 표지가 영...그렇지만요

레삭매냐 2020-04-07 10:34   좋아요 1 | URL
작년엔가 한동안 리커버 에디션
바람이 불었었는데 아마 그 때
잠시 나온 한정판인가 봅니다.

전 지난 금요일날 사서 주말 동안
읽었네요.

말씀하신 대로 구판 표지가 여엉
아니긴 하지요. 딱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는 ㅋㅋ

treehyun 2020-04-10 0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 참 대단한 사람이죠. 그 참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 그 당시 세상과 비교되어 역시나 세상은 달라질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나 보다 싶어 아릿했던 기억이 나네요.

레삭매냐 2020-04-10 08:51   좋아요 0 | URL
위키피디아에 보면 사고사라는 주장도
있는데... 아무래도 자살이 맞는 것 같습
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많은 분들이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분들이 많더
라구요. <쥐>의 저자 아트 슈피겔만의
어머니도 그러셨죠.

초딩 2020-04-12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앙 알라딘에서 이 글 제목으로 메일 보냈어요 ㅎㅎㅎ
제목 너무 근사합니다!

레삭매냐 2020-04-12 19:38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저는 미처 몰랐네요 :>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록 2020-04-14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드삭스매니아님. 잘 지내시죠? ^^ 알라딘 북글에 자주자주 올라오셔서 저도 자주자주 읽곤하네요..^^

레삭매냐 2020-04-22 16:17   좋아요 0 | URL
아주우~ 잘 지내고 있답니다. 초록님도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