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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내일부터 휴가인데 비가 온다고 한다. 이렇게 날이 좋은데 말이다. 회사에 쌓아 놓은 책들을 집으로 운반하던 중에 우연히 안토니오 타부키의 책 세 권을 발견했다. 이건 뭐 거의 팜플렛 수준의 책이다. 요즘처럼 책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때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모두 읽었다.
이탈리아 출신 안토니오 타부키는 페소아가 알바루 드 캄푸스라는 다른 이름[異名]으로 발표한 <담배 가게>라는 시를 보고서 평생을 페소아 연구에 바칠 생각을 한 모양이다. 포르투갈로 떠나기 전에 포르투갈 말을 배우고, 리스본으로 이주했다. 나도 얼마 전부터 페소아의 책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는데, 페소아가 느꼈던 것 만큼의 강렬한 그 무엇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마 언어 탓을 해야 할까. 청년 페소아는 그럴 만한 의지와 시간이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언감생심이다. 그저 페소아와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남긴 글을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싶다. 유럽을 생각하면 스페인에는 가보고 싶지만, 포르투갈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점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솔솔 든다.
소설의 시간은 1935년 11월 28일부터 3일 뒤 페소아가 아케론 강을 건너는 30일까지 3일 간의 여정을 그린다.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 자신과 또다른 자아(alter ego)가 필수적인 것일까? 결국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글을 내가 아닌 타자가 읽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면서, 또 타자가 읽어 주기를 바란다는.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라는 점도 궁금하다.
옆구리에 찌릿한 통증을 느낀 페소아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향한다. 앞으로 그는 자신이자 타자인 ‘방문객’들과 만나게 된다. 페소아 전문가인 타부키는 사실에 허구를 뒤섞은 퓨전 스타일의 글을 선보인다. 아무래도 우매한 독자는 페소아에게도 그리고 타부키에게도 아는 바가 없어서 어쩔 도리 없이 역자라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아마 좀 더 그들을 읽게 된다면 이런 생경함이 줄어들 지도 모르겠다.
아마 지나친 알콜 섭취가 초래한 간부전이 페소아의 사망 원인이었을 거라는 추정이 등장한다. 고독한 작가 페소아에게 알콜이 해방구였다는 추론에서 기묘한 위로를 느끼기도 했다. 어려서는 음악이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알콜이 내 해방구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책인 모양이다. 책을 통해 내가 가볼 수 없는 리스본으로 그리고 만날 수 없는 페소아와 타부키를 이렇게 대면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평생을 소박하게 살면서 오펠리아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소망했던 페소아는 이십대에 요절한 알바르투 카에이루를 스승으로 모신다. 우리는 삶을 해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타부키 선생은 과감하게 해독은 불가능하다고 못박아 말한다. 이유는,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란다. 작가는 어떻게 상상 속의 인물들이 병상에서 죽어가는 대가를 방문해서 이러한 대화를 나눴을 거라는 것을 유추해냈을까? 그만큼 페소아의 삶과 그의 작품들에 대한 이해가 방대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놀랍기만 하다.
죽음을 코 앞에 둔 자신을 찾아 자신의 저작 <불안의 책>(물론 이 책도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는 못했다)에 최대의 찬사를 보내는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나 튜닉 옷을 입고 저승에서 찾아온 안토니우 모라의 경우는 또 어떤가. 처음 들어보는 포르투갈식 투우에 대한 이야기, 바다를 마시는 것 같다는 굴 요리에 이야기는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공략한다. 리스본, 세비야 그리고 환상 같은 사마르칸트가 주는 매혹은 정말 기대이상이었다. 이런 방문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어쩌면 페소아는 죽음에 대해 잠시 잊었을 지도 모르겠다.
타부키 선생은 이 책의 부제로 <어떤 정신착란>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 이런 식의 정신착란이라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을까. 책의 어딘가에서 만나 소박하고 장엄한 지평선이라는 표현이 그렇게 와 닿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페소아와 타부키를 읽어야지 싶다. 이미 <집시와 르네상스>를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