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 지음, 이난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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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서가파먹기 프로젝트 #004>

 

작년 광복절에 이 책을 샀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라이프 에펜디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까지 읽다가 그만뒀나 보다. 그전에는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는데 그 때도 실패했었다. 이번 주말 달궁 독서 모임을 앞두고 부랴부랴 읽기 시작했다. 요즘 읽을 책이 쏟아지고 있는 데다가 한편으로는 마구 사들이고 바람에 좀 위기다. 터키 작가라고는 오르한 파묵(아직까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과 아지즈 네신 정도인데, 소설 잘 내지 않기로 유명한 학고재에서 나온 ‘터키 작가’의 책이라 더더욱 관심이 갔다. 사바하틴 알리, 아마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모양이다. 터키 번역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난아 씨가 번역을 맡아 주었다.

 

처음 두 번에 실패는 진입 장벽이 쉽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싶다. 소설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의 초반 주인공은 라이프 에펜디가 아니라 나레이터 라심이다. 은행원으로 일하다 짤린 라심은 친구 함디의 배려로 그가 일하는 직장에서 독일어 번역가로 일하는 라이프 에펜디를 만나게 된다. 라이프 에펜디는 직장에서도 그리고 가정에서도 그다지 환영 받는 존재가 아니다. 소설이 연재된 1940-41년 터키는 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 아마.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제국이었던 터키는 독일 편에 섰다가 쪽박을 차고 말았다.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던 제국은 연합국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다.

 

세계사가 재편되는 동안, 우리의 주인공 라심과 라이프 에펜디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의 모처에서 근근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비밀을 한가득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라이프 에펜디의 삶에 라심은 조금씩 호의를 가지고 침투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폐렴으로 병석에 누워 하루하루 죽어가던 라이프 에펜디의 비망록을 입수하면서 이야기는 다른 시공간으로 훌쩍 이동한다. 라심의 비망록 입수가 결정적 전환의 계기였다. 그리고 우리는 고대해 마지않던 모피 코트를 걸친 화가이자 카바레 가수 그리고 사랑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팜므 파탈 마돈나를 만나게 된다.

 

아니 진작에 이 스토리가 나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사바하틴 알리는 초반에 너무 느슨한 구성으로 독자의 애간장을 태운다. 1차 세계대전 말기, 징집되어 전쟁에 투입될 뻔했던 라이프 에펜디는 훈련소에서 휴전/종전을 맞는다. 라이프 에펜디는 하우란(어디인지 구글맵을 이용해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출신의 청년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이스탄불로 유학길에 오른다. 라이프 에펜디는 처음부터 가업인 비누 공장 일보다 예술학교 입학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수줍어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주인공은 예술 역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빠르게 포기해 버린다. 이에 아버지는 그는 정치 문화적으로 유대감이 있었던 독일 베를린으로 보내 비누 제조에 관한 선진 기술을 배워 오라고 아들에게 주문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데카당스한 분위기가 넘실거리던 전후 패전국의 수도 베를린에 도착한 라이프 에펜디는 우선적으로 언어 습득에 전념한다. 이십대 청년은 하숙집에 기거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자유로운 토론을 하면서 독일어를 배운다. 이 점은 소설의 전개 과정에서 상당히 중요한데, 첫 번째로는 뒤에 이어지는 환상의 마돈나와의 관계에서 언어의 장벽이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장치이고, 두 번째로는 자유로우면서 한편으로는 혼란하기 그지없던 베를린의 시대상을 조명해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배움이 즐거움이 되는 순간, 승부는 이미 결정난 게 아니었던가. 독일 문학은 물론이고, 러시아 문학에 빠져 투르게네프를 비롯한 작품들을 라이프 에펜디는 섭렵한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처럼 마돈나와의 첫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그의 삶에 대한 전조라고나 할까.

 

라이프 에펜디가 처음으로 만난 유럽은 상상과 많이 달랐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비누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공장에 소개로 취업했지만, 원래 관심이 없었기에 일도 대도시의 화려한 삶도 그저 지루할 따름이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라이프 에펜디는 베를린을 유령처럼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전시회에서 운명적 만난을 갖게 된다. 운명을 말고 이런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그림 앞에서 수일 동안 넋을 잃고 있는 그에게 어느 여성이 말을 건다. 그 여성이 바로 그림의 모델이자 창조자 그리고 라이프 에펜디의 영원한 사랑이 되는 유대인 여성 마리아 푸데르였다.

 

이전까지 사랑이라곤 해보지 못한 순결한 청년은 천상의 여신이 현현한 마리아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의 전개는 고전적 방식을 따른다. 다만 모델이자 화가 그리고 카바레 가수로 변신을 거듭하는 마돈나 앞에서 라이프 에펜디의 혼란은 극에 달한다. 마돈나는 사랑 대신 우정을 요구했다. 사랑은 고사하고 우정마저 잃을 위기에 처한 24세 청년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마리아 푸데르가 시전하는 마돈나와 팜므 파탈 사이를 오가는 중첩적이고 이중적인 이미지들은 라이프 에펜디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짝사랑에 옴팡지게 빠진 청년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감정을 사바하틴 알리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라이프 에펜디와 마리아의 사랑의 감정이 최고조로 치닫는 순간, 청년에게 비보가 전해진다. 터키에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였다. 그러니 모든 것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의 전개는 약간의 신파조의 비극으로 흐른다. 고향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매형으로 농간으로 유산을 강탈당하고 올리브 농사꾼으로 변신한 라이프 에펜디는 오지 않을 마돈나를 기다리고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이 살아간다.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마돈나에게 배신당한 남자는 이제 어느 누구도 믿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염세주의자가 되어 버린 라이프 에펜디는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놀라운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터키와 독일 베를린을 오가며 펼쳐지는 사랑과 판타지 그리고 죽음의 드라마는 시공간을 압도한다. 소설 초반에 라심이 지적하는 대로 모든 이야기는 우연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욕망이 개입해서 그것을 필연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걷잡을 수 없이 들끓던 사랑이 잠잠해지면 남는 것은 회의 뿐인 것을. 사랑이 인도하는 대로 이끌려 가다가 어느 순간 되돌아보니 홀로 뎅그러니 남아 있는 라이프 에펜디의 모습이 그렇게 애잔할 수가 없더라. C'est la 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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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24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덕분에 알게 된 작가이고 책인데 이렇게 또 리뷰로 만나니 음~~~ 왠지 꼭 읽어야할 것만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듭니다. ㅎㅎㅎ
에펜디가 10년 후에나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뭔지 궁금해서라도 빨리 만나봐야겠어요. ㅋㅋ

레삭매냐 2019-01-24 11:34   좋아요 1 | URL
사바하틴 알리의 다른 책들도 소개되었으면
합니다.

케말 파샤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고
결국 불가리아 국경을 넘다가 살해당했다고
하네요. 어째 장준하 선생의 운명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다시 생각해 봐도 참 슬픈 소설이었습니다...
주말 독서모임에 가서 신나게 털어 보려구요.

책은 산 지 163일 만에 읽었습니다.

잠자냥 2019-01-24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63일 만에 읽으신 것 축하합니다! ㅋㅋㅋㅋ

레삭매냐 2019-01-24 13:43   좋아요 0 | URL
왜 사서 바로 읽지 않고
묵혔다가 읽게 되는 걸까요? ㅋㅋㅋ

잠자냥 2019-01-24 13:57   좋아요 1 | URL
장도 묵혔다 먹어야 제맛이라 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19-01-24 1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가 파먹기 프로젝트..... 아주 재미난 발상입니다.
전 안 읽은 책들은 따로 모아 놓아서 파먹을 게 없어 따라할 수가 없는 게 아쉽네요.
파묵을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글쎄, 제 주제에 추천이란 걸 해도 좋은 지 모르겠습니다만, 첫 작품으로 <내 이름은 빨강>이 어떨지, 말입니다. --;;

레삭매냐 2019-01-24 13:44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

제가 이번에 이사하면서 제법 많이 정리
를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디선가 막 튀
어 나오는 책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
습니다...

파묵은 아직입니다. 도전하게 되면 추천
해 주신 책을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2019-01-24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1-24 13:44   좋아요 1 | URL
예전처럼 사람들을 만나지 않다
보니 그런 욕망들도 이제는 모두
시들해진 것 같습니다.

은거하면서 책이나 보는 것이 제
팔자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