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되어 만나리 9
웬지 카니네 집 방문을 극히 꺼리고 회피하려는 명수씨를 설득하고 달래며 집을 출발한 것은 일요일 정오가 좀 지나서였다. GPS에 카니가 불러준 주소지를 입력하며
“ 아, 카니, 미드타운 부촌에 사네요. 하프 밀리언 주택이 즐비한 곳인데 ” 은주씨가 웃으며 말한다.
병목 형상의 도로 탓인지 한참이나 번잡하고 자꾸 밀리게 되는 큰 길을 벗어나느라 시간이 한참 지체되었다.
그리고 겨우 한적한 소로로 접어들자 바야흐로 풍성하게 우거지는 신록에 가려 큼직한 저택이 드문드문 보이는 동네 길로 들어선다.
느릿느릿 번짓수를 점검하며 가다가 야트막한 돌담 위에 번지수만 적힌 주소지에서 지피에스 안내는 끝났다.
그러나 집은 보이지 않고
가느다란 외선으로 된 프라이빗 ( 개인용 ) 도로를 따라 드물게 보는 회화나무가 자잘한 잎들을 팔랑이며 줄지어 서 있다.
“ 미국에서 보기 드문 회화나무일세. 이걸 집 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인물이 난다는 길상목으로, 동양에선 귀하게 여기는 나무지.” 여지껒 뚱하던 명수씨가 비로소 한 마디 한다. 심은 지 한 이 십여 년은 됐을까, 후리후리하게 자라고 밑둥이 실하여 귀티의 풍모가 보인다.
차가 파킹랏에 멈추어 서자 카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청바지에 체크무늬 면셔츠가 신선한 활력을 준다.
“ 찾아 오는데 힘 들지 않으셨나요? 어쨋던 잘 오셨어요. 들어 오세요.”
안으로 들어서는데 40 세 전후로 보이는 한 남자가 웃으며 맞이한다.
은주씨는 무심히 그를 보다 “ 헉 ‘하고 들이킨 숨을 내놓지 못한다. 눈을 크게 뜨고 그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 본다.
명수씨도 막상 그를 보자 가슴에서 억장이 무너지듯, 큰 소리와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린다. 남자가 얼른 명수씨의 팔을 잡으며 게스트룸으로 인도한다.
“ 제 이름은 왕 김이라고 합니다. 참 많이 뵙고 싶었어요.”그는 침착하게 말하며 손을 내민다.
“ 여보, 어쩜 젊었을 적 당신을 꼭 빼 닮았어요. 당신이 옆에 없었다면 당신이 ‘젊어지는 샘물’을 먹고 나타났다고 생각할 뻔 했어요. “ 은주씨는 숨 죽여 얘기했지만 카니도 왕 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도 주의 깊게 듣고 있다. 그리고 슬그머니 웃는다.
넓직한 실내의 통유리 넘어로 덩굴잠미가 한창인 화사한 뒷뜰이 통째로 보이고 잘 꾸며진 수영장에는 맑은 물이 푸르게 찰랑이고 있다.
“ 아, 제 손자들도 소개하지요. 사내아이가 둘, “ 하며 카니는 이층을 향해 “ 션, 루키, 어서 내려 오너라. 린다, 너도 와서 인사해야지 “ 아이들은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즉시 통통통 뛰어 내려 왔다. 한 놈은 12 살 션이구요, 얘는 10 살 루키예요. 내 예쁜 며느리 린다 “
검은 머리 검은 눈에 당당한 체격의 두 소년, 그리고 금발 푸른 눈의 며느리는 의외로 수줍고 조용해 보였다. 그러나 서툴지 않은 한국어로
“ 잘 오셨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 명수씨에게는 고개를 숙여 인사 하고 은주에게는 다가와 다정하게 허그 한다.
가족 모두가 이들의 방문을 몹시 기대하고 흥미로워 했을 듯한 분위기.
명수씨는 다시 맞은 편 소파에 앉은 왕을 찬찬히 살펴 본다. 여기에 내 DNA 일부가 이렇게 크게 일가를 이루고 존재하다니, 처음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바였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싹이 트고 자라나고 가지를 뻗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아, 나란 놈은 잘 살아 왔다고 자부했음에도 , 이 일가 앞에선 왠지 치졸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카니 앞에 면목이 없 다.
은주씨도 눈을 반짝이며 왕을 주시한다. 그리고 옆에 앉은 남편을 바라 보고, 공통점이 뭔가, 뭐가 이렇게 같은 분위기가 되는 걸까 열심히 관찰한다.
“ 미스터 김은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은주씨가 왕에게 묻는다.
“ 네, 저는 쎈메리 하스피탈 ( 성마리아 병원 )에서 흉부외과 닥터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대학에 나가 강의도 하고요. 제 아내도 작은 닥터 오피스를 운영하며 주로 소아, 청소년들의 일차 진료를 맡는 홈닥터를 하고 있지요.’
부드러운 목소리, 친절하고 공손한 태도, 그러나 그 내면에 무한한 긍지와 당당함이 느껴진다. ‘ 참으로 잘 난 아들이다’
마침 카니가 쟁반에 음료수와 치즈, 스넥을 가져 오고, 왕의 아내 린다도 스프링 쿨 러 음료수와 잔을 가지고 와 테이불에 늘어 놓는다.
“ 디너는 다섯 시쯤 준비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린다가 손님들에게 묻는다.
“ 그럼요, 좋아요” 은주가 대답하자 “ OK “ 린다가 생긋 웃으며 주방 쪽으로 간다. 왕도 슬그머니 자기 아내 린다를 따라 자리를 뜬다.
“ 카니, 어쩜 이렇게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어요? 다른 자녀도 있나요?”
“ 아니요, 단 하나의 아들이얘요.”
“ 근데 카니, 아들을 언제 낳아 벌써 손자까지 두었어요?
“ 네, 제가 좀 일찍 십대에 엄마가 되었어요.” 카니는 재빠르게 말하며 슬쩍 명수를 본다.
“ 서양 며느리와 함께 사는게 불편하지 않나요? ‘ 은주는 자신의 시집살이를 연상하며 묻는다.
“ 글쎄요, 아직은 몰라요. 내가 집에 잘 안 붙어있어요.이 집은 다만 일 때문에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니다 쉴겸 해서 돌아오는 제 아지트 같은 곳이지요 “ 카니는 흰 이를 드러내 활짝 웃으며 말한다.
“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그런데 카니 , 세계 곳곳을 살피는게 당신의 직업이었나요? “
그때 왕김과 린다가 다가와서 상냥하게 말한다.
“ 디너가 차려졌어요 , 와서 식사를 하시지요”
큰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으로 인해 밝은 넓직한 식당, 큰 테이불에는 새하얀 린넨 식탁보 위에 꽃과 접시, 포크 나이프 행커치프까지 빈틈없이 말끔하게 차려져 있다.
그리고 차례차례 음식이 나온다. 갓 구워낸 듯 따뜻하고 구수한 빵과 스프 , 셀러드, 메인으로 비프스테이크, 후식인 과일과 디저트,
카니가 자랑스럽게 말한다.
“ 오늘 음식은 아들 왕과 린다가 정성스레 만든 작품이랍니다. 맛있게 드세요 “
다섯 사람은 각자 다른 상념에 젖어 식욕은 별로인데 깔끔하고 심풀하게 준비한 메뉴는 험 잡을 틈 없이 완벽하다.
션과 루키는 일찌감치 자신들의 몫을 해치우고 자리를 뜬다.
대충 먹고 난 은주씨 상냥하게 말한다.
“ 참 맛 있게 잘 먹었어요, 도대체 이런 하이 콸러리 음식 어디에서 전수 받은 거지요?”
며느리 린다에게 물으며 칭찬을 겸한다.
“ 내 시어머니의 요리솜씨가 무척 좋으세요, 난 따라가기 불가능합니다. “
일동은 다 같이 웃으며
카니, 며느 리 린다에게 눈으로 말한다.
‘ 고마워 린다, 나를 돕느라고 많이 애 써 주어서.’
식사가 끝난 후 명수씨 부부는 카니와 함께 뒷 뜰 대크로 나가 한 잔 더 하기로 한다.
뒷뜰 풀장에서 왕과 아들 아이들이 수영을 하고 있다. 덩굴장미가 향기를 뿜으며 활짝 피어 있고 아이들이 그들의 아빠와 평화롭게 공을 주고 받으며 수영을 하는 모습,
너무 신선하고 아름답다, 세 사람은 별 말 없이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신다.
세 사람 다 착잡하고 복잡한 심정이다.
와인 병이 비자 카니가 새 와인을 가지려 자리를 뜬 사이,
은주씨가 남편을 흘겨 보며 날카롭게 말한다.
“ 당신 비겁하군요, 왜 솔직하지 못하죠? 난 당신의 비밀이 의심스러웠어요.
난 이미 카니가 어리디 어린 미혼모였다는 걸 말해 주어서 알고 있었 어요. 아들과 함께 기가 막히게 험하게 살아 온 내력도 얘기를 들었어요, 여러 가지가 궁금하고 의심스럽고 그래서 더 관심이 많았 는데 이제 여기 와서 그녀 아들 얼굴의 퍼즐을 넣고 보니 똑 떨어진 그림이 보여지네요.
카니가 굳이 우리를 초대한 이유가 이해되지 않나요?”
“ 당신한테는 정말 부끄럽고 면목 없소, 근데 나도 까마득한 옛날 에피소드, 잊고 있었고 솔직이 믿을 수 없었고 또 현실로 인정하기 괴로왔소. 그러나 막상 와 보니 부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소.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소? “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명수씨가 말한다.
“ 난 짐을 싸서 집을 나가면 그만이얘요. 난 홀몸 , 아주 심풀하죠, 카니와 그 아들을 인정하세요. 그리고 새 가정을 만드세요. 외롭고 힘들게 살아 온 모자를 따뜻하게 감싸 주세요.”
별로 술을 즐기지 않는 은주씨로서 와인 몇 잔에 활짝 대범해 진다. 모르겠다. 진심에서 하는 말인지, 책임질 수 있는 말인지, 스스로의 설음으로 목이 메이고 눈물이 왈칵 난다.
카니가 새 와인< Beringer 2010>을 한 병 들고 오며 말한다.
“ 은주씨, 우린 아무 것도 바뀌는게 없어요. 다만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의 관계망이 넓어졌다는 사실만 알기를 바래요.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우리 모두 훌륭하지 않나요? “
쾌활한 목소리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 저는 아들 왕이 레지던트를 끝내고 생활이 안정된 뒤 ,뜻한 바대로 유엔본부에 들어가 일을 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 경제 사회 위원회>에서 일해 왔어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이 있으면 즉시 현지로 가 현황을 조사하고 보고하며 또한 일목요연하게 도와줄 일을 작성하여 각 구제활동 분야에서 일하는 기관들에 도움을 요청하는 거얘요.”
카니는 각 와인잔에 와인을 따른다.
“ 근데 이 번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싶은 욕심에 유니쉐프(unicef )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리고 문화나 종교, 또는 정치적 이유로 여성들의 인권이 너무 열악한 아프가니스탄으로 갑니다. 자라나는 여자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와 여성들의 인권 신장과 사회참여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룩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일겁니다. 기한은 정해진게 아니고 아마 거기서 오래도록 그들과 함께 살 각오로 떠나는 거얘요..”
“ 아, 거기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오랜 역사의 종교나 문화적 편견이 너무 크다고 하던데요.”
은주씨의 말이다. 명수씨도 걱정스럽게 카니를 바라 본다.
“충분히 알고 있어요. 다른 국제 사회 봉사단체들과 연대하여 일을 진행해 나갈 겁니다. 그리고 이제 곧 출발할 날짜가 되었어요. 그래서 은주씨의 가게에서도 더 이상 일을 못 하게 됐어요. 죄송하게 됬어요.”
카니는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낸 것이 벅찬듯 와인을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명수씨 부부를 응시한다.
“ 제가 바라는 것은 오늘 처음 인사한 내 아들 왕이와 그의 가족들 포함하여 모두 함께 원만하고 정다운 인간관계를 형성해 주십사는 것입니다. 저의 의도는 이것이 다 입니다. “
하며 나머지 잔을 비운다.
카니의 긴 이야기가 끝나고 그들은 각기 다른 상념으로 조용히 잔만을 비운다.
이제 카니의 집을 떠나며 은주씨가 닥터 왕에게 말한다.
“ 닥터김, 머지않아 당신을 우리 집에 초대하겠어요. 당신의 가족 모두 꼭 와 주세요”
“ 아, 물론 가겠습니다. 잊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
왕은 정말 기쁜듯이 말한다.
명수씨는 기쁘고 쁘듯한 마음과 서운하고 휑한 마음 , 그 양극의 마음에서 분간이 안 되고
어색한 웃음만 머금는다. 그리나 차마 속으로 말한다.
‘ 카니 난 당신에게 미안하고 부끄럽소, 몰라보도록 훌륭하게 성장한 당신 모자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오.’
닥터 왕도 부드러운 눈길로 명수씨를 바라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