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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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무거운 주제를 담아내고 있는 책이다. 책을 읽으며 처음 들었던 생각은 어쩌면 전쟁의 잔인함과 그 안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의 충돌에 대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은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인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기록을 담은 기록의 총체적 결과물이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로 정치철학자인 동시에 그녀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독일의 유대인 학살로부터 탈출한 동시대를 살아온 현 증인이었다. 그녀는 교양잡지 뉴요커의 지원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책은 아이히만의 생애와 전범일 수밖에 없는 그가 스스로 무죄를 주장하게 되는 계기를 군대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해 왜 그런 생각과 판단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상세하고 논리적으로 기술하고 있어보였다. 다만 뭐랄까. 번역에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깔끔하지 않아 읽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게 다가온다. 길게 늘어지는 장문과, 인용 및 부수적인 설명부분에 대한 편집도 마찬가지다.

딴은 단순히 재판의 기록문만 정리한 것이 아니고 당시 상황에 대한 많은 정보제공이 뒷받침을 하고 있어 책이 보여주고 있는 범주는 제법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 몇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들을 추려볼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할지 조금은 막연하다. 군인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해왔을 뿐,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을 무엇으로 할지 문득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독일이 왜 그토록 유대인 학살에 열을 올렸어야 했던가. 그 근원적인 이유 아닌 문제를 생각했던 것은 두 번째의 의문이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전쟁시가 아니더라도 삶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일어날법한 생경스럽고 낯선 반전으로 인해, 오히려 더 강렬하게 생겨나는 인간의 진정한 신념에 대한 의구심 같은 다소 우울한 감정들을 끄집어냈던 것도 같다.

책에서 보면 독일의 히틀러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과 같은 민족소속이었던 ‘유대인 공동체(유대인 위원회)’의 이중적 양면성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나치스와 협력했고, 나치스의 도구화로 변질되어갔다. 강압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개인과 어느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정치적 혹인 경제적 아니면 사회적 이익의 순위를 위해 같은 민족을 배반하고 위협하는 행위는 비단 유대인학살과 관련한 유대인 공동체에 한해서만은 아닌 듯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비슷한 역사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가말이다. 모든 역사와 모든 인간의 이중성이 서로 닮아 있다는 건 아이러니하면서도 동시에 우울한 일이다.

 

더불어 독일이 잔인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을 때 주변국들이 보여주었던 암묵적인

행태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도 같다. 이 시기에 자행된 모든 유대인 학살의 문제가 단순히 독일 안에서의 인종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당대 유럽 전역에서 팽배하게 부풀었던 순수혈통의 보전이라는, 다소 맹목적으로 작용했던 유럽의 민족주의(민족 이기주의) 측면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시작이야 독일이 먼저였을지는 몰라도 주변국들의 암묵적 지지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은 자신의 집과 자산을 빼앗기고 자신의 고향을 떠나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는 운명과 마주하게되었던 것이다.

 

“모든 국가 당국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위원회도 아주 빠르게 ‘나치스의 도구’가 되어버린 네덜란드에서는 10만 3000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대략 5000명은 테레지엔슈타트로 통상적인 방법을 통해 이송되었는데, 이는 물론 유대인 위원회의 협력을 받아서였다.”-p197

작가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유럽사회에서 발생한 나치스의 전반적인 도덕적 붕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이 시기에 자행되었던 유대인학살과 관련한 개인과 나라. 그 안에 존재했던 수많은 비 유대인들의 생각들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정말 그들만의 민족적 우월함을 추구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강력한 압력으로부터의 타협과, 무심함으로 인한 무지만을 쫒았던 것일까.

자 이제 유대인의 강제이주에 깊이 관여하고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으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죄다’, 라고 말했던 아이히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어디까지나 군인으로서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일반인의 신분이었다면 분명 죄인이었겠지만, 군인의 신분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이론을 주장한 이 사람을 두고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악을 행할 수 있다. 누구나 악해질 수 있다. 악한자라고 해서 얼굴이 특별히 악마처럼 생기거나 어떤 표식이 있는 것은 아니며, 그저 평범한 사람도 어느 순간 어느 계기를 통해 악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바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에 깔린 이론일 듯하다.

악의 세력이 우리 자신을 찾아왔을 때(악과 직면했을 때)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하고 판단하며 사유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절실하게 지켜내야 하는 신념이자 정의가 아닐까하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고 싶은 내용일지도 모른다. 평범했던 한 사내가 전범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받은 이 역사의 기록 앞에서, 작가는 인간의 무사유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유하지 않은 행위는 그 어떤 악보다도 위험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같은 내용을 조금은 더 쉽게 풀어쓰면 어땠을까. 이 문제는 번역의 문제일까. 아니면 편집의 문제일까. 그도 아니면 책의 무게를 내가 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어쨌든 읽고 생각해볼만한 가치는 충분한 책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아쉽다.

각설하고 시종 횡설수설한 듯해서 빨리 마무리를 짓고 가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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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20-10-31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불행했던게 기존의 과격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에 반대하고 주변 팔레스타인들에게 온정적인 태도로 인해 거의 백안시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한나 아렌트를 다른 정치철학자들보다 특별하게 생각하는데요. 나치와 유대인 학살을 심층적으로 연구하여 그것에 걸맞는 명성을 얻었음에도 과격하고 보수적인 유대인들에게도 똑같이 비판한 점은 그녀의 양심이 실로 대단하다고 여겨지더군요. 하여튼 이른 아침에 한나 아렌트를 기억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제가 매일 들고다니는 노트북 배경화면이 그녀가 담배연기를 내뿜는 흑백사진이기도 합니다.

월천예진 2020-10-31 10:54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저도 책을 접하면서 책과 더불어 한나 아렌트 관련한 자료를 더 찾아보고 있어요. 묘한 끌림이 있더군요. 한나 아렌트라는 사람~~~
 
악령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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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상)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거장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 조금 거창한가. 아니다. 어쩐지 조금 어색하다. 그의 장편소설 ‘악령’은 전권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집에 있는 책은 첫 번째 상권 하나뿐이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는 것이지만, 책을 구입할 때의 당시 상황에서 느꼈던 묘한 분위기와 흐름에 대해 이제는 충분히 그럴만했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이런 걸 뒤늦은 후회라고 하는 것일까.

물론 점원의 멘트가 심오한 계산이 포함된 것인지, 단순한 판매수익에 따른 멘트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계산대 앞에서 책 권수를 확인하는 점원이 했던 말은 ‘상권만 하시는 건가요?’ 였다. 그 순간 어떤 의도가 숨겨졌는지는 알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지금 나는 무심하게도 여느 책과 더불어 악령의 상권만 구입했던 과오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는 걸 말하는 중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많이 접하진 못했다. 딴은 그 명성만큼이나 그의 작품이 늘 육중한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어떤 하나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가싶다. 생각할 것들이 많은 만큼 깊이감은 깊어지고, 아이러니하게도 비탄과 함께 탄식이 또 그 이면에서의 알 수 없는 탄성이 교차된다.

안타깝게도 상권에는 전체 장편의 스토리중 도입부분에 많은 지문을 할애하고 있기에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전개는 책 말미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된다. 으레 그렇듯 전반부는 등장인물들을 사귀어가는 시간이다.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이런 거다. 인물이 갖는 본명도 길고 복잡한데다 두서넛 대는 예명까지 익혀야하는 고충도 언제나 여전하니, 이 또한 사소한 고충이지 않은가말이다.

 

지방의 유지로 있는 중년여성 바르바라 빼뜨로브타 스따브로기나는 20년 가까이 스째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끼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료이며 후원자로서 그의 곁을 지킨다. 이들이 주인공인가 싶지만 사실 소설 상권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내용은, 바르바라의 아들 스따브로긴(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예명으로 자주 언급됨)의 추문과 관련한 사람들의 오해와 의심, 의혹, 증오와 분노 혹은 알 수 없는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면이 강조된 의구심들의 표출이 거의 대부분이다.

젊은 남녀 사이에 있을 법한 염문설. 그것이 가지고 오는 의혹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게 되고, 이로 인해 얽히고 꼬이는 인간관계. 표면적으로 작품 악령이 그려가는 스토리는 남녀의 사랑과 이를 둘러싼 계급과 신분의 이질감. 그에 따라 변질 될 수밖에 없는 인간성 정도로 접근해볼 수도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기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악령의 존재감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아보인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소개문을 읽어보면 악령이라는 제목이 지니는 의미는 상당히 상징적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돼지 떼에 들린 악령들처럼, 러시아를 휩쓴 서구의 무신론과 허무주의가 초래한 비극을 러시아의 어느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출처-열린책들 www. openbook.co.kr)

 

어느 시대에서였던가. 어느 시기에서였던가. 혹은 누군가에서였던가. 익숙하지 않은 신문물은 새로움의 호기심과 더불어 불온한 의혹과 불안감을 조성하곤 한다. 당대 러시아가 직면해야했던 시대적 정치사회적 흐름에서 작가 도스또예프스끼는 물밀 듯 빠르게 밀려드는, 새롭지만 불안함으로 쏟아져오는 흐름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혹 누군가가 앞에 소개하는 소개문 전문을 읽어본다면, 인용에 있어 작품의 상,중,하 중 상권에 맞는 분량만큼을 발췌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도싶다.(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직 남아있는 책이 두 권이나 있기에 뒤에 따라오는 해설은 잠시 뒤로 밀어두기로 하자. 전체 작품을 읽기도 전에 해설에만 매달리고 싶지는 않다. 전문을 읽어보지 못해서 인물에 대한 평가를 먼저 내리기도 무모한 노릇이고, 인물이 갖는 성격분석도 아직은 애매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한다.

선과 악으로 구분 짓는다해도 과연 누가 선이며, 누가 악인지 명백하지 않다. 저마다 음흉하면서도 측은할 정도로 숨기고 싶은 비밀들이 눈에 보이더란 말이다.

 

알 수 없는 진실의 내면을 감추면서 가면을 쓰고 다가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작가는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게 될까. 이 지독한 끌림에서 한동안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서둘러 나머지 책을 구입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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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10-1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라이크요~
좋은 밤 되세요~

han22598 2020-10-20 0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머지 2권에 대한 리뷰도 궁금해요 ^^

월천예진 2020-10-20 07:5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나머지 책들이 읽고 싶은데 잠시 쉬어가기?를 하고있네요. ^^;;;

월천예진 2020-10-20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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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자전적 소설이라고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글이다. 그러나 그것이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데 있어 어떤 선입견이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작가가 스웨덴 출신으로 시인이자 대중음악가로 활약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책의 안내가 보인다. 한때는 아이스하키 선수였다고도 적혀있다. 이력이 독특하다.

 

주인공 톰은 아내 카린과 대학에서 만났고 동거를 시작한다. 넉넉하지 않은 경제적 환경에서도 첫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설레던 순간, 아내인 카린이 급성 백혈병에 걸리게 되면서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된다.

소설은 앞서 언급했듯이 빠른 전개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단단하게 잡아가고 있다. 동시에 개인의 감정선이 깊이감과 섬세함으로 드러나기보다는, 건조할 정도로 인물의 감정을 절제한 채 그려내고 있다. 반면에 병원의 분위기, 환경, 병원 안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다양한 경험의 묘사는 상당히 디테일하다. 병원이라는 곳이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의료진들이 뒤섞여 수많은 사건과 함께 서로 다른 입장에서 비롯된 갈등이 비집고 들어차있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소설에서 그려지는 병원의 분위기와 이를 감당해가는 인물의 심리는 조금은 낯설게 다가오기도 한다. 어쩌면 이는 소설 속에서 발현되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차분하고 때로는 냉정함을 자아내는 분위기 역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소설의 전반부가 카린의 응급한 상황과 딸 리비아의 출생, 그리고 남겨진 톰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면, 후반부에 갈수록 주인공 톰의 가족사에 집중하게 된다. 과거 유년시절 겪어야 했던 아버지와의 갈등, 현재 병들고 나약해진 부모의 존재 그리고 마지막의 그 아버지의 죽음까지. 소설은 톰이라는 인물이 경험하는 지난한 삶의 모습을 통해, 과거와 현재 안에서 한 개인이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무언의 삶의 성찰을 보여주는 듯하다.(성찰이라는 단어를 쓰고보니 어쩐지 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지만-.-) 작품은 혼자가 된 톰이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홀로 당당하게 딸아이를 키우며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해가며 끝을 맺는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사뭇 고저적이다. 자전적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음을 높이 사는 분위기이다. 감정에 치우치거나 혹은 치우치지 않는다는 조건이 얼마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면, 딴은 이러한 요소로 인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는 것도 지적해봄직하지 않을까.

지나친 침잠과 감정의 깊이감은 흔히 작품이 신파문학으로 갈 문제를 걱정해야 하겠지만, 때로는 문학의 큰 힘이자 궁극적인 목적의 방향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상기하게끔 한다. 그러나 이 또한 개인의 취향이자 시대의 흐름과는 별개의 일이다. 사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 각자의 몫이다. 사견이고,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언론의 반응을 실어둔다. 책에 대한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역시 개인의 취향에 달린 문제다.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읽고, 느끼고, 생각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 불안감, 감동을 번갈아 보여주는 말름퀴스트의 작품을 사랑과 애도에 대한 긴 명상과 같다. 깊은 감정과 감동이 있는 소설이다.”- 커커스 리뷰

 

“상실에 대한 깊고 개인적인 이야기,(……)요즘 인기를 끄는 자전적 소설이나 회고록 형식은 자기중심적이라기보다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가디언

 

가장 공감하는 글이다.

“딸의 출생과 아내의 사망이라는 고통스러운 교차점에 걸린 한 남자의 삶. 급박하고, 가슴 아프지만,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소설” -파이낸셜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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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특별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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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오래전부터 버벅거리던 스피커가 완전히 먹통이 됐다. 아무리 두드려보아도, 선을 다시 꽂아보아도, 먼지를 털어보아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듣고 싶은 음악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갑자기 밀려드는 낭패감이라니. 이 낡은 스피커가 이미 오래전부터 고장이 날 조짐이 있어왔던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서운해진다. 스피커가 뭐라고. 그러나 나는 잠시의 주저함을 뒤로하고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 중이다. 이 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지 않은가. 후후

 

책은 민음사에서 다시 특별판으로 나온 듯한 분위기다. 빳빳한 양장본의 겉표지를 자랑하며 프랑스어 비슷한 글씨가 그림처럼 그러져있다. 책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분명 대학시절 즈음에 동일한 책을 구입을 했던 기억이 있으며, 읽다가 너무나 빨리 지쳐 외면했더라는 약간은 비굴한? 기억도 가지고 있다. 그 젊은 시절에 왜 그리 빨리 이 책을 외면했던 것일까.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십여 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시절에 나를 도망치게 했던 그 답답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놀라운 변화인지 자연스러운 이치인지 나는 아직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이번 책은 철학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다양한 이야기와 주제를 담고 있다.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해내기란 다소 버거워 보인다.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해보자. 그리고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개인의 사견임을 미리 밝혀둔다.

우선 비유와 상징 그리고 은유의 방식에 소설의 스토리를 가져와 작업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세상의 절반은 남자이고, 다시 남겨진 절반은 여자라는 말이 생각나다. 책은 남자와 여자. 이들의 가장 근본이 되는 성적인 욕망과 이 욕망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을 보여준다. 물론 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는 인물들이 각자 느끼는 차이가 크게 작용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소련군의 점령으로 공산화가 되어가면서 무너져가는 이들의 조국 프라하. 작품의 배경으로는 전쟁으로 혼란의 시기를 겪어야 했던 시절을 보여준다.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는 개인의 가치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존재와 가치, 그 사회가 지니는 사상의 가치를 포함해 모든 것들이 뿌리 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근원에서부터 울려오는 이 모든 불안감은, 눈부시게 밝은 빛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어둠과 조우하게 된다. 말 그대로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빨려 들어가게 되는 수렁과 같은 이 어둠이란(사상의 검증, 도청, 비밀경찰, 정치적 회유와 위협으로부터의 도피), 실상 인물들이 멈추지 않고 극복하며 성장해가야 하는 어떤 당위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작가는 잔인하게도 주인공들을 비열함과 처절함 그 한 복판에 묶어놓았다는 생각을 한다. 인물들은 각자의 본질적인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번뇌와 고통을 끌어 앉은 채, 다시 힘들게 당대의 시대적 사회적 암울하고 힘겨움을 두 배 세 배로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고 그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라 판단했으나, 다른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깊이 파고들어가야만 했다. 이를 두고 생각하기를 필연일까, 가벼운 운명일까, 아니면 진정한 사랑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너무나도 불안했기에 스스로를 감당하기조차 힘겨워했던, 가벼운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생겨난 아이러니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은 어떤 것일까∼∼. 다시 생각이 많아진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아름답다, 라고 했던 문장이 생각난다. 인간은 감정에 의해 흔들리고, 분노하며,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나약하면서도 강인한 존재다. 때로는 인간이 스스로가 그런 나약하고 완벽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고군분투하는 삶을 선택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개인적인 사견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인간에 대한 그의 뿌리 깊은 불신(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이 그가 직업을 선택하는 데 이미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P301

 

“보다 합리적이고 보다 은근하게 전략적으로 해야 한다는 거죠. 그들은 서명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P351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P364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조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P365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신의 의지에 국한 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물론 어느정도의 개입은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마지막 선택의 주체는 인간 존재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모든 갈등과 고뇌와 기쁨과 희열 속에서 각자 자신의 존재에 희열을 느끼다가도 끝없는 추락의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되는 이런 그로테스크함의 본능적 감성은, 인간의 삶이 가벼워 보이지만 절대 가벼울 수 없으며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이 모든 갈등의 순간을 극복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의미로 재차 각인된다.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채 불안함 속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함께 들고 버텨야 하는 순간 흔들리는 자아를 발견하게 될 때 아마도 이 문구를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이토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또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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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와 비답 - 신하가 묻고 왕이 답하다
윤재환 지음 / 이가서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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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와 비답

 

-역사 안에서 배우다.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이 가정학습을 하고 있는지라 컴퓨터 앞에 앉기가 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은 끊임없이 숨을 쉰다. 어제 다시 폭우를 동반한 태풍을 몰고와서 힘들게 올려놓았던 장화를 끌어내렸고 비옷을 다시 챙겼는데, 오늘은 다시 말짱한 해가 동그랗게 떠있다. 부끄러운 듯 바람이 살랑거리는걸 보면 가을인가 싶기도 하다.

가을을 논하기에 시국이 불안하기도 하고, 개인사도 불안하니 통 책 읽기에 몰입하기가 어렵다고 투정을 부리면서도 상소와 비답을 읽는다. 누군가 물었다. 상소와 비답이란 것이 무엇인가요?

 

상소와 비답은 조선 중기까지 각 시기에 올라왔던 다양한 상소들과 이에 대한 임금의 답을 모아놓은 책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사료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형식과 구성면에서는 각각의 사료마다 상소를 직접 써서 올린 이에 대한 소개, 상소를 정리해서 이번 책으로 낸 저자 윤재환의 평이 실린 평론, 그리고 원문에 대한 번역 글인 역문(한글), 한문으로 된 원문을 싣는 틀을 갖췄다. 마지막으로 임금에 대한 글로 역시 역문(한글)과 한문인 원문으로 구성했다. 모두 37건의 상소를 소개하는데 조선조 초기 태조를 시작으로 해서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상소가 광해군 때까지 이어진다.

 

책에 실린 상소를 정리하면 태조 때 상소가 2건, 세종 때 6건, 단종 때 1건, 세조 때 3건, 성종 때 8건, 연산 때 1건, 중종 때7건, 인종 때 1건, 명종 때 3건, 선조 때 4건, 광해군 때 1건이다. 책을 읽으면서 불쑥 소심한 호기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 시기, 혹은 어떤 임금의 시기에 상소가 증가했었을까. 어떤 내용의 상소들이 빗발쳤을까. 그들이 올렸던 상소들에 대한 해결책은 관연 현실성이 있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 물음에 대한 답에 대해서는 막연하게도 일정부분 사심이 섞인 이야기를 먼저 써야 할 듯하다. 이를테면 어느 시기에 어느 왕이 통치를 하느냐에 따라, 또 어떤 유능한 인재들이 존재해 왕 옆에서 보필했느냐에 따라 정치적 입장, 수많은 쟁점을 포함한 것들을 판단해야 한다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라는 사심이 그것이다. 역사란 결국 작게는 개인의 이야기인 동시에 크게는 한 시대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건 왜인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그들이 처했던 정치적 이념과 갈등에 따라 이들이 하얀 종이위에 검은 글씨로 써내려갔던 이야기들은 때로는 치열했고 매섭도록 강직했으며 또 이들의 이야기는 그만큼 간곡했다. 임금과 신하의 예의와 법도 정치와 유교적 이념,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포함해 조선을 세우로 그 안에서 살았던 수많은 이들의 삶의 모습이 때로는 애틋함으로 다가오기도 한 이 책은 어쩌면 내가 아끼는 책 한권과 무척이나 닮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문(이 시대가 묻는다), 김태완 저]

당대의 정치적인 입장에서 써내려간 상소가 가장 많았던 것을 볼 때, 과거를 포함한 현재의 어느 시기에서나 언로 즉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부분임에는 분명하다. 많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직언을 하면서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임금은 이들의 간언을 결코 매몰차게 내치지 않았던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깨닫는다. 그것이 항상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그 내력이 바로 조선조 500여년의 역사를 지탱하게 했던 힘이 아니었을까 싶은거다.

 

기억에 남는 내용을 간략하게 적어보자. 정치적 상소도 많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많으며 , 친인척의 병폐와 부조리 혹은 개개인의 신분의 차별, 억울함에 대한 변명 등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을 움직였던 내용은 자식의 허물에 대해 대신 용서를 구하는 어느 가련한 아버지가 쓴 상소문이었다. 이 상소문은 유일하게 단종 시기에 단 한건으로 소개하고 있는 상소문인데 계유년 1월 21일 전 경창부 소윤 민대생 이라는 이가 올린 글이다.

‘살기 힘든 아들의 벼슬길을 열어주십시오’ 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는 이 상소문은 자식의 허물을 알면서도 애끓는 부모의 심정으로 써내려간 81세 노부의 절절한 이야기가 그 중심을 이룬다.

 

-민효역(아들)의 죄가 비록 크다고는 하나, 그 정은 오히려 용서할 만한 점이 있으니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것과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차마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성상의 위엄에 저촉됨을 무릅쓰고 감히 늙은이의 간곡한 정을 말씀드리니, 엎드려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불쌍히 여기어 주십시오. p91-

 

한 번 보고 다시 두 번 봐도 감정에 호소하는 상소문이다. 이에 대한 왕의 비담과 전교는 육조에 내려 의논하게 한 후, 이 절망에 빠진 아비의 아들을 임용하라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시기가 단종1년 시기에 올라온 상소이기에 비답과 전교를 내린 이가 실제의 단종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논리적인 식견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에게서 인간적인 인성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점 때문에라도 개인적으로 민대생의 상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책 후반에 갈수록 이런 인정을 논하는 상소와 논쟁이 몇몇 더 등장하기도 한다. 인간적인 고뇌와 번민하는 이들의 모습, 효, 인성.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시선은 살짝 그 쪽으로 기울었다. 서슬이 퍼렇게 날카롭기보다는 구부러질 줄 알고 그렇게 조금은 유연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정해놓은 관점으로 읽은 이번 책은 저자가 의도한 본래의 의도가 잠시 퇴색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작부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책을 읽어나간다는 게 다소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쟁점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읽고 이해하기를 원했던 사심에서부터 나온 우매한 판단이 더 지배적이었음을 고백한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들이다. 이 책 역시 어떤 관점을 가지고 볼 것인가, 하는 것과 함께 어떤 관점으로 수용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어느 시기든 문제는 있어왔고, 곪아터지기도 했으며, 그로인해 혁명과 개혁이 뒤따르기도 했던 것이 우리의 역사다. 그리고 우리는 늘 그렇듯 역사의 한 자락을 밟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역시 역사의 한 순간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다시 살펴봐야 하고, 더 배우며 깨닫고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날카로운 인식으로 무장한 채 이 책 상소와 비답을 읽을 수도 있으며, 그저 이 또한 개인의 역사요, 한 시대의 기록이요. 라 생각하고 읽을 수도 있으니 이는 개인의 선택이고 개인의 철학적 관점에 따른 판단이어야 한다.

 

무지하게도 사설이 길었다. 여러 가지로 힘든 날들이다. 모두들 힘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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