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모자이크 살인
줄리오 레오니 지음, 이현경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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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모자이크 살인

 

오랜만에 읽어보는 추리소설이다. 제목에서 끌렸나? 그랬나보다. 단테라니. 내가 아는 그 단테가 맞을까? 지옥의 여러 문을 거치면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야할지. 어쨌든 단테의 신곡은 내게 그렇게 자리하고 있는 책인데 말이다. 이번 책은 단테가 나오는 추리소설이라고 하니 호기심이 자꾸 발등을 근질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 단테는 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단테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작가 줄리오레오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단테를 주심인물로 소설을 구성했다고 했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가 신곡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단테보다는, 이면의 다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조금은 다른 단테를 창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책 속에 등장하는 단테는 시인인 동시에 저명한 학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또한 이탈리아 행정위원직의 일원으로 정치적 행보에 살짝 발을 들이민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사실 현실 비판적 의식이 강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를 주변으로 해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학식과 정치적 입지를 겸비한 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일선에 나서게 되면서 소설은 전개된다.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는 문제들은 아마도 교황의 영향력과 이와 대립하는 세력들의 반목과 투쟁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작가는 작품에서 당대 정치 종교를 포함한 시대적 갈등의 면모를 배경으로 한다. 구리를 금으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거짓된 마술처럼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흔드는 연금술과 같은 것이라고 할까. 각설하고 소설은 새로운 시대와 정치에 대한 갈망과 같은 그들만이 꿈꾸는 이상향에 대한 동경심을 그려냈다고 봐야한다.

마지막에 범인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그의 곁을 지켰던 한 여인(작품 내내 단테와 함께 책을 읽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신비한 매력의 여인이다)의 마지막 행보와 단테의 선택은 어떤 의미를 주는 걸까.

 

소설만으로 볼 때 개인적으로는 추리소설만이 지니는 요소보다 다소 많은 내용이 들어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작가는 이러한 부분이 주인공 단테의 철학적 사상과 입지를 잘 대변해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런데 말이다. 딴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처럼 조금은 산만해 보인다는 생각도 조금씩 나를 자극시키기도 하더라. 물론 개인의 좁은 소견임을 밝힌다.

단순한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적 상상력이 가져오는 환상여행적인 재미가 더욱 컸던 작품이다.

 

사족을 단다. 이런 생각들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며, 싸우고, 투쟁하고 반목(이 표현을 너무 자주 쓰는 것 같아 슬퍼진다)하고, 전쟁을 하며 자신의 시대를 살아간다. 작품에서처럼 어쩌면 살아가는 순간순간에는 죽음이라는 건널목도 반드시 존재하는 듯하다. 어느 시절이나 어느 시대나 갈등과 투쟁과 분쟁은 있었을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득 그런 이야기를 접하고 있으니 생각이 늘어진다. 문학은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까닭에 대리 만족의 개념으로 우리 곁에서 여전히 문학의 목숨 줄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생각을 할 때, 우리의 삶의 모습이 이토록 만화경처럼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싶다.

말이 많아지니 생각이 먼데로 판단력을 끌고 가버리는 모양새다. 서둘러 끝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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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편의점 : 문학, 인간의 생애 편 - 지적인 현대인을 위한 지식 편의점
이시한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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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현대인을 위한 지식 편의점

-고전 맛보기


정말 편의점에서 지식을 살 수 있을까. 실은 말이다. 어제도 나는 편의점에서 도시락 두 개와 햄버거를 샀다. 물론 그 중에 내가 먹은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문득 생각하기를 정말 편의점에서 내게 맞는, 내가 좋아하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다소 과장된 상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행복해지기보다는 조금은 많이 우울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걸 두고 소심한 변덕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말이 그렇다는 거다. 책을 쓴 저자 이시한의 생각을 엿보고 싶어진다. 어렵게 다가오는 고전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고 설명해줄 수 있는 어떤 방법? 아니면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함께 책에 대한 이야기와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저자의 책 ‘지식 편의점’은 시리즈물이라고 했다. 이쯤에서 욕심을 내보면 지식 편의점 한권을 읽었으니 이제 그의 남은 책을 내친김에 마저 읽어보고 싶어진다.


독서라는 행위는 어떻게 보면 정말 외로운 순간들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혼자서 밥을 먹는다는 의미의 ‘혼밥’ 같은 표현처럼, 독서의 과정 역시 오롯하게 혼자 읽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때로는 혼자만의 독서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독서의 과정도 일정부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교만한 독서로 멈추지 않기 위함이다. 하나의 작품을 읽고 평가함에 있어 나의 생각은 이렇다, 라고 했을 때 자칫 내 생각이 만들어낸 틀에 갇혀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혼자만의 독서가 갖는 필연적인 한계가 아닐까싶다. 어쨌든 이런저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가끔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듣고 싶어지더란 말이다.


이번 책 읽기는 이런 나의 소심한 불안증과 궁금증 그리고 무엇보다 무형의 한계가 갖는 중압감을 천천히 풀어주는 역할을 잘 해주었던 것 같다.

그의 책은 친절했다. 저자 이시한은 사변적 측면을 포함한 다양한 주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각각의 문학작품을 소개한다. 아직 책으로 접해보지 못한 이들을 위한 작품의 줄거리 소개도 잊지 않는다. 각 작품은 그가 정한 주제에 맞게 재구성 되어 있으며, 저자는 이 주제 안에서 작품을 분석해 함께 생각할거리(숙제)를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딱딱하지 않은 분위기와 대화하는 듯한 구어체로 쓰고 있어, 친근감이 도는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때문에 부담 없이 읽어볼 수 있는 책으로 다가온다.


책에 대한 처음 끌림은 친근감이었다. 읽어본 작품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더 이시한의 생각이 궁금해졌다고 적고 싶어진다. 나와 다른 그는 어떤 생각으로, 어떤 해석으로 작품 안으로 들어갔던 것일까.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내가 품었던 의문들 한가운데 서 있기도 했고, 살짝 비켜가기도 했다.


실은 그랬다. 이시한 역시 수많은 독자 중에 한 사람이고, 누구나 그렇듯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은 개개인의 철학을 겸비한 개성만큼이나 ‘독자적’이라는 것을 다시 상기했던 것도 사실이다. 읽어가는 동안 때로는 그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때로는 조목조목 비교하며, 때로는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려 거리감을 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저자 이시한이 소개하고 있는, 지식 편의점이 품어내는 가치에 조용히 잠식되었다고 말하려던 참이다. 작품 중에는 이미 읽어본 책들도 있었고,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도 있었다. 이전에 먼저 읽고 기록으로 남긴 작품들에 대해서는 저자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기록한 것들을 같이 펼쳐두고 읽어나갔다.


밀란 쿤데라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한나 아렌트의[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저자 이야기에 더 집중했던 까닭은, 나 역시 이 작품들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어떤 요소에 더 집중해서 읽느냐에 따라 작품에 대한 해석은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다. 늘 인간이라는 존재에 몰입해 책을 보는 내게 있어서, 인간존재라는 주제는 또 하나의 한계로 다가선다. 어떻게 보면 나는 이런 나의 한계를 즐기면서도 힘들다고 칭얼거리는가. 어쨌든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이야기는 분명한 투정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각설하고 책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시한의 이번 책은 정치, 사회, 문화, 인간 등 많은 분야에서 만나게 되는 쟁점들을 편안하게 접근하고 있기에 흥미롭고도 유쾌하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책 중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 중 유독 ‘곰스크로 가는 기차’가 시선을 붙잡는다. 누구나 곰스크로 가고 싶은 욕망이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실현되지 못한 이상과 현실적 욕망’ 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의 심연으로 들어가보고 싶은 걸까. 저자의 바람처럼 이십여 년 전 읽었던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을 읽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이시한의 책과 함께, 책 속에 소개되어 있는 작품까지 꼭 찾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나선 길을 더 밝게 밝혀줄 등불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책 읽기 즉 ‘독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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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6-05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평집인가보네요. 같은 책을 읽어도 다양한 생각과 느낌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참 재밌는 것 같아요. 독서 자체에 대한 즐거움도 있지만 책을 읽은 후에 사람들과 함께 서로의 소감을 나누는 것도 그 재미를 확장시켜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

월천예진 2021-06-05 20:25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함께 하는 책읽기도 큰 매력이 있지요. ♡♡
 
그럴수록 산책 - 걷다 보면 모레쯤의 나는 괜찮을 테니까
도대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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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수록 산책

-따뜻함과 산뜻함의 위로

 

표지가 산뜻하다. 이런 색을 무슨 색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초록에 옅은 노랑색을 혼합했을 때 볼 수 있는 색일지도 모른다. 글과 그림 (카툰)을 함께 싣고 있는 책은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으로 얇고 가볍다. 그래서 어쩌면 산책할 때 한 손에 들고 가도 부담되지 않을 것 같다.

작가는 도대체라는 필명으로 책을 냈다. 글과 함께 직접 그림도 그렸다. 카툰 형식이다. 두세 컷에서 여덟 컷을 넘기지 않는다. 이번 책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의 그림은 글과 함께 동등한 역할을 해준다. 그건 아마도 그림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진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첫인상은 산뜻하고 가볍지만 사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사색적이면서 동시에 철학적인 시선이 가득하다. 작가는 어려운 일이 있거나 속상한 일이 있거나, 그렇게 삶이 자신에게 도전장 혹은 불편하고 어색한 손을 내미는 때마다 밖에 나가 걷는다고 고백 한다. 책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이 글을 쓴 작가의 독특한 시선이 아닐까 싶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자신을 향해 마주보면서 다시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뭐랄까. 작가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 혹은 거친 세상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에게 더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산책을 하며 걸어가는 과정에서 주변의 다양한 존재들과 교감을 나눈다. 나무와 새 혹은 바닥을 기어가는 작은 다양한 벌레에게까지 말을 걸고 마음을 열고자 하는 모습과 더불어, 순수함과 엉뚱함으로 무장한 그녀만의 따뜻한 생각들이 묘하게 이뻐 보이고 그냥 그렇게 마음에 와닿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이 선택한 삶도 정말 다양하지 않은가. 어떤 삶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답은 여전히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는가, 라는 화두가 아닐까. 책은 조급함을 뒤로하고 천천히 시간을 즐기며, 순간순간 성실하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게으름에서 나오는 나태와 느림이 아닌, 치유와 위로에서 나오는 성실과 느림의 미학이다.

 

-그 노란 계단을 밟으며 깨달았습니다. 지금처럼 제가 별의 별것에서 힘을 얻는 한, 저에게 늘 희망이 있을 거란 사실을요. 세상은 언제나 비슷한 모습으로 제 앞에 펼쳐져 있을 테죠.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해 어떻게든 힘을 내려는 마음이 있는 한, 저는 또 남들이 보기엔 변변찮은 무언가를 찾아내 희망의 증표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p199



 

 

 

 

-나를 속이고, 조이고, 때리고, 울릴 수도 있는 세상에서

무심히 나를 지나치는 모든 것이 고맙습니다.- p201

 

때로는 그냥 지나쳐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너무 소중하지 않은가. 읽는 이에게 자분자분 위로의 말을 걸어줄 것 같은 책. 도대체의 그럴수록 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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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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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욕망과 사랑. 다른 선택지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작품이다. 사랑과 불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뜻밖에도 이 작품의 작가가 남자였다는 것이 조금은 낯설다. 마담 보바리를 읽는 내내 더불어 연상됐던 작품은 입센의 ‘인형의 집’이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1856년 완성했다고 한다. 반면 입센의 작 ‘인형의 집’은 1879 초연했다는 자료를 찾는다. 이십여 년 뒤의 일이다.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공교롭게도 두 작품의 작가가 남성이라는 점. 작품 안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하면서도 결론적으로 마무리가 상대적으로 갈라진다는 점 등. 몇가지를 계속 생각했던 것 같다.

 

어쨌든 오늘의 주인공은 마담 보라리다. 애칭으로 그녀는 엠마로 불린다. 시골 농장 주인의 딸이었던 그녀는 전처와 사별한 의사 샤를르 보바리와 결혼하면서 보바리 부인으로 불리게 된다. (처음 작가의 시선은 샤를르에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나 엠마의 등장 이후부터는 모든 시선이 엠마 중심으로 흘러가게 된다.)

비록 재혼이기는 하지만 의사와 결혼해서 딱히 어려움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여자 엠마는 결혼과 동시에 결혼생활이 가져올 것 같았던 온갖 환상에서 너무나도 서둘러 황급히 깨어나게 된다. 착실하게 병원을 개원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는 남편 샤를르와는 대조적으로, 엠마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실증을 느끼고 레옹, 로돌프와 같은 정부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외도는 해피엔딩이었을까. 작품이 당대의 시선에서 선정적이다, 라고 판단해 법적인 절차까지 밟아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만약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면 아마도 당대 더 큰 파장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싶다. 이야기는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비소의 힘을 빌려 음독하게 되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담 보라리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이 이다지도 많은 논쟁거리와 가십의 힘을 빌려 오래도록 회자되어 왔던 것일까.

 

작품은 당시 있었던 실화를 바타으로 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는 말이다. 딴은 말이다. 사람 사는 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보인다. 사랑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이사이에 삶과 죽음이 늘 공존하며 친근하게 끼어드는 일까지도 말이다.

마담 보바리(엠마)가 사회적 인식과 고착화된 틀에서 외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얻었던 것은 오직 개인의 욕망과 사랑이었을까. 그 사랑을 순수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일까. 아니면 그 모두가 집착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일탈이었을까. 어쨌든 엠마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개인의 욕망과 보편적 이성, 두 가지 선택지에서 늘 고민하는 불안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엠마의 남자들은 마지막까지 엠마와 함께하는 것을 당당하게 거부한다. 여기에서 그들의 선택은 정당했을까. 이 부분은 작가의 의도였을지 아니면 이 또한 여성 작가가 아닌 남성 작가의 시선에서 오는 편향된 시각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엠마의 죽음은 측은했다. 적어도 개인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그토록 열망하고 사랑했던 정부가 아닌 오직 그녀의 남편 샤를르만 곁을 지킨다.

작품은 외도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정당하지 못한 비이성적 선택에 의한 결과로 재정적 파탄이라는 이야기까지 끌어온다. 이로 인해 엠마는 사랑의 가치가 돈의 가치와는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결국은 부정한 사랑이 가져오는 불행한 말로라고 해야할지. 이 또한 편견일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작품에서 등장하는 남성의 시선이다. (페미니즘 시각으로 볼 필요까지도 없는 문제지만 말이다)그들은 필요에 의해 여성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대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결국 여성은 일회성이 짙은 유희의 대상일 뿐이었다. 남편인 샤를르가 전처가 사망하기 전부터 엠마에게 마음을 두었던 점도 비슷한 쟁점일 수도 있다.

자 그러면 이쯤에서 페미니즘의 반대되는 주장도 나올법하다. 엠마의 선택은 늘 옳았을까. 사실은 말이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일회성의 유희는 남녀 모두 공히 적용되는 부분이다. 엠마의 죽음과 이 죽음을 마주하는 남성들의 시선과 선택은, 작가의 비판이 가미된 지극히 의도된 결말처럼 보인다.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며 인간의 이중적이면서도 불안한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묘사의 힘이 작품 전체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어 안정감 있는 고전의 분위기를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입센의 인형의 집과 비교했을 때 엠마와 로라는 같은 여성이긴 하지만 현실을 마주했을 때 풀어가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 엠마는 마지막까지 남성의 그늘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했고, 실패로 돌아가자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인형의 집에서 로라의 선택은 어땠을까. 로라는 문제 앞에서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당당하게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하는 선택지를 받아들인다. 두 작품 사이에는 이십여 년이라는 시간적 흐름의 간격이 존재한다. 그녀들의 선택은 달랐다. 이제 천천히 엠마와 로라가 선택한 길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의 시선에서 마주하게 될 익숙하면서도 낯선 선택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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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5-25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자(샤를르)는 배우자의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엠마의 결혼)은 합리화되어지고,,,엠마의 남편은 죽음이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기 전까지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작가의 강한 의지(^^)가 엿보이네요. ㅎㅎ

저는 인형의 집이랑 마담 보바리 모두 안 읽었봤지만, 두 작품을 비교/대조하면서 설명한 부분이 너무 좋네요 ^^

월천예진 2021-05-25 16:50   좋아요 0 | URL
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주련 - 선지식과 역사를 만나는 절집 여행
제운 옮김, 양근모 사진 / 청년정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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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련

-그렇게 잠시 멈추다

 



자료를 찾아보니 주련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문구라고 했다. 기둥이나 벽에 써 붙이는 한시라고도 하더라. 사실은 주련이란 표현 자체가 무척 낯설다. 사찰에 그다지 많이 가보지 못한 데서 오는 우매함일까. 설사 자주 드나들었다고 하더라도 한문으로 흘려 쓴 글씨를 읽고 해석하며 이해하기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을 법하다.

 



책의 저자를 확인하면서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책은 그러니까 책 속에 실린 주련을 번역한 이가 따로 있고, 나머지 수필인 듯 자신의 생각을 풀어쓰고 사진을 찍은 이가 따로 있다. 누구의 이름을 먼저 올리는 게 무슨 문제일까 싶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몃 파고드는 잡생각이 발목을 잡는 건 왜인지 모른다.

책은 주련만을 중심으로 논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주련이 중심이다, 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개인이 느끼기에 이번 책은 전체적인 글을 쓴 양근모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번역된 주련은 책의 깊이감을 살려주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딴은 주련을 번역한 제운스님이나 글을 쓴 저자 양근모에게 있어, 무엇이 중심이며 어떤 것들이 먼저인지 논하는 문제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은 대한민국 곳곳에 자리한 크고작은 사찰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각각의 사찰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 유래를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각 사찰과 인연이 닿았던 스님들의 행적과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고, 또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풀어내며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싣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저자가 발품 팔아 오르며 찾아간 사찰에서 느끼고 깨달은 진득한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느낌은 지극히 사변적으로 다가온다. 적어도 내 시선 안에서는 그렇다. 수필처럼 일상처럼 이야기가 잔잔하다. 시적인 표현으로 감각적인 동시에 때때로 문장이 유려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대체로 책에 대한 느낌은 그렇다.

무엇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건 흑백으로 담아낸 사진들이다. 사찰의 풍경을 찍어낸 흑백사진은 각 사찰을 소개하는 내용보다 한발 앞서 시선의 흐름을 붙잡는다. 내가 너무 사진에 집착하는 걸까.

사진 속에는 고즈넉한 절집 기둥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습들하며 말끔하게 정돈된 마당이 소박하게 말을 건다. 또 눈 덮인 기와의 물결이 부드럽게 펼쳐지기도 하며, 거친 절벽 위에 작은 절집과 무언으로 수행 중인 스님들의 바쁜 걸음도 뒤를 따른다.

 



오래전 학생 신분이었을 때 우리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답사를 떠났었다. 아침에 경상도에서 이른아침 밥상을 얻어먹고 지리산 노고단을 올랐다가 까만 어둠이 짙어질 무렵 전라도 어디쯤 짐을 풀었었다. 그 며칠동안 두 곳의 사찰을 찾았었다. 부처님의 불상이 아닌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통도사와, 전남에 있는 송광사였던가. 송광사에 도착했던 시간이 벌써 많이 늦어진 까닭에 다시 내려올 무렵에는 해가 지고 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번 책은 어쩌면 소소하게는 개인의 낡은 기억을 소환하며, 크게는 부처의 마음과 세상의 온갖 화두를 건져 올리고, 그것을 어떻게 감당해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그런저런 생각을 가져오게 했던 책이지 않았나싶다.

 

 



-그런데도 무아(無我)’라는 소식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미운 사람은 밉고, 고운 사람은 곱단 말입니다. 나한테 좋게 한 사람은 분명히 보고도 싶고, 나한테 짓궂게 한 사람은 또 밉단 말입니다. 이것저것 다 버리고 화두 하나만 들고이 목숨 다 바치겠다는 그런 각오로 들어갔지만 그런 속에도 라는 관념을 떨치기가 쉽지 않더란 말입니다. -P137

 

 

 


-번뇌를 벗어나는 일은 예삿일 아니니

고삐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할지어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P147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이 부처님 마음일세

선정에 든 가섭존자 천 겁토록 고요한데

많이 아는 아난존자 한평생 바쁘구나 (향적당)-P470

 

 



나의 사심이 잠시 가던 길을 멈추었을까. 내게도 미운 사람이 새로이 생겨나 그랬는지 이 책을 더 붙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고삐를 고쳐 잡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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