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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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욕망과 사랑. 다른 선택지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작품이다. 사랑과 불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뜻밖에도 이 작품의 작가가 남자였다는 것이 조금은 낯설다. 마담 보바리를 읽는 내내 더불어 연상됐던 작품은 입센의 ‘인형의 집’이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1856년 완성했다고 한다. 반면 입센의 작 ‘인형의 집’은 1879 초연했다는 자료를 찾는다. 이십여 년 뒤의 일이다.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공교롭게도 두 작품의 작가가 남성이라는 점. 작품 안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하면서도 결론적으로 마무리가 상대적으로 갈라진다는 점 등. 몇가지를 계속 생각했던 것 같다.

 

어쨌든 오늘의 주인공은 마담 보라리다. 애칭으로 그녀는 엠마로 불린다. 시골 농장 주인의 딸이었던 그녀는 전처와 사별한 의사 샤를르 보바리와 결혼하면서 보바리 부인으로 불리게 된다. (처음 작가의 시선은 샤를르에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나 엠마의 등장 이후부터는 모든 시선이 엠마 중심으로 흘러가게 된다.)

비록 재혼이기는 하지만 의사와 결혼해서 딱히 어려움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여자 엠마는 결혼과 동시에 결혼생활이 가져올 것 같았던 온갖 환상에서 너무나도 서둘러 황급히 깨어나게 된다. 착실하게 병원을 개원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는 남편 샤를르와는 대조적으로, 엠마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실증을 느끼고 레옹, 로돌프와 같은 정부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외도는 해피엔딩이었을까. 작품이 당대의 시선에서 선정적이다, 라고 판단해 법적인 절차까지 밟아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만약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면 아마도 당대 더 큰 파장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싶다. 이야기는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비소의 힘을 빌려 음독하게 되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담 보라리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이 이다지도 많은 논쟁거리와 가십의 힘을 빌려 오래도록 회자되어 왔던 것일까.

 

작품은 당시 있었던 실화를 바타으로 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는 말이다. 딴은 말이다. 사람 사는 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보인다. 사랑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이사이에 삶과 죽음이 늘 공존하며 친근하게 끼어드는 일까지도 말이다.

마담 보바리(엠마)가 사회적 인식과 고착화된 틀에서 외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얻었던 것은 오직 개인의 욕망과 사랑이었을까. 그 사랑을 순수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일까. 아니면 그 모두가 집착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일탈이었을까. 어쨌든 엠마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개인의 욕망과 보편적 이성, 두 가지 선택지에서 늘 고민하는 불안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엠마의 남자들은 마지막까지 엠마와 함께하는 것을 당당하게 거부한다. 여기에서 그들의 선택은 정당했을까. 이 부분은 작가의 의도였을지 아니면 이 또한 여성 작가가 아닌 남성 작가의 시선에서 오는 편향된 시각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엠마의 죽음은 측은했다. 적어도 개인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그토록 열망하고 사랑했던 정부가 아닌 오직 그녀의 남편 샤를르만 곁을 지킨다.

작품은 외도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정당하지 못한 비이성적 선택에 의한 결과로 재정적 파탄이라는 이야기까지 끌어온다. 이로 인해 엠마는 사랑의 가치가 돈의 가치와는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결국은 부정한 사랑이 가져오는 불행한 말로라고 해야할지. 이 또한 편견일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작품에서 등장하는 남성의 시선이다. (페미니즘 시각으로 볼 필요까지도 없는 문제지만 말이다)그들은 필요에 의해 여성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대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결국 여성은 일회성이 짙은 유희의 대상일 뿐이었다. 남편인 샤를르가 전처가 사망하기 전부터 엠마에게 마음을 두었던 점도 비슷한 쟁점일 수도 있다.

자 그러면 이쯤에서 페미니즘의 반대되는 주장도 나올법하다. 엠마의 선택은 늘 옳았을까. 사실은 말이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일회성의 유희는 남녀 모두 공히 적용되는 부분이다. 엠마의 죽음과 이 죽음을 마주하는 남성들의 시선과 선택은, 작가의 비판이 가미된 지극히 의도된 결말처럼 보인다.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며 인간의 이중적이면서도 불안한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묘사의 힘이 작품 전체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어 안정감 있는 고전의 분위기를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입센의 인형의 집과 비교했을 때 엠마와 로라는 같은 여성이긴 하지만 현실을 마주했을 때 풀어가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 엠마는 마지막까지 남성의 그늘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했고, 실패로 돌아가자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인형의 집에서 로라의 선택은 어땠을까. 로라는 문제 앞에서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당당하게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하는 선택지를 받아들인다. 두 작품 사이에는 이십여 년이라는 시간적 흐름의 간격이 존재한다. 그녀들의 선택은 달랐다. 이제 천천히 엠마와 로라가 선택한 길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의 시선에서 마주하게 될 익숙하면서도 낯선 선택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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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5-25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자(샤를르)는 배우자의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엠마의 결혼)은 합리화되어지고,,,엠마의 남편은 죽음이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기 전까지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작가의 강한 의지(^^)가 엿보이네요. ㅎㅎ

저는 인형의 집이랑 마담 보바리 모두 안 읽었봤지만, 두 작품을 비교/대조하면서 설명한 부분이 너무 좋네요 ^^

월천예진 2021-05-25 16:50   좋아요 0 | URL
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