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전설과 마주하다 - 우리 시대 작가 25인의 가상 인터뷰
장영희 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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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번째 서평

문학의 전설과 마주하다-장영희 외




문학, 삶의 향기




상상력과 소중한 순간순간을 기억하고 싶기에 잊지 않고 있었던 시공간의 기억들이 마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문학의 전설과 마주하다, 는 거창하게 오래된 문학의 역사를 엿봐야하는 수고로움은 따르지 않는다. 케케묵은 시시콜콜한 옛날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이 글을 썼던 이들 각자의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던 문학의 대한 예의와 열정 그리고 그 속에서 꿈꾸며 성장해온 내면으로의 사색이 담긴 이야기의 기록들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있는가, 가장 닮고 싶었던 책 속의 주인공이 있는가, 당신은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느 것 하나 쉽게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들이다. 하지만 제일 먼저 내가 집중을 하고 관심을 갖고 읽었던 책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보고,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은 채 기억의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책과 그 주인공이 있다면 참으로 기쁘게도 문학의 전설과 마주하는 자리 한쪽, 구석진 귀퉁이를 비집고 들어서서 내가 사랑하는 책과 누구누구를 불러낼 수 있는 용기가 솟아나지 않을까.




책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 동시대에 살아있는 이들의 대화가 아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왔기에 친근한 작가와 주인공을 불러내 대화를 하고, 때로는 영화감독을 불러내기도 하며, 일찍이 타계한 선배문인과 스승님을 현세와 내세의 중간지점이라는 묘한 세상을 설정해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을 취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 책의 모든 내용과 대화는 글을 쓰는 이의 주관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책 속에서 인터뷰를 하던 저 모비딕 선장 에이헤브나, 허생전의 허생이나, 깐깐한 이성의 완벽주의자 카프카가 실제로 똑같은 말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했을 것 같다든지, 혹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라는 글 쓴 이의 상상이 만들어낸 일종의 허구라는 점이다. 그러나 몇몇은 정말 살아생전에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그것이 무에 그리 중요한가 말이다.

어쩌면 조금 특별한 상상력과 계획으로 만들어진 책 ‘문학의 전설과 마주하다’, 를 통해 다소 어렵다고 생각해왔던 문학작품과 그 작품을 창조해낸 작가들에게, 다른 날보다는 조금 쉬운 발걸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접했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각각의 상상력의 발휘는 깊이 있는 생각을 불러내는데 그 힘을 받는다. 동시에 인생에 대한 조언과, 문학에 대한 나름의 정의, 글을 쓰는 자세라고 한다면 좀 애매하긴 하지만 각설하고 해당 작품에 대한 평가, 삶과 인생에 대한 진지한 담소, 또는 문학에 대한 어느 한 길에 대한 충고 따위가 들어가 있다고 보면 좋을 듯하다. 




‘말하지 못한 나를 고백하다’. ‘20세기가 21세기에 답하다’, ‘예술의 자세, 삶의 자세’ 등 세 가지 큰 테마로 이루어진 책 안에는 각각의 주제와 맞는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다.

작가가 자신에 대해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발가벗고 거울 앞에 서 있는 느낌일수 있을까. 사실은 대중 앞에 나신으로 서 있는 것보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혼자 서 있는 것이 더 수치스럽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그것은 진정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속속들이 세세하게 뜯어보기 위한 시간이기에 내 자신에게 더 엄격한 순간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이다. 자기 검열의 치열성에서 매번 좌절하지 않는 작가가 어디 있으랴마는, ‘내가 갈망한 것은 철저한 고독’이었노라고 토로하는 카프카를 보면서 나는 그의 내면에 있는 작가로서, 작가의 옷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 어느 젊은이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천재시인으로 잘 알려진 랭보를 찾아갔던 이 역시 시인 박형준이었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형식이기에 상황설정 또한 다양하게 그려지고 있다. 박형준은 직접 랭보를 찾아 기차역으로 가 그를 기다리는 설정을 잡고 있어 한편의 소설 같은 인터뷰를 그려낸다.

 

 이 외에도 서정주 시인과 자리를 함께한 장석주 시인, 김수영 시인과 함께 문학과 현실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주고받은 김명인 시인, 백석 시인을 만났던 두 명의 (오명근, 고형진)저자의 이야기도 주목할 만한 내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백석 시인에 대한 내용은 동일인물과 작품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평가라는 차원에서 문학이란, 보는 시각과 생각에 따라 또 무엇을 중심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방향과 색체로 길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의의를 남겨두는 것을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나, 기존 책에서 많이 보고 들어왔던 이들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소리(이번 책에서는 다소 주관적인 것을 배재할 수 없지만)에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시간은 값진 의미를 둔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전반적으로 저자들마다 그들의 문학적 성향이 지배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을 보인 까닭에 순수 지향의 문학과 민족 문학의 색채가 갈리는 경향이 이 한권의 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점일 것이다.

 책 속에서 누군가 염려와 걱정을 했더랬다. 전쟁과 자본주의 병폐를 모르고 자라난 젊은 작가들의 문학적 취향은 자못 그 방향성이 분명치 않고 위태하다는 내용이었음을 기억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작가는 감춰지고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찾아 치유해야 할 동기부여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하지만, 그러나 또 아직까지도 나뉘어져 있는 듯한 풍토를 보는 듯해서 마음이 건조해지는 것까지 어찌할까.

 그런 뜻에서 나는 황충상 작가가 만난 그의 스승 김동리 선생과 뜻을 같이 하고 싶어진다.

   

[너희가 문학의 진정한 순수와 참여를 알아. 혼돈의 시간은 잠깐 지나갈 뿐이다...]




책 속에서 옛 스승님 함자를 발견하고 복잡한 생각이 들어 며칠을 울적하게 지내는 꼴이라니... 문학의 전설과 마주하려고 앉아있었더니, 부지불식했던 시간들만 그림자처럼 꼬리를 잇는다. 하지만 괜찮다. 누군가 말했듯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칼을 든 군인이 아니라, 책을 들고 있는 독자라고 말이다. 날선 독자가 되어야겠다. 아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지 않을까도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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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 1000명의 죽음을 지켜본 호스피스 전문의가 말하는
오츠 슈이치 지음, 황소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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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번째 서평-오츠 슈이치 지음




죽음을 넘어 삶을 향해

                -위의 제목은 에필로그의 제목이기도 하다-




편도선이 부어서 하루종일 고생이다. 물을 넘기는 일조차 통증이 와서 심호흡을 크게 한 후 물을 마시고 침을 삼키는 일 또한 고민과 주저함으로 시간을 끌다가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음에 삼키게 된다. 아침부터 목이 잠기고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 하루를 보내면서 안 그래도 윙윙거리는 코와 목 상태를 어쩌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데, 책을 읽는 내내 책상위에는 함부로 풀어놓은 휴지뭉치들이 쌓여만 갔다.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

길게 써 놓은 글을 삭제한다. 써놓고 보면 언제나 부질없어 보이는 글귀들은 늘 수치심과 부끄러움이라는 꼬리표를 대등하고 나를 따라다닌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일흔이 훨 넘으신 이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지난 새벽에 써놓은 글을 아침에 보면 차마 다 읽어볼 수 가 없었다고.

아무래도 오늘은 냉정과 이성을 뒤따라가기 보다는 감성에 글을 맡겨야 할까보다. 죽음 앞에 선 우리들의 (어쩌면 나 자신, 또는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 진부하고 또 고지식도 하여라, 학자처럼 딱딱한 말투로 모든 생각과 느낌을 헤쳐모여, 또는 좌우 나란히 식으로 끌고 다니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

현직 호스피스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의사 오츠 슈이치는 말기 암 환자를 돌보며 이 글을 썼다고 했다. 그는 작가가 아닌 의사다. 의사가 펴낸 죽음을 앞둔 이들의 이야기. 바로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가지’의 이야기이다. 앞뒤의 편집되어 있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기존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단 다양한 책보다 훨씬 강한 이미지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 느낌은 강철 같은 쇠붙이의 그것과는 달리 부드러우면서도 아련한 그 무엇이지만 그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어떤 것보다도 더 강한 힘과 에너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더불어 책 중간에 삽입된 흑백사진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던 동기로 작용했었다. 흑백사진이다. 이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자연스레 갖게 되는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감정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후회 또는 쓸쓸함, 어쩌면 기쁨과 환희일 수도 있겠지만 컬러풀한 사진이 아닌, 과거를 상기하게 되는 흑백사진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숙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사람이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면서 후회하는 것이 어디 ‘스물다섯까지’만 될까마는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최후의 시간 앞에서 이들과 다르지 않는 후회와 아쉬움으로 어기적거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무언지 모를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은 비단 마지막 순간을 앞둔 이들의 서글프고 침울한 분위기만은 아니었기에 마지막까지 편안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기억해두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기억에 남는 연애를 했더라면,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결혼을 하고 자식이 있었더라면 .....’

그들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소박한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평범하지만 진지함이 묻어나는 진솔한 소망들이었다. 대기업의 총수를 지내는 사람이나 시골에서 촌부로 농사를 지으며 말년을 보내는 사람이나 그들이 품게 되는 삶의 마지막 순간의 희망은 다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돌아갈 때는 다 빈손으로 간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에는 먹고 싶어도 도무지 입맛이 나지 않아 먹을 수가 없어서 그 또한 고통이기에, 건강할 때 좋은 음식과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두라는 저자 오츠 슈이치의 말이 기억난다. 편도선이 부어서 먹는 일이 힘겨웠던 내가 갑자기 어린 아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것도 오츠 슈이치의 음식 이야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 아들, 오늘 맛있는 거 먹을까? 뭐가 먹고 싶지?”

갑자기 생기가 넘쳐나는 기분이 드는 까닭은 왜였을까. 어쩌면 그것은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힘의 에너지를 내가 양껏 흡수한 까닭은 아니었을까.

누구나 죽음을 맞이함에 있어 슬픔 앞에서 눈물을 짓고 가슴이 저리게 아파한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한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건강하게 살아있는 현재에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건강관리는 물론이고, 정신적 관리 또한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지금 당장 주저하지 말고 보따리를 싸라는, 만나고 싶은 이가 있다면 나중을 기약하지 말고 지금 당장 만나라 했던, 현실의 중요성을 외면하지 말라는 저자의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맞이하게 될 마지막 순간을 어떤 모습으로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 나긋하게 조언하고 있다.




두려워만 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결국은 어디에서 찾아왔든지 간에 우리는 인생의 종결이라는 같은 플랫폼에서 똑같은 열차를 타게 되지 않겠는가. 누구에게나 시간이 공평하지는 않다는 것이 조금은 서글픈 현실이겠지만, 돌아오지 않는 긴 여정을 먼저 출발한 이들의 소박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슴이 설렌다. 느슨하게 풀어진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운동화 끈이라도 다시 조여매고 싶어진다.




바라건대, 그 때 나는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고 나약해지지 않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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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과 체찰 - 조선의 지성 퇴계 이황의 마음공부법
신창호 지음 / 미다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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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번째 서평

함양과 체찰- 신창호




그 마음, 언제나 명징하기를




 이미지라는 것은 한편으로 아주 강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고착화되고 나면 완전히 굳어져버리는 불미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 표지에 나와 있는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문득 천원자리 지폐에 그려져 있는 인물상이 떠오른다. 퇴계 이황. 그의 이미지는 얇디얇은 종이지폐 속에 갇혔다. 냉정한듯 하지만 수심이 묻어나는 표정과 굳게 다문 입술에서 엿보이는 강직한 성품, 다소 양 끝으로 올라가 붙은 눈 꼬리에서 알 수 있는 예리하고 깊이 있는 통찰력 따위를 재빨리 구성해볼 수도 있겠지만 다 접어두고서라도 이황하면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려서 읽었던 교과서 속에 그 모습 그대로 남루한 의복에 늘 검소한 일생을 살다 간 학자.

 신창호가 펴낸 책 ‘함양과 체찰’은 퇴계의 글을 다시 요약 편집하고 읽기 쉽게, 이해하기 쉽게 한글로 풀어 다시 세상에 빛을 만나게 해준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은 퇴계가 완성한 문언 ‘자성록’에 기초를 두고 있다. 더불어 그가 평생을 두고 알고자 했던 학문과 스스로 걸어가기를 원했던 학자로서의 길, 또 같은 길을 가는 후배를 위한 일침과 조언까지 꼼꼼하면서도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학자의 자리에서 알게 된 이들과 주고받았던 서신을 소개하는 형식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답신이나 별지를 첨부하여 퇴계와 교류했던 이들이 서로 간에 배움을 주고받으며 깊이 있는 학문을 전개시켜 나가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사단칠정이나’ ‘이와 기’를 논함에 있어 그 의미를 한 자리에 두고 들어가자면 읽는 이 역시 머리에 흰 띠라도 두른 채, 연필이라도 들고 책을 봐야할 분위기이긴 하다. 그러나 삼백페이지 정도의 내용이 모두 퇴계와 더불어 논박을 했던 기대승의 그야말로 ‘논쟁과 논쟁’으로 채워지지 않았기에 그나마 다행스러웠다면 우스갯소리가 되려는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 내가 더 원하고 알고 싶었던 이야기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찾고 싶었던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하라 하면 머뭇거릴게 분명하지만 뭐랄까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이룩해 놓은 학문이라는 틀이 너무 거대해서, 그저 무심히 돌아본 퇴계는 언제나 날카로운 이성의 흔들림 없는 냉철한 무심한 석상 같은 이미지였다면 한 학자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퇴계의 모습을 찾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찌되었나? 혹자가 질문을 한다면, 답을 얻었는가 묻는다면 무어라 말할까도 생각해본다. 그 답은 아직 더 알고 싶다, 로 기울어지고 있어 보인다. 책 한권으로 쉽게 판단할 소지가 못 된다는 뜻일까. 그의 책을 읽고 나니 생각하는 것조차, 글 쓰는 일 조차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건 퇴계가 일궈낸 그만의 사상이 빚어내는 힘의 영향일까




 책은 이황의 삶과 자성록을 소개하며 3부의 마지막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실천의 지혜를 실으며 목차를 구성한다. 자성록과 더불어 3부에 소개된 내용 또한 읽고 깨닫는 내용이 있으며 간단하게 정리되어 부담 없이 읽어볼만한 내용이다.

 저자 신창호의 소개에서도 언급된바 있듯이 이번 퇴계의 책은 마음을 수련하는 법이 강조되고 있다. 중국의 많은 학자 이를테면 공자나 맹자에서부터 그들의 수많은 제자들과 학파를 달리해서도 소개되는 장자와 그 제자들의 이야기와 인용 또한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결론은 한 가지 각자가 자신의 소신에 맞게 공부를 하라는 것이며,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언제나 마음과 정신을 명징하게 닦아놓으라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이를 따지지 않고 제자들에게조차 예의를 다했던 퇴계의 서신과 그 행적을 들여다보면서 다시 묘한 생각의 꼬리가 늘어지는 것을 느낀다.




 딴짓거리이긴 하지만 문득 특별히 무언가를 원하는 까닭은 아닌데, 아쉬움에 몸이 달아서 내게도 세상을 이야기하고 책을 이야기할 친구 하나가 그립다는 생각이 드는 것조차 외면하는 것이 측은하게 생각되더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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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믿음
신시아 보이킨 지음, 문지혁 옮김 / 가치창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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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번째 서평

코끼리 믿음- 신시아 보이킨 지음




당신의 코끼리는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모두 코끼리 한 마리씩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역자가 마지막 역자후기에 남긴 글이다. 코끼리를 어디에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 가방 아니면 주머니에 그도 아니면 현실성은 다소 희박하겠지만 애완용 코끼리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책을 완독하고 난 지금 나는 그 말뜻을 알 것도 같다. 역자가 이야기했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코끼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슴 한 가운데 마음이라 명명되는 가장 중앙의 최소한의 작은 지점이 될 것이다. 이번에 소개되고 있는 코끼리는 우리 가슴속 내면에 살고 있는 존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리하고 있는 기독교식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종교의 접근을 쉽고 용이하게 해줄 수 있는 안내서의 출간은 그 수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책 역시 그 범주 안에 들어간다. 오히려 크리스천이나, 기독교 등의 특정 종교의 냄새를 품기는 어휘를 선택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비교적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미지인 동물을 제목으로 삼았다는 점이, (저자는 제목에 대해 약간의 걱정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내게는 더 신선했다는 생각이다. 제목 하나만으로도 책의 존폐 여부를 결정짓는 다는 것은 다소 과한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은 제목만큼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코끼리 믿음’은 비유법이 쓰인 문장이다. 코끼리 같은 듬직한 믿음으로 성숙해가는 기독교인이 되자. 믿음을 가지되, 코끼리처럼 크게 요동치지 아니하고, 진득하면서도 굳건하게 그 믿음을 키워가라, 는 이야기다. 이해하기 쉽게 저자는 코끼리와 함께 쥐를 예로 들어준다. 이를테면 ‘쥐를 닮은 믿음’과 ‘코끼리를 닮은 믿음’으로 말이다.

 

 실제로 저자가 경험했던 에피소드와 함께 성경에서 익히 접해왔던 인물들(그들은 엘리야, 데라, 아브라함, 다윗, 요셉과 같은 인물들이다.)을 소개하면서 저자를 비롯한 각각의 인물이 경험했던 상황, 그들이 마주쳐야 했던 고난과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갔는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의 크기와 깊이를 보여준다. 소개되는 성경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모두 하나의 귀결점을 안고 한 곳으로 모여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저자가 비유해서 강조하고 있는 주 그리스도를 향한 굳건하고 강건한 믿음, 즉 ‘코끼리 믿음’으로 집약되고 있는 것이다.

 엘리야는 모든 참기 힘든 상황에서 탈피하기를 원했다. 본의 아니게 인간의 가장 나약한 모습의 표본이 되어버린 엘리야를 통해 저자는 어떻게 ‘코끼리 믿음’이라는 의미를 찾아 풀어냈는지 고민하고 있다면 다음 글을 읽어보면 이해가 갈듯하다.

  

 “하느님과의 계약에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은 바로 지치지 않는 코끼리 믿음을 갖는 것이다. 특히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날 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때를 기다려라, 는 말이 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소통하는 뜻인가 보다. 물론 엘리야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물러났지만 가능하면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고 신시아 보이킨은 말하고 있었다. 그 외 가장 사랑하는 핏줄인 아들을 제물로 받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에 올곧은 믿음으로 기억되는 인물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전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승리할 것을 믿었던 다윗의 믿음, 오랜 시간동안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고뇌의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 믿음을 지키고 성장시켜 하나님의 뜻을 이어갔던 요셉의 믿음이 소개되고 있다.




 저자 신시아 보이킨은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믿음과 실패한 믿음을 거론하면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믿음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만약 그 의미를 잊어간다거나 퇴색되어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에게 직접 말하고 있었다. 믿음은 처음부터 크고 완벽한 것이 아니며 나무가 자라나 열매를 맺듯, 작은 믿음이 자라나 큰 믿음으로 (코끼리 믿음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전체적으로 성경구절의 인용이 많이 보이지만, 주입 내지는 강요의 느낌이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종교의 이질감을 떠나서 읽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의 부담 없는 종교안내서로 보면 좋을듯하다.




갑자기 내 코끼리의 행방이 모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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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의 사춘기 - 사랑, 일, 결혼, 자신까지 외면하고픈 30대의 마음 심리학
한기연 지음 / 팜파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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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열여덟 번째 서평

서른다섯의 사춘기  -한기연




과락(科落)없는 삶을 위하여

  ---다시 시작이다.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요즘은 심리학 관련 서적이 대세인가보다. 기존에 심리학 관련된 책을 그다지 많이 접해보지 않았던 까닭도 있지만 사실은 심리학이라고 하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이 먼저 떠오르고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먼저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버린다. 더욱이 연령대 별로 구분해 출판사 여기저기서 속속들이 출간되는 심리학 서적들을 보고 있으면 흥미위주의 책정도로 치부하거나 또는 간지러운 곳 몇 군데를 시원스레 긁어줄만한 책은 되겠지 하는 편견에 빠져버리곤 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기실 나도 별반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는 총괄적인 개념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발상이긴 하지만, 서른다섯이라는 숫자를 논함에 있어 불현듯 이 책에, 책의 제목에, 책을 쓴 저자에게 뒷덜미를 꽉 잡혀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을 한다.

 이십대, 삼십대를 위한 심리학에서 한발 더 들어가 삼십대 중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 나이 또한 삼십대 중반이라는 고비를 막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라는 위치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키우며 집에서 살림을 하는 주부라고 하면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조금은 느슨해진 삼십대 중반의 긴장감으로 적절한 분위기를 표현할 수 있을까.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나 경제인도 아니며, 그렇다고 사회의 각 층에서 최선을 다하는 슈퍼우먼의 허상을 등에 지고 새벽부터 일어나 어린이집을 전전긍긍하며 기웃거리는 ‘일하는 여자의 모습’과는 분명 다르다. 사람들은 억척스런 이미지를 만들며 또 그것을 일반화시켜 ‘아줌마는 절대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우악스럽다’는 식의 이미지로 못을 박고 고정화한지 오래인 듯싶다. 곁가지로 가는듯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내 입장에서 서른다섯을 뜯어보니 아줌마라는 말 자체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넘치고 또 넘쳐대는 것을 어찌하랴. 불현듯 그 우악스럽다는 표현에서 쓴 웃음을 짓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억척 어멈과 그 아이들’이라는 제목이 생각나는 것일까.




 이번 기회에 내가 이십대를 위해 출간된 심리학 관련서적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라는 생각을 한다. 사실 연령을 크게 나눌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상황에서든지 경험하고 생각하며 또 그런 요소들이 원인이 되어 발생되는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사건 사고 앞에서 갈등과 번민하는 것은 나라의 수장이나, 자아가 생성되어가는 어린아이에게나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단지 우리가 나이를 먼저 걸고 넘어가는 것은 각자의 연령대에 맞게 해결방안을 제시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치’가 작용하기 때문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분명 그것은 내가 가졌던 기대치와도 같다.




 삼십대 중반이라는 지점에 서 있는 여자.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직장에서의 일, 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사랑’의 의미, 그리고 사랑의 결과물인 ‘결혼’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되어간다. 1부에서 서른다섯이 두렵다, 라는 이야기를 선두로 5부 ‘결혼, 꼭 해야 할까’ 까지 실제 상담케이스를 소개하면서 그들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왜 고민하고 갈등하는지를 문제 속으로 접근해 들어가 숨어있는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소개되고 있는 이야기들은 직장에 다니는, 결혼을 앞둔 미혼여성에게 주 앵글이 잡혀있는 듯하다. 때문에 이미 결혼이라는 인생의 색다른 문을 건너 지나온 입장에서는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는 의미의 이미지가 강하다.

 

 심리학이란 학문의 매력은 문제 속에 해결방안이 있다는 데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깊이 있는 내면으로의 사색과 더불어, 용기 있는 자는 솔직한 사람이라는 연결고리를 잘 이어간다면 단단하게 꼬여드는 매듭도 어느정도 느슨해지지 않을까.




  다양한 삶의 모습과 그 안에서 서로 다르다고 생각되지만 어쩐지 비슷한 문제로 고민해가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가 담긴 책 한기연 ‘서른다섯의 사춘기’의 핵심은 마지막에 응집되어 있다. 마지막 6부의 제목은 ‘내 인생의 입 맞추기’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 아니 내가 ‘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라고 이해했다면 너무 상투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아 존재하는 한 내 속의 진실된 주인으로서 바라보는 나를 둘러싼 세계. 그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과 높낮이를 알려주고, 내 삶의 의미를 지어주며, 가치를 인정하기까지의 서른 살 중반의 여자들의 이야기는 때로는 전형적인 심리분석이론에 입각해서 설명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저자가 그를 찾아왔던 내담자에게 해주었을 법한 이야기이며, 책을 접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전하는 조언으로 이어진다. 편안함과 안도감을 두루두루 펼쳐내며 자리를 잡아주는 인생의 선배처럼 조용하게 그러나 깊이 있는 삶의 안내자로서의 저자 한기연의 이야기는 현실적이면서도 매우 따뜻하다.

 

  저자가 말했듯이, 삶이란 긴 시간을 두고 오래오래 살아볼 만한 가치는 분명 있어 보인다. 나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를 키우는 자리에 선지 오래다. 결혼 전에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 결혼을 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기에 부딪혀야 했던 갈등, 반평생을 타인으로 살아온 남자와 함께 생활해가는 과정에서 오는 불협화음 또한 내가 생각하며 고민했던 문제들이었음에 지그시 웃음이 난다. 사람 사는 모습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직까지도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내 발목을 붙들어놓은 현실에서 내가 미처 이루지 못한 그 어떤 것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궁리를 하다가도, 아이들 문제며 남편 문제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를 감안하지 않은 그야말로 생각만 많은 서른여섯의 나.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서른 중반쯤 아직 무언가를 해볼만한 시기라는 충언에 무언지 모를 기쁨에 맘이 가벼워진다.




 배우자 선택에 있어 ‘과락 없는 배우자’를 논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삶에 있어 ‘과락이 없는 인생’을 살고 싶은 소박한 욕심을 하나 키워본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흑백의 논리에 빠지지 않으며, 내게 맞는 적당한 회색을 찾아 스스로 몰입하면서 극한으로 치닫는 생각은 잠시 보류해야겠다. 내 자신을 바로 들여다보는 일. 그것이 모든 관계 속에서 시작되는 첫 단초일 것이다.   




[서른이 넘어서도, 마흔이 넘어서도 진실한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며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혹 방향 설정을 하기 위해 멈칫하거나 방황하는 시기가 있을지언정 좌절과 불행은 인생의 끝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여기쯤에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신호이다.]

                                                       

                                                        서른다섯의 사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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