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40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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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혁명 그리고 가족-

 

지난번 읽었던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 이후 두 번째 접하는 투르게네프의 소설이다

생각해보니 사냥꾼의 수기라는 작품보다 이번 작품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작품의 제목을 더 많이 들어왔던 것도 같다. 그런데 왜 읽어보려 하지 않고 책장에만 꽂아두었을까. 어쩌면 한두 페이지를 읽어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책장에 꽂아두고서 애틋하게 들추어보지 않는 많은 책들에게 일일이 변명을 붙여주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듯싶다. 흔하게 역자타령을 늘어놓고 있을 게 뻔했을 법하다. 이다지도 게으른 내게 축역본 ‘아버지와 아들’이 찾아왔다.

일반적으로는 축역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보통의 축역본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이나 허전함 같은 느낌없이 몰입해서 잘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뭐랄까. 지난번 사냥꾼의 수기에서 경험했던 비슷한 느낌이었을까. 어쩐지 이번 축역본 시리즈에 개인적으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서두는 그렇다는 말이다.

 

자,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자. 무겁지 않게 가볍게 풀어가보자. 작품 ‘아버지와 아들’을 어떤 방향으로 풀어가야 할까,를 고민했었다. 실은 심각하게 혹은 너무 진지모드로 가지는 말자고 다짐하는 중이다.

우선 살짝 줄거리를 소개하면 니힐리즘을 추종하는 젊은 두 사내. 두 집안의 아들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부모, 숙부 등 가족이 등장하고 몇 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가족소설인가하면 비슷하면서도 아니다, 라는 말을 해야한다. 그렇다면 연애소설인가? 라고 다시 묻는다고해도 이번에도 아니다, 라는 말을 다시 되풀이해야한다. 그렇다면 무슨 내용이란 말인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격변기였던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번 축역본 전집을 끌어오고 있는 진형준 교수의 해설 부분을 참고하면 좋겠다.

농노해방을 시행하기 전 후의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당대 러시아가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 즉 지주 혹은 귀족사회(혹은 집단)와 농노(노예 집단)사이의 크고 작은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귀족과 농노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작품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갈등을 소재로 하면서도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 즉 기밀하고 친근하며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특수적인 가족이라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사회조직인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내부적 갈등을 다루면서 가족 구성원간의 사랑과 이해를 담아내는 이타적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갈등을 조작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혼돈을 일으키는 듯하지만, 작품에서 무엇보다 전제적으로 깔려져 있는 감정은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이 아닌 가장 숭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간애이며 사랑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그 감정을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한정 짓기보다는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애틋하면서도 헌신적인 사랑에 주목해보고 싶다.

 

‘니힐리즘. 모든 것을 부정한다.’ 그것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젊은 세대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신념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내 ‘바자로프’.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친구 ‘아르카디’. 두 젊은이는 서로의 집에 머물면서 이를테면 이상과 현실이 가져오는 괴리감에 대해 끊임없이 언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묘하게도 작가 투르게네프는 두 인물을 각자가 상징하는 완벽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는데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는 충분히 작가의 의도된 결과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유치한 감정놀이라고 평가절하하면서도 그 스스로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게 되는 바자로프는 실패한 니힐리스트인가? 바자로프를 스승으로 삼아 추종해왔으나 결국 카차라는 여인에게 청혼을 하게 되면서 바자로프와 서로 다른 길을 인정하는 인물 아르카디 역시 실패한 니힐리스트였던 것일까?

 

사실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패자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군상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의 무덤 앞을 쓸쓸히 오고가는 늙은 부모조차도 말이다.

굳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자식들 세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비굴한 속내를 꺼내 개인이 만들어내는 어떤 타당성으로 묶으려하지 않아도 딴은 괜찮다 괜찮다. 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어차피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이해하며 행동하기 때문이다. 신이 공평한 까닭은 인간을 유한의 존재로 만들었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해석은 개인의 몫이다.

딴은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살펴볼 때 의외로 인간적이고 평범한 삶을 쫒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연인들의 사랑, 늙은 부모가 지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 형제간의 충정과 신뢰로 그려지는)보통의 모습들이 그 어떤 개혁의 급변하는 사상보다 더 값치가 있으며 더더욱 소중하다는 단순하면서도 진지한 하나의 생각을 갖게 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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