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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평점 :
올리버 트위스트
-인물들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올리버 트위스트를 처음 읽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아마도 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두꺼운 종이에 세로로 단을 나누어 편집되었던 아주 크고 묵직한 책이었는데, 요즘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판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기억을 소집할 수 있을까. 나의 기억 속에 살았던 올리버 이야기는 불쌍한 어린 소년의 험난한 삶의 이야기였다. 언제 다시한번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했는데, 이번에 완역으로 된 작품을 접하게 된 것은 행운이 아닐까 싶다.
나는 열 살 아이였을 때 올리버를 처음 만났고, 이제 마흔 여섯의 나이에 다시 올리버를 만났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말함에 있어 어느정도 의미를 부여할 줄 알고 이해할 줄 아는 나이에 이르고보니, 어려서 보던 이야기를 다시 보고, 다시 해석해보고 싶어지는 욕심에 허기를 느끼게 되는가도 싶다.
기억 안에 살고 있는 올리버 그리고 다시 만난 책속에 살고 있는 올리버. 이 친구는 여전히 수줍고 어리숙했다. 세상의 때를 입지 않은 백지의 순수한 날것과 같은 이미지의 소년의 모습에서 이제 성인이 된 나는 무엇을 찾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완역판이어서 그런지 다가오는 느낌은 기억 속에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들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이번 올리버 트위스트는 적나라한 현실비판과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비난이 담겨져 있다.
사실은 어떤 문학작품을 번역하고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의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역자가 지니는 역자만의 ‘사상과 의식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부분의 역자들이 저자의 의도를 잘 살려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재생산한다는 데에는 다른 이견이 없지만, 여기서 역자의 시선이 크거나 작게 작품 안에 반드시 작용하고 있음은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 완역에 공을 들인 역자 ‘유수아’의 시선은 단순히 올리버 개인의 인생 여정에 중심을 두기 보다는, 당대 시대상에 조금 더 몰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 이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 안으로 한발 더 들어가 편안하게 이야기해보자.
전자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소설은 작가 찰스 디킨스의 막힘없는 서사와 묘사, 그리고 탄탄한 구조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고 있는 동시에, 시대의 불공정함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섞여있는 작품이다. 때문에 친근하면서도 거북스러움이 작용하는 불편감이 들어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인물의 대한 묘사에 있어 인물마다 특징을 잘 잡아내어 그 사람의 얼굴 표정과 성격 그리고 더 나아가 복잡미묘한 심리를 그려내는 섬세한 묘사가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는 것도 기억할만한 부분이다.
인물부터 생각해보면 우선적으로 유대인 노인으로 한정지어 등장하는 페이긴과 낸시라는 여성에 집중하고 싶었다. 물론 역자가 뒷부분에서 이 부분에 대해 짧은 기록을 남겨두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러 번 조신하게 생각하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역자의 해설 부분에서 거론된 짧은 이야기들은 책을 조금 더 깊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에, 다소 걸림돌이 되는 작용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알려주고 싶으면 완벽하게 알려줄 것이고, 언급하지 않으려면 끝까지 독자의 이해와 사상과 그에 따른 해석에 맡기면 되는 일이지 않은가 싶은 거다.
어쨌든 그렇다는 말이다.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왜 하필이면 유대인이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 소설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분법적인 해석에 의한 차별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빈부의 격차다.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 귀족내지는 부자와 빈곤계층과 하층민으로 구분된다. 그것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는 신분의 사회적 분리이며,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온갖 다양하고 구차하며 동시에 추악하기까지 한 차별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신분계급의 차별이 첫 번째였다면 두 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남녀의 사회적으로 각인되어버린 삶의 대한 인식의 차별이다. 소설에서는 아무리 미천한 신분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게 그려지고 있다. 빌 사이스와 낸시와의 관계와, 장의사 밑에서 일하던 노아와 샬롯의 관계가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보여지는 인물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상류층의 모습에서도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자유분방하고 언제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행동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남자인 헤리 메일리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불확실한 신분을 이유로 죄인처럼 행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로즈양을 볼 수 있다. 그녀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 역시 고착화된 사회적 인식과 여성이성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 자신 스스로를 가두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던 유대인으로 등장하는 도둑계의 대부인 페이긴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세 번째 차별인 인종에 대한 차별을 살펴 볼 수 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 역자의 해설을 살펴보면 당시 이러한 차별이 만연했고 그렇게 심각하게 문제시화하지 않았었다는 의견을 들을 수 있기도 하다. - ‘인종차별적인 편견에 대한 제약이 아예 없었다’ ‘암흑가와 악당을 대표하는 인물을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 유대인의 다중적인 이미지를 이용했을 뿐이다’ p609-
그러나 역자의 해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작품 속 설정은 당대를 살았던 모든 유대인이 다 다중적이었던가, 라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다. 때문에 개인적 소견으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가적 의도가 개입된 또다른 차별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 찰스 디킨스가 우리의 주인공 올리버를 유대계 소년으로 설정했다면 어떤 결말이 이어졌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작가가 미리 고려한바 올리버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풀어놓고 소설을 출발하고 있으나, 결론적으로 볼 때 소년 올리버는 고아 출신이지만 사실 그의 뿌리는 귀족계열에 그 근거를 둔다. 때문에 의도치 않게 잠시 일탈의 시간을 가졌을 뿐 신분상에서 올리버는 하층민과는 태생부터 다르다. 주인공 올리버가 품기는 기품과 천상에 둘도 없는 선함과 배려심을 자주 강조하는 작가의 의도가 올리버의 태생이 원래는 높은 계급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가 담긴 전혀 다른 새로운 프레임을 접하기도 한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남성과 여성의 차별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물인 낸시가 첫 번째 인물이고, 버블의 부인으로 등장하고 있는 여성이 두 번째로 생각해볼 만한 인물이다.
낸시는 거리의 죄악과 부정과 부패를 상징하는 뒷골목에서 성장했고, 이미 그 문화에 익숙해져버린 인물이다. 익숙함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생경스럽고 부자연스러운걸까. 아니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를 생각하다보면 낸시의 마지막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불행하게도 연민의 정으로 사랑하고자 했던 빌 사익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낸시지만, 그녀는 순간일지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려 했고 용기를 냈던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버블 부인은 버블이라는 관리자와 결혼함과 동시에 결혼한 여자의 품격으로 추락?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인물로 남성성에 지지 않는 강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당대 결혼한 여인은 확고하게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 는 식의 시대상이 요구하는 인물과는 분명 다른 점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은 다소 거칠고 고집스럽게 보이지만 말이다.
몇가지 생각한 것들을 기록하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 아닐까싶다. 작가는 왜 이런 구조적 장치를 만들어가면서 소설을 완성했던 것일까.
‘풍자를 위한 풍자’.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문제일까.
이 작품은 오래도록 찰스 디킨스의 역작으로 사랑을 받아온 작품 중 하나다. 사람들이 올리버 트위스트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려운 역경에 굴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에 탄복하고 감동을 받아서일까. 늘 그렇듯 어린아이들에게는 올리버의 이야기가 아주 좋은 영향을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자신감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다보면 어젠가는 좋은 날이 올거야, 라는 막연한 기대심리를 심어줄 수 있다는 조건하에 제법 솔깃한 이야기로 다가올 수도 있다. 물론 요즘 아이들에게는 보다 현실적인 부분으로 어필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는 참 대단한 명작이라는 것이다. 분석하고 비교할 거리가 있는 책은, 정말 괜찮은 좋은 책이라는 개인적 소견을 늘 버리지 못하는 것도 병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해보인다. 이것 또한 아집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