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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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후회의 의미

   

 

 

엊그제 눈이 내렸다. 아이와 함께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광장으로 나가 얼마 남지 않은 채 꾸덕꾸덕 얼어있는 눈을 밟아본다. 발자국들이 수없이 찍혔다. 어른 발자국과 아이 발자국. 이건 길고양이 발자국이구나. 옆 동에 사는 대형 견(견주 가족들은 그 개를 순돌이라 부른다)의 발자국도 있었다. 이건 또 뭐지? 완전한 원형의 모양이고 가운데가 일정한 간격으로 국화꽃처럼 움푹 파인 모양새다. 아이가 말한다. 글쎄요. 뭘까요?

아하. 어르신들이 짚고 다니시는 지팡이의 흔적이구나. 수없이 많은 발자국은 뜻 그대로 눈 위에 흔적을 남긴다. 눈의 입장에서 보자면 화인처럼 콕콕 박히면서 상처를 받아내는 셈이다. 딴은 아무 의미도 없는 흔적들을 들여다보면서 생각하는 일도 과히 나쁘진 않아보인다. 적어도 추리소설을 읽는 동안은 말이다.

 

아이 덕분에 아니, 아니다. 아이 때문에? 종종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는다. 처음에는 먼저 작가를 소개해줬지만 금세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제는 녀석이 매번 엄마에게 그의 작품을 권한다. 하지만 말이다. 아이와 나의 차이점은 분명 존재하더란 말이다. 어쩌면 그것을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번 책 용의자 X의 헌신은 꽤나 유명한 작품인 듯 했다. 일본에서 이미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영화로 소개된 작품이라는 정보를 찾아본다. 곁에서 아들이 설레발을 친다. 읽어본 작품 중에서 가장 반전이 컸던 것 같아요. 라고 호들갑을 떤다. 조금 더 많은 작품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구나.!라고 조용히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마음을 접고 그냥 웃는다.

 

세상에 착한 사람 즉 악당이 존재하고, 그 반대로 선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이분법적인 생각은 언제부터 생겨났던 것일까.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아마도 종교적 영향에서부터 출발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 복잡한 개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분명한건 모든 개념들이 선과 악의 개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녀 앞에 과거의 남편이었던 남자가 나타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돈을 갈취하고, 정신적 경제적 피해를 끼치던 남자는 모녀에 의해 죽는다. 추리장르에서 예상하지 못한 살인이 일어난다는 설정은 매우 흔한 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리소설은 보편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은폐하려는 범인 혹은 가해자와, 사건을 풀어나가는 입장의 경찰 혹은 피해자의 입장으로 갈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주변인들이 등장한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들이 주인공일 수도 있고, 주변인일 수도 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까닭은 작가와 독대를 하듯 정면으로 마주앉아 두뇌싸움을 하며 나름의 추리를 유추할 수 있는 그 밀고 당기는 맛?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각설하고 그런데 말이다. 어쩐지 이 용의자 X의 헌신은 속도감이 나지 않는다. 물론 개인적인 소견이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른 문제이니 어떻게 읽었는가, 라는 문제는 역시 개인의 판단에 의한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을 다시 이야기하며....

등장인물을 살펴보자. 모녀 야스코와 미사토를 도와 사건을 숨기는 역할을 하는 수학교사 이시가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형사 구사나기. 구사나기와 이시가미의 대학동기이자 물리학 박사로 등장하며 사건해결의 큰 실마리를 찾아내는 인물 유가와가 등장한다. 소설은 수학적 모티브를 가져와 사건 해결에 관한 트릭을 자주 선보이곤 한다. 그러나 복잡한 개념은 아니다. 이를테면 수학적 개념을 빌려와서 독자에게 비유와 상징을 통한 유추를 보여주고 있다고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작품은 뭐랄까. 엇나간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엇나간 사랑이라는 말 대신 잘못된 사랑이라는 표현을 쓸까도 생각했었다.

 

인간이란 참 복잡하고 어려운 개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인데, 때론 그 능력으로 인해 인간은 많은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기 이시가미라는 인물처럼 누군가가 스스로 어느 하나의 신념에 그 자신을 단단히 옭아매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흔들림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 믿는다. 작품에서 본다면 그(이시가미)는 선을 위해 악을 이용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선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에 또 다른 선택으로 악을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옳은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 그것을 진정한 선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일까.

 

용의자 X. 이시가미 그는 신념에 대한 자신의 선택이 혹여라도 사회에 반하거나, 타인의 질타를 받는다거나 어떤 보편적 정의에 반하는 범죄에 해당하는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결코 번복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해야만 하는 인물로 나온다. 아니 작가가 그렇게 이시가미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천재 수학자인 동시에 순진하고 아둔한 사랑꾼으로 등장하는 이시가미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더란 말이다.

 

인터넷에 검색 가능한 이 작품에 대한 일본 모 추리작가의 비판에 대한 글을 읽었다. 이 작품이 대해 본격적인 추리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을 접하면서 나는 모 추리작가의 의견에 동조를 하는 입장이다. 궁금하다면 인터넷을 한번 검색해보면 좋겠다. 작가가 작품에서 제시했던 ‘기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수 문제’처럼 보인다는 표현을 기억한다. 보이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겉으로 보아서 복잡하면서도 실은 약간의 허점이 드러나 있어 보이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추리물의 특징이 다 비슷하긴 하겠지만 유난히 이 작품에서 작위적 분위기가 강했다는 생각도 해본다. 딴은 작가에게 끌려가며 책 읽기를 하는 것보다는 거리감을 유지하며 추리를 할 수 있는 그런 책읽기가 좋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죄의식 보다는 후회하고 있다’는 인물의 대사에서 문득 아가서 크리스티의 고전 작품 중 ‘비뚤어진 집’이라는 작품이 생각나더란 말이다. 어쩌면 그 작품에서 같은 비슷한 표현을 접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말했다. 헌신과 사랑은 다르다고. 그런가. 철학적 질문인 듯해서 살짝 머리가 무거워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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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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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고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 여인의 흑백사진이 겉표지에 실렸다. 무엇인가에 집중해서 몰입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옆으로 조금 비켜선 여인의 얼굴로 인해 이 여인의 얼굴에 음영이 슬며시 깔려있는 것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그 어떤 것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작품은 1974년도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은 카타리나 블룸이다. 책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야기해둘 부분은 이 소설이 스토리상에서 소설의 기본적인 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발단과 전개를 거치고 절정에 이르러 어느덧 결말에 이르는, 그렇게 우리가 흔히 배워 알고 있는 스토리의 전개를 따박따박 절도 있게 잘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작가 하인리히 뵐이 직접 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는 이 작품을 소설로 보지 않는다는 말을 언급했다. 작가의 기준에서 볼 때 소설과 이야기는 분명 서로 다른 차이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책의 뒤편에 실린 작가 뵐의 후기를 들여다보자. 작가는 이야기란 독자와 대중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서로간의 교감을 형성하며 내용을 끌고 갈 수 있는? 반면에, 소설은 고립된 환경에서 어떤 소통도 없이 작가가 혼자 고군분투하며 끌고가는 식으로 방법론의 차이를 언급한다. 그의 이론(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적용함)대로 본다면 작가 뵐의 작품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소설이 아닌 이야기에 속하고 있는 것도 같다. 아무래도 작가의 주장에 설득당해버린 듯한 느낌이다. 음...

 

--이 두 가지의 근본적인 차이는 화자와 청자 사이의 경험을 주고받는 소통이 가능한가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야기’는 화자가 자신의 삶의 경험을 내용으로 삼고, 청자 역시 그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으로 가질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산업과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널리 보급된 소설은 더 이상 타인으로부터 조건을 구하지 못하는 고립된 작가가 골방에서 쓴 고독한 개인의 이야기로서 타인과 그 경험을 나누지도, 타인에게 조언을 해 주지도 못한다고 벤야민은 설명한다. P146--

 

인용은 이야기꾼과 소설가의 차이를 언급했다던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빗대어 하인리히 뵐의 작품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설명한다. 각설하고 이 소설이 작가가 원했던 그 형식의 이야기가 됐든 혹은 소설의 형태이든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는 사실상 그다지 중요한 요소로 다가오지는 않을 듯하다. 당대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형식을 벗어난 소설쓰기와 그런 작품을 읽어내는 일에 이미 익숙한 독자들도 많지 않은가 싶은 거다.

 

어쨌든 소설은 픽션 같은 논픽션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혹한 분위기라고 했던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수에 찬 듯한 여인의 모습에서 무언가 깊은 상념에 젖어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여인이 아마도 카타리나 블룸의 이미지를 잘 살려내고 있는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작품에서 보이는 카타리나의 분위기와도 어쩐지 정말 비슷해 보이기까지 하다.

 

자. 이제 우리는 카타리나 블룸의 이야기에 집중해봐야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좀 들어줘봐야 한다는 말이다. 작가 뵐은 작품 안에서 카타리나를 살인자로 설정했다. 그녀는 왜 살인자가 되었을까. 그녀가 원래 악한 인물로 태어났거나, 성장과정에서 사이코패스내지는 소시오패스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거나 하는 것으로 성급하게 몰아붙이지는 말자.

그녀는 아주 평범하고 앳된 여인일 뿐이었다. 변호사와 건설업에서 종사하는 부부를 도와 가정부 일을 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여성이다. 딴은 다소 불행했던 성장과정을 극복하고 독립해서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여기서 언급하는 불행했던 성장과정은 극한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그녀의 불행이란 무엇이었을까. 예를 들면 이른 아버지의 부재(사망), 부모사이의 평탄하지 못했던 관계, 사고를 치고 자립하기 어려워하며 결국 감옥에 가게 된 오빠, 조금은 서먹했던 모녀관계 그리고 이들 가족을 일찍부터 옥죄어온 왔던 공산주의자, 라는 낡은 시대적 관념들이 그 안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이러한 개인의 성장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소 암울한 요소들이 한 개인이 아동기에서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 모두 악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식의 일반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는 볼 수는 없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회가 인정하는 성실한 성인으로 잘 성장해가는 개인들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주인공 카타리나는 역시 극복과 성실함의 조건에 잘 들어맞는 인물상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카타리나는 정말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계획적으로 잘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경찰에게 쫒기는 신분의 한 남자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를 도왔으며 그것으로 인해 그녀의 삶의 소중한 모든 것들을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다. 물론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다수의 폭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상기해야 할 부분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함께 생각해봐야 할 것은 언론의 중립성이다. 작품에서 비판하고 있는 부분 역시 다르지 않다. 카타리나라는 여성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한순간 끝 간 데 없는 추락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언급한다. 무엇이 그녀를 가장 추악한 여인으로 만들었으며, 가장 비이성적인 인간으로 매도하고, 늘 함께 했던 친근한 이들마저 일순간 그녀를 외면하고 비난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게 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언론사(신문사) ‘차이퉁’은 사실을 사실로 보도하지 않고, 정의를 상실한 언론매체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며 잘못된 언론의 민낯을 상징한다. 피해자를 위한 법적인 보호조치는 이들 언론에게는 아무런 장애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공공의 신뢰를 얻는 다는 이유와, 그만큼의 이중적 가치(대중심리 조작에 따른 반응정도)로 거대한 폭군으로 돌변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힘을 휘두르며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백그라운드 하나 없이 혼자 서서 버티는 한 사람의 여성, 작품 안에서 등장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인격을 말살시킨다.

작품은 정치계와 경찰관계자들과 암암리 연결되어 있는 언론의 작위적 행태를 고발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평범한 개인이 어떻게 추락하고, 그 여파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사회적 고발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전히 이와 비슷한 상황과 직면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부 제목으로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의 이 작품은 아직도 모든 이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고자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 여인이 살인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누구의 책임인가. 왜 사회는 이 여인을 보호하지 못했는가, 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도 같다.

 

중요한 것은 진실과 정의에서 벗어나 왜곡되어버린 사실 아닌 사실에 의해 생길 수밖에 없는 개인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언론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2020년 거짓뉴스가 판을 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으로 선동하지 말라 목소리를 높이는 현재 우리의 언론은 얼마나 건강한가를 묻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책은 마치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경고장을 내미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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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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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인물들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올리버 트위스트를 처음 읽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아마도 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두꺼운 종이에 세로로 단을 나누어 편집되었던 아주 크고 묵직한 책이었는데, 요즘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판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기억을 소집할 수 있을까. 나의 기억 속에 살았던 올리버 이야기는 불쌍한 어린 소년의 험난한 삶의 이야기였다. 언제 다시한번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했는데, 이번에 완역으로 된 작품을 접하게 된 것은 행운이 아닐까 싶다.

 

나는 열 살 아이였을 때 올리버를 처음 만났고, 이제 마흔 여섯의 나이에 다시 올리버를 만났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말함에 있어 어느정도 의미를 부여할 줄 알고 이해할 줄 아는 나이에 이르고보니, 어려서 보던 이야기를 다시 보고, 다시 해석해보고 싶어지는 욕심에 허기를 느끼게 되는가도 싶다.

기억 안에 살고 있는 올리버 그리고 다시 만난 책속에 살고 있는 올리버. 이 친구는 여전히 수줍고 어리숙했다. 세상의 때를 입지 않은 백지의 순수한 날것과 같은 이미지의 소년의 모습에서 이제 성인이 된 나는 무엇을 찾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완역판이어서 그런지 다가오는 느낌은 기억 속에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들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이번 올리버 트위스트는 적나라한 현실비판과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비난이 담겨져 있다.

사실은 어떤 문학작품을 번역하고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의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역자가 지니는 역자만의 ‘사상과 의식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부분의 역자들이 저자의 의도를 잘 살려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재생산한다는 데에는 다른 이견이 없지만, 여기서 역자의 시선이 크거나 작게 작품 안에 반드시 작용하고 있음은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 완역에 공을 들인 역자 ‘유수아’의 시선은 단순히 올리버 개인의 인생 여정에 중심을 두기 보다는, 당대 시대상에 조금 더 몰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 이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 안으로 한발 더 들어가 편안하게 이야기해보자.

전자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소설은 작가 찰스 디킨스의 막힘없는 서사와 묘사, 그리고 탄탄한 구조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고 있는 동시에, 시대의 불공정함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섞여있는 작품이다. 때문에 친근하면서도 거북스러움이 작용하는 불편감이 들어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인물의 대한 묘사에 있어 인물마다 특징을 잘 잡아내어 그 사람의 얼굴 표정과 성격 그리고 더 나아가 복잡미묘한 심리를 그려내는 섬세한 묘사가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는 것도 기억할만한 부분이다.

 

인물부터 생각해보면 우선적으로 유대인 노인으로 한정지어 등장하는 페이긴과 낸시라는 여성에 집중하고 싶었다. 물론 역자가 뒷부분에서 이 부분에 대해 짧은 기록을 남겨두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러 번 조신하게 생각하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역자의 해설 부분에서 거론된 짧은 이야기들은 책을 조금 더 깊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에, 다소 걸림돌이 되는 작용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알려주고 싶으면 완벽하게 알려줄 것이고, 언급하지 않으려면 끝까지 독자의 이해와 사상과 그에 따른 해석에 맡기면 되는 일이지 않은가 싶은 거다.

어쨌든 그렇다는 말이다.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왜 하필이면 유대인이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 소설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분법적인 해석에 의한 차별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빈부의 격차다.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 귀족내지는 부자와 빈곤계층과 하층민으로 구분된다. 그것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는 신분의 사회적 분리이며,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온갖 다양하고 구차하며 동시에 추악하기까지 한 차별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신분계급의 차별이 첫 번째였다면 두 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남녀의 사회적으로 각인되어버린 삶의 대한 인식의 차별이다. 소설에서는 아무리 미천한 신분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게 그려지고 있다. 빌 사이스와 낸시와의 관계와, 장의사 밑에서 일하던 노아와 샬롯의 관계가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보여지는 인물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상류층의 모습에서도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자유분방하고 언제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행동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남자인 헤리 메일리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불확실한 신분을 이유로 죄인처럼 행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로즈양을 볼 수 있다. 그녀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 역시 고착화된 사회적 인식과 여성이성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 자신 스스로를 가두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던 유대인으로 등장하는 도둑계의 대부인 페이긴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세 번째 차별인 인종에 대한 차별을 살펴 볼 수 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 역자의 해설을 살펴보면 당시 이러한 차별이 만연했고 그렇게 심각하게 문제시화하지 않았었다는 의견을 들을 수 있기도 하다. - ‘인종차별적인 편견에 대한 제약이 아예 없었다’ ‘암흑가와 악당을 대표하는 인물을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 유대인의 다중적인 이미지를 이용했을 뿐이다’ p609-

 

그러나 역자의 해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작품 속 설정은 당대를 살았던 모든 유대인이 다 다중적이었던가, 라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다. 때문에 개인적 소견으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가적 의도가 개입된 또다른 차별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 찰스 디킨스가 우리의 주인공 올리버를 유대계 소년으로 설정했다면 어떤 결말이 이어졌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작가가 미리 고려한바 올리버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풀어놓고 소설을 출발하고 있으나, 결론적으로 볼 때 소년 올리버는 고아 출신이지만 사실 그의 뿌리는 귀족계열에 그 근거를 둔다. 때문에 의도치 않게 잠시 일탈의 시간을 가졌을 뿐 신분상에서 올리버는 하층민과는 태생부터 다르다. 주인공 올리버가 품기는 기품과 천상에 둘도 없는 선함과 배려심을 자주 강조하는 작가의 의도가 올리버의 태생이 원래는 높은 계급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가 담긴 전혀 다른 새로운 프레임을 접하기도 한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남성과 여성의 차별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물인 낸시가 첫 번째 인물이고, 버블의 부인으로 등장하고 있는 여성이 두 번째로 생각해볼 만한 인물이다.

낸시는 거리의 죄악과 부정과 부패를 상징하는 뒷골목에서 성장했고, 이미 그 문화에 익숙해져버린 인물이다. 익숙함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생경스럽고 부자연스러운걸까. 아니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를 생각하다보면 낸시의 마지막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불행하게도 연민의 정으로 사랑하고자 했던 빌 사익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낸시지만, 그녀는 순간일지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려 했고 용기를 냈던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버블 부인은 버블이라는 관리자와 결혼함과 동시에 결혼한 여자의 품격으로 추락?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인물로 남성성에 지지 않는 강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당대 결혼한 여인은 확고하게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 는 식의 시대상이 요구하는 인물과는 분명 다른 점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은 다소 거칠고 고집스럽게 보이지만 말이다.

 

몇가지 생각한 것들을 기록하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 아닐까싶다. 작가는 왜 이런 구조적 장치를 만들어가면서 소설을 완성했던 것일까.

‘풍자를 위한 풍자’.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문제일까.

이 작품은 오래도록 찰스 디킨스의 역작으로 사랑을 받아온 작품 중 하나다. 사람들이 올리버 트위스트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려운 역경에 굴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에 탄복하고 감동을 받아서일까. 늘 그렇듯 어린아이들에게는 올리버의 이야기가 아주 좋은 영향을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자신감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다보면 어젠가는 좋은 날이 올거야, 라는 막연한 기대심리를 심어줄 수 있다는 조건하에 제법 솔깃한 이야기로 다가올 수도 있다. 물론 요즘 아이들에게는 보다 현실적인 부분으로 어필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는 참 대단한 명작이라는 것이다. 분석하고 비교할 거리가 있는 책은, 정말 괜찮은 좋은 책이라는 개인적 소견을 늘 버리지 못하는 것도 병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해보인다. 이것 또한 아집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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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위하여 - 암, 호스피스, 웰다잉 아빠와 함께한 마지막 1년의 기록
석동연 지음, 김선영 감수 / 북로그컴퍼니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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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위하여

 

 

첫 번째.

아빠를 위하여, 라는 제목의 책은 저자의 아버지 즉 아빠의 죽음을 지켜보는 과정을 차분한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는 카툰형식의 책이다. 암과 호스피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웰다잉을 목표로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논픽션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책은 환자 특히 암환자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 인상도 좋고 재주도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한자도 잘 쓰시던, 손주 사랑도 남다른 사랑 많은 한 아버지의 투병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던 다양한 정보를 설명하고 있었다. 정보차원에서 본다면 암이란 무엇인가, 암세포의 특징, 암의 종류(악성과 양성의 차이점), 암의 병기를 구분하는 법, 암의 진단과 검사를 포함해 다양한 치료법까지 자세히 설명해준다. 그러나 조금 더 몰입해서 볼 때, 책은 환자를 위한 세부적인 정보와 간병하는 가족을 위한 정보까지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전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번 책은 비슷한 어려움과 마주한 이들에게 지식적인 정보와 함께 정서적인 안정과 위안을 제공하고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책의 화자는 딸이다. 책은 암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며 안타까움으로 아버지의 곁을 지켰던 속 깊은 어느 착한 딸의 모습이 솔직하게 담겨져 있다. 주제나 소재만을 봤을 때 카툰형식이 아니었다면 사뭇 무겁고 암울했을지도 모르는 분위기다. 그러나 저자는 그림을 통해 스스로의 감정을 걸러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슬프고 무거우며 그 색채가 어두웠다면, 역시 마음이 무거워 보는 이들까지도 기분이 가라앉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 이야기는 다행스럽게도 꿋꿋하고 밝은 모습으로 담담하게 자신과 아버지와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 점이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두고 여러 가지 경험하게 되는 낯선 순간들을 어떻게 잘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은 그 순간과 대면하게 된다면 망설이고 주저하며 혼란스러워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이들을 위해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목소리로 위로의 말과 더불어 따뜻한 배려를 더해 한권의 책을 만들었던가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주변에서 보고 느끼는 죽음에 대한 반응정도는 다 같을 수는 없지만 거의 대부분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류가 있는가하면, 또 그렇지 않는 부류로 갈라지는 듯한 분위기다. 어쨌든 개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사안이다. 사실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 있어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보인다. 오늘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막상 그 순간이 다가왔을 때 인간의 불안한 심리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꼭 한가지만은 고집스럽게 생각하는 중이다. 오늘 지하철을 타고가면서 아들에게 했던 말처럼 세상에 모든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마지막에는 모두 대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이 바로 죽음이라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생각이라는 것까지 조용히 이야기한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했을까. 열다섯 살 사춘기 아이는 알 듯 모를 듯 복잡한 표정을 보인다.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어느정도 예감하고 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 말은 내 어머니에게서 또 그 어머니에게서 전해 전해 들은 말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나는 것도 서글픈 일이란다. 그래서 그 누군가 잘 떠날 수 있도록 그만의 시간을 주는 일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지금 이 순간을 두려움과 주저함으로 힘들어하는 동시에 거룩하게 또 신실하게 살아내기 위해 버티게 하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책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처럼... 웃으며 편안하게 마지막을 준비하고 마주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모를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듯하다.

따뜻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아기자기한면서도 진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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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BTS 앨범의 콘셉트 소설 그리고 요즘책방, 책 읽어드립니다
헤르만 헤세 지음, 서상원 옮김 / 스타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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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횡설수설...솔직한 책 이야기)

어렸을 때 알던 데미안은 늘 아주 멀리 있는 낯선 존재였다. 그 기억은 오늘 이즈음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이렇게 데미안이라는 책을 완독하기 전까지 한결같이 낯설었다. 아주 오래되고 낡은 책은 누우런 빛의 종이 가득 눅눅한 습기를 머금고 지금까지 기다려줬던가.

실은 내가 너무 나이가 들어 어린 시절에 보던 조그마한 글씨들을 읽어내기가 조금은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억 속에 데미안은 잊혀졌다가 다시 큰 활자가 박힌 새 책으로 다가왔다.

고백하건데 단 한번도 완독을 해보지 못했다. 이 책 데미안을 말이다. 그저 혼자의 생각으로는 싱클레어를 정신적으로 도와주는 어떤 우주적이며 신적이고 완전한 존재인 데미안의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그 정도로 생각하며 살아왔던가보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뭐랄까 생각이 뒤죽박죽 사방으로 어지럽게 뻗어나가고 있다.

 

부족함 없는 집에서 태어나 부유함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상위 계층만이 선택할 수 있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주인공 싱클레어는 두 개의 세계에서 갈등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두 개의 세계를 두고 작가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로 나누고 있다. 흰 것과 어두운 것. 이를테면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않은 것. 또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과 같은 구분일 수도 있다. 소년은 양극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세계에서 갈등한다. 낯에는 정의롭고 종교적인 동시에 희곤 밝은 세계에서 착한 아들, 착한 남동생의 모습으로 살면서도, 밤이 되면 음습하고 어두우며 비열함과 치졸함이 공존하는 그런 위험한 세계를 동경한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그 까만 어둠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설정한 주인공 싱클레어가 느끼는 두 가지 상반된 세계는 이어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에 그대로 다시 재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싱클레어를 힘들게 괴롭히는 인물로 등장하는 크로머와 데미안의 등장이 그렇다. 프란츠 크로머가 주인공에게 악의적인 인물이라면 데미안은 반대로 그 악에서 싱클레어를 건져내주는 구세주와 같은 선의 역할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책 데미안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서로 이어주고 있는 이야기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둘 수 있는데, 이 부분도 사실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시선이 작용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작가는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대화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 피스토리우스를 통해 ‘카인과 아벨’의 일반적인 것과는 조금은 다른 해석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기존의 상식, 평범한 종교와 일반적인 정의에 수정의 칼날을 들이대는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는 소설 데미안을 이야기 할 때마다 그 유명한 ‘새’ 이야기에 집착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문구가 상징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또 하나의 세계다.’ 라 했던 그 이야기는, 데미안을 다 완독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한번쯤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을 법한 문구가 아니었던가.

 

세상에는 많은 세계가 존재한다. 물론 그 세계를 정의내리는 건 신이 아닌 인간이다. 책 속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우린 신을 창조하고 그 신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해야 우리는 신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어”p230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 아브락사스는 인간의 내면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것을 상징화한다고 생각했다. 선과 악 사이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부단히 자신을 찾아가는 험난한 여정을 통해 성숙해가고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성숙한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해간다고 느꼈던 것 같다.

 

신을 창조하되 굴복하지 않고 당당해질 것.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성찰과 성숙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홀로 성장한다는 것. 자신을 찾아간다는 것. 결국은 신이 멀리서 우리에게 허락한 길이 아닌가. 인간은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틀을 깨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간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존재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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