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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평점 :
용의자 X의 헌신
-후회의 의미
엊그제 눈이 내렸다. 아이와 함께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광장으로 나가 얼마 남지 않은 채 꾸덕꾸덕 얼어있는 눈을 밟아본다. 발자국들이 수없이 찍혔다. 어른 발자국과 아이 발자국. 이건 길고양이 발자국이구나. 옆 동에 사는 대형 견(견주 가족들은 그 개를 순돌이라 부른다)의 발자국도 있었다. 이건 또 뭐지? 완전한 원형의 모양이고 가운데가 일정한 간격으로 국화꽃처럼 움푹 파인 모양새다. 아이가 말한다. 글쎄요. 뭘까요?
아하. 어르신들이 짚고 다니시는 지팡이의 흔적이구나. 수없이 많은 발자국은 뜻 그대로 눈 위에 흔적을 남긴다. 눈의 입장에서 보자면 화인처럼 콕콕 박히면서 상처를 받아내는 셈이다. 딴은 아무 의미도 없는 흔적들을 들여다보면서 생각하는 일도 과히 나쁘진 않아보인다. 적어도 추리소설을 읽는 동안은 말이다.
아이 덕분에 아니, 아니다. 아이 때문에? 종종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는다. 처음에는 먼저 작가를 소개해줬지만 금세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제는 녀석이 매번 엄마에게 그의 작품을 권한다. 하지만 말이다. 아이와 나의 차이점은 분명 존재하더란 말이다. 어쩌면 그것을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번 책 용의자 X의 헌신은 꽤나 유명한 작품인 듯 했다. 일본에서 이미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영화로 소개된 작품이라는 정보를 찾아본다. 곁에서 아들이 설레발을 친다. 읽어본 작품 중에서 가장 반전이 컸던 것 같아요. 라고 호들갑을 떤다. 조금 더 많은 작품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구나.!라고 조용히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마음을 접고 그냥 웃는다.
세상에 착한 사람 즉 악당이 존재하고, 그 반대로 선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이분법적인 생각은 언제부터 생겨났던 것일까.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아마도 종교적 영향에서부터 출발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 복잡한 개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분명한건 모든 개념들이 선과 악의 개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녀 앞에 과거의 남편이었던 남자가 나타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돈을 갈취하고, 정신적 경제적 피해를 끼치던 남자는 모녀에 의해 죽는다. 추리장르에서 예상하지 못한 살인이 일어난다는 설정은 매우 흔한 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리소설은 보편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은폐하려는 범인 혹은 가해자와, 사건을 풀어나가는 입장의 경찰 혹은 피해자의 입장으로 갈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주변인들이 등장한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들이 주인공일 수도 있고, 주변인일 수도 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까닭은 작가와 독대를 하듯 정면으로 마주앉아 두뇌싸움을 하며 나름의 추리를 유추할 수 있는 그 밀고 당기는 맛?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각설하고 그런데 말이다. 어쩐지 이 용의자 X의 헌신은 속도감이 나지 않는다. 물론 개인적인 소견이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른 문제이니 어떻게 읽었는가, 라는 문제는 역시 개인의 판단에 의한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을 다시 이야기하며....
등장인물을 살펴보자. 모녀 야스코와 미사토를 도와 사건을 숨기는 역할을 하는 수학교사 이시가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형사 구사나기. 구사나기와 이시가미의 대학동기이자 물리학 박사로 등장하며 사건해결의 큰 실마리를 찾아내는 인물 유가와가 등장한다. 소설은 수학적 모티브를 가져와 사건 해결에 관한 트릭을 자주 선보이곤 한다. 그러나 복잡한 개념은 아니다. 이를테면 수학적 개념을 빌려와서 독자에게 비유와 상징을 통한 유추를 보여주고 있다고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작품은 뭐랄까. 엇나간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엇나간 사랑이라는 말 대신 잘못된 사랑이라는 표현을 쓸까도 생각했었다.
인간이란 참 복잡하고 어려운 개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인데, 때론 그 능력으로 인해 인간은 많은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기 이시가미라는 인물처럼 누군가가 스스로 어느 하나의 신념에 그 자신을 단단히 옭아매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흔들림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 믿는다. 작품에서 본다면 그(이시가미)는 선을 위해 악을 이용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선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에 또 다른 선택으로 악을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옳은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 그것을 진정한 선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일까.
용의자 X. 이시가미 그는 신념에 대한 자신의 선택이 혹여라도 사회에 반하거나, 타인의 질타를 받는다거나 어떤 보편적 정의에 반하는 범죄에 해당하는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결코 번복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해야만 하는 인물로 나온다. 아니 작가가 그렇게 이시가미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천재 수학자인 동시에 순진하고 아둔한 사랑꾼으로 등장하는 이시가미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더란 말이다.
인터넷에 검색 가능한 이 작품에 대한 일본 모 추리작가의 비판에 대한 글을 읽었다. 이 작품이 대해 본격적인 추리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을 접하면서 나는 모 추리작가의 의견에 동조를 하는 입장이다. 궁금하다면 인터넷을 한번 검색해보면 좋겠다. 작가가 작품에서 제시했던 ‘기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수 문제’처럼 보인다는 표현을 기억한다. 보이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겉으로 보아서 복잡하면서도 실은 약간의 허점이 드러나 있어 보이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추리물의 특징이 다 비슷하긴 하겠지만 유난히 이 작품에서 작위적 분위기가 강했다는 생각도 해본다. 딴은 작가에게 끌려가며 책 읽기를 하는 것보다는 거리감을 유지하며 추리를 할 수 있는 그런 책읽기가 좋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죄의식 보다는 후회하고 있다’는 인물의 대사에서 문득 아가서 크리스티의 고전 작품 중 ‘비뚤어진 집’이라는 작품이 생각나더란 말이다. 어쩌면 그 작품에서 같은 비슷한 표현을 접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말했다. 헌신과 사랑은 다르다고. 그런가. 철학적 질문인 듯해서 살짝 머리가 무거워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