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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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고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 여인의 흑백사진이 겉표지에 실렸다. 무엇인가에 집중해서 몰입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옆으로 조금 비켜선 여인의 얼굴로 인해 이 여인의 얼굴에 음영이 슬며시 깔려있는 것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그 어떤 것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작품은 1974년도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은 카타리나 블룸이다. 책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야기해둘 부분은 이 소설이 스토리상에서 소설의 기본적인 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발단과 전개를 거치고 절정에 이르러 어느덧 결말에 이르는, 그렇게 우리가 흔히 배워 알고 있는 스토리의 전개를 따박따박 절도 있게 잘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작가 하인리히 뵐이 직접 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는 이 작품을 소설로 보지 않는다는 말을 언급했다. 작가의 기준에서 볼 때 소설과 이야기는 분명 서로 다른 차이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책의 뒤편에 실린 작가 뵐의 후기를 들여다보자. 작가는 이야기란 독자와 대중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서로간의 교감을 형성하며 내용을 끌고 갈 수 있는? 반면에, 소설은 고립된 환경에서 어떤 소통도 없이 작가가 혼자 고군분투하며 끌고가는 식으로 방법론의 차이를 언급한다. 그의 이론(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적용함)대로 본다면 작가 뵐의 작품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소설이 아닌 이야기에 속하고 있는 것도 같다. 아무래도 작가의 주장에 설득당해버린 듯한 느낌이다. 음...

 

--이 두 가지의 근본적인 차이는 화자와 청자 사이의 경험을 주고받는 소통이 가능한가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야기’는 화자가 자신의 삶의 경험을 내용으로 삼고, 청자 역시 그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으로 가질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산업과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널리 보급된 소설은 더 이상 타인으로부터 조건을 구하지 못하는 고립된 작가가 골방에서 쓴 고독한 개인의 이야기로서 타인과 그 경험을 나누지도, 타인에게 조언을 해 주지도 못한다고 벤야민은 설명한다. P146--

 

인용은 이야기꾼과 소설가의 차이를 언급했다던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빗대어 하인리히 뵐의 작품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설명한다. 각설하고 이 소설이 작가가 원했던 그 형식의 이야기가 됐든 혹은 소설의 형태이든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는 사실상 그다지 중요한 요소로 다가오지는 않을 듯하다. 당대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형식을 벗어난 소설쓰기와 그런 작품을 읽어내는 일에 이미 익숙한 독자들도 많지 않은가 싶은 거다.

 

어쨌든 소설은 픽션 같은 논픽션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혹한 분위기라고 했던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수에 찬 듯한 여인의 모습에서 무언가 깊은 상념에 젖어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여인이 아마도 카타리나 블룸의 이미지를 잘 살려내고 있는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작품에서 보이는 카타리나의 분위기와도 어쩐지 정말 비슷해 보이기까지 하다.

 

자. 이제 우리는 카타리나 블룸의 이야기에 집중해봐야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좀 들어줘봐야 한다는 말이다. 작가 뵐은 작품 안에서 카타리나를 살인자로 설정했다. 그녀는 왜 살인자가 되었을까. 그녀가 원래 악한 인물로 태어났거나, 성장과정에서 사이코패스내지는 소시오패스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거나 하는 것으로 성급하게 몰아붙이지는 말자.

그녀는 아주 평범하고 앳된 여인일 뿐이었다. 변호사와 건설업에서 종사하는 부부를 도와 가정부 일을 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여성이다. 딴은 다소 불행했던 성장과정을 극복하고 독립해서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여기서 언급하는 불행했던 성장과정은 극한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그녀의 불행이란 무엇이었을까. 예를 들면 이른 아버지의 부재(사망), 부모사이의 평탄하지 못했던 관계, 사고를 치고 자립하기 어려워하며 결국 감옥에 가게 된 오빠, 조금은 서먹했던 모녀관계 그리고 이들 가족을 일찍부터 옥죄어온 왔던 공산주의자, 라는 낡은 시대적 관념들이 그 안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이러한 개인의 성장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소 암울한 요소들이 한 개인이 아동기에서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 모두 악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식의 일반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는 볼 수는 없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회가 인정하는 성실한 성인으로 잘 성장해가는 개인들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주인공 카타리나는 역시 극복과 성실함의 조건에 잘 들어맞는 인물상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카타리나는 정말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계획적으로 잘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경찰에게 쫒기는 신분의 한 남자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를 도왔으며 그것으로 인해 그녀의 삶의 소중한 모든 것들을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다. 물론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다수의 폭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상기해야 할 부분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함께 생각해봐야 할 것은 언론의 중립성이다. 작품에서 비판하고 있는 부분 역시 다르지 않다. 카타리나라는 여성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한순간 끝 간 데 없는 추락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언급한다. 무엇이 그녀를 가장 추악한 여인으로 만들었으며, 가장 비이성적인 인간으로 매도하고, 늘 함께 했던 친근한 이들마저 일순간 그녀를 외면하고 비난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게 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언론사(신문사) ‘차이퉁’은 사실을 사실로 보도하지 않고, 정의를 상실한 언론매체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며 잘못된 언론의 민낯을 상징한다. 피해자를 위한 법적인 보호조치는 이들 언론에게는 아무런 장애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공공의 신뢰를 얻는 다는 이유와, 그만큼의 이중적 가치(대중심리 조작에 따른 반응정도)로 거대한 폭군으로 돌변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힘을 휘두르며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백그라운드 하나 없이 혼자 서서 버티는 한 사람의 여성, 작품 안에서 등장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인격을 말살시킨다.

작품은 정치계와 경찰관계자들과 암암리 연결되어 있는 언론의 작위적 행태를 고발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평범한 개인이 어떻게 추락하고, 그 여파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사회적 고발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전히 이와 비슷한 상황과 직면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부 제목으로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의 이 작품은 아직도 모든 이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고자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 여인이 살인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누구의 책임인가. 왜 사회는 이 여인을 보호하지 못했는가, 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도 같다.

 

중요한 것은 진실과 정의에서 벗어나 왜곡되어버린 사실 아닌 사실에 의해 생길 수밖에 없는 개인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언론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2020년 거짓뉴스가 판을 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으로 선동하지 말라 목소리를 높이는 현재 우리의 언론은 얼마나 건강한가를 묻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책은 마치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경고장을 내미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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