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사회는 여성에 대한 혐오가 수도원 운동을 통해서 확산되었답니다. 이브가 순진한 영혼이었던 아담을 유혹해서 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이지요. 모든 인간의 고통을 최초의 여성인 이브에게 돌리고 있어요. 그들은 영혼이 육체를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성의 영혼이 여성의 감각/육체를 지배해야만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근데 이상하게도 이런 여성 혐오는 여성 숭배와 함께 나타났다지요. 성이 만악의 근원이라면서 금욕을 강조하던 시대, 장자상속제로 수많은 남성들이 수도원으로 향하던 시대, 성적 만족을 위해 여성들을 유괴하던 수많은 범죄자 남성들이 빈번하던 시대가 중세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지금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싶어집니다. 그 시절에도 연애는 사건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답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그들이 나눈 편지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아벨라르는 서양 중세철학에서 실재론과 유명론이 대립할 때, 논리학을 신학, 테올로지 théologie로 전개시켰던 학자입니다. 그는 의심하고 탐구하면서 진리에 도달한다는 보편자 이론을 등에 업고, 당대의 철학자들을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마저 논리로 분석하는 사람이 어느 날 엘로이즈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16세 여성임에도 그 학식이 돋보여 왕국의 많은 남성들의 숭배 대상이었답니다. 37세가 될 때까지 별다른 여성 교제 경험이 없던 아벨라르는 당장에 엘로이즈를 공략할 준비를 합니다. 엘로이즈가 숙부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정 교사로 취업하죠. 그리고 엘로이즈와 수업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나눕니다. 


그리스 철학을 공부하며 연애를 하게 된 두 사람은 솔직했답니다. 두 사람의 연애는 편지와 고백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공부를 위해 마련된 별채에서 책을 펼쳐놓고 공부보다 사랑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내 손은 나의 책으로 가는 일보다 더 자주 그녀의 가슴으로 갔던 것이네. 사랑은 두 사람의 눈을 교과서의 문자 위를 더듬게 하지 않고 서로의 눈망울 속에 머물게 했네. 의혹을 보다 잘 피하기 위해 때로 나는 매질을 가하기까지 했다네, 그것은 분노의 매질이 아닌 사랑의 매질이었으며, 미움의 매질이 아닌 애정의 매질이었던 것이네. 그리고 이 매질은 온갖 향료보다도 더 감미롭기만 했던 것이네."


아벨라르가 젊은 수도사를 위해 쓴 편지에서 육체의 죄를 떠나야 한다면서 자신의 불행한 역사의 시작점을 전하던 구절입니다.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와의 연애를 죄의 사건으로 기록하면서도 회상하는 대목이 예사롭지 않지요. 이들의 비밀연애는 엘로이즈가 임신하게 되면서 숙부에게 발각됩니다. 분노한 숙부를 달래려고 아벨라르는 비밀결혼을 하게 됩니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숙부의 집에 있지 말고 수녀원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합니다. 


숙부는 조카 엘로이즈를 몰래 수녀원으로 보낸 아벨라르의 진심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복수를 감행합니다. 아벨라르는 숙부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거세 당합니다. 이 사건 이후 아벨라르는 자신의 방종을 치료한 신의 은총으로 이 비극을 기록하지요. 그 회고록은 거듭 난 수도자의 기록이 됩니다. 


엘로이즈는 어떤 여성이었을까요. 세간의 관심을 끌던 소녀가 중년의 가정교사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아벨라르가 세상의 찬란한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사랑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임신이 탄로났을 때 아벨라르가 제안한 결혼도 반대합니다. 사랑하는 아벨라르의 명예를 손상시키기 싫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앞날과 자식의 미래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아내라는 칭호가 보다 신성하고 건전하게 판단되겠지만 나에게는 언제고 애인이란 명칭이 보다 감미로웠던 것입니다. 당신만 싫지 않다면 첩이라는 명칭이고 창녀라는 명칭이고 다 상관없었던 것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나 자신을 낮춤으로써 그만큼 더 당신의 총애를 차지할 것이며 당신의 영예로운 명망을 손상시키는 일 또한 덜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엘로이즈는 "남편을 그의 인격보다도 그 지위로 선택하는 여자는 자기 자신을 파는 여자라"고 말합니다. 부유한 사람에게,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자기 몸을 팔려고 하는 행위를 반대합니다. 결혼의 현실을 보라고도 합니다.  "신학이나 철학의 명상 속에 잠겨 있을 사람이 옆에서 들리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며, 유모의 노랫소리며, 집안 살림에 분주한 하인배들의 시끄러운 소요 소리를 견딜 수 있겠습니까?" 엘로이즈는 아벨라르가 위대한 철학자가 되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엘로이즈는 자발적으로 수녀원에 남아 수녀가 되었고, 수녀원장으로 생을 마칩니다. 그리고 아벨라르와 함께 묻힙니다. 


엘로이즈는 뛰어난 문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철학에서부터 신학까지 풍부한 인문의 열정을 가졌습니다. 결혼에 대해, 여성의 삶에 대해 편안한 위치를 고집하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신념을 위해 결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엘로이즈를, 근대적인 의미에서, 실존적인 인간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용기있는 여성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요? 


영적으로 거듭났다고 고백하는 아벨라르와 달리 수녀원장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사랑 안에 있다고 고백하는 엘로이즈를 보십시오. "우리가 함께 맛본 저 사랑의 기쁨이 너무나 감미로워 그것을 뉘우칠 생각이 일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내 기억에서 지워 버릴 수도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엘로이즈에게 붙어서 따라다니는 '중세 지식인 여성'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던진 질문의 내용을 보십시오.


"회개할 필요가 없는 평범한 사람 99명 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이 천국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린다는 성경 말씀을 지적하며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것이 회개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분명히 더 낫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서간집에 나타난 한 지식인 여성의 담론」)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155>입니다. 질문하라, 사과가 아니라 말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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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자신을 파괴하고 거듭 생성되는 불꽃으로 남고자 했다. 결코 삶을 완성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삶을 느껴보려 한 것이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 광적인 그의 노예로서 말이다. 츠바이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삶은 위대했다, 운명에 대한 주권을 운명에게 되돌려주었다. 19세기 유럽의 상황을 생각하면 굳이 저 먼 고대의 운명론을 끌어 와서 근대적 주권이라는 개념에 연결시킨 점이 특이하다. 


츠바이크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역설적 인간으로 믿는 이유는 다음의 구절에서 슬쩍 엿보인다.

 

“매년 유럽에서 생산되는 오십만 권의 책들, 그 책을 한번 읽어 보라. 대체 이 책들이 무엇에 관해 씌어져 있는가? 바로 행복이다. 대개는 한 남자를 원하는 여인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디킨스가 가장 소망하던 것은 명랑한 어린이들과 함께 초원의 오두막집에서 사는 것이다. 발자크는 수백만금의 부 및 귀족의원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성에서 지내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거리, 상점, 값싼 선술집, 밝은 무도회장을 한 번 둘러보라. 그곳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원하는가? 하나같이 다들 행복하고 만족한 부자와 권력가가 되길 원한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크의 인물들 중 이를 원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한 사람도 이를 원치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어느 곳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행복의 순간에도 정지하려 들지 않는다.”(121)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발자크, 디킨스, 빅토르 위고, 괴테 등의 작가와 선명한 경계선이 그어지는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다고, 츠바이크는 연신 감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 정도의 찬사는 당연한 듯도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자판에서 두드릴 때마다 독수리 타법이 된다. 러시아 이름은 왜 이리 길고 거칠까.) 


그렇지만 츠바이크가 그 근거로 가져오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해석을 보자면, 잠시 망설여진다. 그들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같이 범죄 인간들이다. 사기, 폭력 등의 일과를 황홀감에 빠져드는 순환의 고리로 읽어낸다. 


“욕망은 후회로 변하고, 후회는 또다시 행동으로, 결국 범죄는 고백으로, 고백은 다시 그 황홀감에 빠져들게 하는 순환이 계속된다. 이윽고 운명의 모든 길은 이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추락하는 최후까지, 또 다른 이가 그들을 때려눕히기까지 서로 맞닿아 있다.”(211)

 

츠바이크는 당연하게도 카라카조프 가의 사람들에 나오는 인물들을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읽으면 바보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상식적인 사람들에게도 그 소설 속 인물들은 정신병원에 가야할 이상한 인간들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비정상의 인간들을 지구상에 있는 예사로운 인간으로 소설을 통해서 살려낸다. 


“세상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 뜻을 두지 않으며, 자기주장을 관철하려고도 정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아낌없이 소모하며, 그 어떤 것도 계산하려 하지 않으며, 아니 영원히 비타산적 인간이 되려 한다. 그들은 스스로 삶을 느끼려 하고, 삶의 그림자나 반영된 이미지, 외적 현실이 아닌 신비스럽고 위대한 근본요소들, 우주의 힘, 생존하는 실존의 느낌을 감지하고 싶어한다.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으로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곳곳에서 매우 원초적인 식물과 같은 삶, 즉 그 삶에 대한 가장 원초적 욕망의 샘이, 그리고 행복도 고통도 원치 않는 근원적 정욕이 솟구친다. 이 원초적 욕망은 이미 삶의 개별형식이 되어 버린, 가치인정 내지 가치구분이 아니라, 숨쉴 때 느끼듯, 완전히 일치된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209)


도스토예프스키는 영원한 세계를 위해 현실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실존의 황홀감을 감각한다. 다른 작가들이 현실의 크고작은 혼란을 경험하면서, 저항하면서, 끝내 조화를 이뤄내려는 인물을 창조할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영혼을 구원해 낸다. 긴장을 자아내는 범죄 장면에서조차 그 비참을 비껴가지 않고 통과한다. 숭고한 것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단락을 읽어 보자. 1인칭 소설이지만 루소처럼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쓴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진실한 고백록으로,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필연이 절대 질병도 부패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단 저지른 일은 절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하는 것을 강렬하게 의식하고 그걸 빌미로 남몰래 속으로 나 자신에게 이를 갈고 또 갈고 나 자신을 물어뜯고 쥐어뜯으며 못살게 굴고, 그러다 보면 쓰라림이 마침내는 어떤 치욕적이고 저주스러운 감미로움으로 바뀌고, 마침내는 단연코 진지한 쾌감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렇다. 쾌감, 그야말로 쾌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주장한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낸 건 늘 정확히 알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들도 이런 쾌감을 맛볼 때가 있을까? 내 여러분에게 설명해 주겠다. 이 경우 쾌감은 바로, 자신의 굴욕을 너무도 선명하게 의식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었다. 즉, 막다른 벽에 다다랐다는 것을, 이건 추악하기 짝이 없지만 달리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더 이상 출구도 없고 절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설령 뭐든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원하지 않을 것임을, 설령 원한다고 한들 사실상 마땅히 변할 대상이 전혀 없을 테니까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쾌감이 생기는 것이다. “(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발전하는 인류도 아니고, 질서를 찾는 문화인도 아니다. 자신 속에서 영혼을 구원해내고야 만다. 비참한 범죄 인간이 숭고한 것을 찾아서 마침내 승화를 이뤄내고야 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짐작하기로는 아래와 같은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2만 페이지에 달라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그 어디에도, 그 인물들 중 누가 앉고, 먹고, 마시고 하는지는 전혀 씌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느끼고 말하고 투쟁할 뿐이다. 통찰력의 혜안을 가지고 꿈을 꾸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잠자지 않는다. 또한 쉬지도 않으며, 언제나 열병을 앓고, 생각에 잠긴다. 그들은 결코 식물도 짐승도 아니고 무위도식하지도 않으며 멍청하지도 않다. 언제나 움직이고, 흥분하며 긴장하고, 늘 깨어 있다. 지나치게 각성된 인간존재다.”(240)


도스토예프스키 200주년 기념판이 나온 데에, 성평등을 위해 개역을 했다는 문구를 읽고서 떠오른 생각 때문에 다시 이 문제적 인간이 떠올랐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구한 프로이트는 그를 천재 예술가이면서 범죄에  탐닉한 인간이라고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중독자였다. 더구나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소녀를 성폭력한 범죄 경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의식 근처에서 문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다시 책을 뒤적여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대체 도스토예프스키를 어떻게 읽어야 하겠는가. 


영혼의 통증을 느낀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나 그의 주인공들이 아니라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뛰쳐 나간 리자가 아니었을까. 세계문학은 폐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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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잘 지내지?


너도 알고 있겠지만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려 봤으면 해.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에서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겠다고 말했다"고 썼어. 어쩜 그럴까, 의심스럽지. 여성주의를 대표하는 작가가 왜~? 미적 감각을 표현하려고 했을까. 첫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잖아. 직접 꽃을 산다는 건 어떤 꽃을 사고 어떻게 장식하고 뭐 그런 걸 염두에 둔다는 거잖아.댈레웨이 부인 클라리사는 식탁을 꽃으로 장식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거뜬히 해내고 있다는 거야. 


애니야, 클라리사가 정말 원해서 꽃을 사고, 바느질과 파티를 즐겼을까. 그래, 나도 알지. 클라리사는 버지니아 울프가 만든 소설 속 인물이라구. 그래. 버지니아 울프는 어떻게 클라리사가 꽃을 사면서 파티를 준비하는 소설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냐구. 근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냐? 여자들이 하는 모든 일들 중 나쁜 일이 있냐는 거야. 아, 미안해, 꽃을 감상하려고 굳이 꺾고 자르고 다듬고 믹스해서 뭔가를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싫긴 하지. 하지만 그게 도덕을 파괴하거나 전쟁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잖아. 사소하고 한심해서 더 우스운 일이지. 


싫어하는 글쓰기를 오늘도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뭐 떠오르는 게 없어? 좀 더 노력하면 누군가 좋아해 주기라도 할 줄 안거야? 애니야. 아직도 모르겠니. 그런 건 습관이라고 해야 해. 


클라리사가 전통적인 여성성을 나타낼 파티라든가 그런 속물적인 캐릭터를 입고 연기하는 건 버지니아의 의도라고. 여성이 하는 일이 한심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여성이 담당했던 노동은 비로소 가치를 얻게 된다구.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소중하지, 누군가에게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도 좋은거야. 뭔가 크고, 더 중층적이고, 대단한 걸 찾으려면 아마도 여성적인 것들을 모두 모른체 해야 할 거야. 그래서 여성적인 게 필요한 거야.


"그러나 문간에 앉은 가장 추레한 여인들도, 가장 낙담한 비참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삶을 사랑한다. 그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의회의 법도 그들을 다스릴 수 없다고 확신했다." (『댈러웨이 부인』)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140>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멈추고 싶으면 멈추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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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을 비판하는 근거의 상당 부분은 총체성을 향해 있다. '총체성'은 결정론이거나 목적론적 해석이다. 제임슨과 같은 이론가에게 있어서의 총체성은 개인이 경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은 실재보다는 구조나 체제를 작동시키는 원인-형식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경험한 실재의 풍부함을 근거 삼아 총체성을 주장하려 한다면 이는 상상의 관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할 수 있게 된다. 총체성을 따라가다 보면 경험의 부정이 일어난다. 가끔 이런 상황이 흔하게 일어난다. '네가 뭘 알아'. '야, 그럼 너는 뭘 알고 있는데?' 


"개인 주체가 그 또는 그녀 자신이 계급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충분히 의식하면서, 순전한 명징성과 사유의 힘으로 이데올로기를 조절한다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계기에 대한 비전은 한갓 신화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체계에서는 오직 집단적 통일성(그것이 특정계급, 즉 프롤레타리아의 통일성이건, 또는 그 '의식의 기관'인 혁명적 당이 지닌 통일성이건)만이 이런 투명성을 성취할 수 있으며, 개인 주체는 항상 사회적 총체성 내부에 위치하게 된다."(『정치적 무의식』)


제임슨이 인용한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의 다음 구절을 보자.

"과거의 모든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승리자로 등장하는 자는 누구라도 패자의 나뒹구는 시체들 위로 행진하는 오늘날의 지배자들의 개선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전리품들은 관례대로 그 개선 행렬 속에서 드높이 운반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문화유산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적 유물론자들은 그 문화유산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탐색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탐색할 때마다 그러한 문화재들은 곳곳에서 공포심을 가지고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 기원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들이란 그것을 생산한 위대한 창조자들의 노고뿐 아니라, 그 동시대인들의 이름 모를 강요된 노동에 힘입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문명의 기록치고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니었던 것이 없다."(『역사 철학 테제』)

벤야민의 이 '성찰'을 '위대한 사유'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찬란한 문화 유산에 매혹될 때 긍정성을 갖거나 부정성을 갖는다는 말이 '문명'이나 '야만'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문화유물을 대할 때 야만의 기록으로 읽더라도 '총체성'은 실재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총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저 너머에 있는가.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126>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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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는 좋음과 연결되지 않고 옳음과 연결되는데, 이미 좋음과 옳음 이전에 축적들이 있다. 클레멘트가 교부로서 청빈논쟁을 통해 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주장한 일을 떠올려보자. 클레멘트는 1800년 전 인물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성경 구절을 해석한 일로 유명하다. 십계명을 지켰는데 부자라는 이유로 천국에 갈 수 없을까 걱정하는 이들에게, 어렵다고 한 것이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운을 뗀다. 구원은 재산의 여부보다 탐욕과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배고픈 자들을 도울 수 있고 헐 벗은 자들에게 옷을 나눌 수 있단 말이냐고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부자는 그 자신보다는 형제를 위해 재산을 소유하라고 말한다. 


사제가 추구하는 삶은 평신도의 삶과 다르므로 재산을 포기하고 완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제의 청빈의무는 “너희 가운데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성서 구절을 강조한다. 악이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탐욕이라고 주장하며 그 사용법, 사용기술, 사용기능으로 초점을 전환시킨다. 그렇다고 수도원이 교황이 재물을 갖지 않았겠는가. 수도원이 번성한다는 뜻은 이미 재산이 그득함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생명의 나라처럼 말이다. 


1000년이 지나도 수도원의 부유함이 지속된다. 13세기에 들어서면 그레고리우스 9세 교황이 재화에 대한 소유권은 기증한 자에게 있다고 수도회는 소유권을 가지지 않고 사용권을 가질 뿐이라고 칙서를 공포한다.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수도회 모든 재화에 대해 자신이 소유권자임을 밝힌다. 


2.

만약 이 시대가 변화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선 소유와 채무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소유관계와 부채관계를 뒤져야 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에서 털끝만큼이라도 거리를 두고 싶다면 삶이 누구에게 빚지고 있는지, 삶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낡은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중요성을 갖는 '시대정신'이라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대체로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시대정신이란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가 자신의 정신일 뿐"이라고 한 괴테의 규정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 시대정신의 자리를 정해주고 이를 정의할 줄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을까? 시대정신의 발견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면서도 동시에 지성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가의 최고 과제라는 것이 역설적 진리이다." (『의식과 사회』)

"부채는 사회 전체에 대한 ‘공제’ 기계 혹은 ‘포식’ 기계포획 기계이자거시 경제의 규정을 만들고 관리하는 도구인 동시에하나의 소득 재분배 장치이다부채는 또한 집단적 개인적 주체성의 ‘통치’ 및 생산의 장치로서 기능한다.

 

부채 경제는 매우 정치적인 목적을 갖는다. (상호부조연대협력만인을 위한 권리 등과 같은집단행동의 무력화, ‘임금노동자’ 및 ‘프롤레타리아’의 집단 조직행동 및 투쟁 기억의 무력화를 보라대출(금융)을 지렛대 삼아 이룬 경제 성장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갈등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사회 보조은퇴 연금직업 교육 등을 자신들의 투쟁을 통해 획득한 집단적 권리로서 바라보는 주체들과 마주하는 것은 ‘채무자’ 소규모 자산가소액주주를 통치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다"(『부채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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