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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테뉴는 왕정을 쫓아낸 자리에 새로운 군주를 앉히려고 발버둥치는 여론을 비판했다. 신도들이 마비된 이성으로 "앙심과 탐욕"을 의무로 둔갑시키는 여론과 관습에 중독되어 있다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몽테뉴 이성은 지배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다고도 할 수 있다. 
  • 몽테뉴에게 세계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그네와 같다. 자기자신에게서 변덕스러운 형상을 발견하게 되는 인식만이 자신을 개방적인 세계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성적 존재가 아닌 불완전하고 터무니 없는 존재로서 인간을 해석했다.
  • 그래서 몽테뉴에게는 하나의 사회가 만든 정상성이 다른 사회에서는 비정상과 타락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했다. 몽테뉴의 이런 개방적 회의주의는, 어쩌면 스스로가 지닌 병을 진단할 수 있어야만 타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또다른 여론과 관습에 취한 것일 수도 있다. 

  • 그보다는 몽테뉴 시대가 만들어 낸 어떤 분열이 있었음을 직시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 109) 
  • "우리는 어떤 풍습에 대해 내적으로 완벽하게 자유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  외적으로는 그 풍습에 대해 전적으로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 몽테뉴는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지켜야 할 규칙 중의 규칙이며 
  • 법률 중의 법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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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상황 속에 있는 칸트를 읽어보자 하면서도 내내 걸리는 여러 표현들에 마음이 버성긴다나의 이 부대낌은 어디에서 연원할까칸트는 헤쿠바를 권력에서 내려온 늙고 몰락한 여왕으로 묘사한다헤쿠바를 그렇게 읽어야 할까특수 형이상학의 역운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비판이라는 한계를 창안하지 않았는가. 계몽의 서곡을 연주하고 있는 칸트는 헤쿠바가 성숙한 판단력을 보여주는 인물일 수 있음을 왜 알아차리지 못할까칸트의 은유는 역사 속의 인간을 원인-결과로 묶어버리는 행위에 가깝다인간은 자연 법칙에 따른 연관만으로는 설명되지도 않고예언적 실마리로도 정리되기 어렵고경험적 물음으로도 답해지기 힘겹지 않은가 말이다칸트 자신도 역사적 경험을 사건화 하면서 인간은 일종의 창시자라고 했잖은가자유라는 소질을 가진 존재자가 현상을 일으키고 난 후에야 만들어지는 산물이 존재자에게 귀속되어야 할 근거가 있을까몰락한 형이상학이 그렇듯이 헤쿠바의 추방과 고통도 헤쿠바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할까진리는 현상을 사건화하는 권력과 힘의 배후에 있고 명성은 그 증거라고 말할 참일까.



언뜻 자못 우쭐대고 불손해 보이는 나의 주장에 대해 경멸 섞인 불쾌한 표정을 짓는 독자”가 있을거라 짐작하는 칸트 노인이여저를 말하시는 겁니까그렇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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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온 판사가 방영되고 있어. 이상하지? 지옥에서 파견된 판사라니 마치 대기업이 하청에 하청을 주고 다시 하청이 비정규직을 고용해야만 '생산시스템'을 유지하는 거와 비슷하잖아. 판사는 잘 생긴 얼굴에 저돌적인 기운을 지녔어. 지옥에서 온 악마라고 하지만 이미 피고인들에게는 지옥문을 여는 판사일 수도 있어.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의 법정 드라마와 조금 결이 달라. 그러니 진범을 잡고, 억울함을 해소하는 일이 중심이 아니지. 사람을 해한 자는 그대로 당해야 정당하다는 사건 종결에 대한 내용이야. 무척 잔인하게 판사의 행동에 집중하는 걸 보니 아마도 결론은 반대로 가겠지.


이상한 점은 악마가 눈물을 흘리게 되면 '인간화'가 된 거라고 지옥세계가 믿는다는 거야. 감정을 가진 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악마들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다른 종류의 사탄이 있대. 웃고 떠들고 슬픈 척을 할 수는 있지만, 눈물 한 방울은 사탄에게 저주받고 지옥으로 다시 끌려가게 된다네. 

오래 전 알라딘 서재에 영화감상을 하나 썼는데, 지옥으로 끌려가는 은행원에 대한 이야기였어. 공들여 썼지만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 중요한 점은 천국이건 지옥이건 감시도 처벌도 직접 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예전부터 믿고 있다는 거야. 내 생각으로 감시와 처벌은 지식의 문제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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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는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고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할 수 없다는 듯 말한다. 익히 알려진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란 공동체 안에서 몫과 자리가 어떻게 경계설정되어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랑시에르는 변화를 일으키는 동인을 설명하면서 엘리트가 각인시키는 지식의 문제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어쩌면 그들이 설정한 경계선을 무력화시키고서 자신의 상황을 뒤바꿔야 한다는 혁명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랑시에르 이론은 지금 여기에서 반드시 건너야 할 화두를 품고 있다.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평등을 자기 자신에게 제시하는 증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노동자들이 평등해질 수 있으려면 소수자의 지위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럼으로써 공통공간 속에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평등은 자신의 삶을 다르게 만들 열망에서 시작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고, 감각을 열고 시민으로 나가는 급진적 정치가 가능할 구성의 조건 아래 발생한다. 

랑시에르가 인간을 시민으로 세우는 과정이야말로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요구하는 정치라고 말한다. 정치적 포함과 배제의 관계를 문제시하고 기존 비판이론이 갖고 있는 함정들을 찾아낸다. 랑시에르의 다음 언급을 보자면 그 대강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비판은 대중의 역능을 믿지 못한다. 비판은 숨겨질 것이 없이 적나라한 현실을 기만이라고 우긴다. 비판은 진정한 비판의 자질을 가진 특별한 주체를 배경함으로써 부정의 주체의 이름인 '아무나 anybody를 부인한다. 비판은 부정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을 따로 지정함으로써 즉 부정의 역사적 객관성을 맹신함으로써 부정의 근본적인 우연성, 부정의 시간인 아무 때나 anytime를 질식시킨다."

'아무나, 아무 때나'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은 잘 짜여진 지식과 기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랑시에르에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자신의 자리를 찾고 쟁취해서 구축한 지위를 어떻게 공백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정치는 신체감각을 나눔으로 개인에게 특수한 지위를 배분하고 있는 체계다. 예술이 감각을 다루므로 픽션의 세계는 정치를 보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정치의 핵심일 수도 있다. .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1990년에 나온 이후 몇 십 년이 지난 이후 픽션의 가장자리를 언급하는 랑시에르의 의도는 무엇일까. 픽션이 뭔가. 눈을 들어 보이는 거의 모든 것들이 픽션이고, 픽션의 효과다. 픽션으로 합리화한 것들은 무엇이었고, 픽션이 절대 될 수 없는 것은 또 무엇인가. 정치적인 것에서 픽션으로 바뀌는 것에 집중할 수도 있으나, '가장자리'가 문제다. 픽션이 되거나 되지 못하는 경계가 있나, 있다면 어떻게 있는가. 합리성은 픽션에서도 유효한가. 

목차를 보니 과학의 문턱이 보인다. 문도 아니고 문턱이다. 근대적 합리성에 상상적인 자리는 어떻게 있는가. 픽션의 시대는 민주주의의 시대일 수 있는가.


나는 지금 랑시에르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옮겨 나르고 있는데, 이럴 때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은 어떨까/ 

여러 생각들이 떠돌지만 분명한 문제 지점은 하나다.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자리를 이미 차지한 자들이 누구냐는 점이다. 

우선 <픽션의 가장자리> 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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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가 정치신학의 서문에서 '중성' 권력을 말할 때 갈등 상황에 놓인 독자를 발견하게 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정치신학에 대한 새로운 적용 사례가 다수 생겨났다.  15~19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대표', 바로크철학의 神에 유비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17세기 군주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19세기 '중성' 권력, 그리고 '집행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순수 조치-행정국가의 표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정치신학적 사유의 풍요로움을 보여 주는 수많은 사례들이다.


1중성 권력은 17세기 종교 내전을 종식시킴으로써 확립된 주권국가를 말하며, 여기서 '중성'이란 주권국가가 신 • 구교를 포함한 영토 내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우위를 지키는 일을 뜻한다.-옮긴이

2조치-행정국가는 행정 분쟁을 행정재판소를 통해 해결함으로써 행정권이 사법권에 의해 제한받지 않고 행정부의 독자적 권한이 큰 국가를 뜻한다.-옮긴이"

세속화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서 최근 몇 세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슈미트는 주장한다. 형이상학적 - 신학적 - 인간적 - 경제적인 문제에 연결된 세속화는 본래성을 상실한 채 떠돈다. 슈미트에게 중요한 점은 다만, 어떠한 비정치적 결정도 언제나 하나의 정치적 결정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신학도 비정치적 신학은 없다는 것이다. 신학은 정치신학인가. 정치학은 정치신학인가.


법학자 칼 슈미트의 이론화 작업은 나치즘의 질서를 수립하는 데 일조했다고 알려졌다. 나는 슈미트를 읽을 때마다 늘 이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언제였더라. 어떤 분께서 진지하게 충고 하셨다. 그냥 슈미트 그대로 읽으라고. 그런 염려는 오독의 끝을 보여준다고 말이다. 더구나 학인이 가져야 할 기본 태도도 결여된 거라고 하셨다. 그 날카로운 지적 뒤에는 여러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면전에서는 알았다고만 했다. 순간 그는 '계급성'을 확보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아마도 저 인용 글에 나오는 중성 권력은 계급의 기원에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번 가을) 슈미트, 미키 기요시, 제임스 스콧, 벤야민, 하이데거를 건너가며 헤겔과 함께 정치신학을 읽어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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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4-11-24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원님의 독서생활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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