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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들고 한번 흔들자 여러 장의 얇고 조그만 티슈들이 우슈슈 쏟아져 나왔다. 어느 의자에 걸터앉아 건들거리는 나뭇잎들을 올려다 보느라 읽은 자리를 표시하기 위해 한 장의 휴지를 끼워넣은 데서 시작했다. 다음에도 뭔가 표시할 방법이 없어 처음 썼던 휴지를 조각 내서 끼워넣은 탓에 이래저래 책이 두툼해지고 말았다. 휴지로 만든 벽에 한숨이 고이고 나뭇잎과 건들거림이 묻어서 더 축축해지고 있었다. <개념의 정념들> 읽기 시작한 지 꽤 되어간다. 수많은 괄호에 지치기도 하고 되돌이표를 얹은 자동피아노가 연주되는 듯도 하는 동안 비가 열 번은 내린 듯하다. 이 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왜 계속 읽어야 하는지를 내게 묻고 싶었다. 



<개념의 정념들> 읽기 두 번째 걸음은 역사와 진리를 따로 물어야 하는지에 있다. 우리에게 심상하게 들리는 '진리의 역사'라는 단정에는 뭔가 마음을 옭아매는 매듭들이 있다. 발리바르는 파스칼의 "교회의 역사는 진리의 역사라 고유하게 불려야 한다"를 여러 각도로 파헤치며 다시 또 묻는다. '진리의 발명'을 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전통'을 확신하는 성 이레네오 등을 뛰어넘어 가로지르는 파스칼의 언명에는 시대의 저울추가 기울었음을 느끼게 한다. 


"타락과 구원의, 혹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에 관한 예언적 역사는 역사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하나의 표시물을 제시하는데 진리의 역사와 혼동되지 않는다"


파스칼에게는 신앙의 권위와 신비가 교회라는 제도와 어긋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파스칼은 정신의 질서로 물체들의 질서를 사유할 수는 있다고 말하면서도 비가시적인 아가페적 질서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실증과학에 박식한 파스칼은 수학적 사고 형식으로도 얼마든지 신앙을 빛 속에 세울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파스칼은 데카르트가 형이상학으로 구성한 세계에 있기를 거부한다. 이성을 신앙으로 통합하는 파스칼은 무엇을 하기 위해 인간 정신의 질서가 세워져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이성과 신앙을' 통합하는 게 아니다.


역사를 배운다고 할 때 먼저 떠오르는 장은 사건과 실재다. 교회의 역사라고 하면 경험적인 역사 속에서 기원과 기능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교회라는 제도는 자기자신의 권위를 어떻게 확보했는가. 이단을 규정하고 처단할 정당성을 판가름하던 질서를 교회의 역사로 취급할 수 있는가. 오늘날 교회를 놓고 보자면 교리와 믿음의 질서를 구현해내면서 진리를 생산하는 교회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파스칼의 시대가 남달랐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초월적 장소를 열망하는 정신운동을 교회의 역사 속에 마련하고자 한 의도는 확실하다.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위해서 성령 자신이 계시한 신앙의 신비를 위해 감각과 이성에 감춰진 신비들에 우리의 믿음을 이끄는 이런 정신의 복종을 남겨둔다."(노엘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중)


아무래도 발리바르는 대립물의 일치를 구성적으로 보여주려 한다. [캉길렘의 정식은 "진리의 역사만을 만들고자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의 허상적 역사를 만들어 버린다. 진리만의 역사란 모순적 통념이라는 보그단 수호돌스키 씨의 주장은 이 점에서 옳다." 그 공통점은 진리의 역사가 오류의 역사를 통과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벤치오 베리타치스와 그 전진을 설명하는 진정한 방식이다.]


교회를 경험적 역사 과정으로부터 분리해서 종교적 신비 그 자체로 곧 추상적이고 완전한 진리로 전제하면 교회의 정의는 어디에 위치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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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를 향한 의심의 조각들은 여전하다. 마키아벨리의 '주저 없이 사악해지라'는 발언에 비난도 숭배도 따라 다녔다. 독점적 지배욕에 파묻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무리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자기 영혼의 타락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는 맥락에 이르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라는 영웅을 요청하는 셈이다. 여러 독자들은 마키아벨리의 필요에 따른 정치 기술 '교활한' 전략에 놀라면서도, 그가 과거 역사를 교훈적이고 고른 평면으로 만들지 않고 낯설게 보여주려 했다는 점에 흥미를 가졌다.


마키아벨리 독자로서) 발리바르의 특색은 비대칭적 관계 성립 과정에서 권력을 사유하며 현 정세를 파악하고 담론을 전위시키는 인식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데 있다. <개념의 정념>이라는 관념의 발생은 마키아벨리를 적대를 함축하는 권력론의 저자로 설명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마키아벨리가 영향을 미치길 희망하는 독자들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글을 쓰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인민에게 글을 쓰고 있다는 루소의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이 모든 장소들에서의 모든 부분들이라고, 하지만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그러하다고 말하고자 한다. 나는 저술가로서의 마키아벨리가 하나의 유일한 텍스트, 하지만 서로 다른 두 독자 집단을 위한 서로 다른 두 의미를 내포하는 하나의 유일한 텍스트를 구성하기에 성공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가 "글쓰기의 양식 위에서 자신의 현행성"을 구성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그가 공화주의자냐 아니냐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게 된다. 


* 공쟝쟝님 서재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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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테뉴는 왕정을 쫓아낸 자리에 새로운 군주를 앉히려고 발버둥치는 여론을 비판했다. 신도들이 마비된 이성으로 "앙심과 탐욕"을 의무로 둔갑시키는 여론과 관습에 중독되어 있다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몽테뉴 이성은 지배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다고도 할 수 있다. 
  • 몽테뉴에게 세계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그네와 같다. 자기자신에게서 변덕스러운 형상을 발견하게 되는 인식만이 자신을 개방적인 세계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성적 존재가 아닌 불완전하고 터무니 없는 존재로서 인간을 해석했다.
  • 그래서 몽테뉴에게는 하나의 사회가 만든 정상성이 다른 사회에서는 비정상과 타락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했다. 몽테뉴의 이런 개방적 회의주의는, 어쩌면 스스로가 지닌 병을 진단할 수 있어야만 타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또다른 여론과 관습에 취한 것일 수도 있다. 

  • 그보다는 몽테뉴 시대가 만들어 낸 어떤 분열이 있었음을 직시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 109) 
  • "우리는 어떤 풍습에 대해 내적으로 완벽하게 자유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  외적으로는 그 풍습에 대해 전적으로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 몽테뉴는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지켜야 할 규칙 중의 규칙이며 
  • 법률 중의 법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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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상황 속에 있는 칸트를 읽어보자 하면서도 내내 걸리는 여러 표현들에 마음이 버성긴다나의 이 부대낌은 어디에서 연원할까칸트는 헤쿠바를 권력에서 내려온 늙고 몰락한 여왕으로 묘사한다헤쿠바를 그렇게 읽어야 할까특수 형이상학의 역운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비판이라는 한계를 창안하지 않았는가. 계몽의 서곡을 연주하고 있는 칸트는 헤쿠바가 성숙한 판단력을 보여주는 인물일 수 있음을 왜 알아차리지 못할까칸트의 은유는 역사 속의 인간을 원인-결과로 묶어버리는 행위에 가깝다인간은 자연 법칙에 따른 연관만으로는 설명되지도 않고예언적 실마리로도 정리되기 어렵고경험적 물음으로도 답해지기 힘겹지 않은가 말이다칸트 자신도 역사적 경험을 사건화 하면서 인간은 일종의 창시자라고 했잖은가자유라는 소질을 가진 존재자가 현상을 일으키고 난 후에야 만들어지는 산물이 존재자에게 귀속되어야 할 근거가 있을까몰락한 형이상학이 그렇듯이 헤쿠바의 추방과 고통도 헤쿠바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할까진리는 현상을 사건화하는 권력과 힘의 배후에 있고 명성은 그 증거라고 말할 참일까.



언뜻 자못 우쭐대고 불손해 보이는 나의 주장에 대해 경멸 섞인 불쾌한 표정을 짓는 독자”가 있을거라 짐작하는 칸트 노인이여저를 말하시는 겁니까그렇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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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온 판사가 방영되고 있어. 이상하지? 지옥에서 파견된 판사라니 마치 대기업이 하청에 하청을 주고 다시 하청이 비정규직을 고용해야만 '생산시스템'을 유지하는 거와 비슷하잖아. 판사는 잘 생긴 얼굴에 저돌적인 기운을 지녔어. 지옥에서 온 악마라고 하지만 이미 피고인들에게는 지옥문을 여는 판사일 수도 있어.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의 법정 드라마와 조금 결이 달라. 그러니 진범을 잡고, 억울함을 해소하는 일이 중심이 아니지. 사람을 해한 자는 그대로 당해야 정당하다는 사건 종결에 대한 내용이야. 무척 잔인하게 판사의 행동에 집중하는 걸 보니 아마도 결론은 반대로 가겠지.


이상한 점은 악마가 눈물을 흘리게 되면 '인간화'가 된 거라고 지옥세계가 믿는다는 거야. 감정을 가진 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악마들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다른 종류의 사탄이 있대. 웃고 떠들고 슬픈 척을 할 수는 있지만, 눈물 한 방울은 사탄에게 저주받고 지옥으로 다시 끌려가게 된다네. 

오래 전 알라딘 서재에 영화감상을 하나 썼는데, 지옥으로 끌려가는 은행원에 대한 이야기였어. 공들여 썼지만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 중요한 점은 천국이건 지옥이건 감시도 처벌도 직접 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예전부터 믿고 있다는 거야. 내 생각으로 감시와 처벌은 지식의 문제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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