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성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신뢰는 다리를 놓지요."

새로 나온 책들을 보다가, 한 문장에서 시선이 멈춘다. 푸른 꽃이 일렁이고 다리 위로 미풍이 날아오르는 봄날, 그 봄날의 가시를 본다.

  

소개글에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해 보도록 하면서, 차분하게 다독여 주는 책이라고 써 있다. 31가지 감정이 하는 일을 의인화해서 재치 있게 표현했다고 한다. 

기쁨이 책을 읽으면서 친구에게 달려간다. 미움이 연결선을 물어 끊어버리고 통화가 끊겨버리는 장면도 보인다. 열등감은 철창을 만든다.

감정은 주관적이므로 아이들마다 다르게 표현될 수 있으므로, 꼭 이 장면들을 고집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을 계기로 아이들이 각자의 감정을 돌아볼 기회를 갖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장면들은 뭔가 마음에 꺼스러기를 만든다. 예를 들자면 거대한 신뢰가 흐뭇한 표정으로 두 팔을 들어 다리를 받치고 있다. 신뢰가 하나의 도구를 이용한다. 신뢰가 미소를 짓는다. 신뢰는 왼팔과 오른팔을 평평하게 유지해야 한다. 한쪽이 조금이라도 기울어진다면 곤란하다.   


나는 가끔 세상 쉬운 일을 어려워 쩔쩔매는 상황에 빠진다. 이 그림을 봤을 때도 그랬다. '쉽고 간단명료하게 알려 주는 그림책'을 보고서 마음이 뒤죽박죽이 된다. 감정들을 차분해도, 너무 차분한 색감으로 표현해서 그런가. 다행히 이런 생각을 자주 입 밖으로 내지 않아서 창피를 면한다. 


아무튼 동물들이 튀어 나와 감정을 설명하는 그림들을 보자니, 동물에게도, 야만인에게도 상호부조가 기본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 『만물은 서로 돕는다』가 생각난다. 이익을 위해 진력하고, 경쟁하며 물어뜯는 과정에서 인간 역사가 발전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요약하면 크로포트킨은 황당할 수도 있다. 아니키즘의 맏형인데.) 


19세기는 다윈이 기독교 신앙에 충격을 안기면서 과학이 도덕의 토대가 되던 시절이었다. 진화론은 자본가들의 경쟁으로 풍파를 겪는 사회에 훌륭한 해설서 노릇을 했다. 과학지식은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감정을 다스릴 훈련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과학지식이 더 넓게 퍼져갈수록 공업의 시대는 당연한 현상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크로포트킨은 어떻게 과학을 신뢰하면서, 공업국가를 낙관하면서, 상호부조론을 들어 아니키즘을 제안했을까.



크로토프킨은 세기 말의 혼란 속에서 무정부주의자로 이름을 알렸다. 아니키즘 운동은 "조직적 범죄"라고 비난받았고, 운동가들에게도 따가운 시선이 보내졌었는데, 크로포트킨에게는 달랐다.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귀족으로, 지리학자로, 반체제 운동가로  "가장 위대한 망명가"로 환대받았다. 


상호부조론 속 동물 세계는 공존한다. 피에 굶주린 개체들이 전투를 통해 살아남아 진화하는 세계가 아니다. 시베리아의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종의 경계를 넘어 서로 의존하는 조류와 포유류를 관찰할 수 있다. 만물은 서로 깊은 관련 속에 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인류도 초기 단계에서부터 상호부조가 디폴트로 작동하고 있었고, 문명화된 이 시대에도 가장 진보적인 제도를 통해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은 지리학, 물리학, 생물학, 전자기학, 천문학을 중심으로 사회이론을 전개한다. 물질도 에너지도 동물도 인간도 모든 만물은 진화하며 상호의존한다. 인류도 수평적으로 상호 협동하는 코뮌 공동체 위에 거주할 수 있다. 신비롭다.


"오스트리아 전쟁포로들이 키에프의 거리를 지친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이를 본 러시아 농촌 여인들은 그들의 손에 빵이나 사과 때로는 동전 따위를 건네준 바 있다. 수많은 러시아 남자와 여자들은 적과 동지, 장교와 사병 등을 가리지 않고 다친 자들을 돌보아주었다.


전쟁이 벌어진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마을을 떠나지 못한 늙은 농민들은 민회를 열어 '그곳(전쟁터)'에 나간 사람들의 논밭도 경작해주기로 결정하고 적의 포화를 무릅쓰며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렸다. 프랑스에서는 전국에 걸쳐 협동 취사장과 공산당원 식당이 생겨났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벨기에를 위해 자발적인 원조를 보냈고, 러시아 인민들은 국토를 유린당한 폴란드인에게 원조를 보냈다. 벨기에와 폴란드를 돕기 위해 벌어진 운동에는 무보수로 참여하는 자발적 행동과 에너지가 엄청나게 발휘되고 있다. 여기서는 '자선 행위'의 속성이 사라진 대신 순수한 이웃돕기가 이뤄진 것이다."


가만히 크로포트킨의 말들을 듣는다. 러시아 농촌 여인들이 건넨 빵과 사과, 동전에 깃든 마음은 무엇일까. 다친 자들을 돕는 마음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늙은 농민들이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 상황에서 쟁기질을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영국과 미국이 국가적 원조를 보내는 마음은 무엇일까. 그 마음들을 전부 다 동일한 상호부조와 연동할 수 있을까.


'순수한 이웃돕기'가 지배동력이 되는 아나키즘의 사회를 위해서는 또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 크로포트킨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통해 정치적으로, 더불어 경제적으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가진 자 편에" 서 있는 탓에 불의와 억압, 독점의 체제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과학을 업은 자본주의의 전개 경로에 국가독점 자본 체제가 세워질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빵의 쟁취』는 소수 권력자에게 집중된 세계를 비판한다. 단순한 공정함보다 상호부조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수단 사유화의 늪에서 꺼낼 힘, 국가를 폐지할 힘은 개인이 자율성을 회복하는 결단에서 나올 수 있을까. 국가로 자본으로 축적된 생존경쟁의 결과를 뒤엎을 힘이 이웃과의 연합으로 가능할까. 의지로 혁명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오늘 카불에서 일어난 일들을 듣고 있다보면 우리는 아득한 세계의 비참을 마주하게 된다. '국적'으로 보호되는 권력의 실상은 어떤가. 그들의 고난이 국가로부터 국가에 의해 국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 누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을까. 국가가 있어 고난에 처하고 국가가 없어 보호막이 사라지는 세계에서 빵은 어떻게 쟁취할 수 있을까.


또한 생산수단이 인류의 공동재라는 크로포트킨의 주장은 어떤 '러시아 여인과 늙은 농부가 만들어낸 연합'에 얼마나 닿아 있을까. 생산수단은 이미 권력자의 재산권으로 보호되고 있는데, 어떻게 그 권한을 폐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 혁명이 가능하더라도 그 혁명이 상호부조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믿어질 수 있을까. 


가끔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써내려간 문서들을 보다보면 이상하게도 봄날의 가시를 떠올린다. 그토록 악한 감정들이 생산되던 시대에 어떻게 레지스탕스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유대인을 다락방에 숨겨주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살아남기 위해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 뭔가를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감정을 알아야 한다. 주관적인 상태로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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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돼지들은 모두 엄마돼지 집 앞에 모여서 돼지임금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개 위에 나타난 괴상한 그림자는 곰이 틀림없었는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돼지마을로 돌진해 오고 있었거든요. 돼지들은 큰 충격에 빠졌어요. 호랑이 군대가 곰을 발견하고 놀랐을 때와 똑같은 일이 돼지마을에서도 일어났어요.어찌할 바를 몰라 모두 꽥 소리를 내며 눈을 찔끈 감고 말았습니다. 엄마돼지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울부짖는 곰이 다가와 갑자기 엄마돼지를 부릅니다. 어이구, 이 일을 어쩌나. 도와주세요. 새 임금은 너무 무서워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간신히 물었어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곰 이빨을 장식한 곰탈 옷을 벗자 돼지임금이 나타났습니다. 모두들 엉? 하며 멍하게 쳐다보기만 합니다. 새 임금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말합니다. 아, 당신이군요. 우리 모두 놀랐습니다. 곰마을에서 귀한 보물을 얻어 왔군요. 호랑이 군대도 놀라 도망갔답니다. 마침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상황을 알아차린 돼지들은 너나 없이 하품을 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곰 소동이 있던 날, 엄마돼지는 놀라서 기절하고 넘어지며 다리에 큰상처를 입었습니다. 다친 다리 때문에 집 안에만 있게 되었습니다. 돼지임금은 열심히 간호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돼지들은 여러 약초를 두고 갑니다. 점점 쇠약해진 엄마돼지에게 한 가지 걱정이 생깁니다. 엄마돼지는 돼지임금을 불러 말합니다. 이제 마을에 가서 친구들과 지내렴. 파수꾼 일도 하고 토끼들도 안내해. 엄마돼지는 돼지임금을 떠나보내려 합니다. 돼지임금도 알고 있었어요. 모든 돼지들은 늙어 떠날 때가 되면 홀로 지내길 원한다고 했거든요. 돼지임금은 엄마돼지 곁을 떠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돼지임금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엄마돼지의 말을 어긴 적이 없었어요. 다른 돼지들의 말도, 새 임금의 말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돼지임금은 누군가의 말을 거부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돼지임금은 터덜터덜 마을을 향해 갑니다.


마을 놀이터는 재미난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돼지임금은 친구들 사이에서 달리고 떠듭니다. 곰 흉내를 내달라는 요청에 기꺼이 눈물을 날리며 뛰던 저 지난 밤을 흉내냅니다. 즐거워 박수를 치는 마을 돼지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껑충거립니다. 문득 엄마돼지가 걱정되기 시작하고,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둘러 집으로 달려갑니다. 엄마돼지는 꼭 건강해질거야, 엄마돼지는 꼭 건강해질거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며 쏜살같이 달립니다. 그러다 잠깐 사이에, 순식간에 왼쪽 발밑에 돌덩이가 쑥 밑으로 빠져 버립니다. 중심을 잃고 허우적대던 돼지임금은 그만 굴러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아이구, 아이구, 이게 무슨 일이야. 


한참을 구르던 돼지임금은 뭔가 축축한 구덩이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호랑이 군대가 머물던 곳입니다. 하필이면 호랑이 군대가 화장실로 사용하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어요. 어유 이 일을 어쩌나. 돼지임금은 서둘러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다리가 아파 꼼짝할 수 없습니다. 왼쪽 다리에 큰 상처가 보입니다. 어이구 어찌 이런일이, 어이구. 돼지임금은 어이없게도 그 상태로 몇 시간을 그대로 주저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밤이 되자 슬슬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 멀리서 횃대를 든 마을 돼지들의 소리가 들리자 돼지임금은 있는 힘껏 소리칩니다. 여기요, 여기요. 여기 있어요. 새 임금은 엄마돼지에게 선물할 약초를 들고 왔다가 돼지임금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찾아 나선 길이었습니다. 돼지임금은 벌떡 일어나 기쁜 마음으로 감사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쳤던 다리가 멀쩡한 겁니다. 아유, 어찌 이런일이. 아유. 


호랑이 군대가 남긴 똥 구덩이에 담궜던 다리가 낫게 되자, 돼지임금은 엄마돼지의 상처에도 바릅니다. 며칠 후 마을돼지들은 너도나도 호랑이 군대가 남긴 약을 보관했습니다. 이웃 마을에서도 이 약을 얻으려고 더 많은 동물들이 몰려옵니다. 호랑임금도 찾아옵니다. 지난 번에 도망가다 다친 상처 때문에 힘들어 했던 호랑임금이 늑대가 전해 준 약을 바르고 건강해졌답니다. 새 임금은 호랑임금에게 약이 부족하지 않게 더 많이 선물합니다. 호랑임금이 묻습니다. 이 귀한 약은 대체 어디서 온 건가요? 돼지임금은 즐겁게 대답합니다. 당신들의 똥이랍니다. 호랑이표 약이지요.


돼지마을은 이제 호랑이 군대를 겁내지 않습니다. 앞으로 싸울 일이 생기더라도 호랑이풀이 치료해 줄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안녕, 돼지임금.




*이 그림은 <제목 없음 76>입니다.


소소한 일은 소소할 때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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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마을이 잘 살게 될수록 찾아오는 손님들이 늘었어요. 돼지임금은 누구보다 빠르게 그들을 안내합니다. 어유,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힘드세요. 저 쪽 길이 지름길이랍니다. 똥거름 저장소에서 마을 놀이터를 지나 자신이 살았던 대궐까지 마을 곳곳을 누비며 신나게 안내합니다. 토끼 손님이 오는 날은 특히 신나는 날이었어요. 길고 하얀 귀를 세우고 두 손을 비비며 인사하는 토끼들의 말은 언제 들어도 돼지임금을 행복하게 했어요. 당신이 그 호랑이를 물리친 돼지임금이군요! 부끄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돼지임금은 코를 킁킁 거리면서 말합니다. 어유, 뭘요. 지금은 똥 폭탄을 만들지 못하는 걸요. 여우가 왔고 고양이도 행차했어요. 거북이 등에 올라탄 병아리들까지 다녀간 후에 돼지임금은 그만 피곤해지고 말았어요. 새 임금은 돼지임금에게 엄마돼지와 함께 쉴 때라고 충고합니다. 엄마돼지는 새 임금에게 기쁘게 말했어요. 새 임금님, 당신은 관대하군요. 그런데 몇 번째 새 임금인가요? 새 임금은 허허 웃으며 답합니다. 글쎄요. 그거야 알 수가 없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군요. 엄마돼지도 잘 알고 있었어요. 돼지마을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문제를 제일 잘 해결할 수 있는 돼지를 임금이라 부르며 힘을 모았거든요. 그러니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새 임금이 몇 번째 임금인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돼지임금이 시원한 그늘에서 엄마돼지와 낮잠을 자고 있을 때 새 임금이 다급하게 찾는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마을 광장에는 이미 많은 돼지들이 모여 웅성웅성 걱정을 내놓고 있었어요. 글쎄 호랑이마을이 화가 났다는군요. 늑대들이 호랑이마을에 가서 돼지에게 졌다고 놀렸다네요. 호랑이 군대는 어찌할까요. 이제 우리마을은 어찌 될까요. 우리 돼지들은 전쟁이 싫어요. 싸우기 싫어요. 광장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각자 의견을 내느라 분주합니다. 마을 경계선에 똥 저수지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돼지도 있었고, 뒷 산에 굴을 파서 잠시 피하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새 임금은 똥 저수지는 짧은 시간에 만들기도 힘들고 오염되는 물 때문에 힘들다고 합니다. 그때였어요. 누군가 탄식하듯이 중얼거립니다. 호랑이를 설득할 곰을 데려옵시다. 곰이라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새 임금은 돼지임금에게 부탁합니다. 당신은 우리 중 제일 빠르지요. 지금 당장 곰마을로 달려가세요.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돼지임금은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갑니다. 쉬지 않고 달렸어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도착합니다. 안녕하세요. 곰돌이님들! 우리마을을 도와주세요. 호랑이 군대가 곧 온다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무기도 없고 군대도 없답니다. 곰임금님, 호랑이 군대에게 말해주세요. 곰님들 언제나처럼 우리 돼지들을 도와주세요.   


곰님은 서두르는 돼지임금이 안타까워 헛기침을 합니다. 진정하세요,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드세요. 당신에게 시간이 없어 보이는군요. 하지만 우리 곰마을도 이제 병사가 없답니다. 임금도 없답니다. 모두가 미안해 합니다. 크게 실망한 돼지임금을 문 앞에 두고 곰님은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 그리고 커다란 꾸러미를 들고 다시 나타납니다. 돼지임금이여, 이것들은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소중한 보물이랍니다. 당신이 받아준다면 좋겠어요. 곰님들은 돼지임금에게 음식이 든 보자기와 곰 이빨로 장식한 곰 가죽 옷을 선물합니다. 


골짜기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갑니다. 돼지임금은 기운이 없어 뛰지도 못하고 어기적 걸어갑니다. 그러다가 엄마돼지 생각이 났습니다. 어유, 이 일을 어쩌나. 엄마돼지가 제일 먼저 호랑이 군대를 마주칠텐데, 이 일을 어쩌나. 엄마돼지의 집은 마을 가장자리에 있습니다. 돼지임금은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났습니다. 어유, 이 일을 어쩌나. 호랑이 군대보다 먼저 도착해야 하는데, 어이구, 어이구. 돼지임금은 보자기에 든 음식을 꿀떡 삼키고 힘을 냅니다. 곰 가죽을 두르고 고개를 치켜 세웁니다. 그리고 날쌔게 달립니다. 엄마돼지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생각합니다. 눈물이 흘러 날립니다. 


호랑이 군대는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저 촛대바위만 지나면 돼지마을입니다. 호랑임금은 호랑이 군사들에게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는 준비되었습니다. 호랑이 군대는 허약하지 않습니다. 호랑이 군사들은 얍, 얍, 얍. 단결합니다. 그리고 우렁차게 대답합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호랑임금이 초승 달빛 속에서 돼지마을로 가는 산등성이를 봅니다. 곰이 순식간에 돼지마을 쪽으로 뛰어갑니다. 아니, 이럴 수가. 엄청난 속도로 가고 있어요. 호랑임금은 그만 악하고 소리칩니다. 저렇게 날쌘 곰이 있다니. 곰들은 배고플 때만 사나워지는데, 어쩐 일로 화가 났을까. 조금 더 다가가 봅니다. 비를 뿌리며 괴성을 지르고 곰이 지나가고 있지 뭡니까. 돼지마을을 지키는 곰이 틀림없구나. 안되겠다. 퇴각이다. 호랑임금은 억울한 마음을 누르고 발길을 돌립니다.



*이 그림은 <제목 없음 112>입니다.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다른 시간에 살더라도 우리라고 외치면 마법이 찾아옵니다. 


이제 5부만 남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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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돼지임금 3부입니다. (돼지임금 1부, 2부는 이전 포스팅  https://blog.aladin.co.kr/722236154/12659152 에)


돼지임금은 신이 났어요! 동쪽 마을에서도 서쪽 마을에서도 돼지임금이 와 주길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돼지임금은 조금은 우쭐한 기분이 들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이렇게나 좋은 일이라니!!


돼지임금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어디에서 똥을 눌까를 고민해야 했어요. 돼지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돼지임금의 똥이 필요하다고 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새 임금이 돼지임금을 찾아왔어요. 아유, 수고가 많으십니다. 당신의 똥은 우리 마을의 보물입니다. 월요일은 동쪽 마을로 가 주세요, 그리고 수요일은 서쪽 마을로 금요일은 남쪽 마을로 토요일은 북쪽마을로 가셔야 합니다. 


돼지마을은 돼지임금 똥밭 만들기가 한창이었어요. 돼지임금은 이리저리 움직여 다니며 볼 일을 봐야 했어요. 그래도 돼지임금은 힘든 줄도 몰랐어요. 어쩌다가 갑자기 똥이 마려울 때면 힘을 써 참아야 했지만, 그래도 돼지임금은 즐거운 마음으로 참을 수 있었어요. 


집 밖을 나서면 동네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돼지임금에게 인사를 건네요. 안녕하세요. 어제 당신의 똥을 묻었는데 언제쯤 싹이 날까요. 돼지임금은 어흠~ 웃어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서쪽 마을에는 이미 싹이 올라왔대요.


돼지마을이 풍족해지기 시작했어요. 쑥쑥 올라오는 가지에 튼실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요. 돼지마을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되었어요. 아이들은 집 앞 공터에서 놀기도 해요. 함성소리가 저 멀리까지 울려요. 놀다가 지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돼지임금 똥밭을 지나가요. 아이구 냄새, 지독한 냄새 방구 냄새~. 아이들은 똥터가 거북해요. 어른들도 이미 그 똥밭이 거북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이었어요. 새 임금은 마을 밖에 돼지임금 똥밭을 만들라구 했어요. 돼지마을에는 공원이 생기고 공연장이 생기고, 똥밭은 거북한 장소가 되었거든요. 돼지임금은 엄마와 살던 마을 끝 집으로 돌아와야 했어요. 마을 끝 엄마돼지의 집은 돼지임금이 살던 때보다 훨씬 낡아져 있었어요. 돼지임금은 조금은 슬픈 마음이 들었지만,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었어요.  


엄마돼지는 반가운 마음에 돼지임금 등짝을 어루만져요. 오랜 동안 네 등짝이 그리웠단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랐니. 돼지임금은 엄마돼지를 안으면서 자랑스럽게 말해요. 엄마는 모르실거예요. 마을사람들이 내 똥을 좋아해요. 저 멀리 사는 북쪽 돼지들도 반가워 인사를 세 번씩 해요. 엄마돼지는 돼지임금이 점점 홀쭉해지는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매일 저 멀리까지, 동서남북, 똥 누러 다니느라 쉴 새가 없었던 돼지임금이 애처롭게도 생각되었어요. 


가을이 되던 무렵이었어요. 돼지임금은 집 밖에 있는 똥밭에 똥을 누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마을 밖으로 옮겨온 똥밭에 마을사람들이 오지 않고 있었어요. 돼지임금의 똥을 구하러 줄을 서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었어요. 돼지임금이 홀쭉해지고 나서는 똥 속에 소화되지 않은 씨앗도 없고, 마른 똥이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아유 어쩌나 이제 더이상 똥이 나오지 않아요. 돼지임금이 누는 똥은 마을에 필요한 똥이 아니었어요. 갑자기 슬픔이 밀려와요


울먹이는 돼지임금 옆으로 새 임금이 찾아왔어요. 돼지임금이여, 나는 새로운 임금입니다. 우리 마을에서 당신이 가장 빠른 돼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이제 우리 마을은 걱정을 덜었군요. 당신은 호랑이만큼 빠르고 곰보다 냄새를 더 잘 맡는 돼지라고 하더군요. 돼지임금은 깜짝 놀랐어요. 누가 그래요? 믿어지지 않아요. 


새 임금은 부르럽게 말을 이어갑니다.  당신이 지난 여름 아침에는 동쪽 마을에 오후에는 서쪽 마을에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재빠르게 동서남북을 오고가는 모습을 우리 마을 모든 사람들이 봤다고 증언했어요. 누가 뭐래도 당신은 가장 빠른 돼지랍니다. 그래서 부탁합니다. 이제 우리 마을은 호랑이도 여우도 무섭지 않아요. 우리 마을의 파수꾼이 되어주세요.


돼지임금은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납니다. 온 마을을 하루에도 몇 바퀴 쏜살같이 달립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소식을 알립니다. 누군가 길을 잃었을 때 재빠르게 안내를 합니다. 바람이 달라붙고 발바닥이 간지럽고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즐겁습니다. 마음 속에 그득한 용기는 헉헉 숨이 차올라 잠시 쉴 때마다 속삭입니다. 달리기는 행복이에요. 


(4부와 5부를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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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몇 십년 전에 농활을 갔다가 아이들과 함께 부른 노래 '돼지임금'의 이야기 버전을 썼었는데, 이제서야 2부가 완성되었다. 노래의 내용은 단순하면서도 재미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했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뚱뚱뚱 돼지임금 부하들과 으스대다 어느 날 산길에서 호랑이를 만났네.

겁쟁이 돼지임금 도망가고 싶었지만 부하들이 보고있어 어쩔수가 없었네.

돼지임금 호랑이보고 잠깐 기다리라 했네. 온 몸에 똥칠하고 자- 덤비라 했다네

소중한 내 발톱에 똥칠하기 싫어! 호랑이는 돼지보고 내가 졌다 했다네."


노래와 율동을 즐기던 중 뚱뚱하고 더럽게 표현된 돼지의 재치에 개연성을 넣어 줄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만들게 된 이야기다. 아주 오래된 1부 이야기에 2부를 추가했다. 


《1부》


옛날 옛적에 아주 깊고 깊은 산 중 마을에 돼지들이 모여 살았답니다. 그 곳은 동서남북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평평한 들판과 냇가가 있는 한적하고 마을이었지요. 돼지들은 너도 나도 모여들었고 마을의 인구는 해가 갈수록 늘어났답니다. 그러자 마을에는 돼지들이 먹을 음식들이 부족하기 시작했어요. 돼지들은 회의를 열고 대표를 뽑아 그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지요. 마을돼지들은 모두 냇가 옆에 모여 '누가 대표가 될 것인지 의논합니다. 여러 돼지가 거론되었지만 결국 한 돼지가 결정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다른 동물들을 압도할 거대한 몸집과 무시무시한 입김을 가져야 최고지요!"

"맞아요, 우리 마을에서 최고 멋진 돼지를 뽑아요!"


그 때부터 멋진 돼지는 '거대 몸집의 돼지'가 되었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큰 돼지는 존경받게 되고 마을의 대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마을 끝 마지막 집에 살던 엄마돼지도 자신의 아들을 가장 존경받는 돼지가 되도록 키우고 싶었습니다. 아들돼지는 엄마 말씀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고 몸집을 키웠습니다. 아들돼지가 음식을 구해오는 엄마돼지를 위해 조금이라도 집안 일을 하려고 하면 엄마돼지는 벌컥 소리를 키웁니다.


" 너 그러다 살 빠지면 어쩌려고 그러니."


아들돼지는 결국 아침부터 밤까지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손을 들어 양치질하는 것까지 엄마돼지가 합니다. 몇 년이 지나자 아들돼지는 마을에서 가장 큰 돼지가 되었습니다. 아들돼지를 보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모여드는 마을돼지들 덕분에 엄마돼지는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엄마돼지는 쉴새없이 일하느라 아들돼지의 손바닥만하게 작아졌지만 그래도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돼지가 드디어 마을의 임금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마을 가운데에 있는 돼지임금 저택으로 가야하는 날, 아들돼지는 너무 커져서 문을 나설 수가 없었답니다. 결국 문을 뜯어내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가 있었어요. 아들돼지가 저택으로 가는 모습은 논밭에서 일하던 돼지들에게도 똑똑히 보였습니다. 아들돼지가 한 발 디딜 때마다 땅이 울리고, 한 숨 내쉴 때마다 거친 바람이 됩니다.


"아, 너무 멋지시다. 저 임금님은 땅을 울리고 하늘을 가를 수 있어. 우리 마을은 이제 안전해."


이런 믿음이 마을돼지들에게 생겼습니다. 돼지들은 기쁜 마음으로 더 열심히 일을 하며 돼지임금이 먹을 음식을 만듭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더 거대해진 돼지임금에게 맞는 집과 옷감, 음식이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을돼지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고 또 일해서 돼지임금의 먹이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돼지임금은 점점 거대해지고 마을돼지들은 점점 야위어 갔지만 모두가 행복해 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돼지마을 동쪽에서 일을 하던 돼지들이 부엉이들에게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 멀리 호랑이 마을에서 돼지임금을 만나러 온다는 것입니다. 돼지임금에 대한 소문이 그 곳까지 퍼져 호랑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호랑이 임금의 명예를 지키고 돼지들을 혼내주기 위해 군사를 파견한다는 것입니다. 마을돼지들은 그 소문을 듣고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돼지임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돼지임금은 걱정에 빠졌습니다. 자신을 믿는 마을돼지들과 엄마돼지를 위해 일어나 싸우고 싶었지만 이미 거대해진 몸을 움직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손을 위로 올려 체조하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마을돼지들은 하나같이 밝은 얼굴로 말합니다. 


"임금님, 그들이 마을에 오기 전에 물리쳐 주세요. 호랑이 군사들은 발톱이 날카로워 마을이 엉망이 될 거예요. "


결국 돼지임금은 자신의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섭니다. 마을돼지 절반은 돼지임금의 음식을 들고 그를 따릅니다. 돼지임금이 마을을 벗어나는데는 이틀이 걸렸습니다. 드디어 산길에 들어서자 마자 호랑이 군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돼지임금은 숨이 차서 말조차 꺼내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물론 뒤돌아서서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돼지임금은 생각합니다.


'내가 잘 하는 것은 먹는 것과 먹은 것을 소화시키는 것인데, 어떻게 저들을 이길 수 있지? 빠르지도 않고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할까... 그나저나 오랜만에 걸었더니 똥누고 싶을 뿐이야'


배에 힘을 주고 똥누고 싶은 것을 참던 돼지임금은 결국 참지 못하고 엄청난 방구폭탄과 똥을 발사하게 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똥덩어리와 함께 나온 방구냄새는 호랑이 군사들의 혼을 빼놓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뿌해진 산 속에서 우왕좌왕하다 말합니다.


"에이, 더러워. 숨쉬기도 어렵고. 모두 퇴각이다. 돼지임금 기다려라. 우리는 또 올 것이다."


마을돼지들은 호랑이 군사를 물리친 돼지임금이 자랑스러웠지만 기쁨을 표현할 기운이 없었습니다. 방구폭탄에 혼미해진 것은 마을돼지들도 마찬가지 였거든요. 돼지임금은 마을저택으로 돌아오며 생각합니다.


"거대한 것은 멋진 것이 아니야. 더이상 돼지임금으로 살고 싶지 않아"


마을돼지들도 생각합니다. 방구폭탄과 거대한 똥덩어리에 둘러싸인 돼지임금이 더이상 멋지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을돼지들은 하나둘씩 모입니다. 새로운 규칙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이 마을의 대표가 되어야 할까요?"


아직도 돼지마을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2부》 


돼지임금은 며칠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답니다. 마을 사람들이 새로운 임금을 뽑은 사실을 알려 왔거든요. 물론 호랑이군을 물리쳐 준 일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고 전해왔지요.

돼지임금은 몹시 놀랐고 어지러워 일어설 수도 없었답니다. 아이고 아이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발버둥을 쳐보지만 몸놀림이 여의치 않았어요. 돼지임금이 괴로워하자 새로 뽑힌 임금은 모두에게 말했어요.


“돼지임금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줍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마을 사람들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돼지임금은 그날 처음으로 밤 산책을 나갔습니다. 하루를 굶었더니 허기졌지만 마을에서 보내 온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어요. 아이구 아이구,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돼지임금은 아이구 하며 계속 걸었습니다. 아침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아이구 소리도 그쳤습니다. 자신이 살던 궁전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온갖 음식과 푹신한 이부자리가 있는 그곳으로 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이구 어이구 어찌 발이 안 움직일꼬.


돼지임금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며칠을 쉬지 않고 더 멀리멀리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탈진한 돼지임금은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눈을 떠보니 마을 밖에 있던 전승지였습니다. 몇 달 전에 호랑이군에게 승리를 거둔 곳이지요. 그날의 안도감이 다시 생각나고, 돼지임금 눈에 눈물이 맺힙니다. 돼지임금이 될 준비를 하며 십 년, 돼지임금으로 십 년을 보냈는데 이제 뭘 하며 보내야 할까요. 으이구 으이구 이 난리에도 어찌 배는 이리 고플까. 돼지임금은 먹을거리를 찾아 두리번 거렸습니다. 아유 아유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요. 열매가 주렁주렁한 나무도 있고 좋아하던 부추와 쑥이 엄청나게 자라나고 있지 뭡니까. 돼지임금은 허겁지겁 먹기 시작합니다. 


저 멀리서 횃대를 든 마을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돼지임금, 돼지임금 어디 있소? 돼지임금을 찾아 마을을 헤매고 다녔답니다.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승지까지 오게 된 마을사람들은 배부르게 먹고 잠이 들어 있는 돼지임금을 발견합니다. 반가움은 잠시 스치고, 화가 난 마을사람 몇몇이 돼지임금을 큰 소리로 불러 깨웁니다. 이거 봐유, 지금 며칠을 돼지임금 찾느라 들판에 일거리가 얼마나 밀려있는지 알긴 해유. 돼지임금은 잠결이지만 말도 없이 나와서 미안하다 합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갑자기 비명을 지릅니다. 돼지임금도 너무 놀라 따라 소리칩니다. 아악 아악 왜 그래요. 마을사람들이 횃대를 주변으로 비추자 온갖 종류의 야채들이 쑥쑥 자란 들판이 드러납니다. 가지가 휘어질 듯 열매가 풍성한 나무들도 보입니다. 마을사람들은 너무 놀랐답니다. 와아 와아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지난 호랑이전투에서 돼지임금이 뿜어냈던 똥바가지들 속에 있던 씨앗들이 쓱싹쓱싹 자라고 있었어요. 나무 뿌리도 튼실해져 싱그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합니다. 마을사람들은 갑자기 돼지임금 주위로 모여들어 말합니다. 돼지임금이여, 어서 똥을 누세요. 마음껏 누세요. 그 말을 들은 돼지임금은 너무나도  기뻤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 휘파람 불기는 <제목 없음 88>입니다.


자신이 의심스러울 때면 외치세요, 돼지임금이여. 아, 돼지임금이여. 


5부까지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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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 2021-06-02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야기 읽는 내내 웃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아이들도 재미있게 들어줍니다. 꼭 완결되어 책으로 엮어보고 싶습니다. (개인 소장용입니다. ) 다음 글 기다리는 시간이 행복할 거 같습니다. 천천히 기다리겠습니다. 초원님

초원 2021-06-02 14:4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제 글을 좋아해 주신 세 번째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심 없이 칭찬을 건네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좋은 일이네요.
돼지가 깨끗하고 영리한 동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돼지가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오면 더 좋을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모든 게 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