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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저녁 강연회(http://www.100books.kr/?no=10189)를 가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혼자라는 시큼한 냄새에 더 취하기 전에 액션을 취하자는 모종의 결단이기도 했습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는 버스 안의 사람들은 서로의 존재가 짐이 되기도 합니다. 모두가 지쳐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피해 맨 뒷자리로 가고 중고등학생들의 우정의 대화를 듣습니다. 참으로 극적입니다.  

 

1시간 남짓의 버스 여행을 마치고 넓고 넓은 예술의 거리를 만납니다. 시원한 광장과 울창한 공원, 화려한 분수대 그리고 인상적인 건물들이 펼쳐있습니다. 예술의 전당, 시립미술관, 엑스포 광장, 한밭수목원, 평송문화원 등등 말입니다. 왜 좋은 것들은 이렇게 몰려 있을까요? 내가 사는 동네의 썩은 하수구 냄새는 결코 맡을 수 없습니다. 나는 잠시나마 문화인이 되어 당당하고 경쾌한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듯한 상상에 빠져 발바닥에 힘을 주고 걷습니다.

 

입구에서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몰려 있습니다. 반가운 친구들과 함께하는 그들의 표정은 웃음을 머금은 눈빛으로 도드라져 보입니다. 나는 머쓱해지는 심정을 억누르며 익명성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려 합니다. 그러나 곧 소스라쳐버리고 맙니다. 참가비를 받고 있었습니다. 참가비 만원. 우선 내 지갑 속에 만원이 있는지를 기억해내려고 애쓰면서도 오늘 만원을 쓰면 내일 또 어떻게 하나 망설입니다. 순간적인 그러나 단호한 결정으로 뒤돌아 나옵니다. 뒷통수가 신경쓰입니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을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나의 잘못입니다. 왜 참가비가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을까요? 이렇게 오래도록 살았으면서 돈 없이 진행되는 행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당연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스스로 쓴 맛을 맛보려 할까요? 학습 공동체라는 대문의 구호에서 편견을 가졌나 봅니다. 굳이 왔던 길을 다시 밟으며 나오다가 멀리서 안면이 있는 듯한 여성의 미소를 발견합니다. 여러 친구들과 즐겁게 등장하는 그녀들은 생기있어 보입니다. 나는 그녀들의 이름도 모르지만 짧은 순간 부러움을 갖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나 자신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2년이나 일하지 않고 놀고 있습니다. 물론 일하고 싶습니다. 일하면서 느끼는 성취감은 아무리 오랜 시간 놀아도 채워지지 않는 종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친구도 없습니다. 당연히도 친구와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로 인정받는 충족감은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니까요. 직업이 있는 것, 친구가 한 사람 쯤은 있는 것, 만 원쯤은 쓸 여유가 있는 것, 그 모두가  대다수에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당연하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권리를 양도하고 폭력을 선물받는 것이 당연한 사회이니 나의 부당연은 투정일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당연한 것이 넘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을 잃고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직장을 잃고 방황하는 실업자에게 자신의 천직을 찾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배고픔에 허덕일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때문에 다른 사람을 상처내야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것들이 당연한 것들이 되길 바랍니다.

 

깜깜한 하늘에 그림을 그려봅니다.

어쩌면 당연하다에 새겨진 두 가지 뜻에서 받은 저주가 아닐까요.

1. 당연―하다 (當然―)【형용사】【여 불규칙】 이치로 보아 마땅하다.
2. 당연―하다(瞠然-)【형용사】【여 불규칙】 놀라거나 괴이쩍게 여겨서 보는 눈이 휘둥그렇다. 
 

<200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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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제적 삶의 양식이 문제란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크 샌델 교수의 책과 강의(EBS방송)가 연일 화제다. 윤리적 딜레마를 중심으로 고전적 정의론을 검토하는 샌델 교수의 강의는 상당히 개방적인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부터 하버드 강의라는 점, 인문학적 감수성을 얼마간 충족시켜준다는 점 등에서 여러 시청자들에게 참신하게 다가오는가 보다. 나로 말하면 <정의>라는 범주 자체에 크게 회의적인 사람이라 토론 열기에 동참하기는 힘들었지만, 일단은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자본주의'라는 체제 하나 만으로 귀결시키는 환원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불평등, 부조리, 범죄, 질병, 환경 파괴, 가족의 해체, 그리고 세대 간의 단절까지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낳은 결과물로 간주하자면, 우리의 문제는 단순하고 선명해질 수 있다. 한때는 이런 진단에 열광하기도 했었다. 물리쳐야 할 적, 저항해야 할 체제는 외부적 문제였기에 하나의 구호로 단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 후, '주체'와 '해방'이라는 기표가 얼마나 모순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는가를 확인했고, '욕망'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단결된 구호가 흩어졌을 때 다시 한번 경제와 정치, 종교와 문화가 옹골진 거미줄처럼 삶에 작용하여 힘을 발휘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여러 지성인들이 내놓은 해법은 상당히 내재적이고 인문적이다. 자본제적 삶의 양식에서 비롯된 습성을 고침으로써 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문한다. '소비하는 동물로만 살 것인가'를 묻는다.  

(계속)

 
2.  "인간은 '인간관계'인가?"

 

3. "고통과 상처, 그리고 적확한 거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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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만들어진 인간이었어, 네 자신을 찾아, 그것이 구원이야."

이런 선언들이 익숙한 멜로디로 들리는 것은 '주체'와 '인간'의 동일화,  '능동적 인간'에 대한 찬양이 유행가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많은 부분  근대가 만들어낸 후유증이 틀림없다. 계몽의 시대에 대한 염증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령을 '너 자신을 알리라'로 바뀌도록 했다고나 할까. 그 시작점의 의도에서는 나쁜 맥락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알린다'는 행위를 <상품>과 <광고>로 환원시켜서 주문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해와 편견으로 인한 갈등과 소외를 감소시킬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물론 거기에는 알려야 할 자신의 덕목들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누구든지 알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태어나는 일에 관여할 수 없었듯이, 삶은 의외로 (자신이) 간섭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비록 예측된 일이라 하더라도 그 대응에 있어 무력하기도 하다. 언어와 문화, 구조는 이미 개인의 자유의지의 한계를 설정해 놓았기에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은 (궤도 안에서) 저항하고 분노한다. 자신을 표현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표현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수많은 현대 대중들은 이런 까닭에서 '자기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라'는 메시지에 쉽게 경도될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인, 지성인들의 은밀한 충고를 통해 비난_조롱당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 어떤 '실체'가 과연 당신의 실체가 맞느냐고, 동일성과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당신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에게는 경계해야할, 근절해야 할 많은 장막들이 있다. 그런데 때로는 장막과 대안의 경계가 흐려져 보인다.  더 경솔하게 말하자면 대안이 필요한가 말이다. 무엇을 위한 대안을 찾는 것인가.   
 

"클럽-블로그-트위터, 뭐하니?" 

'블로그' '페이스북' '트워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야 말로 후기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도드라진 변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블로그, 페이스북은 자신의 일기장이자, 1인 미디어로서 사회적 표현이자, 사회적 관계를 통한 힘을 과시할 수 있었던 미시적 정치의 장이자, 소비시장의 활력 매체로 기능하고 있다. 이전 포스트에서 클럽과 같은 동호회(다수,집단) 체제에서 블로그와 같은 1인  체제로 네트워크 지형이 변화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즉문즉답 네트워크적 감수성을 강점으로 하는 트위터에 이르러 그 극에 달했다고 보여진다. 트위터는 집단 체제, 클럽문화의 장점이었던 '연결'이라는 특징을 극대화하면서, 단점일 수 있었던 피로감(운영진, 회원 간의 마찰)을 최소화시켜 주었다. 더불어 블로그의 생산성이 1인에 의지하여야 했다는 점에서 매일 새로운 컨텐츠의 갱신을 요구받는 부담감에서도 해방시켜주었다. 두드러진 잇점은 역시 사용자의 감각을 만족시켜 주었던 즉시성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것을 '네트워크 혁명'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여전히 회의적이다. 트위터, 트위터 이용자가 수용하고 거부하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체제가 상당히 모순적이라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이것은 몸의 습속이 자본제적 삶에 적응하여 이질성을 옹호하나, 이성과 감성에 있어서는 여전히 근대적 동질성을 갈망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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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눈에 들어와 마음으로 기어가더니 나가려 하지 않는 시가 있다. 늘 품고 다니던 '비관'이, 이토록 짧지만 강렬한 시어로 대답해왔다.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1993)

 


'꼬리를 물고 뱅뱅 도는' 우리들은 언제나 자유를 꿈꾸지만 그것은 쉽게 오지 않는다. 거대한 우주 속, 위대한 태양도 자기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저 꿈만 꿀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벌거벗은 모습이 된 자신을 발견한 순간, 그 짧은 순간 나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어느 날, 이탈한 궤도를 바라보며, 포기한 또다른 꿈들을 바라보며 외롭고 슬프겠지만, 마침내 자유로워진다. 마치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고 사라져 버리는, 그래서 더 간절하고 고귀한 별똥별처럼.  김중식이란 시인의 시어가 버겁기만 한 나의 일상에 짧은 위안이 된다. 그 짧은 위로의 시어가 사라지고 다시 제자리를 맴도는 나의 '비관'을 마주한다.

나는 나의 일상을 전복하려 하는가

나는 늘 낙오자가 되는 길을 택한다 맹렬하게 거부하다가 눈을 뒤집으며 코를 벌름거리며 입꼬리를 씰룩이며 고개를 돌리고 만다 나는 내 삶이 상처받는 것에 진력이 난다 너무 작아져서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만 내가 살아 가는 시간들이 버겁지 않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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