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말하려는 '무정함'<유산, 세대 계승, 내리 사랑> 같은 인간 공동체적 정情의 계보에 연결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정함은 분명한 얼굴을 갖는 사회관계를 필요로 하며개체와 개체 사이를 규정하면서 시작합니다반면 무정함은 '개체 그 자체'와 '사회자본'과의 관계를 회의하는 상태에서 시작합니다유정과 무정이 발생하는 서로다른 방식에 주목합니다


제 경우를 대입해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바랍니다. 저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 특히 가족이나 학교, 직장처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동질적인 공감력을 필요로 했던 상황에서, 저는 이 문제를 늘 고민해야 했습니다. 제 평판은 메마르고 모난 행동들로 인해 원성 속에 있곤 했습니다. 친밀함으로 연결되길 바랐던 가족, 친구, 동료, 시민들에게 매정하고 모질고 재수없고 싸가지없고 심지어 미친년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분들에게 반감을 가져본 적은 없습니다.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웃고 같이 울어야 할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는 제 자신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평가의 시선들로부터 제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유지하고, 친절을 준비하고, 처음 건네는 말은 제가 기억해낼 수 있는 가장 감미로운 말들을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아마도 젊었던 그 날들, 십 몇 년은 그런 상태를 유지했을 겁니다. 좋은 점들도 생겼었지요. 그러다 주변에서 이상한 말들도 듣기 시작했습니다. 실실거리고 다닌다거나 뭔가 바람이 잔뜩 들어 입에 발린 말들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어두침침한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따뜻함을 제2의 천성으로 자리잡도록 하려고 했지만, 다짐-실패-실망-다짐-실패-실망이라는 패턴만 쌓이고 있었습니다.


딱 한번 꿈 속에서 행복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라는 억하심정도 없이, '너네가 뭘 알아'라는 건방짐도 없이, 성급함과 믿지 않는 태도를 쳐내버리고, 몇 십년을 유지한 그 습관 덕분에, 늙은 제 얼굴에 인자함으로 인한 따뜻한 주름살이 패여 있었습니다. 그 얼굴이 제 얼굴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 또한 편안하고 인정 넘치는 분위기가 그득했습니다. 영구적 평화의 상태가 생각나는 장면이었습니다.


지금 제 얼굴은 피곤한 모양 그대로, 공포가 만든 양미간의 모양 그대로 깊은 골짜기를 형성해 주름져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 길은 제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제가 하고 싶은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무정함'에는 비난, 조롱, 냉소, 비판, 공격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일입니다. 종種적인 연속감정이나 세대 내 공통감각 혹은 동질적 시대의식으로, 너와 나를 부르며, 우리에게 사람답게를 노래하는 '유정함'과는 대립되지 않는 무정함을 발견하려 합니다. 情의 양적 측정을 통해 +에서 -로 이동하는 방식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무정함은 완성된 형태로 오지 않습니다.


현재 구성된 사회적 관계를 부정하며, 나홀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논리가 아닙니다. 온갖 '관계의 비정함'을 양산해내며 '이해관계의 상대성'을 끌고오는 정당화 논리도 아닙니다. 물론 저처럼 흔한 안부인사조차 나눠 가질 대상도 없는 사람의 상태도 무정함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무한 마이너스의 상태로, 유정함의 결핍형태입니다.


영화 《어느 가족》을 통해 유정함의 과잉을 확인하고, 유정함에 기대려는 경향과 거리두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거친 영화는, 온정으로 꾸린 인스턴트 가정에 균열이 생기고 씁쓸해지게 되었을 때, 어떤 형식을 취하더라도, 기필코 가족을 구성할 것을 촉구합니다. 일견 새로운 가족론을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만, 제가 느낀 바대로 표현하자면, 누구보다 간절하게 유정사회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가족의 균열과 자본제적 관료적 물신숭배적 현실을 의미있게 연결하기 보다는, 가족이라는 근원적 유대와 신뢰 관계, 즉 유정함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 가족 구성원들은 가명을 씁니다. 한 명 한 명이 시대적 고통을 겪는 희생된 사람들로 보입니다. 공장에서 해고당하거나, 산업재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친가족에게 학대당하고 방치된 아이들, 노령 연금으로 근근히 살며 고립된 노인들. 그들이 애써 일군 《어느 가족》의 포스터, 가족사진은 완벽해 보입니다. 혈육이 아니더라도, 네가 우리 유전자를 갖지 않았더라도 넌 우리 패밀리야 그래서 아껴주고 보호하고 혼내고 다독이고 먹이고 재우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함께 행복할거야 아침밥을 든든하게 나눠 먹고 저녁에는 하루 일과를 서로에게 도란도란 나눠서 그 삶의 수고를 위로할거야 잘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아 실수가 있어도 상관없지 우리는 가족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가족이 되는 거야. 너희들에게 부여된 사적 권한으로 완전한 가족이 된거야.


이 내적이며 사적인 가족에게 닥친 '가족붕괴'의 순간을, 영화는 실질적 가장이었던 할머니의 죽음과 매장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할머니의 장례를 진심으로 치뤘어야 했다는 듯이, 마당 한쪽에 묻고, 태연하게, 살아 있는 자의 몫 - 노령 연금을 수령하는, 남겨진 가족의 뻔뻔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절도 행각으로 쫓기다 적발되던 중에, 이 새로운 가족은 법적 절차를 통해 흩어지게 되는데, 이 가족의 운명이 ''에 의해 좌초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합니다.


이 가족의 생존력은 특이합니다. 필요한 물건은 훔쳐서 충당합니다. 상품경제를 상이하게 해석하며 절도 방법을 쇼타에게 전승하는 오사무는 반도덕적 생존술로 새로운 가족성립의 배경을 정당화했었습니다. 기존 가족에게서 얻은 이름을 버리고, 《어느 가족》에서 얻은 가명들은 완전한 가족을 지탱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낯선 장면들은 영화가 끝나갈 무렵 읊조리고 흐느끼는 아픔을 통해 완전히 익숙한 세계로 다시 돌아옵니다. 감옥에 갇힌 노부요가 참던 눈물을 훔쳐닦으며 아이들을 걱정합니다. 떠나가는 버스 안에서 쇼타는 진짜 가족은 오사무였다는 듯이 나직하게 아버지라고 불러봅니다. 집으로 되돌아간 어린 쥬리는 다시 학대받고 있습니다.


(유정) 가족은 법과 대치하지 않습니다. 도덕과 대결하지도 않습니다. 정情과 대척합니다. 아무도 아닌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머물렀던 가족명名을 지운 자리에 가명을 만들고 혈연에 연연하지 않더라도 가족의 형상은 그대로 남습니다. 가족의 균열은 그 지점에서 발생하는데, 이 새로운 가족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어느 가족》은 일시적으로 성공했습니다. 저 빛났던 따뜻함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일들이 가능했던 이유도, 기존 가족을 부정하고 떠나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처럼, 그 유정함들을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족》은 실패와 성공으로 구분되지 않는 유정함의 가족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기나긴 가족의 전통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애야말로 너무 강력해서 늘 부숴져야 했던, 몇 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제가 아닙니까. 부서진 가족 문제를 유정함의 세계로 되돌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요 사람은 항상 부족하고, 사람의 자리들은 늘 고통이라고요. 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어느 가족》이 짚어내는 틈을 사유하는 동안 성장한 것처럼 지금도 발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또 누군가는 법과 국가의 문제로 전환되어야 한다고도 할 것입니다. 법적 기준과 국가가 요구하는 질서에 맞춘다면, 유정함의 가족이 아니라 무정함의 세계를 가능하게 할까요.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세계를 소위 무정함의 세계라고 한다면, 그곳에서 가족의 운명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 시점에 비관주의자 쇼펜하우어를 생각합니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알려진 바대로, 서양철학사에 두드러진 흔적을 남긴 <의지의 형이상학>의 사상가입니다. 아르투르는 아버지를 절절하게 사랑했던 반면에, 어머니와 불화하며, 여성을 혐오했던 철학자입니다. 그가 키우던 흰색 푸들 아트만이 죽었을 때 슬픔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누이 동생의 장례식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진정성이 그득한 조사를 남겼던 반면,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가족 문제로, 노동과 경제의 문제 읽어보려고 합니다. 무정함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알라딘'을  즐겁게 동화로 읽으려면, 램프 속에 사는 지니는 밖으로 나오고 싶어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니가 내 편이라는 생각도 필수적이다. 지니는 오직 램프 바깥에서 들려오는, 침입해 들어오는, 소리로만 탈출할 수 있다. 그래서 지니의 위치는 애매하다. 절대적 힘을 갖고 있는 지니에게 없는 단 한가지는 '거주지 이동의 자유'. 지니가 램프 바깥 세상에서 하는 일은 건설이고 이동이고 창조다. 유람이 아니다. 해방도 아니다. 누군가의 소원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실제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궁전을 짓고, 의복을 재단하고, 가축을 돌보며, 요리와 청소를 해낸다. 눈깜짝할 사이에 우렁각시처럼 해내고야 만다. 한 마디의 불평도, 노동쟁의도 없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낸 지니는 조용히 사라진다. 램프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런데 램프 속에는 몇 명의 지니들이 있었을까.


지니들은 현대에도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왕처럼 군림하는 수많은 '알라딘'들에게 편안한 침실, 영양가 있는 식사, 흥겨운 오락을 제공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장마로 제방이 넘치고 태풍으로 위태로운 길 위에도 지니들은 불을 밝히기 위해 램프 밖으로 나온다. 피자를 싣고 택배 상자를 싣고 달리고 있다. '알라디너'의 부름에 반응할 수밖에 없다. 지니에게 계시된 이성은 '금지하는, 거부하는' 이성이 아니다. 지니는 움직이고 돌보는 이성을 갖고 있다. 지니는 빌딩을 짓고 있다. 논밭에 씨를 뿌리고 있다. 공장에 다운타임이 없도록 쉬지 않는다. 어쩌면 지니의 소원은 램프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알라딘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알라딘의 소리를 들리지 않는 램프 속을 떠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알라딘'을 찾으려면 트럼프나 빌 게이츠 같은 인물들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나는 줄곧 현대사회를 신자유주의 같은 개념으로 해석하는 일에 반대했다. 오늘날의 신봉건주의는 봉합경제를 주동력으로 하는 체제를 표현한다. 봉합경제의 주체는 트럼프와 빌 게이츠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형상을 보자면, 현대적 리바이어던이다. 누군가는 트럼프와 빌 게이츠가 지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쉬지 않고 일하고 상상할 수 없는 부를 점유하고 있지 않은가. 트럼프를 상징하는 황금빛 빌딩들을 보면 부동산 가치 투자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치를 상승시키는 재주를 마법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는 어떤가. 시대를 읽는 능력에 더해 블루오션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세계적인 부자가 아닌가. 말하자면 그들은 '알라딘'이자 '지니'. 봉합경제에서 《알라딘과 마법 램프》의 결말은 알라딘과 지니가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봉건사회의 귀속자본과 근대사회의 능력자원이 마치 별개의 것이었던 것처럼 착각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사회자본의 성격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2.


고대에서부터, 아마도 사회가 성립하는 순간부터, 능력 • 실행력, 솜씨의 문제는 주술 • 종교 • 과학과 함께 세대 교육의 중요 축이었다. 그래서 알라딘은 불우한 소년이었지만, 용기를 지닌 청년으로 성장하며, 마법을 선물받게 된다는 서사가 어색할 수가 없다. 그 마법을 통해 주류 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필시 사회성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슴 속에 어떤 등불 하나는 지니고 있다고 말하면, 알게 모르게 수긍하게 되지 않는가. 이 불빛을 개인의 가능성으로 끌어내 사회적 노동의 쓸모에 연결하던 시대가 바로 자본주의다.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라는 용어를 통해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마이클 영은 영국의 사회학자다. 그가 사용하는 메리토크라시는, 단순하게 실력이나 업적을 인정하는 사회적 개념을 넘어 있다. 메리토크라시는 지능intelligence만 뛰어난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Merit에 지능과 더불어 effort를 용해시키기 때문이다. 땀과 눈물, 인내를 통해 목적을 성취해내는, 분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국가 사회는 높은 위치에서 지배적 권력을 행사할 근거로 관직 임용과 관련된 지적 지표를 다양하게 확보한다. 먼저 교육을 통해 그리고 각종 자격시험이나 지능검사 등의 과학적 근거를 사용한다. 기업은 정부와 함께 고급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대학과 협력하고 전문인력 양성 시스템을 만든다. 크라시cracy에 메리토를 앞세워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하는 통치 형태가 된다. 과학적 지표를 개발할수록 민주주의가 정밀해질 수 있다는 가정을 품고 있다.


능력 있는 동료가 승진을 먼저하고, 목표를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은 사람이 더 안락하게 산다는 것이 무슨 문제겠는가. 또 누가 게으르고 능력도 없는 동료를 응원하겠는가. 신분이 귀속되던 봉건사회를 탈피한 후 오직 능력만으로 신분을 취득할 길이 열렸을 때, 근대인들은 어떤 미래를 꿈꿨겠는가. 능력 있는 사람이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하고,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어떻게 반대할 수 있었겠는가.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의 배경을 2034년으로 이동시키면서 강조하고 싶었던 점은 메리토크라시가 불러올 수 있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지적 엘리트 계급의 사회적 지위가 확보될수록, 지능과 품성이 모자란 사람이 복지나 가사도우미와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일이 당연해 보이도록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노동의 존엄이 훼손되더라도 국가공동체의 효율성을 업고 부강한 국가를 설계하는 논리로 묘사되었다. 유력한 사회 질서가 된 메리토크라시를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대항 담론으로 저항하더라도 불공정과 양극화를 제지할 공동체 윤리를 회복시키기 어렵다. 정책을 끌어내오지 못하는 것도 메리토크라시가 의미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영은 메리토크라시를 경계하며 비판한다. 메리토크라시가 메리토크라시를 파괴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저항력을 잃을 것이라고 말한다.


"1914년에 상층 계급에는 공정한 몫의 천재와 둔재가 있었고, 노동 계급도 마찬가지였다. … 지능은 어느 정도 무작위로 분포됐다. 각각의 사회 계급은 능력으로 볼 때 사회 자체의 축소판이었다. 부분은 전체하고 똑같았다. 지난 세기에, 그러니까 1963년 이전에 이미 어지간히 시작된 근본적인 변화는 지능이 계급들 사이에 재분배되고 각 계급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재능 있는 이들은 자기 능력에 부합하는 수준까지 올라갈 기회를 부여받는 한편, 그런 변화에 따라 하층 계급은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몫이 됐다. 이제 부분은 전체하고 똑같지 않다."『능력주의』


이런 논리는 여러 가지로 처참할 뿐이다. 옳지도 않다. 사실도 아니다.


3.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 할 때 거의 대부분이 메리토에 연관되어 있다. 너도나도 '나답게' 살고 싶다하지만, 그 척도는 타인을 향해 있다. 사람들이 경박해서가 아니다, 도덕적이지 않아서도 아니다, 지능이 낮아서도 아니다, 공감능력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인과관계를 가질 수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하나 결속의 지표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합경제의 양상이다. 마치 중세에 혈통으로 지위를 상속시키듯, 신봉건사회에서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대부분의 생산물들의 근친성을 따지고, 편애하고, 보호한다. 그것들에게는 각자의 지위가 부여된다. 그 근친성으로 묶인 조직들이 클수록 족벌은 이탈을 용서하지 않는다. 빈곤이나 불평등은 '모순'의 자격으로, 심층도 아닌 표면으로써 이미 안전하게 결합되어 있다. 마치 알라딘과 지니가 결합되어 완전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듯이 말이다. 빌 게이츠를 심판하면 마소가 무너지고 연관 기업과 주주들과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어떻고 등등의 끝없는 『천일야화』가 이어질 것이다.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연달아 벨소리가 크게 울린다. 토요일 밤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세 걸음만 떼면 현관인데 열 수가 없었다. 커다란 소음이 되어 건물을 울리는 벨소리에 더해서 세차게 마음이 방망이질을 했다. 아무도 없는 척 했다. 짐작으로는 택배 도착을 알리는 기사님의 호출이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과를 마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착잡하고, 마주칠까봐 두렵고 위축되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침묵은 말한다. 여기 아무도 없어요. 문 밖에 두고 가세요. 나는 잠시 알라딘의 마법을 원하고 있었지만, 양치기 소년이었던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러니까 거짓말을 멈추더라도, 이 작은 원룸 방 안 가득 흐르는 사회적 고통을 쫓아낼 수 없을 것이다. 알라딘도, 지니도 아닌, 양치기 소년이기에 더욱 그렇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크라테스는 극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극복이 필요할까요. 그래도 굳이 극복을 대입해보자면, 자신과 대결하고 자신의 욕망 한 부분을 떼어낸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지요.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현재화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를 극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발전이지요. 자신을 변형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발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에게로 향합니다. 계시로 주술효과가 그득한 미신으로 되돌아갑니다. 그곳에는 그를 고발한 멜로토스도, 그를 추종한 멜로토스 아들도, 끝까지 곁을 지킨 친구들 … 도 없습니다. 오직 소크라테스 자신이 존재합니다. 덕을 가진, 지혜를 사랑하는, 신이 신임하는 가장 현명한 자입니다. 그가 실천하고 회복한, 고귀한 영혼, 계시된 이성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지혜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멜로토스에 대해서도 말해야겠습니다. 이전 글 《빌리 엘리어트》에서, 아버지 재키의 교육방식에 개입하고 간섭하던 윌킨슨 선생을 기억해보세요. 윌킨슨 선생은 아들 빌리가 평생을 탄광촌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동자 신세가 될 게 뻔하다고,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도록 하라고 훈계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멜로토스의 아들 아니토스에게 지적 능력이 있다며, 가업을 승계하지 말라고, 무두질하는 직업에 머물지 말라고 조언하지요. 젊은이의 소질을 알아보고 참다운 자신을 찾으라고 조언했습니다만, 멜로토스의 입장에서는 젊은 아들의 영혼 속에 불화를 심어 넣는 악한이었죠. 부모와 자식 간의 인륜적 연관에 개입하는 소리들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새의 날개짓을 통해 전쟁을 결정하던 세계에서,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는 일은, 건강을 위해 의사의 말을 듣듯이 자명한 일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멜로토스는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며 사형시켜 줄 것을 주장했으니까요. 윌킨슨 선생은 수 천 년이 지난 영국의 탄광촌을 배경삼아 말했으나, 재키가 받은 충격은 작은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부자관계의 파괴는 공동체의 결속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도시 곳곳을 누비며 대화를 이끌어냅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아테네인들이 ''이 아니라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죠. 소크라테스 자신만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이었다고 한탄합니다. 도시의 죄를 알아챈 소크라테스는 적극적으로 그 상황에 개입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실천의 철학자였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자신이 깨우친 진리를 아테네 도시국가 전체로 이전시키려고 합니다. 그 방법은 소크라테스가 개척한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마을에서, 시장에서, 귀족들과, 청년들과 끊임없이 대화합니다. '너희들도 스스로 진리를 잉태하고 낳아야 한다, 나는 너희들이 진리를 낳을 수 있도록 산파가 되겠다'. '네 스스로 진리를 깨우쳐라', '너 자신을 알라'의 다른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행동은 진실한 시대의 용기가 아니라 선동 소요죄로 받아들여집니다.


신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고 믿는 그리스인들에게 신을 따르지 않는 듯 보이는 소크라테스는 문젯거리였습니다. 고발자 멜로토스는 자신의 아들이 소크라테스의 꼬임에 빠져 타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멜로토스의 입장에선 멀쩡한 아들이 가업인 무두질을 경시하며, 물려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다가, 결국 술독에 빠져 지내게 되는 일이 어떻게 신의 계시일 수 있었겠습니까. 저마다 자신의 혼phyche을 돌보라고 강권했던 소크라테스가 멜로토스의 아들에게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고 조언하는 과정에서, 무두질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소크라테스에게 내린 다이몬의 명령이었지만, 멜로토스에게는 생업 문제와 연결된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의 소크라테스는 긴 의문들을 남기게 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벌금형으로 감형을 요구하라고 재촉하지만, 재판 중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영빈관에서 식사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당당한 무죄를 주장합니다. 1차 변론 후 1차 투표에서 30표 차이로 유죄로 판결됩니다. 형량을 감량할 수 있는 2차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비천함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대로 변론하고 죽는 쪽으로 걸어갑니다. 2차 투표에서는 80표 차이로 사형이 확정됩니다.


내게 평소 들리곤 했던 다이몬의 신령스런 알림은 지난 시절 아주 자주 들렸고, 내가 행동을 올바로 하지 못할 형편이 될 때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나를 가로막았소. 그러나 지금 내게, 여러분들 자신들이 보듯이, 어떤 사람은 가장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여기는 일이 일어났소, 하지만 그 신의 계시는, 내가 오늘 집을 나서서 이리로 올 때도, 여기 재판정에 들어설 때도, 변론을 하면서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도 나를 가로막지 않았소. 다른 말을 할 때는 말하는 중간에 내가 말을 그치게 했소. 이에 비해 지금 변론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행동을 할 때도 말을 할 때도 나를 가로막지 않았소.”



소크라테스가 최후 법정 연설에서 자신을 옹호해 준 재판관을 향해 했던 변론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변론이 아닙니다. 선언에 가깝습니다. 재판관 앞에 선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자신이 의존하는 바가 신의 섭리이고, 늘 신이 내리는 내면의 소리, 다이몬의 소리에 복종한다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하고 싶었던 일은 아테네를 신의 계시로 가득 채우는 것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도덕이었습니다. 델피 신전에 새겨진 '그노티 세아우톤'은 당시 그리스인들의 시대인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어떤 부분에서 소크라테스와 다른 이들의 균열이 발생했을까요. 물론 아테네를 둘러싼 외교, 정치, 행정 등의 문제가 중층적임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에서 주목하는 바는 다이몬의 소리, 신의 섭리, 그리고 신탁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지식을 말한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아버지의 직업인 조각을 포기하고 철학자로 나선 일이 신탁이었는지 신탁의 위반이었는를 가려야 했던 겁니다. 멜로토스에게는 무두질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철학자는 젊은이에게 말합니다. 무두질이 네 직업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이런 추론이 가능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으며 굴러가는 그리스 사회 체제를 전복하려는 것이었을까요. 거기에 중점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누가 무두질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제기는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소크라테스 이후 인간의 욕구나 충동이 억제되어야 한다는 금욕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어떤 역할을 했을 거라는 것만을 암시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누구의 논변이 더 '신적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신이 맡긴 뜻을 해석해내고 진리를 선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자본으로서의 논쟁과 재판이 중요한 시대였습니다. 그 사회적 인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 사회가 작동할 수 있었던 사회자본에 '재판'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어떤 순간은 사회자본의 위치를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그렇죠. 암요. 아테네 시내를 돌며 소크라테스가 몰두했었던 대화들, 오고 갔던 논리들은 지식과 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참된' 지식을 생산해내려는 활동이었습니다. 아테네의 모든 사람들이 이 사회자본의 영향권 안에 있었습니다. 신탁이 그리스 사회를 뒷받침하고 있던 정치경제적 생산양식들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하는 단계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신이 주재하는 바가 엉터리라고 의심하게 된다면 어떻게 그리스에서 권력이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 인들이 논리를 사랑하고 이성적인 사유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하다기 보다는 그리스 사회가 성립/보존하는 순간에 발생했던 사회자본이 '산파술'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더불어 산파술이 제외하고자 했으나 엄존했던 것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 무두질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태에서 독배를 마셨습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은 정치 판단이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생각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지러운 정치에 관여하면 몸을 망치게 된다, 부정과 불법적인 일을 막으려는 사람은 누구건 그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정치와 경제가 뗄 수 없이 연결되었던 그리스 사회 속에서 비정치적이거나 반정치적인 행동이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신탁이라는 사회자본을 생산하는 과정에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회자본과 분리된 삶이 가능하지 않으니까요. 현실을 회피하는 현실주의자가 성립할 수 있었던 시대입니다.


잠시 주제에서 빗겨났습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자면, 소크라테스는 왜 법정에서 형벌이 결정되는 소송 당사자 임에도 간절한 변론이 아니라 선언을 했던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의 신탁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것이죠. 신탁을 확인하며 아테네의 모든 명망있는 자들과 토론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이몬의 신탁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신탁은 늘 수수께끼로 주어집니다. 대개의 사람들이라면 신탁의 소리를 '가로막는 소리'로 듣지 않겠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소크라테스는 최후의 변론에서 말하듯이 늘 다이몬이 자신을 제어했다고 말합니다. 욕망을 제어하고 도덕을 완성했다고 말하지만, 실로 벌어진 일들을 보자면 이렇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가로막는 소리'가 내면에서 들릴 때, 뭔가 주저되거나 회의되거나 의심될 때 그 소리를 따랐고, 그 결과를 도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로막는 소리'가 사라진 상태는 다이몬의 신령이 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이성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흔히 상대방을 공격하며 이성을 언급할 때, 감정에 휘둘려서 무식하게 행동하고 편가르기를 한다고 말합니다. 이성이 작동하면 억제되는 것이 감정이라도 된 듯 말하지요.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이성은 '가로막는 소리' 였을까요. 아니면 마지막 다이몬의 소리 '묵음' '침묵'이었을까요. 소크라테스의 계시된 이성을 돌아보는 일은 그렇게 수 천 년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성은 총체화되지 못한 잔여에 대한 차단과 수용의 갈등에서 현상합니다. 만약 당신이 사는 사회가 '인간의 권리와 자율성'을 보장하는 곳이라면 어떻게 그런 상태가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인간의 이성, 보편 진리를 인식한 불굴의 자유인들이 선창하고, 대중들이 이를 본받아 자유 의지를 복구해내면서 일까요. 아닙니다. 아니예요. 만약 그런 사회가 존재한다면 필시 '미신' '주술' '신탁'에 의해서 가능했을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성이란 '계시된' 것입니다.


2020년에도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누가 읽을까요. 지성인의 기본 자세를 역설하며 지식인의 자리를 확보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좋아할 겁니다. 두려움 속에서 긁어모아야 할 용기가 필요한 사람도 관심을 가지겠지요. 국가폭력 앞에서 시름하는 사람에게도 어떤 영감을 줄 것입니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시위'를 진압하려는 공권력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여러 상황에서 사용가능하다는 점이 고전이 '오래된'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고전은 혁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자본의 생산양식에 깊게 관여하고 있어서 혁명의 재료가 될 수는 있겠지요.


* 문득 멜로토스의 아들이 아니라 다른 고발자의 아들이었던 것 같아요. 도서관에 가게 되면 찾아보고 수정해야죠. 조금 덜 추해지려고, 급하게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보니 오류가 있습니다. 멜로토스, 이름도 정확한가요. 이런, 이런, 제가 머저리라는 것은 알겠는데요, (9월 11일 덧붙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영화《빌리 엘리어트》에는 뻔히 들여다보이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공권력, 계급, 공동체, 상징자본, 메리토크라시, 자유 등의 굵직한 주제들이 주렁주렁하다. 부르디외의 사회학 이론을 덧대어 읽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읽어보려 한다. 1980년대 영국노동자 가족이 겪었던 사회적 고통이 빌리 엘리어트의 성공으로 치장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 다른 방법으로 이 영화를 읽고 비교해 본다. 《빌리 엘리어트》의 두드러진 중심 공간을 문제삼아 유토피아와 헤테로피아의 관계를 생각한다. 먼저 재키 엘리어트를 중심으로 줄거리를 풀어보고 난 후 특이성을 갖는 공간, 이질적인 공간,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생각을 덧붙인다.


2. 광부와 댄서

저 유명한 대처리즘의 중심부에 있던 광산촌 더럼에서 힘겹게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 재키는 평생 광부로서 자신과 가족을 지켜온 심지있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동료와 마을 공동체에서도 신임이 깊은 위치였으나, 파업의 장기화로 심각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데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방황하게 되면서 노쇠한 가부장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던 중 재키는 빌리의 꿈을 보았고 혼란에 빠진다. 윌킨슨 선생은 빌리에게 발레를 가르쳤는데, 능력이 남다르다며, 왕립학교에 오디션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이 제안에 당황한 재키는 격하게 거부하고 빌리를 설득하려 했으나, 기어코 윌킨슨 선생으로부터 따끔한 충고를 듣고 얼굴을 붉히고야 만다. 이 구렁텅이에서 빌리만은 탈출할 수 있다고 윌킨슨 선생은 확신한다. 잿빛 광산촌에서, 서로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는 갱도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화려한 미래가 빌리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들 빌리를 위해 노조를 배신할 결심을 한 후, 광산노조의 주축으로 활동하던 큰 아들 토니와 격렬하게 대립하기도 하면서, 재키는 새로운 인물이 된다. 즉 가족 내에서 무력했던 모습을 벗고 생기를 찾는다. 아내의 유품을 전당포에 맡기고 마련한 돈으로 빌리에게 오디션 기회를 선물한다. 그리고 큰 아들 토니를 앞세워 갱도로 복귀하면서, 빌리의 신세계를 완성할 학자금을 준비한다. 희생하는 아버지,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고, 군림하지 않으며, 배경으로 물러서는 아버지가 된다. 그 결과는 십 년 정도 흐른 후, 런던의 웅장한 오페라 공연홀에서 보상받는듯 보인다. 재키 엘리어트는 당당하게 빌리의 가족이 도착했다고 알린다. 공연의 주인공이 된 빌리의 가족이 여기 왔다고 전한다. 힘을 잃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던 가부장 재키는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난다. 가족의 가치를 새로운 형식으로 지켜낸다.  Be yourself!



2.

공간은 모든 공동체적 삶에 근본적인 것이며, 모든 권력 행사에도 근본적인 것이다.”

『헤테로토피아』는 푸코가 유토피아에 대비시켜 사용하는 용어인데, 아마 이런 구절에서 매혹적인 유인가를 갖게 된다.


"스쳐 지나가는 통로가 있고 거리가 있고 기차가 있고 지하철이 있다카페 영화관 해변 호텔과 같이 잠시 멈춰 쉬는 열린 구역이 있고휴식을 위한 닫힌 구역자기 집이라는 닫힌 구역도 있다그런데 서로 구별되는 이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그것은 일종의 반反공간 contre-espaces이다이 반공간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 어른의 사회는 아이들보다 훨씬 먼저 자기만의 반공간자리매겨진 유토피아모든 장소 바깥의 실제 장소들을 스스로 조직했다예를 들면정원이 있고 묘지가 있고 감호소가 있고 사창가가 있고 감옥이 있고 클럽 메드의 휴양촌이 있고 그 밖에도 많다." (『헤테로토피아』)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는 실재하는 유토피아이며,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이라고 주장했을 때, 저항감이 있었는데, 마치 공간을 텍스트로 옮겨 버린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알려진 대로 푸코 자신도 더 전개시키지 못하고 유야무야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헤테로토피아가 가정하는 어떤 특정 요소가 사람들을 유혹한다. 영원성의 양식인 박물관에서 한시적인 시장, 변두리, 마을 공터, 가건물, 좌판을 헤테로토피아로 등판시킬 때,마음 한쪽 비어 있는 구멍이 그 자리이기라도 하는 냥 끌린다. 아니, 뭔가 그럴 것이라는 가능성에 믿음을 실어버린다.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로 지목하는 장소들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는데 그 원리가 있다 “. 유토피아와 대립관계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어제의 헤테로토피아가 오늘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움직이고 생활하고 거주하는 현실 공간은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와 어떻게 다른가. 푸코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 규칙 안에서 작동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유토피아는 상상력으로만 작동하는 현실에 없는 장소를 뜻하는데, 이때 가상과 허구는 당연하게도 정상적 규칙 밖에 있게 된다. 헤테로토피아의 경우에도 정상성을 벗어나 질적 차이를 갖는 공간을 말한다. 푸코는 현실세계의 바깥 공간, 빈 공간을 사유하며 반反-공간을 설명하며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사유하라고 말한다.


" 그것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의제기를 수행할 수 있다아라공이 말햇던 매음굴처럼 나머지 현실이 환상이라고 고발하는 환상을 만들어냄으로써아니면 그 반대로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고 정리되어 있지 않고 뒤죽박죽이라고 보일 만큼 완벽하고 주도면밀하고 정돈된 또 다른 현실 공간을 실제로 만들어냄으로써한동안-특히 18세기에-식민지는 적어도 사람들의 계획 속에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작동했다물론 이 식민지들이 커다란 경제적 유용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거기에는 상상적 가치들이 결부되어 있었으며이 가치들은 확실히 헤테로토피아의 고유한 위광에 빚지고 있었다그리하여 17세기와 18세기 영국의 청교도 사회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완벽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시도했다."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들이 다른 모든 공간에 대한 이의제기라고 한다면, 그 이의제기를 하는 것이 무엇인가, 공간 자체가 되어야 할텐데, 위 문단 같은 설명을 보자면, 그 당사자는 마치 현실의 착취관계를 허물어버리는, 오히려 착취자의 이의제기의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는 특정 주체, 계급들처럼 보인다. 헤테로토피아는 정상성 바깥에서 정상성의 수호천사라도 된 듯하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헤테로토피아로 분류될 수 있는 장소는 50센트 권투 연습 클럽 활동의 장소요, 노조 회합의 장이며, 빌리를 돕기 위한 모금 행사장이 되기도 하는 마을공동체 센터다. 이 센터에서 빌리는 발레 수업을 구경할 수 있었고, 운명적 일탈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너무나 이상적이다. 그리고 실재한다. 지배자도 없고 탄광회사의 규칙도 자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마을 센터를 헤테로토피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센터는 대처리즘으로 상징되는 영국 사회의 규칙의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유토피아도 헤테로토피아도 아니지 않는가. 마치 광부 재키의 집에 석탄이 떨어졌고, 피아노를 부숴 만든 장작이 그 난로를 가동시킨 것처럼, 마을 센터는 장작이 된 피아노이기라도 한 것일까.


재키와 토니 엘리어트 부자는 발레 관람을 위해 코벤트가든에 있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를 찾는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허겁지겁 들어선 그 공간은 2300여 개의 좌석이 있는 웅장한 극장이다. 과거에는 국왕의 지원을 받고 왕과 귀족을 위해 공연한 곳이었으나, 현재는 입장료를 낸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공연장이 되었다. 빌리에게 꿈의 공간이었다. 이제 빌리의 유토피아는 현실 공간이 되었다. 아니다, 빌리는 사실 성공한 발레리노로 로얄 발레하우스에서의 공연을 꿈꿨을텐데, 이를 두고 유토피아라고 할 수는 없다. 푸코의 지적대로 “사각형의 무대 위에 온갖 낯선 장소들이 연이어지게 만들어지는” 극장이기 때문에 헤테로토피아라고 해보자. 개인적 의식의 차원을 벗어나 사회적 회로를 돌려보면 이해할 수 있을까. 로얄발레하우스가 헤테로토피아로서 드러내는 정상성 바깥의 존재-사유는 어떻게 정상성들을 타격할 수 있을까.


재키와 토니에게 이 로열 발레 하우스는 어떤가. 관람자로 하나의 좌석을 배정받았고, 공연을 향유할 수 있으나 그들에게 그 곳은 어떤 공간이라고 하겠는가. 유토피아인가, 헤테로토피아인가, 현실공간도 아니라면, 도대체 코벤트가든 로얄발레하우스는 무엇일까. 노동자 아들 빌리가 수석무용수가 되었다, 로얄발레하우스에서.


누가 헤테로토피아를 만드는가. 일종의 제도적 공간들이다.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로 제시하는 공간들은 자본주의가 거대한 세계체제로 나아갈 동안 심한 부침을 겪었던 곳들이다. 푸코의 온갖 헤테로토피아들은 그 공간의 질적 경험들을 아예 지워버리거나, 정상성의 꼭대기를 향하고 있는 주체들을 환영한다.


"만일 자급자족적이고 자기폐쇄적이며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롭지만 바다의 무한성에 숙명적으로 내맡겨져 있는장소 없는 장소이자 떠다니는 공간의 조각인 배, 19세기의 거대한 배가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이 홍등가에서 저 홍등가로 이 항로에서 저 항로로 전전하면서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동방의 정원 안에 아주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는 것을 찾으러 식민지까지 갔다는 점을 고려하면우리는 배가 왜 우리 운명에서-적어도 16세기 이래로는-가장 거대한 경제적 수단인 동시에 가장 거대한 상상력의 보고였는지를 이해하게 된다그것은 특출한 헤테로토피아이다배 없는 문명이란 자녀들이 뛰놀 만한 커다란 침대를 갖고 있지 않은 부모를 둔 아이들과도 같다그리하여 그들의 꿈은 고갈되고정탐질이 모험을 대신하며경찰의 추악함이 해적의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대체하고 마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


만약 빨간나라가 유토피아라면, 그 안에 헤테로토피아는 어떤 모습일까.


규정된 사회관계로 보자면 엘리어트 가족은 임금노동자 계급이며빌리를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하는 로얄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키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경제력을 갖고 있다그런데 이 영화는 아버지 재키 엘리어트의 결단 아래 빌리는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신분상승이 문제에는 두 가지 딜레마가 있고각각 다른 존재론적 함의를 갖는다그리고 이런 질문들이 연이어 나올 것이다성공한 빌리가점점 더 퇴락해져가는 광산촌 더램에서 여전히 분투하고 있을 형 토니와 나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빌리가 살던 골목길에 홀로 서 있곤 하던어린 소녀는 무얼 하고 있을까.


1대항공간이라는 대안도 가능할 것이다. 한데 우리말에서 '대항'은 맞선다 거스른다는 反의 정적인 의미에 더해, 덤빈다는 좀더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어감까지 담고 있다. 헤테로피아는 사회에 의해 고안되고 그 안에 제도화되어 있는 공간이며, 다만 그 존재 자체로써 나머지 정상 공간들을 반박하고 이의제기하는 공간이기에, '대항공간'보다는 '반공간'이 좀더 적절한 번역어로 여겨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신봉건주의'를 주장하면서 '봉합경제' 체제를 설명하느라 헐리웃 영화 《귀여운 여인》을 예로 들었던 점이 실수였을지 모른다. 줄리아 로버츠가 고급 의상실에서 옷을 사려다가 점원으로부터 제지 받는 장면을 이용해서 자본주의의 지속불가능성을 말하려고 했었다. 《귀여운 여인》은 성매매로 생계를 이어가던 줄리아가 M&A 사업가 리처드 기어를 만나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게 되는 과정을 경쾌하게 풀어낸다. 기적적인 사랑이라는 마법, 장미를 들고 나타나는 기사 로맨스로 보여지는 이 영화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은 앞서 말한 부분이었다.



리처드의 비지니스 회합에 입고 갈 의상을 고르려고 줄리아가 부띠끄로 들어간다. 점원은 줄리아를 탐색하고나서 이 옷들은 비싸다고 말한다. 곧바로 나가 줄 것을 종용한다. 줄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한 웅큼의 구겨진 돈을 꺼내보이며 자신에게도 이 옷들을 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점원은 냉정하게 줄리아와 같은 고객과 거래할 수 없음을 고지한다.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모순이 드러난다. 화폐는 얼굴을 갖지 않으며 대지 위를 순환해야 했다. 정량적으로 작동하며, 공정에 기여해야 할 화폐의 위상은 현실화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밤낮으로 떠들어 대던 휘황찬란한 불빛은 이 환상 위에 서 있었다. 물론 그 돈은 리처드가 줄리아의 서비스에 필요한 비용으로 주었던 겄이었으나, 점원에게는 더러운 돈이었다.



돈은 돌고 돈다고 모두들 믿었다. 그렇지만 이미 봉합경제에 들어선 자본주의에서 줄리아의 돈은 결코 상류층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저소득층이 벌어들인 돈이 상류층으로 집결하는 것이 아니다. 저소득층의 돈은 소비하는 순간 사라진다. 상류층을 향해 그 돈은 우리의 피땀이 축적된 거란 말이야 하고 외쳐봐야 별무소용이다. 줄리아와 저소득층의 돈이 파생시장에 접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동산 시장이나 금융경제에 참여할 수 없는 돈이 있다. 돈의 순환은 신용이나 신탁을 근거로 각자의 봉합경제 장원으로 묶여진다. 그러므로 어떤 돈은 그 장원에 합류할 수 없고 거부당한다. 봉합경제를 추동했던 관료제는 다시 봉합경제 내부로 침투하기 어렵다. 이미 형성된 분권적인 봉합경제는 생산과 소비 체계가 마치 토지를 영유하며 질서를 유지했던 봉건 상황처럼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의상실 장면 하나만으로는 봉합경제를 설명하기 어렵다. 다음 장면이 결합해야 한다. 리처드가 부를 이룩할 수 있었던 회사 운영방식은 경영이 어려운 회사를 인수한 후 다시 조각내서 부분으로 팔 때 발생하는 이익이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가족이 3대에 걸쳐 운영하던 회사를 인수한 후 분해하려고 했으나, 줄리아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킨다. 가족 경영 회사에 투자를 하고 공동 소유주가 된다. '합류'의 의미는 도덕이나 규범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은, 마치 사랑의 힘으로 뛰어넘은 계급질서처럼, 건전한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기업은 사회적 기여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단골 고객을 확보한다. 단골 고객들의 소비가 그 기업의 주요 동력이 아니지만, 봉합경제 상황에서는 마치 중요한 구성 주체가 된 듯한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봉합경제에서 영유할 영토를 확보하지 못한 여느 줄리아들은 하나의 봉합경제에 합류하길 열망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리처드의 출현같은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는 아니다. 리처드의 삶의 궤도에 줄리아는 거의 노출될 수 없는 봉합경제 상황에 살고 있다. 아니 밀봉경제로 나가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그 밀봉경제에서 리처드와 줄리아는 서로를 영영 상상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2.

작년 초여름부터 내 공황이 다시 꿈틀대다 잠잠하다를 반복한다. 길을 걷다가도 무서워져서 꼼짝없이 서 있거나, TV를 보다가도 온 몸이 경직되곤 한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섭다. 이전에는 '나만 아는' 글을 썼다면, 병이 난 이후에는 '나조차도 알 수 없는' 글을 쓴다. 글쓰기도 무서워졌다. 글이 누군가를 향한 무기일 수 있을까.



3.

공포와 경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무작정 홉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어제 다시 읽으려고 했더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홉스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이랬다. 국가가 (시민)사회를 포괄하며 시작하는 근대사회에서의 자유는 이미 비극의 장을 발생시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왜 사회가 포괄하는 국가가 아니라 그 반대여야 했는가. 인간이 태어나면서 둘러싸인 장소는 국가가 아니라 사회다. 언제나 국가보다 사회가 더 크고 넓었으며, 포괄될 수 없는 잉여가 있었기에 인간의 역사가 가능했다. 이런 과정을 변동, 변화, 혁명 등의 이름으로 말할 수도 있다. 홉스가 정치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홉스는 권력층의 자제가 아니었으나, 사회적 이득으로 축적한 자본이 풍부했고, 그 사회자본을 활용할 기회/운에 닿아 있었다. 홉스의 자장 안에 있던 18~19세기의 국가는 지금의 국가 개념과 다르지만, 여기에서 편의상 국가라고 말할 때는 홉스에게 말할 권리를 주는 권력 말이다. 홉스는 종교와 국가 권력을 주어진 대로 해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홉스가 풀어놓은 상상 속에서의 자유란 정치권력를 단일한 신체로 만들면서 발생한다. 그러니까 홉스의 자유가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절대 권력을 말하고 있으면서, 생명과 노동의 얼굴을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권력은 국가에 있지 않고 사회에 있다. 홉스가 비기득권층임에도 강력한 논쟁을 유발하는 정치문제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도 권력이 사회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위치에 있던 홉스가 사회에서 권력을 파악하지 않고 절대군주, 리바이어던에게서 발견하려 했다는 점은 다음의 사실을 말해준다. 새로운 계급을 형성할 사회자본이 축적되고 있었다.



4.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나는 병들고 무용한데 여전히 사회에 해를 끼치고 있을까를 염려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