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많은 이분법적 설정이 괴로운 이유는 자기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며 상대의 위치를 지정해 버린다는 점에 있다. 어떤 이분법적 구도는 타자를 제거하려고도 한다. 굳이 나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까지 그런 대립 구도를 익숙하게 쓰다보면 세상이 더 괴로워진다. 현실에서 그렇게 정형적 구도가 출현할까? 


2.

고전의 쓸모는 그것이 만들어질 때의 현실을 이리저리 뒤집어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고전을 원본 그대로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고전은 이미 거기 있으니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까 너무 아둥바둥 말아도 된다. 

과거는 거기 그대로 있으니까 변할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3.

이불개기는 재미 없어, 네가 해!

- 그래.

이불개면서 왜 웃어?

- 즐거우니까.

매일 하는 일이 왜 즐거워?

- 해가 매일 뜨니까 이불도 매일 개야지.

어제 해가 오늘 해와 달라?

- 어제 해는 기억나지 않아서 몰라. 그냥 푸른 하늘은 해와 같이 나오니까 즐거워.

즐거운 건 뭐야?

- 아이스크림 먹을 때 맛 같은 거야.

넌 아이스크림 다 못 먹고 빼앗기잖아.

- 빼앗기는 게 아니라 나중에 돌려받는거지.

왜 넌 뭐든지 재밌고 즐거워?

- 물어보지 않아서 몰라.

모르면서 뭐가 좋다고 하냐?

- 해 뜨고, 이불 개고, 아이스크림 맛이 좋다는 건 알지, 

엥?

- 난 물을 필요도 없어. 네가 다 해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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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의 저 유명한 말은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힘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여자가 된다." 보부아르가 내재성에 연결된 육체에 해석적 시선을 내놓고 난 후에 세상은 '여성'을 (두드러진 무대 위로 올리고) 문제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의 젠더- 페미니즘 사상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버틀러도 『제 2의 성』과 함께 시작했다고 하지 않는가.  보부아르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 묶여 버린 '여자'의 숙명을 사회적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보부아르와 상관없이 언제나 여자의 일생은 늘 문젯거리였다. 가부장제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허난설헌도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음을 탄식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보부아르가 말을 뱉어내자마자 여성들이 너나없이 요동쳤다고 한다면, 이미 반응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황이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또 그만큼 (보부아르의 발화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힘도 갖고 있었다고 봐야한다.



보부아르는 계획에 없던 글쓰기 목록이었지만, 최근 여러 곳에서 보부아르를 둘러싼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마농 그라시아가 쓴 『We Are Not Born Submissive : How Patriarchy Shapes Women;s Lives』에 대한 서평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여성의 'submission(순종, 굴복)'에 대해 '보부아르 방식(방법론)'의 분석을 시도한다.


보부아르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여성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보부아르는 당연하게도 사르트르를 복사하는 후학이 아니다. 여성주의가 만들고 있는 불편함에 대해 거리낌 없이 분석하면서, 지금 우리가 왜 다시 보부아르를 읽어야 하는지 제시한다. 여성에게 닥친 상황에 주목하려면, 여성의 "순종을 여성을 탓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순종이 무엇인지 제대로 풀어 이해하는 비신비화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의 문제를 드러낸다.


"가장 독립적인 페미니스트 여성도 남자들이 자신에게 던지는 정복의 시선을 즐기는 순간을 발견할 수 있고, 자기 파트너의 팔에 유순하게 안기고 싶은 순간, 혹은 더 큰 만족을 준다고 여겨지는 활동들 대신 가사 노동-잘 개켜진 빨래나 예쁘게 차려진 아침 식탁의 작은 기쁨들-을 더 좋아하는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욕망과 즐거움은 그들의 독립성과 양립 불가능한 것인가? 지금까지 이어진 수 세기 동안의 페미니즘을 배신하는 것인가? 남자들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대하면서도 성평등을 요구할 수 있는가? " (「다시 보부아르와 여성의 순종을 말하는 이유」중에서)


가르시아는 여성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표면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거역할 수 없는 '여자의 일생'이 있는 게 아니라고, '여성의 관점에서 순종을 설명하는 최초의 현상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나는 자유의 문제, 특히 여성의 자유를 논하는 부분에서 튀어오르는 말을 애써 뒤로 해야했다. 우선 이 서평과 가르시아가 말하는 바를 따라 읽으려고 노력한다. 조금 더 묵혀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다. 


하지만 보부아르의 저 유명한 말에 대해서는 한 마디 거들 수 있겠다. 보부아르의 저 선언은 '여자들'을 절대적 타자로 만들 수 있는 힘 또한 가졌다고 말이다. 보부아르가 만들었던 여자로서의 경험 전반에 대한 현상학적 참여로, 전형들이 쏟아져 나올수록, 전형적 인물들이 드러날수록, 그 반대의 인물들도 만들어졌다고 말이다. 우리는 한 겹의 질곡을 더 얻은 셈이라고 말이다.


 사르트르는 타인이라는 지옥을 설명할 때, 나를 바라보는 자를 매개자로 불러세웠다(『사르트와 폭력』). 그 바라보는 자들의 시선은 나를 객체화, 대상화시킨다. 그러면서도 주체는  때로 그 '시선'들을 필요로 한다. '나'는 시선을 내게 두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기 바란다. '나'는 바라보는 자가 없이 홀로 고독할 때 삶의 의미를 함께 잃는다. 


사르트르의 대항폭력은 지배폭력과는 다르다. 또 말에 호소하는 방식의 폭력과도 다르다. 그렇다면 지배의 언어(폭력)도 아니고, 대항의 언어(폭력)도 아닌, 제3의 언어(폭력)는 가능할까. 그리고 그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상호주체적 관계를 창조할 수 있을까. 보부아르의 선언이 아직까지 혼란의 중심에 있는 이유다.



보부아르를 다시 읽기 시작한다. 보부아르의 발화는 '여성적'인가. 여성이 여성동지를 가질 수 있을까.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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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바람이 분다. 요란스레 내리치던 천둥에 이어 감질나던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에 바람이 들어섰다. 그리고 여즉 불어대며 괜찮다 한다. 모든 게 그대로라고 한다. 하늘을 때리던 소리도 순간이고 지금 부는 바람도 순간이라 한다. 네 삶도 순간이다 한다. 두려움도 그럴테니 잠깐만 숨을 참아보라 한다. 지나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게 자연이라 한다. 마비된 등짝도 쭈글해진 손이나마 문지르고 바람을 일으키고 숨을 불어넣으면 다시 녹는다고 한다. 그런게 휘파람이라 한다. 순간에 웃고 순간에 울고 순간에 멈추고 순간에 달린단다. 휘파람은 재빨리 사라져야 한단다. 


*이 그림은 <제목 없음 89>입니다. 아무쪼록 당신의 아픔이 순간이길, 그리고 당신의 기쁨도 그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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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8-20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접 그리셨나봐요.^^
와! 전 그림은 모르지만 느낌 확 옵니다! ^^

초원 2021-08-20 09:45   좋아요 1 | URL
얄라 님, 반갑습니다.

느낌이 온다고, 그것도 확~온다고 하니 신나네요.
사람이 기분이 붕 뜨면 그만 자기 주제를 잊고 마는데,
저도 잠깐 그랬네요.

얄라 님이 예전에 표현하신 ˝보이지 않는 심장˝과 비슷한
마음으로 그림판을 이용해서 그렸어요.

감사해요. 이렇게 적막한 곳에 생기를 주시네요.
 

 "참을성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신뢰는 다리를 놓지요."

새로 나온 책들을 보다가, 한 문장에서 시선이 멈춘다. 푸른 꽃이 일렁이고 다리 위로 미풍이 날아오르는 봄날, 그 봄날의 가시를 본다.

  

소개글에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해 보도록 하면서, 차분하게 다독여 주는 책이라고 써 있다. 31가지 감정이 하는 일을 의인화해서 재치 있게 표현했다고 한다. 

기쁨이 책을 읽으면서 친구에게 달려간다. 미움이 연결선을 물어 끊어버리고 통화가 끊겨버리는 장면도 보인다. 열등감은 철창을 만든다.

감정은 주관적이므로 아이들마다 다르게 표현될 수 있으므로, 꼭 이 장면들을 고집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을 계기로 아이들이 각자의 감정을 돌아볼 기회를 갖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장면들은 뭔가 마음에 꺼스러기를 만든다. 예를 들자면 거대한 신뢰가 흐뭇한 표정으로 두 팔을 들어 다리를 받치고 있다. 신뢰가 하나의 도구를 이용한다. 신뢰가 미소를 짓는다. 신뢰는 왼팔과 오른팔을 평평하게 유지해야 한다. 한쪽이 조금이라도 기울어진다면 곤란하다.   


나는 가끔 세상 쉬운 일을 어려워 쩔쩔매는 상황에 빠진다. 이 그림을 봤을 때도 그랬다. '쉽고 간단명료하게 알려 주는 그림책'을 보고서 마음이 뒤죽박죽이 된다. 감정들을 차분해도, 너무 차분한 색감으로 표현해서 그런가. 다행히 이런 생각을 자주 입 밖으로 내지 않아서 창피를 면한다. 


아무튼 동물들이 튀어 나와 감정을 설명하는 그림들을 보자니, 동물에게도, 야만인에게도 상호부조가 기본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 『만물은 서로 돕는다』가 생각난다. 이익을 위해 진력하고, 경쟁하며 물어뜯는 과정에서 인간 역사가 발전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요약하면 크로포트킨은 황당할 수도 있다. 아니키즘의 맏형인데.) 


19세기는 다윈이 기독교 신앙에 충격을 안기면서 과학이 도덕의 토대가 되던 시절이었다. 진화론은 자본가들의 경쟁으로 풍파를 겪는 사회에 훌륭한 해설서 노릇을 했다. 과학지식은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감정을 다스릴 훈련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과학지식이 더 넓게 퍼져갈수록 공업의 시대는 당연한 현상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크로포트킨은 어떻게 과학을 신뢰하면서, 공업국가를 낙관하면서, 상호부조론을 들어 아니키즘을 제안했을까.



크로토프킨은 세기 말의 혼란 속에서 무정부주의자로 이름을 알렸다. 아니키즘 운동은 "조직적 범죄"라고 비난받았고, 운동가들에게도 따가운 시선이 보내졌었는데, 크로포트킨에게는 달랐다.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귀족으로, 지리학자로, 반체제 운동가로  "가장 위대한 망명가"로 환대받았다. 


상호부조론 속 동물 세계는 공존한다. 피에 굶주린 개체들이 전투를 통해 살아남아 진화하는 세계가 아니다. 시베리아의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종의 경계를 넘어 서로 의존하는 조류와 포유류를 관찰할 수 있다. 만물은 서로 깊은 관련 속에 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인류도 초기 단계에서부터 상호부조가 디폴트로 작동하고 있었고, 문명화된 이 시대에도 가장 진보적인 제도를 통해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은 지리학, 물리학, 생물학, 전자기학, 천문학을 중심으로 사회이론을 전개한다. 물질도 에너지도 동물도 인간도 모든 만물은 진화하며 상호의존한다. 인류도 수평적으로 상호 협동하는 코뮌 공동체 위에 거주할 수 있다. 신비롭다.


"오스트리아 전쟁포로들이 키에프의 거리를 지친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이를 본 러시아 농촌 여인들은 그들의 손에 빵이나 사과 때로는 동전 따위를 건네준 바 있다. 수많은 러시아 남자와 여자들은 적과 동지, 장교와 사병 등을 가리지 않고 다친 자들을 돌보아주었다.


전쟁이 벌어진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마을을 떠나지 못한 늙은 농민들은 민회를 열어 '그곳(전쟁터)'에 나간 사람들의 논밭도 경작해주기로 결정하고 적의 포화를 무릅쓰며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렸다. 프랑스에서는 전국에 걸쳐 협동 취사장과 공산당원 식당이 생겨났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벨기에를 위해 자발적인 원조를 보냈고, 러시아 인민들은 국토를 유린당한 폴란드인에게 원조를 보냈다. 벨기에와 폴란드를 돕기 위해 벌어진 운동에는 무보수로 참여하는 자발적 행동과 에너지가 엄청나게 발휘되고 있다. 여기서는 '자선 행위'의 속성이 사라진 대신 순수한 이웃돕기가 이뤄진 것이다."


가만히 크로포트킨의 말들을 듣는다. 러시아 농촌 여인들이 건넨 빵과 사과, 동전에 깃든 마음은 무엇일까. 다친 자들을 돕는 마음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늙은 농민들이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 상황에서 쟁기질을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영국과 미국이 국가적 원조를 보내는 마음은 무엇일까. 그 마음들을 전부 다 동일한 상호부조와 연동할 수 있을까.


'순수한 이웃돕기'가 지배동력이 되는 아나키즘의 사회를 위해서는 또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 크로포트킨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통해 정치적으로, 더불어 경제적으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가진 자 편에" 서 있는 탓에 불의와 억압, 독점의 체제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과학을 업은 자본주의의 전개 경로에 국가독점 자본 체제가 세워질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빵의 쟁취』는 소수 권력자에게 집중된 세계를 비판한다. 단순한 공정함보다 상호부조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수단 사유화의 늪에서 꺼낼 힘, 국가를 폐지할 힘은 개인이 자율성을 회복하는 결단에서 나올 수 있을까. 국가로 자본으로 축적된 생존경쟁의 결과를 뒤엎을 힘이 이웃과의 연합으로 가능할까. 의지로 혁명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오늘 카불에서 일어난 일들을 듣고 있다보면 우리는 아득한 세계의 비참을 마주하게 된다. '국적'으로 보호되는 권력의 실상은 어떤가. 그들의 고난이 국가로부터 국가에 의해 국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 누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을까. 국가가 있어 고난에 처하고 국가가 없어 보호막이 사라지는 세계에서 빵은 어떻게 쟁취할 수 있을까.


또한 생산수단이 인류의 공동재라는 크로포트킨의 주장은 어떤 '러시아 여인과 늙은 농부가 만들어낸 연합'에 얼마나 닿아 있을까. 생산수단은 이미 권력자의 재산권으로 보호되고 있는데, 어떻게 그 권한을 폐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 혁명이 가능하더라도 그 혁명이 상호부조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믿어질 수 있을까. 


가끔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써내려간 문서들을 보다보면 이상하게도 봄날의 가시를 떠올린다. 그토록 악한 감정들이 생산되던 시대에 어떻게 레지스탕스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유대인을 다락방에 숨겨주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살아남기 위해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 뭔가를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감정을 알아야 한다. 주관적인 상태로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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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돼지들은 모두 엄마돼지 집 앞에 모여서 돼지임금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개 위에 나타난 괴상한 그림자는 곰이 틀림없었는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돼지마을로 돌진해 오고 있었거든요. 돼지들은 큰 충격에 빠졌어요. 호랑이 군대가 곰을 발견하고 놀랐을 때와 똑같은 일이 돼지마을에서도 일어났어요.어찌할 바를 몰라 모두 꽥 소리를 내며 눈을 찔끈 감고 말았습니다. 엄마돼지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울부짖는 곰이 다가와 갑자기 엄마돼지를 부릅니다. 어이구, 이 일을 어쩌나. 도와주세요. 새 임금은 너무 무서워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간신히 물었어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곰 이빨을 장식한 곰탈 옷을 벗자 돼지임금이 나타났습니다. 모두들 엉? 하며 멍하게 쳐다보기만 합니다. 새 임금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말합니다. 아, 당신이군요. 우리 모두 놀랐습니다. 곰마을에서 귀한 보물을 얻어 왔군요. 호랑이 군대도 놀라 도망갔답니다. 마침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상황을 알아차린 돼지들은 너나 없이 하품을 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곰 소동이 있던 날, 엄마돼지는 놀라서 기절하고 넘어지며 다리에 큰상처를 입었습니다. 다친 다리 때문에 집 안에만 있게 되었습니다. 돼지임금은 열심히 간호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돼지들은 여러 약초를 두고 갑니다. 점점 쇠약해진 엄마돼지에게 한 가지 걱정이 생깁니다. 엄마돼지는 돼지임금을 불러 말합니다. 이제 마을에 가서 친구들과 지내렴. 파수꾼 일도 하고 토끼들도 안내해. 엄마돼지는 돼지임금을 떠나보내려 합니다. 돼지임금도 알고 있었어요. 모든 돼지들은 늙어 떠날 때가 되면 홀로 지내길 원한다고 했거든요. 돼지임금은 엄마돼지 곁을 떠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돼지임금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엄마돼지의 말을 어긴 적이 없었어요. 다른 돼지들의 말도, 새 임금의 말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돼지임금은 누군가의 말을 거부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돼지임금은 터덜터덜 마을을 향해 갑니다.


마을 놀이터는 재미난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돼지임금은 친구들 사이에서 달리고 떠듭니다. 곰 흉내를 내달라는 요청에 기꺼이 눈물을 날리며 뛰던 저 지난 밤을 흉내냅니다. 즐거워 박수를 치는 마을 돼지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껑충거립니다. 문득 엄마돼지가 걱정되기 시작하고,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둘러 집으로 달려갑니다. 엄마돼지는 꼭 건강해질거야, 엄마돼지는 꼭 건강해질거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며 쏜살같이 달립니다. 그러다 잠깐 사이에, 순식간에 왼쪽 발밑에 돌덩이가 쑥 밑으로 빠져 버립니다. 중심을 잃고 허우적대던 돼지임금은 그만 굴러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아이구, 아이구, 이게 무슨 일이야. 


한참을 구르던 돼지임금은 뭔가 축축한 구덩이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호랑이 군대가 머물던 곳입니다. 하필이면 호랑이 군대가 화장실로 사용하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어요. 어유 이 일을 어쩌나. 돼지임금은 서둘러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다리가 아파 꼼짝할 수 없습니다. 왼쪽 다리에 큰 상처가 보입니다. 어이구 어찌 이런일이, 어이구. 돼지임금은 어이없게도 그 상태로 몇 시간을 그대로 주저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밤이 되자 슬슬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 멀리서 횃대를 든 마을 돼지들의 소리가 들리자 돼지임금은 있는 힘껏 소리칩니다. 여기요, 여기요. 여기 있어요. 새 임금은 엄마돼지에게 선물할 약초를 들고 왔다가 돼지임금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찾아 나선 길이었습니다. 돼지임금은 벌떡 일어나 기쁜 마음으로 감사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쳤던 다리가 멀쩡한 겁니다. 아유, 어찌 이런일이. 아유. 


호랑이 군대가 남긴 똥 구덩이에 담궜던 다리가 낫게 되자, 돼지임금은 엄마돼지의 상처에도 바릅니다. 며칠 후 마을돼지들은 너도나도 호랑이 군대가 남긴 약을 보관했습니다. 이웃 마을에서도 이 약을 얻으려고 더 많은 동물들이 몰려옵니다. 호랑임금도 찾아옵니다. 지난 번에 도망가다 다친 상처 때문에 힘들어 했던 호랑임금이 늑대가 전해 준 약을 바르고 건강해졌답니다. 새 임금은 호랑임금에게 약이 부족하지 않게 더 많이 선물합니다. 호랑임금이 묻습니다. 이 귀한 약은 대체 어디서 온 건가요? 돼지임금은 즐겁게 대답합니다. 당신들의 똥이랍니다. 호랑이표 약이지요.


돼지마을은 이제 호랑이 군대를 겁내지 않습니다. 앞으로 싸울 일이 생기더라도 호랑이풀이 치료해 줄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안녕, 돼지임금.




*이 그림은 <제목 없음 76>입니다.


소소한 일은 소소할 때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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