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성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신뢰는 다리를 놓지요."
새로 나온 책들을 보다가, 한 문장에서 시선이 멈춘다. 푸른 꽃이 일렁이고 다리 위로 미풍이 날아오르는 봄날, 그 봄날의 가시를 본다.
소개글에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해 보도록 하면서, 차분하게 다독여 주는 책이라고 써 있다. 31가지 감정이 하는 일을 의인화해서 재치 있게 표현했다고 한다.
기쁨이 책을 읽으면서 친구에게 달려간다. 미움이 연결선을 물어 끊어버리고 통화가 끊겨버리는 장면도 보인다. 열등감은 철창을 만든다.
감정은 주관적이므로 아이들마다 다르게 표현될 수 있으므로, 꼭 이 장면들을 고집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을 계기로 아이들이 각자의 감정을 돌아볼 기회를 갖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장면들은 뭔가 마음에 꺼스러기를 만든다. 예를 들자면 거대한 신뢰가 흐뭇한 표정으로 두 팔을 들어 다리를 받치고 있다. 신뢰가 하나의 도구를 이용한다. 신뢰가 미소를 짓는다. 신뢰는 왼팔과 오른팔을 평평하게 유지해야 한다. 한쪽이 조금이라도 기울어진다면 곤란하다.

나는 가끔 세상 쉬운 일을 어려워 쩔쩔매는 상황에 빠진다. 이 그림을 봤을 때도 그랬다. '쉽고 간단명료하게 알려 주는 그림책'을 보고서 마음이 뒤죽박죽이 된다. 감정들을 차분해도, 너무 차분한 색감으로 표현해서 그런가. 다행히 이런 생각을 자주 입 밖으로 내지 않아서 창피를 면한다.
아무튼 동물들이 튀어 나와 감정을 설명하는 그림들을 보자니, 동물에게도, 야만인에게도 상호부조가 기본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 『만물은 서로 돕는다』가 생각난다. 이익을 위해 진력하고, 경쟁하며 물어뜯는 과정에서 인간 역사가 발전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요약하면 크로포트킨은 황당할 수도 있다. 아니키즘의 맏형인데.)
19세기는 다윈이 기독교 신앙에 충격을 안기면서 과학이 도덕의 토대가 되던 시절이었다. 진화론은 자본가들의 경쟁으로 풍파를 겪는 사회에 훌륭한 해설서 노릇을 했다. 과학지식은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감정을 다스릴 훈련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과학지식이 더 넓게 퍼져갈수록 공업의 시대는 당연한 현상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크로포트킨은 어떻게 과학을 신뢰하면서, 공업국가를 낙관하면서, 상호부조론을 들어 아니키즘을 제안했을까.
크로토프킨은 세기 말의 혼란 속에서 무정부주의자로 이름을 알렸다. 아니키즘 운동은 "조직적 범죄"라고 비난받았고, 운동가들에게도 따가운 시선이 보내졌었는데, 크로포트킨에게는 달랐다.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귀족으로, 지리학자로, 반체제 운동가로 "가장 위대한 망명가"로 환대받았다.
상호부조론 속 동물 세계는 공존한다. 피에 굶주린 개체들이 전투를 통해 살아남아 진화하는 세계가 아니다. 시베리아의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종의 경계를 넘어 서로 의존하는 조류와 포유류를 관찰할 수 있다. 만물은 서로 깊은 관련 속에 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인류도 초기 단계에서부터 상호부조가 디폴트로 작동하고 있었고, 문명화된 이 시대에도 가장 진보적인 제도를 통해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은 지리학, 물리학, 생물학, 전자기학, 천문학을 중심으로 사회이론을 전개한다. 물질도 에너지도 동물도 인간도 모든 만물은 진화하며 상호의존한다. 인류도 수평적으로 상호 협동하는 코뮌 공동체 위에 거주할 수 있다. 신비롭다.
"오스트리아 전쟁포로들이 키에프의 거리를 지친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이를 본 러시아 농촌 여인들은 그들의 손에 빵이나 사과 때로는 동전 따위를 건네준 바 있다. 수많은 러시아 남자와 여자들은 적과 동지, 장교와 사병 등을 가리지 않고 다친 자들을 돌보아주었다.
전쟁이 벌어진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마을을 떠나지 못한 늙은 농민들은 민회를 열어 '그곳(전쟁터)'에 나간 사람들의 논밭도 경작해주기로 결정하고 적의 포화를 무릅쓰며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렸다. 프랑스에서는 전국에 걸쳐 협동 취사장과 공산당원 식당이 생겨났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벨기에를 위해 자발적인 원조를 보냈고, 러시아 인민들은 국토를 유린당한 폴란드인에게 원조를 보냈다. 벨기에와 폴란드를 돕기 위해 벌어진 운동에는 무보수로 참여하는 자발적 행동과 에너지가 엄청나게 발휘되고 있다. 여기서는 '자선 행위'의 속성이 사라진 대신 순수한 이웃돕기가 이뤄진 것이다."
가만히 크로포트킨의 말들을 듣는다. 러시아 농촌 여인들이 건넨 빵과 사과, 동전에 깃든 마음은 무엇일까. 다친 자들을 돕는 마음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늙은 농민들이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 상황에서 쟁기질을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영국과 미국이 국가적 원조를 보내는 마음은 무엇일까. 그 마음들을 전부 다 동일한 상호부조와 연동할 수 있을까.
'순수한 이웃돕기'가 지배동력이 되는 아나키즘의 사회를 위해서는 또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 크로포트킨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통해 정치적으로, 더불어 경제적으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가진 자 편에" 서 있는 탓에 불의와 억압, 독점의 체제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과학을 업은 자본주의의 전개 경로에 국가독점 자본 체제가 세워질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빵의 쟁취』는 소수 권력자에게 집중된 세계를 비판한다. 단순한 공정함보다 상호부조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수단 사유화의 늪에서 꺼낼 힘, 국가를 폐지할 힘은 개인이 자율성을 회복하는 결단에서 나올 수 있을까. 국가로 자본으로 축적된 생존경쟁의 결과를 뒤엎을 힘이 이웃과의 연합으로 가능할까. 의지로 혁명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오늘 카불에서 일어난 일들을 듣고 있다보면 우리는 아득한 세계의 비참을 마주하게 된다. '국적'으로 보호되는 권력의 실상은 어떤가. 그들의 고난이 국가로부터 국가에 의해 국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 누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을까. 국가가 있어 고난에 처하고 국가가 없어 보호막이 사라지는 세계에서 빵은 어떻게 쟁취할 수 있을까.
또한 생산수단이 인류의 공동재라는 크로포트킨의 주장은 어떤 '러시아 여인과 늙은 농부가 만들어낸 연합'에 얼마나 닿아 있을까. 생산수단은 이미 권력자의 재산권으로 보호되고 있는데, 어떻게 그 권한을 폐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 혁명이 가능하더라도 그 혁명이 상호부조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믿어질 수 있을까.
가끔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써내려간 문서들을 보다보면 이상하게도 봄날의 가시를 떠올린다. 그토록 악한 감정들이 생산되던 시대에 어떻게 레지스탕스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유대인을 다락방에 숨겨주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살아남기 위해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 뭔가를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감정을 알아야 한다. 주관적인 상태로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