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반듯한 길을 따라 연달아 비슷한 주택이 들어서 있어. 다른 집 마당에는 꽃과 나무가 웃고, 곱게 빗겨놓은 잔디도 있고, 돌도 모양을 뽐내듯 배치되어 있는거야. 그런데 이 아이가 사는 집은 황폐한 거지. 손질되지 않은 마당은 정원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상태야. 차라지 자연이었다면 다행이었겠지. 말하자면, 건반 하나가 고장나 연주를 할 수 없게 된 피아노처럼 예쁜 정원으로 이어진 길이 그 집 마당에서 끊기게 된거야. 


그런데 이 집은 뒷마당에서 닭을 길렀나봐. 아이는 달걀을 한 꾸러미 담아 건너 편에 사는 친구에게 가져가. 아마 그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이었겠지. 영화 내용을 추측하자면, 건너에 사는 그 친구는 줄곧 그 달걀들을 버린거야. 왜냐하면 더러운 집에서 보내온 달걀은 당연히 비위생적일 것이라 생각했겠지. 하여튼 아이는 상처를 받게 되고, 자신의 부모에게 따지게 되는데, 그때 들은 대답이 걸려. 잠깐 본 거라 내용도 잘 모르지만 이 장면이 기억에 남아. 아이의 부모는 자신들의 소유가 아닌, 빌린 집이었기에 마당을 가꿀 여력을 쉽게 낼 수 없었다고 했나봐. 부모는 장애가 있는 가족을 돌보느라 지쳐있기도 했고. 힘들게 일해야 간신히 가족들의 의식주만 챙길 수 있는 처지였거든. 그들이 게으른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어. 집을 가꾼다는 일과 생계를 유지한다는 일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보였지. 그런데 무려 12년이나 그 집에 살았다는거야.  그들은 무감각해져 가고 있었어. 내일 먹을 식량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어. 


하지만 나는 멍해졌지, 12년을 살면서 우리집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 게 뭘까하고. 월세를 산다고 하면 대개 몇 년이잖아. 12년이라면 이미 그들이 주인이 아닐까 싶어지는거야. 영화 속 그들은 백인 노동계급이니까 일의 세계, 노동의 세계에서 그렇게 취약한 위치에 있지는 않아. 그럼에도 그들은 주변인처럼 보였어. 평생을 일하는 시민노동자로 참여하고도 축적할 자산을 갖지 못하고 전전긍긍해야 해. 국가가 보장하는 '국민생활'의 현실이라 하겠지. 

대부분의 노동자가 자녀에게 자신의 삶을 물려주는 걸 꺼려하는 이유가 많겠지만, 생활공간과 일상의 물질적 조건들에서 오는 소외도 많이 작용할거야. TV가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는지 몰라도 한번 맘먹고 들여다 봐봐. 교양오락 프로그램에 나오는 가족들의 모습이 '정해진' 느낌이 들거야. 부모가 일군 작은 사업장을 자녀가 이어받곤 해. 공예품에서부터 농산물 가공 등 제조업도 있지만, 식당이나 서비스업도 많이들 그래. 성공한 부모의 삶이 당연히 자녀에게 이전되지. 더구나 재벌가가 아니라도 의사, 학자, 정치인 등 전문직인 경우에는 흉내내기 어려운 귀속적 배경과 힘들까지 증여돼. 다만 이 땅을 직접 일궈내는 노동자 가족만이 예외야.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말들이 많은데 어떤 면에서 가족권력의 생성 '가능과 불가능'으로 짙고 어두운 벽이 생기고 있다고 봐.   


다시 그 영화로 돌아가면 그 아이는 건너편 집 노인의 도움을 받아 마당가꾸기를 시작해. 쓰레기를 정리하고, 돌을 고르고, 꽃과 나무를 심고, 잔디를 관리해서 번듯한 정원을 만들었어. 그 다음 영화 내용은 모르겠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이와 노인이 가꾼 정원이 마치 신기루처럼 보였다는 거야. 부모의 피곤과 무력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아이가 알기는 어렵지. 아이가 부모의 노동현장을 개선하거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비판할 수도 없잖아. 다만 아이는 일상생활을 아름답게 가꾸는 힘을 통해 자신과 더불어 부모의 삶을 조금 더 윤택하게 하려는 중요한 기술을 사용하지. 확고하게 굳어져 버린, 깨지지 않는 짐 덩어리와 같은 하루하루를 마당을 쓸며 부드럽게 만들어. 줄기에 새순을 틔우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함께 기뻐하지. 변화하는 것들과 함께하게 되면 내면에 더 큰 힘이 길러져. 말하자면 그렇지. 말하자면.  


가끔 이론서를 읽다보면 이론은 정원을 가꾼 아이처럼 이론가의 성공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현실을 추상화하지 않고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해서, 답답한 마음이 들면 힘을 긁어모아 이론서를 따라 읽어. 행여라도 지치지만 않으면, 이론연구자들은 이해를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이론에서 현실로 쉽게 옮겨갈 수 있을지도 몰라서 미련스럽게 따라 읽지. 그러다 보면, 아이의 부모가 12년을 살면서도 그 집에 애착을 갖지 못하는 것도 설명할 수 있어. 마당을 돌보지 않으면서도 닭을 키우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져. 장애를 가진 가족에 대해서는 전적인 책임을 느끼지만 자신에 대한 책임은 조금씩 뒤로 밀어버리는 것도 발견하게 되지. 이론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찾아낼 수 있어. 


이런 말도 덧붙여 읽지. “문제를 의식하게 되면 그 문제에 대해 투쟁하게 된다”고. 근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라면 이론서가 왜 수백 년을 돌고도는 고전이 되겠어. 이론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아이의 해법도 그래. 영화 상영 시간 몇 십분 동안이니, 마술처럼 변화된 마당이 짠 하고 나타나는 거지. 근사한 정원을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잖아. 그동안 부모와 아이와 건너 노인뿐 아니라 다른 모든 변수들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부모가 실직을 하거나 집을 비워줘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어. 건너 노인이 다치거나 아파서 함께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고. 이론서에도 그렇고 영화 속 아이가 그렇고, 자신이 변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좋은 말씀을 건네는데, 허허, 그 무슨 떼거지냐고 하겠지만.


오늘따라 더 못마땅해서 투덜거려. 그래. 그런거라면 다시 이론서를 따라 읽어야겠지. 거기에 보면 내 망언에 깔린 열등과 부정을 확인할 수 있을거고. 내 태도의 문제를 의식하게 되면 그 문제에 대해서도 투쟁할 수 있게 된다고. 이론서에 구원은 없어도 계속 살아가라고는 하잖아. 문제를 밀어버리면서 또 다른 문제를 맞이하더라도 그 순환 속에서라도 살아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라고 하잖아.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158>입니다. 멍멍이와 멍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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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2-05-26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플립이라는 영화죠? 재미있게 봤는데. 언급하신 장면이 생생한데 저는 이렇게는 생각 못하고 로맨스에 푹 빠져서 봤습니다. ㅎㅎ

초원 2022-05-27 09:24   좋아요 0 | URL
순수한 빛을 읽어내는 영화였군요. 말씀따라 검색해보니 아름다운 인생영화라는 후기들이 주루룩 ...
제가 쓴 내용으로 보자면 거의 상관이 없는 딴 영화였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신자유주의>라는 논점은 비판의 맥락이 아니라는 주장을 다시 하게 된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나 새로운 자본주의에서의 '자유'나 문제를 해결하는 논쟁점을 생산할 수 없다. 오히려 자유를 말하는 자를 경계해야 한다. 열흘 전에 올린 포스팅에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겠다고 공언하면서 트위터를 인수한 일론 머스크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지젝이 올린 칼럼 〈우크라이나의 자유, 어산지의 자유〉을 읽게 되었다. 맙소사, 지젝이 내가 이야기하던 《신봉건주의》를 그대로, 그러니까 그대로 말하는 것이었다. 지젝은 관심에 없던 사람인데 <신봉건주의>를 통해서 비판이론을 전개하던 사람이라면 관심을 가져야 할 게 아닌가 싶다. 지젝은 대체 어떤 경로로 신봉건을 말하고 있을까.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41990.html

- 한겨레신문 5월 8일자, 〈우크라이나의 자유, 어산지의 자유>


아무튼 그의 칼럼에 의하면 자유는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가 영국에서 범죄인인도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미국으로 송환될 경우 징역 175년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글을 열었다. 그리고 서구 세계의 자유가 어떤 한계를 보여주는지를 설명하려고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를 예시로 들고 있었다. 플랫폼에서의 자유란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이가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다면 표현의 자유가 지켜지는 것이다."라고.


다음 문장을 보자. "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주요 공유자원 중 오직 기업이라는 사유재(심지어 이 경우는 한 기업인)만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는 곳이 됐단 말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이제 자유가 신봉건주의에 의해 수호되는 시대가 됐다. 또 다른 문제는 머스크가 '표현의 자유'를 좋고 싫음이라는 의견의 문제로 정의하면서, 모든 의견을 동등하게 다뤄도 상관없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본인권, 교육, 의료에 관한 진실이 그런 문제에 해당하는가?"


지젝은 자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쓴 글에서는 이렇다.


https://blog.aladin.co.kr/722236154/13563451

- 5월 2일, <여기 알라딘 서재에서 무얼 하고 계신가요>


 "몇 년 전에 올린 글에서는 알라딘 서재의 글쓰기는 무급 노동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었다. 그리고 연이어 올린 글에서, 자유로운 글쓰기를 위해서도 이용자 약관동의 사용계약이 아니라 생산계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신봉건주의를 지탱하는 봉합경제의 특성에서 온라인 글쓰기는 삶의 영역의 분리를 심화시키고, 노동을 더 전설 속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했다. 미래에 오게 될 밀봉경제는 어느 수준이 될 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네트워크, 알고리즘, 콘텐츠 범벅이 된 메타버스의 세계가 그 예시가 될까." 


지젝이건 다른 누구이든 간에 우리는 동시대를 살고 있으며 세계체제에서 묶여 있기 때문에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딜레마가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어떻게 저지할 수 있는가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지할 자유 같은 걸 놓고 경쟁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야 할 대안이란 국가와 민족에 얽매이지 않을 지점에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거기에 있다. 


이 참에 지젝에게 관심을 가져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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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론 머스크가 55조에 트위터를 인수하기로 했다 한다. 착잡한 일이다. 트럼프가 트위터에서 강제 퇴출당했을 때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쉽게 판단이 가지 않았었다. 미국 최고 권력자가 가진 발언의 자유를 트위터는 계정을 정지시킴으로써 제한해 버렸다. 상징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좋은 일이었는가. 누구에게 그런가. 


이제 세계적 갑부 머스크가 온라인에 자유를 허용해야겠다면서 트위터 주인이 되려 한다. 그의 경영 전략에 따라 상장도 폐지하고 개인 기업이 될 거라고 한다. 머스크가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손을 댄 것마다 금으로 변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가 열린 것이다. 트위터가 어떻게 바뀌게 될 지 알 수 없다. 공격적으로 여러 미래 산업을 독점하는 일론과 같은 사적 기업가들이 계속 늘어나도 되는 것일까. 계속 거대해질 공룡기업에 대한 견제는 누가 하게 될까. 스타링크로 하늘을 점거하고 화성 프로젝트를 근사한 형태로 설계한, 그 미래는 누구의 미래인가.


데이터는 단순히 이진법으로 만들어졌지만 무엇으로든 변신가능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하나의 비트가 하나의 데이터가 되고 하나의 알고리즘이 된다. 그리고 플랫폼이 형성된다. 처음 트위터는 140자의 제한이 걸린 탓에 확장성 문제가 컸다. 경영실적이 좋지 않아서 위기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트위터 사용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재주를 뽐내며 특유의 짧고 강렬한 메시지들을 만들었다. 리트윗되고 재창작되고 응답되는 끝없는 트위터 연결성은 일론 머스크가 탐내는 55조의 가치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55조는 누구에게 갈까. 십여 년 간 수만 개의 트윗을 생산한 계정들은 아닐 것이다. 


2.

이곳 알라딘 서재도, 예전만 못하다고들 하지만, 알라디너들의 발랄하고 진지한 글들이 끝없이 올라온다. 나도 가끔씩 공들여 쓴 글을 올리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두서없는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득 문득 한심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처음에는 블로그가 가진 사회참여적 성격을 생각하며 애써 의미를 찾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라인 생태계를 지배하는 동력들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올린 글에서는 알라딘 서재의 글쓰기는 무급 노동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었다. 그리고 연이어 올린 글에서, 자유로운 글쓰기를 위해서도 이용자 약관동의 사용계약이 아니라 생산계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신봉건주의를 지탱하는 봉합경제의 특성에서 온라인 글쓰기는 삶의 영역의 분리를 심화시키고, 노동을 더 전설 속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했다. 미래에 오게 될 밀봉경제는 어느 수준이 될 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네트워크, 알고리즘, 콘텐츠 범벅이 된 메타버스의 세계가 그 예시가 될까. 

 

그렇게 혼자 묻고 혼자 덮고 혼자 떠들다 보니 플랫폼 위에서 더 외로운 게 아닐까 싶어진다. 무엇보다 그런 마음을 느끼게 될 때는 두 종류의 생각이 교차한다. 하나는 오락가락하는 기분의 문제다. 독자가 없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곤 하는데, 그럴 때면 아예 글쓰기를 그만두지 그러냐는 생각이 함께 든다는 점이다. 클릭 경쟁이 비지니스가 되는 온라인 세상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글을 쓴다는 일은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목소리가 큰 사람, 자극적인 내용을 물고오는 사람만의 온라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서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금방 패배감으로 바뀌게 되는 지점이다. 


두 번째는, 알라딘 서재처럼, 블로그 기능을 갖는 곳에서의 글쓰기가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에서 복잡한 심정이 되곤 한다. 책을 리뷰하거나 추천하는 일이 하나의 권력이기라도 하듯, 힘을 휘두르려는, 글쓰기가 되기도 한다. 소비하는 일에서 여론을 생산하는 위치로 자신을 이동시키면서 사회참여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만약 인터넷 여론장이 현실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단이 될 수 있었다면, 어떻게 소셜 미디어를 운영하는 기업가들이 전 세계 부를 단기간에 움켜 줄 수 있게 되었을까. 이런 사소한 글쓰기의 기능이란 새로운 자본주의의 동력이 되기만 하는 게 아닐까 싶어질 때가 많다. 


데이터의 힘이 폭증한 새로운 세계에서, 내 데이터의 침묵은 의외로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조금 다른 일일 것이다. 온라인 글쓰기에 대하여/ 좋아요 참여에 대하여/ 블로그에 대하여/ 알라딘 서재에 대하여/ 그 행위들을 대상으로 사회적 읽기를 해야 한다. 온라인 글쓰기의 발생을 역逆사회화할 방안 같은 걸 상상한다. 사회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역학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여기 이 알라딘 서재에서 무얼 하고 계신가요? 당신의 블로그 생활은 당신의 실생활입니까? 예? 아니오?


3.

플랫폼 자본주의와 플랫폼 노동에 대해서 이미 많은 연구들이 나와 있다. 


(『피지털 커먼즈』중에서) "플랫폼 기업은 이용자들이 일상적으로 생산하는 감정·정서·의식·정동·언어·활동 등 전자적 표현과 지적 유대의 무수한 관계의 갈래들을 디지털 인터페이스에 효과적으로 실어 나르고 중개하면서도, 그 집합적 기호를 어떻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망 안으로 흡수할 수 있을까를 암중모색하는 이중의 비즈니스 전략을 꾀한다." 


"오늘날 ‘공유’(중개)경제는 플랫폼 알고리즘 기술을 기업 경영의 핵심 기제로 삼아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능력을 자신의 장기로 삼는 반면, 노동인권, 이익 배분, 소유권, 의사결정 구조 등 대부분의 민감한 질문에 침묵하면서 실제 공생적 가치를 강조하는 커먼즈적 지향, 즉 ‘공유’(호혜)의 용어법과는 사뭇 다른 경로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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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2년 래드클리프-브라운과 말리노우스키는 뒤르켐의 뒤를 잇는 기능주의 인류학을 출현시켰다. 그들의 근대 인류학은 참여조사, 현지조사 방법을 통해 새로운 사회인류학을 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이전의 연구자들이 참고한 자료는 식민지 관료의 기록이거나 여행가들의 산문이었다. 혹은 성직자들의 일기와 같은 자료에 의지해서 가보지 않은 사회를 연구실 의자에 앉아서 논했다. 그래서 그들의 자료가 민속지적 정보가 되기도 하고,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지식을 구축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그려진 식민지인, 원주민들의 모습은 폭력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인류학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었다. 그들은 참여관찰을 통해, 현지에서 보고 듣고 말하며 얻은 자료들을 취합했다. 이들의 방법은 보다 설득력 있는 사회적 과학을 예시했다.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친밀한 상태에서 그들의 모든 측면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의 모습은 마치 '현장'의 우선성을 확신하는 듯 보였다. 


말리노우스키는 기능주의 인류학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을 출간했다. 뒤르켐의 기능주의는 전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기능하고 있는, 유기적인 연결을 통해 사회를 드러내는 방법론으로, 인류를 새로운 관점으로 사유할 것을 요구했다. 말리노우스키가 트로브리안드에서 몇 년에 걸쳐 거주하면서, 원주민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며 보내던 시간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참여관찷을 행하는 연구자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의 교환들은, 사회 전체 상황 속에서 되살아나는 언어들 속에서 원주민들을 형상화했다. 


트로브리안드에서 원주민들은 기간산업인 농업 생산자들로서 훌륭한 경작자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경제적 본성으로서 주술이, 이들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말리노우스키는 사회적 사실로서 분석할 수 있었다. 잉여 농산물이 족장의 권위를 뒷받침할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주술은 문화적 의례 행위로서 중요한 사회통합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농경과 그 생산물은 남태평양 공동체의 사회 조직화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정치권력의 토대를 이루거나 가사 분담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친족의 의무와 혼인법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원시적인 경제 조직, 정치 질서, 그리고 가정생활에 대해서 낯설지만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책소개 중에서) 


2.

만약 트로브리안드에 언론사가 있었다면 말리노우스키는 좋은 언론인이 되었을 것이다. 언론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유형의 기사문들은 참여관찰 인류학과 정반대의 형상화를 노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몇 문장의 SNS 메시지를 기사화하면서 마치 그것이 압도적인 여론인냥, 사회 전체를 조망할 열쇠인 것처럼 확대하기에 바쁘다. 뉴스는 기자의 관점을 여과없이 투영하는 작품이 아닌데 기사문은 언로를 타고 무책임하게 이동하게 된다. 불특정 다수에게 고르게 전달하며 사회통합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특정 상황을 공론장의 억압을 위해 동원한다. 


만약 사회를 총체화하고 싶다면, 갈등을 드러내고 싶다면, 인류학자의 시선과 비숫하게, 참여하되 참여하지 않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언론인이 이미 고정된 의도를 갖고, 누군가의 발언에 집중한다면 그곳에서 무엇이 태어나겠는가. 가끔 언론인에게 필요한 게 최소한의 참여관찰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말리노우스키도 그랬겠지만, 현장연구를 진행하는 인류학 연구자들도 먼저 자신이 채택한 이론을 취하고 있다. 하나의 방법론을 갖지 않는 관찰과 참여는 여행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자가 가진 이론의 맥락이 원주민의 행동 유형, 기술적 장치, 환경 요소들의 관계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관찰자의 시선에서 유효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관점이 무엇이었고, 그것으로 확인한게 무엇인지를 독자가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3.

경작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빠짐없이 듣고 옮기는 말리보브스키는 자신의 이론을 풍부화하는 자료로 트로브리안드에 실재하는 사회를 그려냈다. 이 연구를 통해 트로브리안드에 살았던 인류의 생활방식과 언어적 상황은 언제까지 그대로 남을 것이다. 말리노우스키가 그려낸 트로브리안드가 실재 그 곳, 그 사회와 어떻게 같고 다른지는 알 수 없다. 그 사회 속에서 원주민들이 어떤 방식으로 말했고 행동했는지,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행위들이 어떻게 엮이게 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할 뿐이다. 


"우리는 참여관찰의 불가피한 주관성과 자료 수집의 균질성을 향한 열망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한마디로 대답하자면, 그럴 수 없다. 또한 관찰자의 편견이라는 고유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것이야말로 인류학과 같은 사회과학을 화학과 같은 자연과학과 구분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사회문화인류학』중에서)


그리고 그들 연구자들 중 일부는 참여관찰한 자료를 통해 연구자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 또한『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1985)에서 장 프랑수아 스크립차크는 클라스트르를 원시사회에 대한 관찰자이자 진정한 철학자-연구 대상에 자신의 선험적인 도식을 투사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연구 대상으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존중하고 놀라워하며 자신에게 질문했다는 점에서-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클라스트르는 1963년에 구아야키 인디언에 대한 현지조사에 나선 이후 1960년대의 대부분을 파라과이와 베네수엘라 등에서 인디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연구하였는데, 클라스트르는 이러한 현지조사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인류학의 본질적인 문제, 즉 국가로 표상되는 정치권력의 문제를 원시사회를 대상으로 분석하고 있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소개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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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뭐라 떠들 내용은 없지만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일어난 일에는 몇 마디 건네고 싶다. 뭔가 상징적인 일이라 너도나도 한 마디씩 거들게 된 터라, 그 사건에 대해서 더 덧붙일 일은 많지 않다. 내가 궁금한 건, 폭행이 이루어지고 있던 순간에도 시상식이 멈추지 않고 진행되었던 것일까에 대한 것이었다. 그랬다. 한 배우가 다른 배우를 폭행하는 중에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음 수상자가 호명되고, 영광을 안은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정지되지 않는, 잠들지 않는 세계처럼 시상식을 멈추게 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예전에 아카데미 시상식을 눈여겨 본 일이 있긴 하다. 메릴 스트립이 트럼프가 장애인 기자를 흉내낸 일을 거론하며 현실을 비판하던 영상이었다. 미국 최고 권력자를 향해 소신을 드러내던 메릴 스트립의 영상은 윌 스미스의 폭행 영상처럼 순식간에 퍼져 나갔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제 마음이 부서졌고지금도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남에게 굴욕감을 주려는 본능을 드러내면 다른 모든 이의 삶에 퍼져 나갈 겁니다다른 사람들도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고 승인하는 일이 됩니다. 혐오는 혐오를 폭력은 폭력을 낳고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를 괴롭히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한다면 우리는 모두 패배할 거예요"


트럼프는 장애를 가진 기자가 자신에게 불리한 발화를 할 때 느꼈던 감정을 어떤 여과도 없이 만인을 향해 쏟아냈다. 사실 의도적인 연기였다는 생각도 들 수 있다. 트럼프는 미국이 가졌던 민주경찰의 '역할'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정치인은, 말하자면 대신 말해주는 사람들이다. 트럼프가 누구를 위해 그런 흉내를 낸 것인지, 그냥 나온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메릴도 자신의 연설의 촛점을 연기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눈여겨 보게 된다.  


"배우가 할 유일한 일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들어가 관객들에게 그 느낌이 어떤건지 느끼게 해주는 겁니다숨 막힐듯 아름답고함께 연민하는 연기들이요"그런데 "트럼프가 전혀 훌륭하지 않은 연기로" 장애인을 표적삼아 효과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메릴이 연설을 마무리하는 말은 참으로 극적이다.  


"바로 이런 일들 때문에 매체를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는 격분이 일어날 때 권력자를 끌어내릴 힘을 가진 언론들이 필요합니다. ... 그것이 바로 미국의 건국자들이 매체를 신성시 여기고 헌법에 언론의 자유가 있는 이유죠" 


단숨에 아주 효과적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건국자들과 나란히 자유를 구현해 내는 매체로 소개한다. 메릴은 이 연설을 행할 때 '연기'하고 있던 것일까? 이런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메릴의 발화를 아카데미 시상식과 떼어낼 수 없기에 그렇다. 연기는 영화의 동력이다.  


숨죽여 살던 역사적 인물을 얼마나 잘 재현해 내느냐.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사람을 표현하면서, 더 실제처럼, 더 사실적으로 더 효과적으로 연기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그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을 연기하는 사람에게 더 큰 권력이 간다. 마치 정치인이 대변인의 위치로서 상상할 수 없는 권력을 얻듯, 연기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영화는 이미 권력이다. 전달의 힘은 증폭에 있다. 영화'판'이 세계를 증폭시킨다. 


두 흑인 배우들의 격투는 마치 희극처럼 보였다. 아카데미는 실제 폭력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노출시켰고, 제지의 제스쳐도 없었다. 폭력을 행사한 배우는 울먹이며 수상 소감을 말했다. 맞고도 웃으며 다음 수상을 진행시켰던 배우도 여전히 그 장면을 소재로 삼아 코메디 쇼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건의 시청자들은 진지한 발언을 쏟아냈지만, 아카데미의 위치를 조정시킬 타격을 주지 못한다. 


폭력과 전쟁이 범람할 때 그 재현으로 권력을 갖게 영화판이 엄연하다. 

가난과 폭력을 떨쳐낼 수 없어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록의 의미를 묻는다. 

기록을 남길 방법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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