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러웨이 선언문에 보면 이런 문장이 있다. "사이보그의 현신incarnation구원의 역사와 무관하다."  서구에서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기대고 있는 기원 설화를, 개인의 발달과 역사의 발달이라는 쌍둥이 신화로 구축하고 있는 서사 장치를 건너뛰고 있다. 사이보그는  해러웨이의 아이러니한 믿음의 이해에서 구축된 이미지다.  사이보그는 에덴동산을 모른다. 사이보그는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꿈을 꾸지도 못한다. "결국 그들에게 아버지는 있으나 마나 별반 차이는 없는 듯하다."

 올해 다시 해러웨이를 읽으려고 책을 꺼냈다. 모든 동일성이 사라지려고 할 때 차이의 동일시는 내게 상당한 타격을 준다.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사유가 <있음이라는 길 위를 찾아가는 방법이나 도구>라면, 사이보그라는 사유는 무엇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영영 궁금한 문제다. 이걸 납득할 때까지 해러웨이를 읽어보겠다.




"나는 윤리적 채식주의가 필요한 진실을 체현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동물들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가 갖는 극단적인 잔인성에 대한 결정적 증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또한 나는, 우리가 인간예외주의의 근거가 되는 “그대, 죽이지 말지어다”라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양육하기와 죽이기를 필멸의 운명을 진 반려종 얽힘의 불가피한 일부로서 대면하게 하는 명령인 “그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지어다”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복수종 공동의 번영은 동시적이고 모순적인 진실들을 필요로 한다고 확신한다."

― 4장 검증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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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9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원 2024-03-20 23:13   좋아요 0 | URL
절 무한냥으로 부르지 말아 주세요. 어색해서 발꼬락에 힘이 들어가네요.

잘 지내시나요. 감사해요. 무진장 아주 많이 거대하게 땡큐합니다.
근데 어쩌나요. 저 메일 못 열어요. 이십 번도 넘게 시도했는데 비번이 아니랍니다.
네이트 머시기 없어지고는 들어가질 않아서요. 거기에 남겼던 글도 꽤 되는데 모두 날아갔지요.
뭐 아쉽지는 않은데, 오늘 커피 쿠폰이 거기에 있다니 참...

그 마음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둘려주세요. 제가 성공해서 유명해지면 꼬옥 찾아갈게요.
같이 커피도 마시고 케이크도 먹고 꽈배기 들고 산책도 해요.

2024-03-21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원 2024-03-21 07:58   좋아요 0 | URL
잠시 반성합니다. 어제 밤에 공익광고를 봤어요. 아이에게 친절하게 접근하는 어른을 경계하고 따라가지 말라는 내용이었죠. 온라인에서도 그렇죠. 어른이라고 예외는 아니죠. 갑자기 같이 커피 한 잔 하자고 해서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부드러운 말로 속이고 속는 세상이니까요. 저야 저를 알지만 온라인 너머의 사람들은 저를 모르니까 어여쁜 ㄱㅈㅈ님에게는 흑심을 품은 늑대일수도 있지요. 제가 옛날 사람이라서 ㄱㅈㅈ님을 막 대했나봐요. 미안해요. 진심은 밝히지 않을게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래요.

2024-03-21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야기로 말해지는 것들은 말하자면 존재한다기보다는 발생한다. 즉 각각은 계속 진행해가는 활동의 순간이다. 한마디로 이것들은 객체가 아니라 이야깃거리이다."

"정주민은 장소를 점령한다. 반면 유목민은 점령에 실패한다. 하지만 행려는 실패한 점령자나 주저하는 점령자가 아니라 성공한 거주자이다. 그들은 사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때때로 상당히 먼 거리를 폭넓게 여행하고, 이 움직임을 통해 그들이 지나간 각 장소의 계속되는 형성에 기여한다. 요컨대 행로는 장소가 없는 것도 장소에 묶인 것도 아니라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





"메를로퐁티는 그 이유에 대해 그것들의 분열이 종결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으로 되돌아온다”라고 말을 잇는다. 우리는 놀랍게도 반짝이는 별이 우리 자신의 눈이라는 사실, 즉 우리가 별을 그저 볼 뿐만 아니라 별과 함께 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고흐가 그린 것은 천체 투영관에서 흔히 상영되는 총체로서의 하늘의 파노라마가 아니다. 그의 그림은 화가가 본 것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우주로 열리면서 폭죽 세례처럼 폭발하는 듯한 시각의 탄생을 선과 색으로 상연한다. "

"이것이 바로 삶의 독특한 점이다. 매 순간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무엇이 되고 있는지를 해결해야 하므로 어떤 지점에서도 과정은 최종 결말에 도달할 수 없다. 달성은 언제나 연기되고 언제나 ‘아직 아니다’. 인간은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항상 인간이 되어 가고 있으며 그 진전과 함께 자신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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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포지토의 <임무니타스>는 면역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면역성이란 뭐랄까 일종의 내부적인 한계에 가깝다. 면역성은 공동체에 일련의 경계를 부여함으로써 공동체가 구축적인 동시에 해체적인 형태를, 정확히 말하자면 해체하는 동시에 재구축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내부의 한계 안으로 접어들게 만든다. 

이러한 부정적 변증관계가 특별히 부각되는 곳은 법률 언어의 영역,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체계 전체에 대한 면역장치로서의 법적 권리가 논의되는 곳이다. 루만의 주장대로 18세기부터 서서히 확장된 면역의 의미론이 근대사회의 모든 영역을 파고들었다는 것은 곧 면역 메커니즘을 더 이상 법적 권리의 기능으로 간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법적 권리를 면역 메커니즘의 기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과 폭력의 관계를 읽어내는 이 단락에서 에스포지토는 기울어지지 않는 시선을 지닌 듯 보인다.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법이 한다고 해서 공동체가 폭력과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폭력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여전히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장치 속에 흡수된다." 폭력을 막는다는 장치의 작동은 폭력의 이면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자연스레 이데올로기 자체가 되고 있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닌데,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일도 거기서 시작되고 숙명이라는 ...껍데기 구도에 ...말이 사라지곤 했다. .한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읽기도 간신히 하고 벌렁거리는 통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이 시간도 이런 상태를 끌어내려는 작은 시도다..

하여튼 면역성을 논하면서 법과 폭력의 관계처럼 '사적이고 탈취적인' 글쓰기를 의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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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수업

"사물은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사물은 우리의 에고를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안의 지배원리를 누가 알고 있는가. 명상록은 이 대답을 독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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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이어서 쓰기 3


벤야민은 기억의 대상으로서 역사를 사유한다. 회상하는 사람이 기억한 내용은 벤야민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기억 작업이 곧 이미지를 만든다. 그래서 역사 이미지는 무한하다. 이 무한성이 역사와 기억을 다루는 벤야민에게 특이한 점이다. 물론 그렇다. 인간이라는 삶은 하나일수도 없고, 직선적으로 살아낸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믿고 싶을 때는 많지만 말이다. "기억이라는 페넬로페적 작업"을 성좌 구조로 연결하는 벤야민은 역사를 신학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벤야민은 진화론적 경향도, 실증적 사고도, 목적론적 진보도 거부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맑스는 혁명이란 세계사의 증기기관차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상황은 완전히 다를지도 모른다. 아마도 혁명은 이 열차에서 여행 중인 인류가 비상 브레이크를 잡는 일일 것이다."(199쪽)


벤야민이 '정지상태로서의 혁명'을 말할 때 언급하는 여행객을 떠올려 보자. 맑스의 역사 유물론은 최종 목적을 향해 증기 기관차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사실 여기에 혼란이 있다. 세계사의 증기기관차는 벤야민의 표현처럼 자동 장치일텐데 어떻게 비상 브레이크가 작동할 수 있을까. 여행 중인 인류는 누구일까. 우선 혁명가나 투사를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유랑하는 민족? 혹은 귀족? 상인? 신학자? 예술가? 무엇보다 만약 기억 작업이 페넬로페적이라면 여행 중인 인류는 페넬로페일까 아니면 남편인가. 따질 것도 없이 아도르노가 신화를 재해석하면서 페넬로페를 자연-여성이라는 종속적 위치에서 해방시켰듯이 페넬로페일 것이다.  


벤야민은 연대기적 서술을 선호하지 않는다. 사건들이 짜임새 있게 연쇄된, 역사기록을 의심한다. 벤야민은 직조된 페넬로페의 베틀작업보다 그걸 다시 풀어내는 작업을 더 중요시 할 것이다. 진정한 역사의 이미지를 변증법적 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그럴 것이다. "건설적이면서 동시에 해체적인" 것을 통해 현재를 재구성하려한다.  


"뢰비의 결론에 따르면,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한마디로 해방을 위한 혁명적 비관론이다. 이것은 “역사는 원래 그렇게 진행될 것이[었]다”(즉 “그러니 우리는 역사를 바꿀 수 없[었]다”)라는 ‘멜랑콜리한 숙명론’=‘역사주의’에도, “진보는 불가피하게 승리할 것이다”(혹은 “대중의 지지는 보장되어 있다”)라는 좌파의 ‘낙관론적 숙명론’=‘진보주의’에도 반대한다. 오히려 역사는 어떤 의미로든 미리 정해져 있기보다는 무한히 열려 있는 무엇이다. 그러므로 이 열림 속에서 역사의 다른 가능성들, 즉 해방적이고/이거나 유토피아적인 가능성들을 찾아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이를 위한 일종의 참조점이다."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 소개말 중에서)



이상하다. 나만 그래? 그렇다면 그렇고. 


건설도 해체도 페넬로페가 해낸다면 이는 자동장치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페넬로페가 유예시키는 것은 또 무엇인가. 페넬로페의 비상 브레이크는 작동한 게 맞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은 몰랐을까. 할 말은 더 많으나 내일 이어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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