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잘 지내지?


너도 알고 있겠지만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려 봤으면 해.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에서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겠다고 말했다"고 썼어. 어쩜 그럴까, 의심스럽지. 여성주의를 대표하는 작가가 왜~? 미적 감각을 표현하려고 했을까. 첫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잖아. 직접 꽃을 산다는 건 어떤 꽃을 사고 어떻게 장식하고 뭐 그런 걸 염두에 둔다는 거잖아.댈레웨이 부인 클라리사는 식탁을 꽃으로 장식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거뜬히 해내고 있다는 거야. 


애니야, 클라리사가 정말 원해서 꽃을 사고, 바느질과 파티를 즐겼을까. 그래, 나도 알지. 클라리사는 버지니아 울프가 만든 소설 속 인물이라구. 그래. 버지니아 울프는 어떻게 클라리사가 꽃을 사면서 파티를 준비하는 소설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냐구. 근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냐? 여자들이 하는 모든 일들 중 나쁜 일이 있냐는 거야. 아, 미안해, 꽃을 감상하려고 굳이 꺾고 자르고 다듬고 믹스해서 뭔가를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싫긴 하지. 하지만 그게 도덕을 파괴하거나 전쟁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잖아. 사소하고 한심해서 더 우스운 일이지. 


싫어하는 글쓰기를 오늘도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뭐 떠오르는 게 없어? 좀 더 노력하면 누군가 좋아해 주기라도 할 줄 안거야? 애니야. 아직도 모르겠니. 그런 건 습관이라고 해야 해. 


클라리사가 전통적인 여성성을 나타낼 파티라든가 그런 속물적인 캐릭터를 입고 연기하는 건 버지니아의 의도라고. 여성이 하는 일이 한심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여성이 담당했던 노동은 비로소 가치를 얻게 된다구.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소중하지, 누군가에게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도 좋은거야. 뭔가 크고, 더 중층적이고, 대단한 걸 찾으려면 아마도 여성적인 것들을 모두 모른체 해야 할 거야. 그래서 여성적인 게 필요한 거야.


"그러나 문간에 앉은 가장 추레한 여인들도, 가장 낙담한 비참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삶을 사랑한다. 그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의회의 법도 그들을 다스릴 수 없다고 확신했다." (『댈러웨이 부인』)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140>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멈추고 싶으면 멈추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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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을 비판하는 근거의 상당 부분은 총체성을 향해 있다. '총체성'은 결정론이거나 목적론적 해석이다. 제임슨과 같은 이론가에게 있어서의 총체성은 개인이 경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은 실재보다는 구조나 체제를 작동시키는 원인-형식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경험한 실재의 풍부함을 근거 삼아 총체성을 주장하려 한다면 이는 상상의 관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할 수 있게 된다. 총체성을 따라가다 보면 경험의 부정이 일어난다. 가끔 이런 상황이 흔하게 일어난다. '네가 뭘 알아'. '야, 그럼 너는 뭘 알고 있는데?' 


"개인 주체가 그 또는 그녀 자신이 계급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충분히 의식하면서, 순전한 명징성과 사유의 힘으로 이데올로기를 조절한다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계기에 대한 비전은 한갓 신화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체계에서는 오직 집단적 통일성(그것이 특정계급, 즉 프롤레타리아의 통일성이건, 또는 그 '의식의 기관'인 혁명적 당이 지닌 통일성이건)만이 이런 투명성을 성취할 수 있으며, 개인 주체는 항상 사회적 총체성 내부에 위치하게 된다."(『정치적 무의식』)


제임슨이 인용한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의 다음 구절을 보자.

"과거의 모든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승리자로 등장하는 자는 누구라도 패자의 나뒹구는 시체들 위로 행진하는 오늘날의 지배자들의 개선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전리품들은 관례대로 그 개선 행렬 속에서 드높이 운반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문화유산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적 유물론자들은 그 문화유산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탐색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탐색할 때마다 그러한 문화재들은 곳곳에서 공포심을 가지고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 기원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들이란 그것을 생산한 위대한 창조자들의 노고뿐 아니라, 그 동시대인들의 이름 모를 강요된 노동에 힘입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문명의 기록치고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니었던 것이 없다."(『역사 철학 테제』)

벤야민의 이 '성찰'을 '위대한 사유'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찬란한 문화 유산에 매혹될 때 긍정성을 갖거나 부정성을 갖는다는 말이 '문명'이나 '야만'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문화유물을 대할 때 야만의 기록으로 읽더라도 '총체성'은 실재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총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저 너머에 있는가.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126>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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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는 좋음과 연결되지 않고 옳음과 연결되는데, 이미 좋음과 옳음 이전에 축적들이 있다. 클레멘트가 교부로서 청빈논쟁을 통해 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주장한 일을 떠올려보자. 클레멘트는 1800년 전 인물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성경 구절을 해석한 일로 유명하다. 십계명을 지켰는데 부자라는 이유로 천국에 갈 수 없을까 걱정하는 이들에게, 어렵다고 한 것이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운을 뗀다. 구원은 재산의 여부보다 탐욕과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배고픈 자들을 도울 수 있고 헐 벗은 자들에게 옷을 나눌 수 있단 말이냐고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부자는 그 자신보다는 형제를 위해 재산을 소유하라고 말한다. 


사제가 추구하는 삶은 평신도의 삶과 다르므로 재산을 포기하고 완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제의 청빈의무는 “너희 가운데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성서 구절을 강조한다. 악이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탐욕이라고 주장하며 그 사용법, 사용기술, 사용기능으로 초점을 전환시킨다. 그렇다고 수도원이 교황이 재물을 갖지 않았겠는가. 수도원이 번성한다는 뜻은 이미 재산이 그득함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생명의 나라처럼 말이다. 


1000년이 지나도 수도원의 부유함이 지속된다. 13세기에 들어서면 그레고리우스 9세 교황이 재화에 대한 소유권은 기증한 자에게 있다고 수도회는 소유권을 가지지 않고 사용권을 가질 뿐이라고 칙서를 공포한다.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수도회 모든 재화에 대해 자신이 소유권자임을 밝힌다. 


2.

만약 이 시대가 변화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선 소유와 채무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소유관계와 부채관계를 뒤져야 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에서 털끝만큼이라도 거리를 두고 싶다면 삶이 누구에게 빚지고 있는지, 삶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낡은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중요성을 갖는 '시대정신'이라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대체로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시대정신이란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가 자신의 정신일 뿐"이라고 한 괴테의 규정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 시대정신의 자리를 정해주고 이를 정의할 줄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을까? 시대정신의 발견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면서도 동시에 지성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가의 최고 과제라는 것이 역설적 진리이다." (『의식과 사회』)

"부채는 사회 전체에 대한 ‘공제’ 기계 혹은 ‘포식’ 기계포획 기계이자거시 경제의 규정을 만들고 관리하는 도구인 동시에하나의 소득 재분배 장치이다부채는 또한 집단적 개인적 주체성의 ‘통치’ 및 생산의 장치로서 기능한다.

 

부채 경제는 매우 정치적인 목적을 갖는다. (상호부조연대협력만인을 위한 권리 등과 같은집단행동의 무력화, ‘임금노동자’ 및 ‘프롤레타리아’의 집단 조직행동 및 투쟁 기억의 무력화를 보라대출(금융)을 지렛대 삼아 이룬 경제 성장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갈등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사회 보조은퇴 연금직업 교육 등을 자신들의 투쟁을 통해 획득한 집단적 권리로서 바라보는 주체들과 마주하는 것은 ‘채무자’ 소규모 자산가소액주주를 통치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다"(『부채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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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계적이라고 칭해지는 것들에 좋은 일들이 많다. 똑딱똑딱 어느 지점에서나 한결같이 지나가는 시간은 기계적이다. 펄덕펄덕 쉼도 없이 넘어가는 심장음처럼, 꽐꽐꽐 삼키는 냉수처럼, 나풀나풀 이동하는 나비처럼 규칙적인 음색과 느린 지속들은 언제나 반갑다.   


2.

작년 몇 개월은 뜨개질로 아침을 시작해서 뜨개질로 끝내곤 했다. 다이소에서 3개의 털실뭉치와 하나의 코바늘을 샀다. 그리고 눈 뜨면서 오른손에 바늘을 잡았다. 시간을 마중하며 시간을 배웅하며 늦은 밤까지 했다. 잠에서 깬 한밤중에도 코바늘을 잡았다. 손수건 크기로 뜨다가 좀더 큰 것들을 만들고 싶어서 5천 원 어치 다섯 뭉치 실을 더 구입했다. 모자도 뜨고 무릎 담요도 뜨고 다시 풀고 다시 뜨고 다시 풀고 다시 뜨고.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빨래를 널어놓은 건조대 옆에서 뜨고, 이불을 둘러쓰고 뜨고, 책을 펴놓고 뜨곤 했다. 그렇게 혼자 앉아 뜨개질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만뒀다. 내 뜨개질 실력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뜨개질 하는 시간 내내 물음을 멈추고 머리를 비우고 손을 바삐 움직이고 의심을 버렸다. 그걸로 족했다.


3.

지난 몇 개월은 틈이 많은 시간을 그리기로 보냈다.  노트북 기본 프로그램에 있는 그림판을 열고 정성껏 색을 고른다. 마음대로 움직이는 않는 마우스 휠에 끙끙댔다. 그렇게 마우스에게 지휘를 부탁했다. 뉴스를 듣다가 그림을 그렸다. 책을 읽다가 그림을 그렸다. 잠이 오지 않을 때 그림을 그렸다. 배가 고파도, 배가 불러도, 배가 아파도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리고 다시 지운다.  뜨개질과 다르게 흔적이 남는다. 알라딘 서재에 올린 것을 봐도 그렇다. 역시 늘지 않았다. 예술을 할 수 없음이 다행이다.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135>입니다. 피어라, 피어서 내려라.



* 사라져라, 더 멀리 사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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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는 아마도 진화론에서부터 검토해야 한다. 진화론은 냉혹해 보인다. 적자생존이라고 하는 -살아남지 못할 종들에 대해 연민조차 갖지 않는 과학·기계적인 학설로 여겨진다. 그런데 진화 개념을 보급시키기 시작한 분야가 '사회학'이라는 사실을 앞세워 생각하면 뭔가 다른 측면을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거되지 못하는 게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기준 말이다.

 

 "진화의 이데올로기는 19세기 후반을 장식한 보편적인 시대정신"이었다. 유럽에 혁명의 동요가 요동치던 18세기, 그 시대가 저물어 가던 즈음, 어떻게 진화의 이데올로기가 번성할 수 있었을까. 진화론적 시각에서 보면 비합리적, 야만적인 장애들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 단순하게 보자면 인민을 해방시키려면 '기존 인민'이 사라져야 한다. 모두가 돌아버린 것인가. 그냥 행복해지기 위해 주문을 외우고 있었던 것인가. 


그 부침의 회오리는 자본주의의 번성과 엮여 있다. 제국주의가 끝없이 정복전쟁을 일삼으며 진화 이데올로기를 동력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추측만으로도 진화론에 대한 긍정성이 말끔하게 사라짐을 느끼게 된다. 영국이 식민지 행정관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동인도 대학>은 '미개 사회'를 향한 압력만은 아니었다. 진화론의 기본 혁명 구도는 문화인으로 거듭 태어난 '新'인민을 요구한다. 진화론에 알레르기가 생기는 지점도 그곳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화론에 대한 다른 사유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진화론은 혁명의 시대와 자본주의의 번성과 제국적 정복 충동과 연동되어 떠오른다. 분명 진화론은 새로운 진보였다. 이 새로운 관념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신앙처럼 떠돌면서 혁명의 공기를 계몽의 공기로 둔갑시켰다.  혁명의 시대가 만든 어떤 것이 계몽의 시대를 만든 것인가. 진화론은 혁명가가 꿈꾼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가. 혁명 자체가 잠재적으로 지니게 되는 폭력은 진화론과 닿아 있는가.


문화진화설은 19세기 전반의 헤겔, 콩트, 생시몽 등을 매개로 콩도르세 및 튀르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면서, 사회 속의 인간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제가 동일함이 곧 내용도 같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건이 『고대 사회』의 서두에서 밝힌 것은 인류 기원의 단일성, 동일한 발전 단계에서의 인류 욕구의 유사성, 동일한 사회적 조건에서의 인간 정신 작용의 제일성齊一性 등이다. 즉, 문화 및 사회에 내재된 합리성은 인간의 동질적, 일반적 환경으로서의 역사에 비추어서만 이해가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문화와 사회가 발전의 단계에 따라 구분됨과 동시에 동질적이고 단일한 연속선상에 배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진화론적 시각은 생물학 뿐만 아니라 이후 세계에 긴 그림자를 남긴다. 유럽의 역사주의가 이렇듯 진화론과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진화론을 고려해야 한다. 모건의 인류학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인간은 동일하게 출발했다, 인간은 동질적 욕구를 갖는다, 동일한 사회적 조건은 동질적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진화론을 이끈 학설은 박물학과 민속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져 봐야 한다. 이 박물학은 실증적인 속성을 가진다. '실증'이라거나 '사실'이라거나 '조사'나 '비교법'이 어떤 굴절을 겪어야 진화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유물 한 점을 놓고, 지층 한 단락을 보고, 가족 결합 형태를 정리해서, 언어 체계를 비교해서 문명을 읽어야 한다.   


문화진화론은 문화가 갖는 총체성에 근거를 둔다.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 관습 등의 총체적인 복합으로서 문화는 그 시대 인간이 이루어 낼 수 있었던 사고와 행위 법칙 등의 보편적 원리를 찾아낼 토대가 된다. 그 문화의 성격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들의 언어와 신화, 종교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과실을 따던 인류가 불을 사용하고, 토기를 제작하던 시대로 진입하면서 겪게 된 '진화의 시간'을 생생한 감각으로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실증적이기에 눈 앞에 그 인류를 대하듯 한다. 마치 엎어질 수 없는 사실 마냥 받아들인다. 멸종된 동식물의 종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유적으로 사회도태된 인간을 상상해 버린다.


문화진화론에서 문화라는 총체적인 시각은 문화 행위자로서의 인간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문화 유물에 연결된다. 언어도 신앙도 예술도 가족도 도덕도 모두 '물적 위치'를 갖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진화론을 다시 사유할 거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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