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을 위한 윤리학 수업이라는 표현에 쓸쓸해 하다가,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독자들”이 이 책으로 핵심에 접근하게 될 거라는 문구에 할 말이 쏟아져 나오려는 순간, 입 다물어야지 하는 소리가 들린다. 단념을 연습하는 중이다. 몇 가지 생각할 문제를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한다.
1. 행복에 대해서
쓰레기를 거리에 버리지 않는 습관, 담배 꽁초를 주워서 거리를 깨끗하게 하는 … 이런 도덕적 행동은 윤리가 아니라고 훈계하던 담임교사가 계셨다. 그때는 봉사활동 점수같은 평가도구가 없었지만 아이들은 자주 학교밖 마을 근처의 쓰레기들을 주워 모아야 하는, 수업 외 훈련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내가 버린 쓰레기 꽁초가 아니지만 '깨끗해질 거리'를 위해서 경쟁하듯, 놀이하듯 내달리며 줍곤 했었다. 우스운 일은 다음 날이면 또 어김없이 다시 쓰레기와 꽁초가 쌓이곤 한다는 사실이었다. 거리는 줍는 순간만 간신히 깨끗해지는 것이었다. 버리는 사람과 줍는 사람의 술래잡기였을까.
더 어릴 적의 기억으로는 아침 몇 시까지 빗자루를 들고 나가서 출석 점검을 하고, 동네 청소를 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들었던 끔찍한 소식들 중 하나는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는 길거리에 껌을 뱉으면 감옥에 갇히고, 남의 것을 탐내면 손목을 자르는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길 가다가 애국가가 울리면 멈춰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국민교육헌장을 마음 깊이 외워야 했던 시절이었다. 애국이 아니라 충성이었다. 도덕이 법형에 밀착되어 있던 때였다.
도덕이 아니라 윤리를 강조하던 담임교사의 심리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도덕과 윤리의 차이에는 위반에 대한 처벌 유무와도 관련이 있다. 도덕 위반자에게는 강제할 근거들이 있겠으나 비윤리적 사람에게는 교정도 개선도 강제할 방법이 없다. 담배 꽁초를 버리던 사람들은 눈총을 받기는 했겠으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오늘날처럼 쓰레기 투기 행위에 범칙금이 부과되었다면, 적발가능성은 낮지만, 적발된 후 행동이 교정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교정이 도덕의 이름으로 진행되더라도, 그래서 도덕적 행동이 습관이 되더라도, 그 학습이 윤리적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교사에게 윤리는 기꺼이 배우려는 태도에서 시작해, 자신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에서 우러나오는 능동적 행동들을 의미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바꾸자면 삶의 기술을 통한 자기배려로서의 윤리다. 이런 측면에서 위의 문제를 살펴보면 아마도, 도덕과 윤리의 최대의 차이는 자신의 개입 유무에 있다. 도덕적 명령으로가 아니라 윤리적 생활의 구현으로 자기자신를 세우고, 그 진정한 자기규율로 세계에 참여하라는 말이다.
도덕과 윤리는 어렵지만, 행복에 대해서라면 소셜미디어의 몇 계정만 훓어보더라도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외적인 좋은 것들을 가질 때, 그것을 가질 능력이 있다는 자부심이 생길 때, 얼마나 행복한지 설명할 표현력을 구사할 수 있을 때, 이 행복을 전할 친구가 있을 때, 친구에게도 나의 행복이 전염되어 공동감각이 형성되었을 때, 나와 내 친구와 내 가족과 내 현실에 다시 이 행복을 생성할 방법을 갖고 있을 때, 그러니까 나와 내 기쁨과 내 가족과 내 친구와 내 일이 행복 안에 거주할 수 있을 때이다.
2. 불행에 대해서
고통에 진정성을 부여하려는 부박한 시절이다. 진정성은 우리 시대에 특정한 모습으로 튀어나온다. 앞 단락에서 행복을 말하는 자에게 내면에 대한 통찰을 요구하는 것도 진정성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네가 누리는 그 행복감이 타율에 의해 조작된 건 아니냐고 따진다. 네가 진정으로, 자율적으로, 자기 윤리로 행복을 누리고 있느냐고 한다. 즉 자기 내면에 충실한가를 묻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묻는 자는 타자가 아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행복이다. 그럼에도 네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있구나 인정하는 자는 완전한 타자여야 한다. 소셜미디어에 게시물을 올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만약 실천이 윤리의 핵심이라면 게시물을 올리고 무언가를 조정하고 획득하는 것을 어떤 근거로 윤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있을까.
알라딘을 떠돌다가 만난 또 하나의 책 『만들어진 유대인』은 위험한 책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유대인 권력에 도전하는 책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나 유대권력을 위험하다고 하지 않고. 이 책이 위험하다고 할까.
『만들어진 유대인』은 “신화 위에 건설된 이스라엘의 역사적 진실”에 깊이 다가선 책이라고 한다. 2천 년의 유랑도 없었고, 떠돌던 자들이 고향땅을 되찾은 것도 아니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유대인들에게 네가 진실로 그러한가를 묻는다. “유대인의 나라라는 이념이 오늘날 이스라엘의 폭력적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제는 오히려 반유대주의를 부채질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얻게 된 부와 동질성으로, 내부의 이질적인 것들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민주국가가 아니라 유대국가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국가윤리를 묻고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 누군가는 반전을 요구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책을 쓰면서 미신이 분명한 유대 신화를 제거할 것을 요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면 과연 이스라엘의 폭력을 멈추게 할 힘이 이 세계에 있기는 할까 의심하게 된다.
"이스라엘 법에 담겨 있는 정신에 의하면,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이스라엘국의 목적은 이스라엘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을 섬기는 것이며, 이 나라 안에 거주하고 이 나라 말을 쓰는 모든 국민이 아닌, 유대인이라는 '에트토스(종족)'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이들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유대인이 '유대주의, 유대종교, 유대 정체성' 등을 안과 밖에서 비판하는 흐름은 낯설지 않은 주제다. 저 유명한 프로이트나 스피노자도 그러하지 않은가. 내적 성찰과 세계에 대한 관계를 문제로 삼아 성찰하는 근대적 윤리라면 스피노자는 그 전방에 서 있다. 더구나 스피노자도 암스테르담에 있던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에티카』와 『지성개선론』을 통해 비판하는 지성과 자유인의 형상을 실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세운 윤리학에서 유대 국가윤리는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겠다. 다음의 구절들에서 반복되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유대국가는 민주국가일 수 있는가.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본다.
"정리 68 만약에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그들이 자유로운 동안에는 선악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증명 : 나는 이성에 의해서만 이끌리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태어나서 또 자유롭게 존속하는 사람은 타당한 관념만을 가진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악에 대한 개념을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선의 개념도 가지지 않는다. 이리하여 이 정리는 증명되었다.
주해 : 제4부의 정리4로부터 이 정리의 가정이 잘못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만을 생각하는 한에서만, 혹은 도리어 무한한 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다만 인간 존재의 원인에 지나지 않는 신을 염두에 두는 한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과 내가 이미 증명한 다른 것들은 모세가 최초의 인간에 관한 저 얘기 속에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얘기 속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능력,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이익만을 고려한 그 능력 이외의 어떠한 신의 능력도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고 방식에 따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즉 신이 자유로운 인간에 대해서 선악을 인식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을 금지하였고, 인간이 그것을 따먹자마자 곧 살기를 원하기보다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후에 인간은 자기의 본성에 완전히 일치하는 여성을 발견하였을 때, 자연 속에는 그녀 이상으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야수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고, 곧 그는 야수의 감정을 모방하여 자신의 자유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이 잃어버린 자유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이끌린 자, 말하자면 신의 관념에 의해서 이끌린 족장들에 의해서 후에 회복되었다. 신의 관념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또 자신을 위해서 욕구하는 선을 타인을 위해서도 욕구하게 하는 유일한 근거이다 이것은 이미 증명한 바이다." (『에티카』4부 중에서)
상상에 의해 세운, 자기 정체성을 보존하는 차원의 자기 요구가 담긴 이야기를 창작하는 자유를 허용하는 스피노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모세는 최초의 인간을 지칭한 최초의 인간이다. 유대인들은 신의 관념으로 이끌린 족장들에 의해서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 단락에서 모호하고 전혀 윤리적이지 않은 주장들을 만나게 된다. 문제는 비판하는 자와 윤리로서 다시 서게 되는 참된 자아 혹은 주체가 어떻게 동일인이 될 수 있는가이다. 이 간격과 한계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 윤리학은 믿기 어렵다.
3월쯤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4월쯤 읽고, 여름이 오면 두 권 책에 대한 독후감을 써야겠다.
3.
발끝에서 잡는 안도감으로 알라딘 서점의 베스트셀러 50권을 구경했다. '마이너 필링스나 공감 지능, 부모와 다른 아이들, 어른의 대화, 일기 쓰기, 스톱 씽킹' ‥등 제목도, 논변도 화려하다. 이 강렬한 집중들은 불안에 대처하려는 즉각적이고 민감한 처방에 다름 아니다. 사정이 달라지길 기대하는 독자들의 심정들이 전해져 오는 것 같다.
'총균쇠나 미움받을 용기, 정의란 무엇인가, 명상록, 담론' 처럼 꾸준히 자리를 지키는 순위표 사이로 마키아벨리와 니체, 공자처럼 묵직한 전통들도 놓여 있었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얻을 수 있는 공통감각을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