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을 위한 윤리학 수업이라는 표현에 쓸쓸해 하다가,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독자들”이 이 책으로 핵심에 접근하게 될 거라는 문구에 할 말이 쏟아져 나오려는 순간, 입 다물어야지 하는 소리가 들린다. 단념을 연습하는 중이다. 몇 가지 생각할 문제를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한다.  


1. 행복에 대해서

쓰레기를 거리에 버리지 않는 습관, 담배 꽁초를 주워서 거리를 깨끗하게 하는 … 이런 도덕적 행동은 윤리가 아니라고 훈계하던 담임교사가 계셨다. 그때는 봉사활동 점수같은 평가도구가 없었지만 아이들은 자주 학교밖 마을 근처의 쓰레기들을 주워 모아야 하는, 수업 외 훈련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내가 버린 쓰레기 꽁초가 아니지만 '깨끗해질 거리'를 위해서 경쟁하듯, 놀이하듯 내달리며 줍곤 했었다. 우스운 일은 다음 날이면 또 어김없이 다시 쓰레기와 꽁초가 쌓이곤 한다는 사실이었다. 거리는 줍는 순간만 간신히 깨끗해지는 것이었다. 버리는 사람과 줍는 사람의 술래잡기였을까. 

더 어릴 적의 기억으로는 아침 몇 시까지 빗자루를 들고 나가서 출석 점검을 하고, 동네 청소를 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들었던 끔찍한 소식들 중 하나는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는 길거리에 껌을 뱉으면 감옥에 갇히고, 남의 것을 탐내면 손목을 자르는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길 가다가 애국가가 울리면 멈춰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국민교육헌장을 마음 깊이 외워야 했던 시절이었다. 애국이 아니라 충성이었다. 도덕이 법형에 밀착되어 있던 때였다. 


도덕이 아니라 윤리를 강조하던 담임교사의 심리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도덕과 윤리의 차이에는 위반에 대한 처벌 유무와도 관련이 있다. 도덕 위반자에게는 강제할 근거들이 있겠으나 비윤리적 사람에게는 교정도 개선도 강제할 방법이 없다. 담배 꽁초를 버리던 사람들은 눈총을 받기는 했겠으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오늘날처럼 쓰레기 투기 행위에 범칙금이 부과되었다면, 적발가능성은 낮지만, 적발된 후 행동이 교정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교정이 도덕의 이름으로 진행되더라도, 그래서 도덕적 행동이 습관이 되더라도, 그 학습이 윤리적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교사에게 윤리는 기꺼이 배우려는 태도에서 시작해, 자신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에서 우러나오는 능동적 행동들을 의미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바꾸자면 삶의 기술을 통한 자기배려로서의 윤리다.  이런 측면에서 위의 문제를 살펴보면 아마도, 도덕과 윤리의 최대의 차이는 자신의 개입 유무에 있다. 도덕적 명령으로가 아니라 윤리적 생활의 구현으로 자기자신를 세우고, 그 진정한 자기규율로 세계에 참여하라는 말이다.


도덕과 윤리는 어렵지만, 행복에 대해서라면 소셜미디어의 몇 계정만 훓어보더라도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외적인 좋은 것들을 가질 때, 그것을 가질 능력이 있다는 자부심이 생길 때, 얼마나 행복한지 설명할 표현력을 구사할 수 있을 때, 이 행복을 전할 친구가 있을 때, 친구에게도 나의 행복이 전염되어 공동감각이 형성되었을 때, 나와 내 친구와 내 가족과 내 현실에 다시 이 행복을 생성할 방법을 갖고 있을 때, 그러니까 나와 내 기쁨과 내 가족과 내 친구와 내 일이 행복 안에 거주할 수 있을 때이다. 


2. 불행에 대해서

고통에 진정성을 부여하려는 부박한 시절이다. 진정성은 우리 시대에 특정한 모습으로 튀어나온다. 앞 단락에서 행복을 말하는 자에게 내면에 대한 통찰을 요구하는 것도 진정성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네가 누리는 그 행복감이 타율에 의해 조작된 건 아니냐고 따진다. 네가 진정으로, 자율적으로, 자기 윤리로 행복을 누리고 있느냐고 한다. 즉 자기 내면에 충실한가를 묻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묻는 자는 타자가 아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행복이다. 그럼에도 네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있구나 인정하는 자는 완전한 타자여야 한다. 소셜미디어에 게시물을 올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만약 실천이 윤리의 핵심이라면 게시물을 올리고 무언가를 조정하고 획득하는 것을 어떤 근거로 윤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있을까. 


알라딘을 떠돌다가 만난 또 하나의 책 『만들어진 유대인』은 위험한 책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유대인 권력에 도전하는 책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나 유대권력을 위험하다고 하지 않고. 이 책이 위험하다고 할까.


『만들어진 유대인』은 “신화 위에 건설된 이스라엘의 역사적 진실”에  깊이 다가선 책이라고 한다. 2천 년의 유랑도 없었고, 떠돌던 자들이 고향땅을 되찾은 것도 아니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유대인들에게 네가 진실로 그러한가를 묻는다. “유대인의 나라라는 이념이 오늘날 이스라엘의 폭력적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제는 오히려 반유대주의를 부채질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얻게 된 부와 동질성으로, 내부의 이질적인 것들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민주국가가 아니라 유대국가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국가윤리를 묻고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 누군가는 반전을 요구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책을 쓰면서 미신이 분명한 유대 신화를 제거할 것을 요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면 과연 이스라엘의 폭력을 멈추게 할 힘이 이 세계에 있기는 할까 의심하게 된다. 


"이스라엘 법에 담겨 있는 정신에 의하면,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이스라엘국의 목적은 이스라엘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을 섬기는 것이며, 이 나라 안에 거주하고 이 나라 말을 쓰는 모든 국민이 아닌, 유대인이라는 '에트토스(종족)'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이들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유대인이 '유대주의, 유대종교, 유대 정체성' 등을 안과 밖에서 비판하는 흐름은 낯설지 않은 주제다. 저 유명한 프로이트나 스피노자도 그러하지 않은가. 내적 성찰과 세계에 대한 관계를 문제로 삼아 성찰하는 근대적 윤리라면 스피노자는 그 전방에 서 있다. 더구나 스피노자도 암스테르담에 있던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에티카』와 『지성개선론』을 통해 비판하는 지성과 자유인의 형상을 실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세운 윤리학에서 유대 국가윤리는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겠다. 다음의 구절들에서 반복되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유대국가는 민주국가일 수 있는가.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본다.


"정리 68 만약에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그들이 자유로운 동안에는 선악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증명 : 나는 이성에 의해서만 이끌리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태어나서 또 자유롭게 존속하는 사람은 타당한 관념만을 가진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악에 대한 개념을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선의 개념도 가지지 않는다. 이리하여 이 정리는 증명되었다. 


주해 : 제4부의 정리4로부터 이 정리의 가정이 잘못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만을 생각하는 한에서만, 혹은 도리어 무한한 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다만 인간 존재의 원인에 지나지 않는 신을 염두에 두는 한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과 내가 이미 증명한 다른 것들은 모세가 최초의 인간에 관한 저 얘기 속에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얘기 속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능력,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이익만을 고려한 그 능력 이외의 어떠한 신의 능력도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고 방식에 따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즉 신이 자유로운 인간에 대해서 선악을 인식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을 금지하였고, 인간이 그것을 따먹자마자 곧 살기를 원하기보다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후에 인간은 자기의 본성에 완전히 일치하는 여성을 발견하였을 때, 자연 속에는 그녀 이상으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야수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고, 곧 그는 야수의 감정을 모방하여 자신의 자유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이 잃어버린 자유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이끌린 자, 말하자면 신의 관념에 의해서 이끌린 족장들에 의해서 후에 회복되었다. 신의 관념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또 자신을 위해서 욕구하는 선을 타인을 위해서도 욕구하게 하는 유일한 근거이다 이것은 이미 증명한 바이다." (『에티카』4부 중에서)


상상에 의해 세운, 자기 정체성을 보존하는 차원의 자기 요구가 담긴 이야기를 창작하는 자유를 허용하는 스피노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모세는 최초의 인간을 지칭한 최초의 인간이다. 유대인들은 신의 관념으로 이끌린 족장들에 의해서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 단락에서 모호하고 전혀 윤리적이지 않은 주장들을 만나게 된다. 문제는 비판하는 자와 윤리로서 다시 서게 되는 참된 자아 혹은 주체가 어떻게 동일인이 될 수 있는가이다. 이 간격과 한계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 윤리학은 믿기 어렵다. 



3월쯤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4월쯤 읽고, 여름이 오면 두 권 책에 대한 독후감을 써야겠다.



3. 

발끝에서 잡는 안도감으로 알라딘 서점의 베스트셀러 50권을 구경했다. '마이너 필링스나 공감 지능, 부모와 다른 아이들, 어른의 대화, 일기 쓰기, 스톱 씽킹' ‥등 제목도, 논변도 화려하다. 이 강렬한 집중들은 불안에 대처하려는 즉각적이고 민감한 처방에 다름 아니다. 사정이 달라지길 기대하는 독자들의 심정들이 전해져 오는 것 같다. 

'총균쇠나 미움받을 용기, 정의란 무엇인가, 명상록, 담론' 처럼 꾸준히 자리를 지키는 순위표 사이로 마키아벨리와 니체, 공자처럼 묵직한 전통들도 놓여 있었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얻을 수 있는 공통감각을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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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는 만들어진 인간이었어, 네 자신을 찾아, 그것이 구원이야."


이런 선언들이 익숙한 멜로디로 들리는 것은 '주체'와 '인간'의 동일화, '능동적 인간'에 대한 찬양이 유행가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많은 부분 근대가 만들어낸 후유증이 틀림없다. 계몽의 시대에 대한 염증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령을 '너 자신을 알리라'로 바뀌도록 했다고나 할까. 그 시작점의 의도에서는 나쁜 맥락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알린다'는 행위를 <상품>과 <광고>로 환원시켜서 주문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해와 편견으로 인한 갈등과 소외를 감소시킬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물론 거기에는 알려야 할 자신의 덕목들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누구든지 알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태어나는 일에 관여할 수 없었듯이, 삶은 의외로 (자신이) 간섭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비록 예측된 일이라 하더라도 그 대응에 있어 무력하기도 하다. 언어와 문화, 구조는 이미 개인의 자유의지의 한계를 설정해 놓았기에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은 (궤도 안에서) 저항하고 분노한다. 자신을 표현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표현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수많은 현대 대중들은 이런 까닭에서 '자기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라'는 메시지에 쉽게 경도될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인, 지성인들의 은밀한 충고를 통해 비난_조롱당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 어떤 '실체'가 과연 당신의 실체가 맞느냐고, 동일성과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당신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에게는 경계해야할, 근절해야 할 많은 장막들이 있다. 그런데 때로는 장막과 대안의 경계가 흐려져 보인다. 더 경솔하게 말하자면 대안이 필요한가 말이다. 무엇을 위한 대안을 찾는 것인가.



"클럽-블로그-트위터, 뭐하니?"

'블로그' '페이스북' '트워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야 말로 후기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도드라진 변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블로그, 페이스북은 자신의 일기장이자, 1인 미디어로서 사회적 표현이자, 사회적 관계를 통한 힘을 과시할 수 있었던 미시적 정치의 장이자, 소비시장의 활력 매체로 기능하고 있다. 이전 포스트에서 클럽과 같은 동호회(다수,집단) 체제에서 블로그와 같은 1인 체제로 네트워크 지형이 변화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즉문즉답 네트워크적 감수성을 강점으로 하는 트위터에 이르러 그 극에 달했다고 보여진다. 트위터는 집단 체제, 클럽문화의 장점이었던 '연결'이라는 특징을 극대화하면서, 단점일 수 있었던 피로감(운영진, 회원 간의 마찰)을 최소화시켜 주었다. 더불어 블로그의 생산성이 1인에 의지하여야 했다는 점에서 매일 새로운 컨텐츠의 갱신을 요구받는 부담감에서도 해방시켜주었다. 두드러진 잇점은 역시 사용자의 감각을 만족시켜 주었던 즉시성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것을 '네트워크 혁명'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여전히 회의적이다. 트위터, 트위터 이용자가 수용하고 거부하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체제가 상당히 모순적이라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이것은 몸의 습속이 자본제적 삶에 적응하여 이질성을 옹호하나, 이성과 감성에 있어서는 여전히 근대적 동질성을 갈망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상 11년 전 글입니다. 띵동.


2.

북플을 이용할 줄 몰라서 그런 게 있나보다 했다. 어느 날 북플에는 알림이 있고 빨간색으로 1이 표시되면 새소식이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끔 들어가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알림에 표시된 소식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마침표 뒤에 덧붙인다. '띵동' 누가 왔어요, 띵동. 


방금 전 오랜만에 들어온 서재에서 먼지 잔뜩 쌓인 글 목록을 보다가 새소식을 보러 갔다. 반갑게도 알림이 있었다. 11년 전 오늘 당신이 쓴 글이 있답니다, 띵동. 알고리즘이 날 챙겨주는구나. 나조차도 잊은 날을 너는 불러올 수 있구나. 인간을 닮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인간이 닮아야할 알고리즘들의 세상이 있을 것만 같다. 


11년 전 오늘에 썼다는 글을 읽었다. 공포의 냄새가 옅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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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체에게 양심이란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니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양심이 침식당한 결과다. 자유롭던 인간이 지닌 양심과 사회에 합류한 인간이 갖게된 양심의 가책은 모두 인간이 동물에서 탈피하면서 얻게 된 것들이다. 너무 잘 알려진 바, 니체는 양심의 가책을 넘으라고 한다.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구별하라고 한다. 길들이기의 도덕에서 벗어나와 힘에의 의지를 믿는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아니라 창조하는 자연의 힘에서 존재를 회복하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니체를 떠올릴 때는 그럴 때가 아니다. 기존의 도덕들을, 이 세계가 내게 던져 준 선악판단을 넘어서려고 할 때가 아니다. 흔적도 없는 도덕을 붙들어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다. 파괴되고 경멸이 가득한 세상에서, 폭력이 범벅이 된 생활세계를 목격하게 될 때, 지금 이 혼란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각일 수 있는지를 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시대를 제대로 살지 못해서 수없이 많은 밤을 양심의 가책을 안고 지샜다. 지금 이 세계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숙면을 취할 수 있다면 무엇에 의해 그럴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내가 아프고 병든 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니체에게 물었다. 어떻게 나만 그 세계에서 온전히 빠져나올 수 있느냐고 버텼다.  


2.

평생이 사춘기다. 모든 살아 있는 형상들은 자기-자신의 실현을 추구한다는 자연의 필연적 경향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것이냐. 나, 이놈, 정신차리라. 내게 자연을 거스르는 거대한 힘이라도 있는 게냐.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렇다면 뭔가. 방랑하도록 태어난 게 아니냐. 생명이란, 원체, 완전체 같은 거하고는 거리가 먼 게 아닌가 말이다. 허허. 나는 앞으로도 계속 헤매고 울렁거리며 훌쩍거리겠지만, 그게 이상한 게 아니란 말이렷다. 잠깐만 기다리게. 성미가 급한 탓에 천지분간을 못하는 게구나. 내가 그리 흔들린다 하여 세상도 그럴 거라 믿는 게냐. 내가 헛된 일을 하는 동안 누군가는 또 장한 일을 허는 거겠거니 해볼 수도 있것지. 거봐라. 우쩌다 그런 걸 생각허는 날은 아마도 더 심한 풍랑에 빠지겄지. 아니여. 내 안에 내재하는 목적이 있다허면 말이다, 왜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지를 생각하며 더 울적해질 게 아니여. 그러면 이렇게 방향을 틀어야허것지. 지금 내게 이짝저짝 가르는 말들이 필요한 게 아니구나 해야허지. 자연에 목적이 있다허면 인간이 알 수 없는 거고, 자연이 확연히 드러나는 자체라면 내가 허우적대더라도 그렇거니 해야허지. 


그렇지, 그래. 그러허더라도 '너'를 생각하는 순간 그런 건 까마득히 사라지는 거여. 너가 아파하고 너가 힘들어하는 얼굴이라면 말이여. 자연이 그러하니 세상이 이러하니 그렇거니 해야허지 할 수가 없어지는 거지. 그럴 때면 '나'로 시작헌 회오리가 태풍처럼 몰아치는 거여. 허허. 이제 뭔 생각을 해야 허는지 짐작이 가지. 나 ,회오리도 너, 태풍도 좋지 않어. 나와 너와 세상과 자연이 죄다 각자로 나타날 수가 없는거잖어. 나는 너이고 이런 게 아니여. 나이고 너이고 세상이고 자연이여. 나따로 너따로 세상따로 자연따로 그런 거는 해로워. 


가려진 해를 보며 진짜 해를 보고 싶다 허는거지. 해를 잘 알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생각허는거지. 해를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 잘 모르는 건 아닐거여. 해를 따로 생각헐게 아니란 말이여. 유일하게 해가 중심일 때가 있기는 허지. 어스름하게 올라오는 아침해를 두고 다함께 맞이하는거 그런거 말이여. 나에겐 너뿐이여 허면서 얼싸안고 해맞이를 하는 거 그런거 아니여. 나는 여기에서 너는 그곳에서 세상은 저기에서 자연은 사방에서. 말없이, 주고받고 그런 것도 없이, 그런게 함께한다는 거지. 


*이 그림은 <제목 없음 43>입니다. 금지를 금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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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초대장>

미국에 사는 갑부가 4천억 달러를 투자해서 미래 도시를 만든다고 한다. 도시 내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한 미래도시라고 한다. 5백 만명을 거주시킬 계획이며, 헨리 조지 방식의 토지소유제까지 도입한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겠다. 15분 이내에 직장도 학교도 시장도 문화센터도 갖춘 도시는 온갖 첨단 설비에 의해 운영된단다.갑부는 거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낸다. 또 다른 갑부인 머스크는 화성 프로젝트 X를 설명한다. 미소를 띤 얼굴과 정중한 태도로 화성에서의 미래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한다. 


이 공개된 초대장은 사실 공수표여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초대장을 공개하면서 여유롭다. 미래도시와 화성 이주를 향한 열망이 지구의 대안이기라도 하듯이 당당하다. 그렇다. 이 두 개의 사업은 말하자면, 공개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는 봉합경제의 한 양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에 연결될 수 없겠지만, 마치 이들의 비지니스가 지구의 운명을 개척하는 선구안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투자를 유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구에 절망한 사람들은 화성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상상할 것이며, 인간에 절망한 사람들은 미래도시 프로젝트에 열광할 수도 있겠다. 


<두 개의 법안>

텍사스에 낙태금지법이 있다고 한다. 반면 일리노이주에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한 남성을 고소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한다. 당사자가 아니라도 성범죄자나 가정폭력범을 고소하도록 하고 벌금을 부과하는 법이란다. 벌금이 만 달러부터 매겨지는데, 절반은 텍사스에서 낙태를 하지 못해 일리노이주로 오는 여성들의 낙태 수술을 지원한다고 한다. 


이 대립하는 법안은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을 의미한다. 자기결정권이 자유와 만나는 곳에 어떤 진실이 있다고 확신한다. 낙태를 하지 않겠다는 일도, 낙태를 하겠다는 일도 자기구성의 윤리에 닿아 있다. 낙태를 막느냐 허용하느냐에만 몰입한다면 영영 '문제'로만 남게 될 수도 있겠다.   


< 두 개의 시간>

눈이 아파서 머리가 어지러워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듣게 된 정보를 끄적인다. 공들여 누군가 써 놓은 글을 읽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일단 나를 고양시키는 일이다. 글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접촉하는 일은 자신을 중단시키고 작은 분기점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목적이 분명한 독서라도, 읽기에 빠져 있다가 간혹 정신을 차리게 되면, 자신과 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 사소하고 담백한 행동이 삶의 고양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왜 삶을 고양시켜야 하는지 의문에 빠지곤 한다. 


책을 '읽기'가 아니라 책을 '쓰기;가 문제다. 읽기에는 해가 덜하다. 쓰기에는 독이 있다. 어떤 독은 그래, 누군가에게 약이 되기도 하겠다. 그러나 그때의 약이란 하나의 비평이므로 '읽기'를 떠난 상태다. 좋은 독을 생산한 저자가 인기를 얻는다기 보다는, 비평 무대에 오른 글이 약의 가능성을 두드리는 것이다. 비평은 다른 종류의 '쓰기'다. 쓰기의 독과 비평의 약 사이에서 인과는 개인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래도 독이다. 그래서 쓰려는 자는 늘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만들어진 독이 어디로 가겠는가. 인기 없는 글을 쓰는 사람은 실은 독이 아주 미량이라 독도, 약도 아니라는 뜻이다. 글을 쓰고 더 쓸쓸해질 때면 이 사실을 떠올리면 된다. 해독중이라고. 만들어진 독이 저절로 해독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이다.


자신의 인식 수준을 참된 방향으로 끌어가려는 도덕적 국면을 만들어야 한다. '나'라는 동굴을 개방시켜서 편견을 조정하는 자발성을 소박하게 경험해야 한다. 그런 의지를 티끌만큼도 갖지 않은 읽기는 자아를 비대하게 만들고, 고립을 자초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달래고 달래도 그럴 수 없다 한다. 왜 자신의 삶을 고양되거나 파괴될, 무시무시한 무대 위에 올려놓아야 하느냐고, 울분이 솟는다. 여기에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읽기의 시간과 쓰기의 시간.  나는 영영 주체적 삶을 살 수 없거나, '주체'는 '나'라는 생명활동이 일어나는 이 몸과 연관이 없다 하겠다.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87>입니다.  트러블드 워터 속에서-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랫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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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한껏 부풀려진 상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야생의 삶을 결코 잊지 못하는 존재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그냥 동물로 인식하고 싶어한다. 『노루인간』의 다음 구절을 보자. "열일곱 살이 되자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숲에서 보내기로 작정했어. 그리고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치르는 날에 반항심은 절정에 달했어." 저자는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홈스쿨링을 해야 했던, 사회부적응으로 문제를 겪는 소년이었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생활세계에서도 인간의 굴레가 족쇄처럼 주어져 있다고 느꼈다. 그러던 저자는 숲이 자신을 맞이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특히 노루와 같은 동물들과 섞여 살면서 비로소 "나를 사물의 질서 속에 있는 나의 진정한 자리로 되돌려 주었"다고 고백한다.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책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동물의 관계를 구축한 저자의 경험은 탈자본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영감이 될 수 있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수사슴과 정면으로 마주쳤어. 늦여름에 사슴이 빽빽 우는 소리는 자주 들었지만 과감하게 다가간 적은 없었어. 열 살 짜리 소년에게 한밤중에 들리는 거친 울음소리는 너무나 위협적이었어.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나는 겁이 나서 돌처럼 굳어버렸어. 내 앞 1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육중한 몸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진동하면서 내는 그 생물이 발산하는 힘에 압도당하고 말았어. 심장이 얼마나 쿵쿵 뛰던지 그 소리가 수백 미터 주위에서도 들릴 지경이었어. 돌연 그가 나를 향하더니 쉰 목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어.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암사슴들이 그보다는 조금 낮지만 강력한 소리로 화답하기 시작했어.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덜덜 떨렸어. 하이파이 시스템의 저주파처럼 말이야. 마침내 수사슴이 방향을 바꾸었어. 나도 뒤돌아섰어. 그 수사슴 때문에 거기 갔던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이었어. 숲의 우여곡절이 두 존재를 만나게 했듯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어. 얼마 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면서 그 수사슴이 내 짧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교훈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동물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야 했어. 야생이 세계는 초심자에게는 문을 열지 않아. "(『노루인간』)


그렇다면 이 책의 소개말에서  "우리는 자연에 복종함으로써만 자연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보자.  늑대를 개로 길들이듯이 노루를 길들이지 않고, 자신의 몸을 노루에 맞춰 길들임으로써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나무랄 데가 없는 해석같기도 하다. 또 인류세로 접어든 인간의 반성과도 같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자면 자연에 대한 뭔가 초월적인 믿음으로도 들린다. 저자가 노루와 함께 했던 7년의 생활에 대해서는 상상력 말고는 달리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왜 그곳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는 더듬거리며 이해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모아놓은 다음의 말들도 읽어본다.  "무례한 인간의 행동, 숲의 삶을 더 큰 관점에서 생각, 우리 행성 지구의 미래에 대한 존중이라는 기쁨과 걱정, 종種 간의 사려 깊은 동거의 의미 ..." 등은 "도토리를 주워 먹고, 이슬을 받아 물을 마시고, 노루처럼 낮에 쪽잠을 자고, 감기약으로 담쟁이덩굴과 소나무 싹으로 치료를 하며, 노루를 따라 하루 5킬로 정도 이동하며 생활한 7년"동안에도 인간의 <그것들>을 버릴 수 없었음이 아닐까.



절반의 인간, 절반의 노루가 아니다. 노루였던 인간의 고백에서 소외된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낯설음도 없어 보인다. 이토록 이색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저자의 경험을 기꺼이 껴안기 꺼려지는 이유는 아마도 노동하는 인간과 노루의 노동의 간격에 닿아 있다.  인간소외의 문제를 고민하던 마르크스가 자연법을 뛰어넘을 때 중시했던 노동개념을 꺼내들어온다. 노루인간과 기계인간은 노동의 소외를 제거할 수 있을까. 


"더욱이 자연과의 상호 작용은 너무나 긴밀하고 실존적으로 내밀해서, 우리는 자연을 인간 신체의 “비유기적” 확장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노동할 때 자연은 인간적 보철prosthesis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볼 때, 마르크스는 인간들에 관한 최근의 논쟁, 즉 기술을 사용해서 사이보그가 되는 인간들에 관한 논쟁을 [일찌감치] 예견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자연과 관계할 때 이용하는 기계들은 우리의 살만큼이나 우리 신체의 일부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살은 단지 '웨트웨어wetware의 일종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생산으로서의 노동 개념은 아주 급격히 확장된 인간 개념, 즉 자연 전체를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로 통합할 정도로 확장된 인간 개념을 낳는다. 우리 자신의 활동에서 낯설어지면서, 우리는 또한 우리 노동이 포괄하는 더욱 확장된 형태의 인간으로부터도 낯설어진다[소외된다]." (『하우투리드 마르크스』,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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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1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초원님에게 생스투유~ 책 담아갑니다

초원 2021-11-16 12:18   좋아요 1 | URL
이런 한갓진 곳까지 걸음 해주셨네요.
반갑습니다.

저도 며칠 전 프레이야 님이 올려주신 만요슈, 잘 읽었답니다.
책의 기운을 널리 전하시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이번 주는 따뜻하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