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얘기가 차고 넘치는 가운데 가까스로 참기로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무슨 얘길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데 무슨 얘길 할 수 있겠는가.(아 또 이런 말투ㅠㅠ)
가볍지만 사려깊고 신랄하지만 지랄스럽지 않으며, 장광설인듯 지루하지 않게, 늘어나지만 과욕을 부리지 않는, 가두고 있지만 도망갈 수 있는, 그런(그럴 수 있는) 알라딘에 간만에 들어왔다.
오늘은 올 들어 가장 일찍 일어났다. 새벽 4시. 밖은 아직 어두웠고 마음은 무거웠고 몸은 그냥 절망적이었다. 소독(말이 좋아 소독이지 농약살포에 다름 아니다. 그나마 미량요소라 불리는 영양제가 추가될 뿐이다)을 하는 날은 이래야만 한다. 그나마 공포감은 현저히 줄었다. 작년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적과작업은 이제 막바지이지만, 그러느라 이 한 몸 다바쳐 이바지한 어떤 결사의 흔적이 있다면, 그것은 뼈다귀와 삭신이 동의어라는 것이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그 방면으로 어떻게든 도가 틀 줄 알았는데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내겐 머나먼 얘기다.
이 일을 하면서 지겹다는 말을 한번도 입밖에 낸 적은 없다. 다만 내면화된 그 지겨움이 고이고 고여 고운 말로 승천하는 유니콘이라도 되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짜내야할 고름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고 마냥 지겹기만 했다면 엄살이요 뻥이다. 작은 생명체가 커가는 걸 보면서 흔히들 하는 말이 하루하루가 다르다고들 한다. 세상은 달라지는 것 같지도 않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지만 달라진다. 어떻게든 달라진다. 열매 역시 커가면서 달라지는데 당장 작별이라도 할 것 같다. 애처롭도록 아름답게 달린다. 달리되 허투루 달리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있다.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다하려는 것처럼 필사적이다. 고요한 햇살과 흔들리는 바람과 작은 빗방울, 그리고 밤사이 내가 모르는 은밀한 세계와의 접신을 기다린다. 난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쓴다. 세상이 어떻고 열매가 어떻고 바람이 어떻고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알지 못하지만 쓰는 것이다. 쓰디쓴 척 현실을 비관하다가 쓰다만 공책처럼 얼 빠진 잇몸을 드러내며 현실을 잊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 것도 못하는 나에게 나는 절망도 잘한다.(이 짓도 하다 보면 잘하게 되는 건가) 아무려나 익숙하다 보면 지겨워질테고 그때가 되면 쥐어짜낼 고름이라도 있을까. 있을 것이다.그러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