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이 많이 없어서 우선 정리하기로 했다. 아직 한창 전개가 되고 있는 이야기. 여러 가지 얽힌 실타레가 던져진 상태. 아무래도 나이를 먹고 판타지를 읽으니 외국의 판타지와 많은 차이를 느낀다. 일단 독자층을 더 넓힐 수 있는 수준의 필력과 언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 어린 언어유희는 작품이 깊어지는 걸 방해하는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아직은 판타지가 그 옛날의 '드래곤 라쟈'에서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장르적인 재미를 주는 것에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에피 브리스트'를 교재로 읽은 것이 대학교 때였으니 대충 생각하면 25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역사교재로 읽었기 때문에 작가나 작품의 소설적인 의미를 분석하지는 않았고 작품에서 드러난 시대상을 주로 이야기했었다. 같은 작가의 '얽힘 설킴'을 읽으면서 사실적인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자의 글을 보니 '극사실주의'라고 한다. 그 명칭에 걸맞게 이 소설에는 환상이나 happy ending은 없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비록 남자는 좀더 환상을 갖지만) 현실의 차이를 인식하여 미래의 행복을 그리지 않고 현실의 사랑을 한다. 귀족남자는 당시의 귀족남자답게 능력도 없는 주제에 돈을 펑펑 쓰는 생활을 하며 이를 지속시켜줄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여자는 그 추억을 간직하다가 다시 현실적인 결혼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그 속에 담겨진 사회나 미래의 상징성은 차치하고라도 무척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문학'이란 타이틀이 붙는 작품인데 어떤 의미로는 이런 '문학'을 소설로 쉽게 접근하고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문학'이라는 베일로 둘둘 감싸고 소설을 접근하여 이를 신성시하고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식의 독서론을 벗어난지 오래인 이유다.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개소리에 놀아나는 건 한때의 바보짓으로 족한 것이다. 깊이 없는 지식인들의 얕은 말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늘 다짐하면서 내 자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role model을 찾은 기분. Band of Brothers 시리즈를 보면서 항상 멋진 군인을 넘어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던 Dick Winters의 관점에서 보는 101공수부대-506연대-Easy중대의 활약에서 부대원들의 용기와 희생, 단결과 형제애를 다시 한번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여기에 더 중요한 건 Dick Winters가 삶을 살아가는 자세와 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끝에 그가 말하는 Leadership에 대한 열 가지 계명을 복사해서 한쪽에 붙여두고 매일 읽고 머릿속에 새겨 삶의 지침으로 삼고자 한다.
전쟁은 사람을 늙게 한다. 고작 이십 대의 청년이 몇 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사선을 넘어가면서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에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for better or worse, 그 끝에 얻은 평생의 lesson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낸 Dick Winters는 나라, 인종, 이념, 종교, 시대를 넘어 귀감이 될 만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운동을 하면서, 일을 하다가 게을러지거나 대충 하고 싶을 때마다 그의 말을 되새겨보게 된다.
혼란스러운 시기를 견뎌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철같은 단련으로 육체와 정신을 단단히 무장할 필요가 있다. 똥파리가 난무하고 가짜 스승과 가짜 지도자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믿을 건 자기자신과 자신을 아껴주는 주변의 소수밖에 없다. 뉴스와 책, 강연도 참고의 대상일 뿐, 성찰과 분석을 통한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깨인 머리와 정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