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정말 물건이다.  이런 생각을 책을 읽는동안 계속 하고 있다.  추리의 짜릿한 맛도 그렇지만, 상상력과 역사의 사실을 교묘하게 섞어서 이런 재미있는 시대극을 만들어낸 작가는 정말 대단하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뛰어넘었다는 평이 정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냥 나온 말은 아닌거다.  브라운 신부와 파인즈의 조합을 연상시키는 캐드펠 수사와 휴 버링가의 관계도 상당히 흥미로운데, 첫 번째 이야기에서를 볼 때만 해도 난 그가 악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드펠 수사와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두뇌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의 선함과 정직함이 드러났고, 지금까지도 그는 캐드펠 수사가 가장 신뢰하는 왕의 고관이로서, 이런 저런 상황에 나타나서 캐드펠 수사에게 도움을 준다.  왕당파가 되어버린 구 황후파인데, 왕권쟁탈전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 시기에 휴 버링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도 20권까지 읽으면서 계속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정말 재미있는 책.


G-20으로 분류되는 국가, 아니 러시아, 인도, 중국은 빼고.  적어도 현대의 법과 질서가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는 (여기서 한국도 일부 빼고) 나라에서는 약자와 소수가 그런대로 법과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늦은 시간에 어두운 도시 한 구석을 걷거나 인적이 끊어진 산골, 지방도로를 걸어가는 것은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위험한 일이지만, 적어도 일부러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면, 제한된 의미로나마 안전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확대해도 고작 200년이 채 되지 못한 이런 법치질서는 몇 안되는 근대국가의 장점이고 혜택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시점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50년 안팎이라고 보지만.


캐드펠 수사가 살던 12세기는 이런 우리의 기준에서 보면 무척 위험한 시대였다.  툭하면 이웃왕국이나 지역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멀쩡하게 해가 뜬 시간이라도 물을 긷던 처녀가 사라지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했고, 심지어는 도시 한복판이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위험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감시카메라도 없었고, 인구도 드문드문이라서 아마도 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렇게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왕당파와 황후파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한 무더기의 불한당이 마을을 습격하고 양곡과 여자를 끌어간다.  이 와중에 수녀원에서 보호받던 귀족의 자녀가 사라지는데, 이들을 찾는 와중에 남매를 보호하던 수녀가 죽은채 발견되는데, 친구와 적의 경계도 분명하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도 일정하지 않게 되어 도무지 범인의 정체를 알 길이 없다.  


캐드펠 수사는 여러 모로 내가 볼 때 성직에 합당한 사람이다.  요컨데 세상을 충분히 경험한 후 자신의 뜻에 따라 수도사가 된 사람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나 환상으로 수사생활을 망칠 가능성이 적고, 훨씬 더 단단한 마음으로 이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게다가 바깥세상에서 얻는 유용한 지식과 경험은 사건추리에도, 사람을 살리는 것에도 쓰이니 금상첨화다.  


이번에도 남들은 그냥 보고 지나치는 단서들을 충분히 살펴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그는, 그 이상 기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간의 고된(?) 수사관(?) 행보에 대한 보답일게다.


이름의 끝에 '윈'자가 들어가는 영어권 이름이 한글로 읽으면 꽤 가볍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개중에는 '볼드윈'처럼 영주나 기사의 이름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에드윈'이나 '릴리윈' 같은 이름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의 신언서판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 수도 있다.  그 '릴리윈'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은 이 작품에서는 '광대'다.  그것도 벌이나 먹을 것이 나쁘진 않았을 궁정의 광대 (court jester)가 아닌 혼자서 떠도는 어릿광대다.  벌이도 시원치않고, 온갖 멸시와 모욕에 익숙해져야 하는 운명은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지워지는데, 평생 떠돌아다니면서 남을 웃긴 댓가로 겨우 밥 한술을 뜰 수 있는 이들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했었을 것 같다.  게다가 마을이나 씨족개념이 강한 시대에 이렇게 연고없이 떠도는 사람은 뒷배경이 하나도 없는 외톨이였을 것이기에 이 책에서처럼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마을 뒷 산의 나무에 매달리기 십상이었을 것 같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이렇게 정황, 그것도 아주 희미한 정황상의 이유로 목이 매달릴 뻔한 떠돌이 광대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이 캐드펠 수사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다른 이야기처럼 범인으로 밝혀지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의 슬픔과 비극이 있는데, 역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12세기는 매우 불합리한 시대였을 것이다.  범인이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속도라면 2-3월이면 캐드펠 시리즈도 모두 다 읽게 될 것 같다.  그간 쌓아놓은 책도 많고, 들어올 책도 많으니까, 일만 계속 들어와주면 이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읽고, 운동하고, 일하고.  이게 하루의 큰 축이다.  여기에 이런 저런 즐거움을 덧붙여 느낄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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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6-01-08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건강 챙기세요. ㅎㅎ transient-guest님의 엄청난 독서량을 보고 갑자기 드리고 싶은 말씀이네요 ^^

transient-guest 2016-01-09 02:26   좋아요 0 | URL
결명자차를 구해서 마시려고 합니다.ㅎㅎㅎ 눈건강은 늘 챙겨야죠.ㅎ 감사합니다.

붉은돼지 2016-01-0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건`이라고 하시니 장물애비 된 몸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군요 ㅎㅎㅎㅎ

transient-guest 2016-01-09 02:26   좋아요 0 | URL
절판되기 전에 사들이심이.. 추리소설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고 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