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언제 마셔도 좋지만, 비가 오는 날에 마시는 술은 특별히 그 맛이 좋다. 술 자체의 맛도 중요하지만 잔과 마시는 시간의 무드, 환경 같은 것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맛난 술도 다른 몇 가지와의 박자가 맞지 않으면 별로다.
이곳은 이제 우기의 시작이다. 5-6일 전인가 하루 종일 비가 오더니 기온이 뚝 떨어졌다. 아침 저녁으로 영상 8도 정도인데, 이 날씨에 익숙해진지 오래라서 그런지 꽤 춥게 느껴진다. 그런데 기다리는 비는 생각했던 만큼 자주 내리지는 않고 있다. 지난 3-4년 이상 이어진 캘리포니아주의 심각한 가뭄 때문에 이번의 엘니뇨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우기가 되었는데도 말이다. 나도 비를 기다리는데, 당연히 가뭄이 걱정되어서이고, 혼자만의 이유는 좀더 맛나게 술을 마시기 위함이다.
이번 주의 일기를 보니 일요일과 다음 주 월요일에는 비가 올 것이라고 나와 있다. 오늘이나 내일, 아니면 토요일에 오면 더 좋을 텐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업무를 열심히 보고서 월요일 점심 때 걸어서 갈 수 있는 다운타운에 있는 수 3-4군데의 bar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맥주라도 한 잔 할까하고 말이다. 목이 많이 부어서 좀 걱정이 되기는 하고, 또 월요일이라서 좀 그렇긴 하지만.
내가 미국에 오던 20여년 전으로 가지 않더라고 꽤 최근까지 캘리포니아를 상징하는 것들 중 하나는 잔디가 풍성하게 깔린 주택 앞뜰, 도로의 island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심각한 가뭄이 계속 이어지면서, 물 또한 replace하기 어려운 자원의 하나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물사용을 조정하고 quota를 매겨 값을 올리기 시작한 결과 먼저 개인주택에서 잔디가 사라지고 있고, 시나 주정부 차원에서도, 공공건물에서도 잔디가 벗겨지고 물을 적게 먹는 사막식물 따위가 그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다.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고 지지하면서도 밥맛이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는 매우 합리적이고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하면서도 감성적으로는 한 시대의 종말 같은 그런 맘인 것이다. 이 드넓은 땅에서 물론 캘리포니아가 전부는 아니지만서도...
아무튼 추운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서, 열량충족을 위해서, 물 대신으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라든가 화가나서, 슬퍼서가 아닌 practical한 이유로 이집트에서, 아니 상고시대 술을 만든 이래 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술을 마셔왔다. 나는 그 전통을 충실하게 잇고 있을 뿐이다. 집에도 몇 병이 있고, 사무실에도 선물용으로 열 댓병 정도를 쟁여놓았지만, 오늘은 와인보다는 다른 술을 마시고 싶다. 그런데, 그 마시고 싶은 술이 무엇인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점심을 늦게 먹었기 때문에 아직은 배도 부르고 해서 저녁까지 술을 마실 생각이 들지는 모르겠다. 많이들 술배와 밥배를 따로 구분한다는데, 나는 배를 파티션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밥을 먹으면 술맛이 떨어진다. 덕분에 맛이는 술은 언제나 공복에 들어가는 술인데, 이것은 속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이제 건강을 신경써서 챙기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하는, 아니 한방에 훅! 가버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이미 나랑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외사촌동생은 2010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내 세대의 죽음을 처음 본 시점은 지나버렸지만, 앞으로도 내가 또는 내 주변의 동년배들 중 하나씩 둘씩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만이라도 모두들 행복하게 사랑하면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