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이 존재하는, 그러니까, 너무 어려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과 단편적인 기억이 나는 부분의 경계부터를 기억이 존재하는 지점이라고 설정할 때,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주변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의, 남아있는 몇 개의 기억의 모습들 중 삼국지 동화책을 보는 내 모습과 조잡하지만 위인전기와 명작동화가 포함된 수 백권의 전집을 사들고 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또는 그 당시 구들장에 연탄불을 지피면 찜질방 마냥 뜨끈하게 지져진 방바닥에 엎드려서 책을 보던 누나와 나, 그리고 어머니의 젊은 모습 또한 그렇게 한 장의 사진처럼, 내 몸에 컬러 프린터가 있다면 바로 뽑을 수 있을만치 선명하게 떠오른다.  삼국지는 도화지처럼 두꺼운 종이에 컬러로 인쇄된, 극장만화의 축약본이었는데, 관우가 오관을 넘어가면서 고뇌하는 모습의 그림이 생각나고, 극장만화는 추석특선만화의 단골로 나중에도 여러 번 보았는데, 카세트 테잎으로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오래 독서라는 것을 해왔던 모양인데, 어머니의 기억에 따르면 또 꼭 그렇지만도 않다.  초등학교 2-3학년 무렵에는 잦은 전학으로 인해, 공부나 책 모두 던져버렸던 모양으로, 하도 책을 안 읽어서 책에 다시 흥미를 붙여주려고 보물섬 같은 만화잡지와 소년중앙, 새소년, 그리고 소년경향같은 어린이 잡지를 사주셨던 것을 기억하고 계시니 말이다.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우주가 상시 대기하고 있는 요즘의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아이들에게 말 그대로 꿈과 희망을 키워주던 이들 월간잡지들은 '믿거나 말거나'수준의 공포/괴담/기담에서 제법 과학적인 논리와 뉴스를 발췌해서 옮긴 듯한 수준 높은 이야기들도 많이 등장하였기에, 그 시절 나와 친구들에게 좋은 논쟁거리를 제공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야기하고 나니까, 연식이 추정되는 정보가 상당히 많이 포함된 것 같다.  이런 추억의 잡지들도 헌책방을 돌다보면 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날짜를 넉넉히 잡고 한국에 가면 부산이나 서울의 헌책방을 돌아보면서 옛날 추억에 묻히고 싶다. 

 

책읽기에 대한 고민을 특별히 해본적이 없었다.  그저 읽고 즐기고, 사들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2007년 무렵부터 늦은,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런 저런 고민이 들 때마다 책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한 해에 몇 권을 읽었는지 기록을 하기 시작했으며, 대략 2009-10년 무렵부터 이렇게 알라딘에 후기를 남기면서 읽은 것들에 대한 기록을 하기 시작했는데, 독서에 대한 고민도 대략 2007-2010년 사이에 시작이 된 것 같다.  

 

우연히 접한 남들의 책읽기 기록을 보면서, 그리고 이런 저런 독서론에 대한 글을 보면서, 시작된 독서고민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뚜렷한 고민의 주체가 되는 이슈도 잡히지 않고, 간혹 이런 것이 내 고민이었나 싶어 생각해보면, 독서 그 자체의 고민이 아닌, 마치 지금처럼, 독서 후, 무엇을 남기는가에 대한 고민이나 실생활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그치고 만다.  최근의 20권 읽기 project 역시, 독서와 현 상태의 삶에 대한 연결을 하려고 시작한 것인데, 생각해보면 이 또한 독서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고민하고 좌절하고, 순간순간 기쁘고 행복한, 그 모든 것들이 삶의 모습이라고 할 때, 독서에 대한 고민 또한 그 자체로써의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듯 끊임없는 화두에 대한 착은 이렇게 아래와 같은 책을 읽는 것으로 나타난다.

 

책과 글을 좋아하고, 걷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이면서, 생태/녹색생활에 대한 글을 쓴 정수복의 책과 글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모아놓은 생활 에세이 같다.  종이책과 책, 그리고 글에 대한 예찬이 가득한 이 글은 마치 예전에 읽었던 '노란 불빛이 있는 서점'의 따뜻함을 떠올리게 했다.  저자가 생활했던 서울과 파리의 서점 이야기, 서재 이야기, 책을 읽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두서없이 써내려가다 보면,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을 예쁜 사진을 넣어 책을 꾸미면 이런 책이 나오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서점 자체가 대형화의 일차 파도, 그리고 인터넷 서점의 이차 파도에 밀려, 영세한, 그러나 자기만의 색깔과 풍경을 주었던 작은 서점들이 거의 사라진 한국과 미국의 경우, 이 책에서 보여준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없겠으나, 유럽에는 아직도 이런 작은 책방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고, 나름 성업중인 듯 하다.  무엇이든 오래된 것은 부수고, 갈아 엎어야 하는 한국에서는 앞으로도 점점 옛날 모습은 사라져 갈 것이다.  고향을 떠난지 오래인 나 같은 사람에게 이미 고향의 모습은,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5년 정도만 더 지나면, 그나마 남아있는 모습도, 시행정차원에서 문화로 보존하지 않는다면, 깡그리 사라질 것 같다.  DSLR같은 괴물이 아닌 작고 깜찍한 Lomo같은 것을 들고, 옛날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남아있는 인천의 모습을 담고 싶다.  대한서럼, 동국서림은 동인천의 쇄락과 함께, 사라져 버렸고, 신포시장의 닭강정과 차이나타운의 만두를 빼면 그 옛날 부자들이 요정같은 집을 짓고 살았던 동인천은 이제 재개발을 기다리는 old town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너무도 학술적인 접근, 그리고 부족한 증거자료를 '샛강'이라는 시대소설의 인용으로 채우는 등의 연유로 그리 재미있게 생각되지는 않는 책이다.  '고서점'이라는 키워드에 낚였다고나 할까?

 

조선시대 이전의 서책유통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부분은 조선시대 일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의 이야기들 뿐이다.  과거제도가 시행된 것이 고려조 광종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시절에는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책이 수입되었던 것일까? 

 

서점은 본래, 책장사 외에도, 지식의 전파와 나눔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근 20여년을 제외하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기억에도 서점 주인아저씨는 책을 정말 잘 아는 분들이었다.  문제집을 주로 파는 학교 앞의 영세서점조차도 당시 서슬퍼런 군사정권과 그 뒤를 이은 보통사람 치하에서 전교조 활동을 하다 퇴직당한 선생님이 운영하였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나의 투쟁'과 '니벨룽겐의 노래'를 산 기억이 난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 두 책은 survey계열의 역사책으로만 이름을 알고 있던 것인데, 서점에서 단행본을 처음보고서 나름 기뻐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역시 직원이나 컴퓨터가 찾아주는 것 보다는 책 내용을 잘 아는 서점 아저씨가 책에 대한 이야기와 곁들여 찾아주는 것이 더 훈훈한 책방의 모습같다.  어린 학생에게도 시사이야기도 들려주고, 책 이야기도 나누던,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손님의 '책'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주던 그 모습이 보고싶다.  아니, 어쩌면 언젠가는 내가 그리 되면 좋겠다.  지금의 업으로 어느 정도의 안정을 이루어 여력이 생기면 꼭 그리 해보고 싶다.  단언하건데, 파는 것보다는 사들이는 부분에 더 무게를 두고, 서점경영보다는 그저 시간을 보내면서 가끔씩 있는 거래에 만족해야 할 터이니, 확실히 현 직업에서의 성공이 기본조건이 될 것 같다.  분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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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25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방(고서점) 하던 분들은 돈이 있어 책방을 열지 않았어요.
꼭 돈만 생각하면 책방도 도서관도 꾸리지 못한답니다.

즐겁게 꾸리면서 사랑하자는 마음으로
좋은 꿈 이루시기를 빌어요.

transient-guest 2013-06-25 07:53   좋아요 0 | URL
역시 비전이 중요하지요. 옛일은 모르지만, 요즘 세상에는 영리적인 목적으로 서점을 운영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에요. 저는 제가 시간을 보내면서 하루를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책이야기를 나눠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네요.ㅎ

blanca 2013-06-25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물섬' 반갑네요! 맨날 아버지한테 사달라고 졸라대던 ㅋㅋ 기억이 나요. <어깨동무>도요. <노란 불빛의 서점> 재미있게 읽었고 지금도 제 책장 한켠에 고이 모셔두었습니다. 요즘 동네 서점, 여긴 대학가인데도 찾기 어려워요. 대형서점도 어렵다고 하던데 참 안타까워요. 혹시 읽으신 책 목록 작성하세요? 저는 하다 말다 해서 제가 어떤 책을 읽었는 지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해요. 기회가 되면 엑셀로 차근차근 하고 싶은데. 이것도 쉽지가 않네요.

transient-guest 2013-06-25 12:14   좋아요 0 | URL
몇 년 전부터 읽으면 여기에 이렇게 남기구요, 가지고 있는 책 리스트는 세번 네번 만들다가 말았어요. ㅎㅎ 순전히 중복구매를 피하려고 하는건데, 잘 안되네요. 그나저나 보물섬도 어깨동무도 아시다니, 저하고 연식히 비슷할지도 모르겠어요. 한국에 방문하게 되면, 서친들하고 번개라도 한번 해보고 싶네요.ㅎㅎㅎ '이겨라 벤', '그라운드의 표범', '아기공룡 둘리' , '맹꽁이 서당', '악동이', '신통방통이'도 기억하시죠?ㅎㅎㅎ 보고싶네요...그들 모두..

프레이야 2013-07-0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책인시공을 비롯해 정수복 시인의 파리 이야기를 담은 책들을
담을 수 있게 되네요. 땡스투도^^
고맙습니다. 책 읽기에 대해 진지하게 자문해본 적은 저도 없지만
숨을 쉬듯 밥을 먹듯 그런 게 되었지요. 책이 없다면 책읽기가 없다면
무언가 지탱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요.
트란님, 서점경영에 대한 꿈은 일단 접어두시는 거에요? ^^

transient-guest 2013-07-06 02:07   좋아요 0 | URL
당장은 어렵지요. 제가 좋아하는 추리/형사소설에 Cliff Janeway라는 형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게 있는데요, 이 사람이 book mania에요. 나중에 형사 은퇴하고서 서점경영하는 사람이거든요. 시리즈의 첫 작품을 요즘 읽으면서 많이 공감하고 잇지요. 인생의 모델이 될런지도 모르겠어요.ㅎㅎ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 있답니다. 저자 이름이...John Dunning이던가용? 덴버에서 알공킨이라는 서점을 경영하고 있다고 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