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앞서 말한 바 있지만, 김영하 작가는 그의 팟캐스트를 통해서 알게 된 한국의 현대 작가들 중 하나이다.  한국문학읽기의 한 갈래로써, 그를 비롯한 현대의 우리 작가들의 책을 하나씩 읽어가고 있다.  내가 읽는 그의 세 번째인 이 책은 참으로 특이한 설정을 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 같다.  무력한 중년의 가장이지만 정체는 특수훈련을 받아 북이 남에 심어놓은 세포인 주인공, 기영.  권태기와 오랜 외로움을 아들뻘에 가까운 애인과의 정사 - 를 넘어서는 - 로 풀어내는 시들어가는, 그러나 한때는 운동권이었던 마리.  코미디언의 아들로 태어나, 지극히 공무원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는, 철수는 그러나 국정원의 요원이다.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직업상의 하루와는 다르게 - 적어도 내 눈에는 - 그는 초식남, 그러니까 vegetarian이다.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닐게다.  8-90년대의 운동권에, 지금도 노동권이나 기타 야권으로 총칭되는 사회운동/사상운동계에 북의 세포들이 잠입해있다는 설은 꾸준히 제기된다.  워낙에 공작정치에 시달린 우리들인지라, 정부의 이런 발표들을 잘 믿지 못하고 - 실제로 최근 들어 공안사건의 경우 검찰의 승소율이 매우 낮다 - 기득권당이 대세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한 작전으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빈도수는 몰라도, 실제로 이런 의도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류의 사건들이 터지는 타이밍은 어찌나 기가 막힌지). 

 

작가가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떤 목적이 있는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다 지나가버린, 이제는 남한에서의 삶에 익숙한 그를 다시 흔드는 과거, 그 과거를 이용하여 다른 세포들을 잡으려는 국정원의 음모, 마리의 불륜 - 을 넘어선 법대생들과의 난교 -, 이런 것들을 가지고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거의 끝에서 기영은 결국 국정원에 협조하고 남한에 남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정원은 아마도 그를 더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모종의 작전을 감행하여 그의 사망 내지는 사고를 위장하는 것 같다.  잠수정이 나타나고 공작조가 상륙하는 시점에서 공격의 섬광이, 빛이 기영의 눈을 가린다.  흡사, birth와도 같다.  아기가 엄마의 자궁에서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에 이런 빛을 보는 것이라면 말이다.  아니면, 단순히 터널 끝에는 빛이 보인다는 것을 강조하여 기영이, 자랑스러운 국정원의 도움으로 G-20에 빛나는 대한민국으로 온전히 귀화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까?  either way, 빛은 찬란한 시작같으나, 기영은 일상은 실로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그의 과거를 아는 마리, 불륜은 끝냈으나, 앞으로는 더 멀어질 것만 같은, 기영의 wife와, 아이와의, 그리고 여전히 고단한 중년남자의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무엇인가 잘 끝나려는 듯, 국정원의 철수는 마지막으로 비디오를 수거해가는데, 이 chapter의 제목이 "변태"이다.  그런데 나는 이 "변태"가 비디오를 녹화한 러브호텔 주인영감인지, 이를 수거해가는 철수를 말한 것인지 조금 생각하게 된다.

 

철저한 무관심, 일상, 권태, 이런 이야기를 빌어, 시대정신의 부재를 느끼는 요즘의 세태를 표현하려고 한 것인지?  분명한 것은, 이 소설에서조차 사상은 이제 우리에게 큰 화두가 아니다.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것, 기왕이면 잘 사는 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화두인 것임을 보게 된다. 

 

김영하 작가는 단순한 소설로 보아도 재미있고,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는 행간을 추측해도 상당히 흥미있게 접근하게 된다.  특히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살짝 금기시되는 테마 - 난교, 자위 등 - 를 쿨~하게 다루는 것 또한 흥미롭다. 

 

끝으로 대마초의 황홀경을 교회에서의 황홀경 으로 비교하는 부분은 은근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왜냐면, 적어도 그 지점장의 인간됨에 대한 묘사를 보건데, 작가가 의도하는 표현은 지점장이 느끼는 황홀경이 군중심리와 집단최면에 의한 것임을, 즉 그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종교체험과 그릇된 것의 차이라는 것이 종이한장차이 정도이고, 받아들이는 이의 분별에 따라 혼동되기도 하는것을 알기에, 적절하게 지점장의 인간성을 우회해서 묘사한 것이라고 보인다.  즉 특정종교나 종교인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닌, 소설상의 기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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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1-18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90년대 소설들은 80년대와는 다르죠.간첩을 대하는 시각도 그렇습니다.분단문제를 다루는 소설가로 김원일 씨가 있는데 그가 간첩을 다룬 중편 '환멸을 찾아서'는 좀더 진지하고 애잔하게 간첩문제를 접근합니다.소설적 재미도 좋은 작품입니다.

transient-guest 2013-01-19 00:22   좋아요 0 | URL
보관했다가 구해봐야겠습니다. 공산주의국가의 본격적인 붕괴를 체험하게되는 90년대부터는 사상이나 이념보다는 역시 먹고사는 문제가 더 중요하게 체감되는 것, 그리고 한국의 경우 김영삼씨의 삼당합당을 통한 일부계열의 '민주화'세력의 기득권화로 인한 전반적인 냉소주의, 체념, 허무주의같은게 적지않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또 IMF도 그런 작용을 했을 것 같구요. 그런데, focus를 향한 다양한 이야기 떄문에 그런지, 현대소설은 상당히 산만하게 느껴질 때가 있네요.

노이에자이트 2013-01-1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문제는 냉전 직후 신세대를 표방한 사람들도 이제는 사십이 넘어서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정치성형과 무관하게...청소년이나 이십대가 듣기에는 잔소리 같은 그런 것 있잖아요.

transient-guest 2013-01-20 01:32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런게 세대간의 차이 아닐까요? 정말이지 이야기는 조심해서 해야하는 것 같아요. 난 젊다고 생각하고,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꼰대냄새가 나는거죠.ㅎㅎ

아이리시스 2013-01-24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 좋아해요. 간첩, 국정원, 음모론 같은 키워드에 관심도 있는 편이고요. 이보다는 <검은꽃>을 더 많이 좋아하지만. 이 소설까지는 김영하도 좋아하는 국내작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제가 변한 건지, 작가가 변한 건지, 이후 읽지를 않았으니 제가 변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transient-guest 2013-01-24 02:26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할수록 무엇인가 배어나오는게 있어요. 간혹 나타나는 표현도 좋고. 김영하 작가의 책을 출판된 시기에 맞춰 읽은게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요, 초기작부터 시기별로 구별해서 보아도 좋겠네요. 어느날, 다시 흥미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변했다는 생각일랑 마셔요.ㅎ